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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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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지도
샤먼의 호수, 풍요의 호수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
바이칼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다. 깊이가 1,637m에 이fms다. 호수의 단면을 잘라서 보면 바이칼은 마치 맥주 잔이나 밥그릇을 닮았다. 이에 비하면 세계의 다른 호수들은 그 단면이 접시처럼 생겼다. 인류 전체가 40년을 먹을 수 있는 양, 세계 민물의 20퍼센트, 세계 식수의 80퍼센트의 양이다. 그래서 바이칼 물은 생수로 판매되고 있다. 미네랄이 과다하지 않고 인체에 꼭 이상적인 양만큼 함유되어 있으며 산소 량은 많단다. 생수는 수심 4백 미터의 물을 채취한다. 10년 전에 채취한 바이칼 물이 아무 침전물도 없고 이끼도 없을 정도이다. 호수의 남북 길이는 6백40km, 최대 폭은 80km 이다. 바이칼은 그렇게 길쭉한 모습으로 시베리아에 떠 있다. 워낙 큰 호수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지도에도 반드시 표시된다. 초승달 모양의 호수이다. 바이칼은 타타르어로 ‘풍요의 호수’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호수와 그 주변에는 2600 여종의 생물이 살고 있고 그 가운데 1200 종의 동물과 600 종의 식물이 다른 지역에는 없는, 오직 바이칼에서만 사는 희귀종이다. 지구의 생태박물관이다. 호수의 나이는 세계 최고령인 2500만 년이 넘는다. 바이칼에는 바다표범이 서식한다. 네르파라 불리는 이 바다표범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민물에 사는 바다표범이다. 그리고 바이칼은 아직도 조금씩 움직이면서 자신을 모습을 진화시킨다고 한다. 내부 지진활동이 활발하고 150년 전에는 강도 10의 지진이 발생하여 여섯 개의 마을이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 인명피해가 많았고 지형도 많이 바뀌었다. 바이칼 물에 손을 씻으면 5년, 세수를 하면 10년, 목욕을 하면 30년을 더 산다고 한다. 러시아의 세 가지 자랑거리로 여자, 보드카, 바이칼 물을 일컫기도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바이칼 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몽골의 샤먼
몽골의 샤먼
몽골의 샤먼
몽골의 역사와 종교
1. 몽골의 역사
몽골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면적은 156만4천 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50만, 수도는 울란바토르, 1인당 국민총생산액은 400불입니다. 몽골은 13세기 이전까지 유목생활을 하면서 부족 형태로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1271년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창건하면서 몽골은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대륙과 동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고 러시아는 물론 멀리 서유럽까지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죽은후 내부분열로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1368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몽골인들은 청나라 등 중국에 복속되었고,1911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의 지원으로 혁명을 일으키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련에 이어 두번째 공산국가가 되며, 1946년에 중국으로 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국제적으로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1987년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칭기즈칸 역사 참조)
2. 몽골의 인종과 종교 기원
후기 구석기와 신석기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몽골리안 계통이었으나 아파나시에보의 청동기인들은 유럽계통의 인종들이었다. 바이칼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축으로 북동부 아무르강지역과 동북아시아 내몽고, 만주지역 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들 몽골리안들의 이동은 사냥을 중심으로 한 수렵위주 의 경제형태에서 기후의 변화와 함께 사냥대상이 줄어드는데 따른 어로 중심과 원시농경을 시작하면서 적이한 기후와 강 및 토양을 찾아 남하하게 되는게 이유이다. 일부는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고초원을 경유하여 중국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서북부 등으로 남하하게 된다. 바이칼호는 시베리아 대륙의 한복판에 있다. 러시아인들은 동부 시베리아에 속한다고 하지만 수천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몽골 사람들은 시베리아를 논할 때 바이칼 동쪽이냐, 서쪽이냐로 가름한다. 곧 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중핵지대로서 시베리아를 상정하면서 바이칼 호수의 동서로 시베리아를 구분하는 잣대를 삼았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이칼호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 바이칼은 삶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형이하학적 조건들 모두를 통틀어 아주 밀접한 연관을 지니던 곳이었다. 이는 지금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의 중세까지 세계사의 전면에서 끊임없이 역동적인 변화와 이합집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시하고 문명의 교류를 실현시켜왔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시베리아 샤머니즘이요, 이는 곧 바이칼호 지역을 모태로 하여 형성되었다.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 또한 민족 문화의 뿌리를 북방 샤머니즘과 연관시켜 논의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20세기 초부터 활발히 있어왔다. 물론 고고학이나 문헌사학, 언어학, 농학, 유전학, 의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등 제반 학문 분야의 민족 기원 문제에 대한 연구와 접근도 중요하고 실제 연구 결과도 적은 바 아니지만 민속학, 민족지학(ethnography) 등의 측면에서 고대 북방인들의 정신문화적 복합 상태를 연구하는 작업이야말로 그 어떤 연구보다도 학문적 비중이 낮지 않다고 본다. 특히 우리는 분단시대의 공백으로 1990년대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기원지로 언급되는 북방지역, 즉 중국 동북 만주지방, 발해만 연안,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 알타이 산맥 지역, 예니세이강 투바지역, 아무르강, 송화강 유역 등을 답사하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이 지역들에 대한 개론서 수준의 정보도 아직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민족지학 연구의 첫째 조건은 현장성이다. 바이칼호 지역을 고대 시베리아인들의 정신문화적 원류인 샤머니즘의 중심지로 볼 때, 이 지역 원주민 부리야트족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현장 연구가 가장 급선무이며 아울러 우리 전통문화 특히 한국 무(巫)와의 비교연구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3. 바이칼 신화와 샤머니즘
부리야트족 샤머니즘의 구비 서사시 ‘게세르’에서도 이 우주의 구조를 아버지격인 하늘과 어머니 땅, 그 사이에 인간을 놓고 인간이 악마에게 빠져 세상을 어지럽힐 때면 주기적으로 아버지인 하늘의 신 텡그리(Tengri)가 자신의 아들을 지상에 보내 악을 물리치고 땅 위의 평화를 이룩하곤 한다. 이때의 서사 영웅이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게세르칸(Geser-Khan)이다. 그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70살 할아버지와 60살 할머니가 사는 오두막집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는 또한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반도의 각종 부족 신화(동명왕 설화 등)의 하늘 사상이나 천손(天孫) 강지(降地: 땅으로 내려옴) 사상과 똑같은 구조와 동기를 보이고 있다. 부리야트인들의 전설은 바이칼호 형성에 관해 “…옛날 옛적에는 바이칼 바다가 없었고 오로지 땅뿐이었다. 어느날 불을 토하며 산이 무너지더니 물로 변하여 커다란 바다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즉 바이칼 호수는 지금도 ‘서있는 불(standing fire)’ 이라는 뜻으로 땅속의 불이 식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한편으로는 샤먼의 바다라고도 불리는데 태초에 불을 토하며 형성된 원시의 바다가 주변 바이칼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한없는 동경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곧 바이칼 자신이 샤먼의 존재와 동격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바이’는 샤먼을 뜻하고 ‘칼’은 계곡·호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전해왔다. 또 하나 중요한 바이칼 구비전승으로 ‘알탄샤가이(황금복사뼈)’ 신화가 있다. 이는 부리야트 전통 신화 중 대표격인 ‘울리게르 서사시’ 계열의 영웅서사시로 ‘게세르’ 신화와 함께 모두 샤먼문학으로서 수천년 아니 수만년 간 샤먼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샤먼은 종교적 사제이자 제사장이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종족의 역사와 우주의 기원을 설파하는 역사가이자 과학자이다. 또한 사회 윤리를 제시하는 도덕적 리더로서 행동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온 특이한 존재였다. 이러한 샤먼이 전해준 ‘알탄샤가이’ 신화에도 여러가지 우리네 풍속과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손님에게 곰방대로 담배를 권한다거나, 상대방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씨름으로 결판을 낸다든가, 지상의 혼란을 하늘에 거주하는 신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으로 화하여 제거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천신주재 사상 등을 역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바이칼의 구비문학은 이처럼 내용상 현재로부터 수만년 전의 지구 빙하기에 대한 인류의 기억까지 희미하나마 담고 있으며 바이칼 주변 알타이어계 여러 종족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문화적 보고이다. 그리하여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과 한반도의 민족지학적 상관성을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산더미 같고 바다와 같음을 느끼게 된다.
# 바이칼 샤먼 세계 신들의 수직적 위계질서 (장생신?)
1)후헤 문헤 텡그리 (영원한 푸른하늘)
2)에세게 말라안 텡그리 (현명한 아버지 하늘신)
3)하늘 거주 텡그리들
4)텡그리의 자손인 한(혹은 하트)들
5)노욘,자얀, 위대한 남-녀 샤먼들의 영, 종족의 시조가 되는 영웅들의 정령들
6)산,강,호수 등 거대 자연물의 정령들, 질병의 원인이 되는 정령들, 할매와 할배, 영험한 처녀의 정령들
7)종족사이에서 특별한 업적을 세우지 못한 일반인들이 사후에 변신하게 되는 영혼, 집안을 보호하는 조방신,
아다,아나하이,무우 슈부운, 이승에서 모욕당했던 가난한 백성들의 영혼, 병사한 사람들의 영혼등
위의 1~3은 하늘에 거주하는 신이고, 3번 하늘 신의 자녀들이 지상에서 육신을 얻으면 인간계(중계)의 지배자인 한(혹은 칸,카안)이 되고 죽으면 다시 4번 위치에 편입. 징기스칸도 죽어서 4번 자리에 갔을 것임. 신들은 '에세게 말라안 텡그리'를 통해서만 '영원한 푸른 하늘'과 교통이 가능했고 '에세게 말라안 텡그리'는 다양한 신들 사이의 유기적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 수행...
(용어 참고)
* 후헤 : 영원한
* 문헤 : 푸른 ,초록
* 텡그리 : 바이칼 인근과 극동 아시아지역,몽골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늘 신의 호칭. 원래의 의미는 '하늘' 혹은 '하늘거주자'였으나 의미가 전용되어 하늘 신의 통칭으로 사 용.
(알타이 지역 - 텐게리 , 중아아시아 지역 - 텡기르)
* 에세게 : 아버지,할아버지
* 말라안 : 현명한
* 한(칸) : 1)텡그리 바로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신과 정령
2)한이 지상으로 강림하거나 육신을 빌어 지도자로 나서는 경우 부여 받는 호칭
(한 혹은 칸) 예) 징기즈 칸
* 하트(혹은 하탄) : 한의 여성형 명사. 여신
* 노욘 : 주인, 지배자의 의미. 영어의 Mr와도 유사성 보임.
* 자얀 : 창조자,조물주의 뜻이나 '창조적 속성','조물주적 속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함.
특정 샤먼을 지칭하는 경우에도 사용.
* 아다 :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영혼의 일종
* 아나하이 :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영혼의 일종
* 무우 슈부운 : 여인의 형상을 한 사악한 영혼
# 부리야트 마을의 ‘천마도’
아직도 바이칼엔 곳곳에 샤머니즘의 실상들이 넘쳐난다. 나그네 발길이 닿는 언덕과 언덕, 고개와 고개마다 솟대와 신목(神木), 당목(堂木), 당집이 있으며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만발하여 있다. 질병을 고치는 약수라는 뜻의 ‘아르샨’ 지방에 가면 산중의 약수와 약초로 병자를 치료하는 샤먼을 지금도 만날 수 있고 어느 부리야트족 마을에는 비료자(자작나무의 러시아말)를 신성시하며 하늘로 솟구치는 천마(天馬)를 그려 놓았다. 마을마다 하늘 제사터가 있고 그 주변은 사람들이 출입 않는 소도이며 이곳을 하늘과 땅의 소통이 가장 잘 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네 사촌 부리야트 사람들이다. 이르쿠츠크에서 한두 시간 거리의 부리야트족 마을 우스체르다 부근 제사터 안내문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곳은 우스체르다 자치구 가운데 가장 지력(地力)이 센 곳입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하늘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 몽골의 탱그리와 단군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오듯 샤먼킹(shaman king) 단군이다. 단군은 하느님의 자손이며 지상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존재이다. 단군의 어원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리민족은 몽골어중 '텡그리'라는 하늘을 의미하는 단어가 -->탕구르-->당군-->단군 으로 변천된 것이며, 이는 고조선이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가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한자어로 쓴 것은 그후의 일이며, 박달나무는 제단의 재료로 제사장을 의미하며, 임금은 말그대로 정치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은 단군왕검의 줄임말이 아니라, 제정일치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고, 여러 명이 존재했으며 그중 1대 단군이 왕검이라고 불리웠다.
4. 몽골신화 ( 몽골 제족(諸族)사이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신화)
몽고, 돌궐(터키), 달단(타타르), 퉁구스, 흉노(훈)의 여러 부족들은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해왔다. 이들 부족들의 종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샤먼(shaman)에 대한 믿음이다. 샤먼의 주술은 너무나 강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지상으로 데리고 올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창조주와 겨룰 정도였다. 징기즈칸의 군대가 중국을 정복하면서 몽고와 시베리아에 티벳 불교가 도입되었다. 그 이후 샤먼의 권위가 추락했다. 대부분의 몽골 제족의 경우, 그들의 신화는 영웅서사시나 전설 속에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리앗(Buriat) 몽골족의 전승은 예외(例外)여서 잘 정리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천계(天界)는 동(東)과 서(西)로 나뉘고, 동에는 44명의 사신(邪神)이 있고, 서에는 55명의 선신(善神)이 있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애니미즘적(的) 관념을 나타내는 이들 신격(神格)은 텡그리라고 한다. 동과 서를 합쳐 99명인 텡그리 외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부에 또 텡그리가 있는데, 이들의 쟁탈을 둘러싸고 동과 서의 싸움이 벌어진다. 패배하여 지상에 떨어진 동천(東天) 수장(首長)의 시체 각 부분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마물(魔物)들이 인간에게 질병과 죽음 및 재앙을 가져다 준다. 한편 서천(西天)의 수장은 아들을 내려보내 그 마물들과 싸우게 한다. 마물의 대부분은 머리가 여러 개인 괴수(怪獸)인데, 천신(天神)의 아들이 지상(地上)으로 내려오는 동기, 그리고 그때에 천신에게서 받는 여러 가지 신기(神器) 등에 특색이 있다. 동과 서, 또는 선과 악의 2원론적 구성이나 신격의 이름 등을 보아 이란으로부터의 짙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몽고신화로 분류한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알타이어족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제목처럼 몽고인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타타르,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5. 징기스칸 시대의 샤머니즘과 현재 몽골의 샤머니즘
하이지히(Walther Heissig)는 체계적으로 몽골의 종교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지금은 '사라져버린(disappeared)'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하이지히의 연구는 종교를 억압하던 사회주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 '사라짐'의 전제에서 출발할 때 몽골 샤머니즘의 현재적 사실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이 시장경제로 전환한 후 새롭게 복원되기 시작한 현대 몽골의 샤머니즘은 현재적 현상이면서도 과거 전통의 의미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몽골 샤머니즘에 대한 기술은 역사속의 문화적 특성과 동시대적 관찰을 효과적으로 병행할 때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몽골의 유목문화 샤머니즘은 위계적 세계관을 종교적으로 형성했다. 보통 샤머니즘에는 지고신이 있다해도 대부분 '숨은 신'이나 '사라진 신'으로만 존재하는 반면 몽골 샤머니즘에서는 최고신 텡그리가 신적 위계의 정점에 강력하게 위치한다. '영원한 푸른 하늘' , 즉 멍케 코케 텡그리(M nke K ke Tengri)가 현실적 의례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런 신관의 위계성은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결과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즉 농경 중심의 정주사회와는 달리 유목민들의 이동적 삶은 안정된 정치체제를 구성하기 곤란했고, 따라서 이동성의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상징적 위계 구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샤머니즘 신앙을 가진 유목민들에게 수직적 초월의 관념이 발달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몽골비사}의 첫부분에는 징기스칸이 '천상에서 운명을 점지 받고 태어난' 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 역시 징기스칸의 개인적 배경을 텡그리의 의지와 일치시킴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표현이었고,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연대성이 약한 씨족들의 결속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몽골인들에게는 정치적 행동과 종교적 의례가 불가분하게 얽혀 있으며, 텡그리에게 드리는 희생제의는 하늘의 의지와 군사적 승리, 통치권의 주장, 성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훗날 텝 텡그리(Teb-Tenggeri)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몽골의 대샤먼 커커츄(Kokochu)는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테무진에게 "하늘은 테무진에게 이 대지를 통치케 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내려준다. 그에게 '징기스칸'이라는 칭호를 준 이도 커커츄였다. 이런 종교적 권위 부여는 테무진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파라만장했던 씨족간 전쟁과 통합을 통해 몽골고원을 통일한 징기스칸의 궁정에는 베키(Beki)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베키라는 칭호에는 샤먼적 성격이 깃들어 있으며 샤먼적 인물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만 부여된 것이다. {몽골비사} 216절은 "베키로 추대되면 흰옷을 입고 백색 거세마를 타며 상석에 앉는다. 또 년월의 길일을 택하는 일을 주관한다"고 기술하고 있음을 볼 때, 족장급 샤먼들이 제국의 궁정에서 통치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샤먼의 정치적 진출이 강력하다보니 당연히 징기스칸의 통치권과 마찰이 생겨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 성립기에 징기스칸을 도왔던 커커츄는 정치적 갈등속에서 징기스칸의 동생이 권력을 얻을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이에 징기스칸은 神·政 두 가지를 모두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욕으로 커커츄를 살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신격화를 추진했다. 훗날 멍케칸(1251-1259)은 "하늘에는 멍케-텡그리가 있듯이 대지에는 하늘의 아들인 징기스칸만이 유일한 군주이다. 멍케-텡그리의 명령은 징기스칸으로부터 출발한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종교적 합리화는 샤머니즘을 이용해 절대권력을 장악하려는 초기 몽골 칸들의 의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몽골 샤머니즘은 야쿠트족 중심의 사카(Sakha)공화국에서처럼 과거의 정치적 힘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시장경제로의 변화 이후 티벳불교가 과거의 사회주의적 이념을 대체하면서 급격히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티벳불교는 승단 제도를 통해 복구의 체계적 진행이 용이했지만 샤머니즘은 늙은 샤먼들의 '재개'와 새로운 샤먼의 '출현'이 갖는 비체계성으로 인해 과거의 정치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몽골 정부가 전통문화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샤머니즘을 통한 재건은 아니다.
현재의 몽골 정부 역시 민족정체성 확립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다. 오랫동안 강제로 잊혀졌던 징기스칸의 역사적 복원과 신격화가 한참 진행중이고, 姓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키릴문자 대신 전통 몽골 문자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는 총체적인 전통의 복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몽골 전통의 중심축이었던 종교 역시 빠른 속도록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몽골은 티벳불교가 지배적 위치로 올라섰고, 도처의 사원이 복원되면서 활성화되고 있다. 라마승들의 사회참여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벡커는 민주화시위에서 라마승들이 종교활동의 자유를 주장하며 뛰어들었고, 사회주의를 대체할 마땅한 도덕적 기준이 없었던 개혁세력에게 자연스럽게 티벳불교가 사회적 도덕률이자 기준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현지에서 직접 볼 수 있었던, 라마승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존경심은 그것이 현실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속에 샤머니즘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현재 몽골의 샤머니즘은 전통문화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특히 전세계 환경운동가들이 관심갖는 몽골의 생태계 보존의 차원에서 샤머니즘은 효과적 신념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 몽골 사회에서도 샤먼은 여전히 소수이며, 라마승들의 종교활동과 중첩되는 폭이 넓다보니 샤먼만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지도 못하다. 뿐만 아니라 벌써부터 샤먼을 트릭스터로 몰아대는 사회적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있어서, 자칫 근대화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있는 듯하다. 현재의 몽골 샤머니즘은 '자유롭지만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였다. 샤머니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해 왔다. 그 변화의 현실이 '사실'에 가깝다. 몽골 샤머니즘을 깊이 이해하려면 고대 유목민들의 과거적 샤머니즘이 아니라 새롭게 고안되고 창조된 산물로서의 현재적 샤머니즘 현상을 연구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6. 몽골의 종교
1) 샤머니즘
현재 몽골 인구의 50% 정도가 샤머니즘 신자이다.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혹독한 생활 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샤머니즘에 젖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징기스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부리야트 사람이고 그의 무덤도 바이칼 알혼섬에 있다는 전설로 미루어 칭기스칸이나 그 부족들도 위와 같은 바이칼 신들의 위계질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다. 장생신은 가장 상위의 신인 '영원한 푸른 하늘'의 중국식 표기로 추정된다.
# 바이칼호 주변 부리야트족- 시베리아에는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이 있다.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은 이 중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바이칼호 주변에서 자치공화국을 이뤄 살고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아 관심거리이다.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돼 부리야트족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즈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다.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의 올혼섬에는 오색 천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이 수없이 많다. 샤머니즘의 상징인 이 말뚝은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 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똑같은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리야트족은 우리나라 처럼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 또한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 부리야트족의 샤먼은 '샤먼의 호수' 라고 불리는 바이칼 호숫가 신목(神木) 아래서 바이칼의 신 불한(칸)을 부르는 굿판을 벌인다.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모습이 닮아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스탈린 시대 때 많은 브리야트족 샤먼이 처형당했다. 이로인해 샤먼적인 요소가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샤머니즘 자체가 쇠퇴하면서 일반인의 기억에서 무속적인 특징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바이칼호에는 다시 샤머니즘 바람이 불고 있다. 바이칼에 대한 숭배나 제사, 혹은 제물 공여 의식은 바이칼 주위에 산재한 우상을 모신 신당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이칼 주변과 알혼섬 일대에서는 희생을 바치는 장소의 규모에 따라 만칸, 자니그칸 등으로 불린 제사터가 널려 있으며, 이들보다 그 규모가 더 크고 조직적인 특성을 보이는 부리야트인의 타일라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타일라간은 서부 부리야트인뿐만 아니라 바이칼을 지나 몽골 고원에 이어지는 부리야트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며, 그 대상에 따라 농경, 목축, 어로 등의 특징을 갖는 제사 형태를 보인다. 부리야트인 타일라간 가운데 발치르족의 타일라간에서는 바이칼에 대한 제사의식의 원형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부리야트의 무속 신앙에 따르면 세계는 악과 선의 수많은 영으로 가득하다. 서부의 55선신과 동부의 44악신 혹은 악령이 합하여 부리야트인의 세계는 99의 신들이 주재하고 있다. 산, 숲, 강, 호수, 별, 해, 달 등에 에젠으로 불리는 영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자연물 가운데 인간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바이칼호의 경우에는 켕그리 수준의 영들 외에도 여신 바이켈 하탄이 모든 자연 현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초여름이 되면 부리야트인들은 알혼섬 혹은 현재의 이르쿠츠크 인근의 바이칼 주변에서 성대하게 타일라간 의식을 집전했고, 제물을 바쳤다. 영들 가운데 가장 영험이 있고 세력이 강대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의 여신 바이겔 하탄에게 제물이 바쳐진다. 초여름에 바이칼 지역의 농토에서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땅의 왕인 다일란 노욘에 대한 경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바이켈 하탄 경배 의식보다 뒤에 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2)라마교(티벳불교)
지금 몽골의 전체 인구의 26%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계속 부흥하고 있다. 국가 종교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징기스칸 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징기스칸은 불교를 믿는 위구르인을 선생이나 공직자로 채용했다. 위구르인은 일반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았고 몽골에 지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왕위에 있으면서 징기스칸은 또한 주요 불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오게데이칸(Ogedei Khan)은 티벳의 라마승을 초대해 하라호룸(Kharakhorum)에서 불교의식을 배웠다. 그리고 여기서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이러한 다신교적인 샤머니즘이 몽골의 전통적인 신앙이 되었다. 불교가 몽골의 정식 종교로 채택된 것은 쿠빌라 칸(Kubila Khan) 때의 일이다. 쿠빌라 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공식 종교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라마승 로디자틀산(Lodijaltsan)을 몽골 불교의 공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라마승은 군대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으며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쿠빌라 칸의 노력에도 불교는 몽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상류층들의 종교였으며 티벳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불교도 그 지지기반을 잃고. 대신 샤머니즘이 16세기 중반부터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 황모파 불교(Yellow Hat sect Buddhism) 또는 라마교가 몽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라마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몽골에 도입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교는 몽골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입지를 종교적 인물을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고, 둘째로, 티벳의 황모파 지지자들이 적모파에 대항해 몽골 지배층과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몽골에 도입된 세번째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호전적인 몽골을 잠잠하게 만들 수단으로 라마교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1577년, 알탄 칸(Altan Khan)은 티벳의 수장을 몽골로 초대했다. 알탄 칸은 몽골을 라마교로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불교신앙을 법률에 통합하여 샤머니즘의 관행을 제거하는 법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아브타이 사인 칸(Avtai Sain Khan) 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브타이 사인 칸은 1586년 제3 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몽골 라마교의 중심으로 하라호름(Kharakhorum)에 주(Zuu)사원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라마교의 수장인 자나바자르(Zanabazar)의 지도아래 라마교 절과 학교가 생겨났다. 자나바자르는 상류 계급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몽골인들에게 라마교를 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이후 200년간 몽골 인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라마교는 점점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이 기간동안 승려들을 사원 밖으로 내보내 일하게 함으로써 몽골의 노동인구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소위 "좌익편향(Left Deviation)" (1929-1932)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300개의 사원을 폐쇄했다. 일부 승려들은 처벌이 두려워 떠났다가 1932년 "새전환운동(New Turn movement)"의 시작으로 다시 사원으로 돌아왔다. 이 운동은 신앙, 교육, 선전을 지향한 운동이었다. 1936년 사원 수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폐쇄당한 300개 이상의 사원을 포함해 모두 767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 편향(Left Deviation)" 직후의 기간동안 늘어난 승려의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전체 모두 100,000명 이상의 승려가 생겨났다. 당시 성인 라마승은 전체 남성 인구의 40%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의 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몽골 공산당은 "사원의 기관화"를 실시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몽골 공산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원을 떠나 세속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매우 강력히 권고 받았다. 1938년 약 20,000명의 승려들이 유목민이 되었으며 5,000명은 정부 지원 인원으로, 나머지 청년은 군대로, 어린이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승려들은 1930년대 중반 사원 방화와 파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해로 기록된다. 수백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천개의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0,0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후 40년 이상, 몽골인들은 공포 속의 종교 생활을 했다. 나이든 신자들은 100여명의 승려가 남은 중심 사원 간단 사원에 나갔으며 혹은 고비 사원으로 갔다. 고비사원에는 약 4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집에서만 종교생활을 했고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지되었다.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의 불교는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1930년대 억지로 세상으로 쫓겨 났던 많은 승려들이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원래 살고자 했던 삶을 살고 있다. 1990년, 약 20여명의 여성 신자들이 세운 여성들을 위한 사원이 울란바트르에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활동에 나섰으며 몽골인을 서구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3) 몽골 라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
티벳불교의 몽골내 확산은 샤머니즘의 입지를 협소하게 만들었지만,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몽골의 샤머니즘과 티벳불교의 차이는 모호하다. 이는 종교적 지평융합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샤먼과 라마승의 직능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라마승들도 점을 치고, 예언을 하고, 치유의례와 자연숭배를 했고, 심지어 엑스타시와 주술적 행위의 연행에서는 라마승들이 샤먼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도 했다. 몽골의 라마승은 전형적으로 샤먼이 행하는 종교적 직능을 담당하고 있다. 마을 잔치가 벌어진 초원의 개울가에서 가정의 우환과 그것의 치유를 위한 작은 의례를 행했는데, 그 처방이라는 것이 입김을 불어넣은 사탕이라든지, 신령한 힘을 주입한 투그릭 지폐같은 것이었다. 또한 차강노르솜의 늙은 라마승은 티벳불교의 신격뿐 아니라 자연신령 로스-사브다크와 교류하고 있었고 그는 자연신령들이 무척 강력하며, 자신에게 커다란 힘을 부여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상은 외형적으로는 샤머니즘이 티벳불교에 제압되었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종교적인 지평융합을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쥬코프스카야(Zhukovskaya)의 분석에 주목할 수 있다. 쥬코프스카야는 17세기 몽골에 재차 들어온 티벳불교는 이미 샤머니즘과 유사한 티벳의 토착종교인 본-포(Bon-po)와 여러 세기에 걸쳐 경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혼합된 형태였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티벳불교와 샤머니즘의 융합은 한 쪽의 해체가 아니라 각각의 종교성을 풍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몽골 샤머니즘은 티벳불교의 판테온을 수용하면서 신관을 발전시켰고, 우주관을 정교화시켰으며, 화려하고 현란한 의례도 도입했고, 샤먼들은 티벳불교의 신격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샤머니즘이 티벳불교에 일방적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박원길은 "어느 면에서는 몽골의 샤머니즘은 라마교(티벳불교)의 외형을 빌려 그대로 존속되어 갔다."고 분석한다. 즉 심층적으로는 샤머니즘적 인식체계가 그대로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4) 회교
몽골 내 회교 인구는 약 4% 정도이다.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이흐 시에도 회교도들이 4-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회교인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최근 터기 모슬렘 협회에서 몽골 회교 선교를 위해 몽골에 모두 4개의 학교를 세우거나 합작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1993년 몽골-터키 합작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95년 가을에 기존의 몽골 건축 기술학교(제 4호 건축기술학교)를 합작하였으며, 북쪽 다르항 시와 서쪽 바양울기 아아막에서 학교를 인수하여 모슬렘 선교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는 "몽골 모슬렘 협회"(Mongolian Moslem Society)가 결성되어 있으며, 회교도들과 카자흐 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7. 칭기즈 칸과 몽골의 역사
칭기즈 칸(Chingiz Khan :成吉思汗 ;1162-1227)은 몽고 제국의 창건자, 원의 태조. 아명은 테무진(?木眞)이다.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해 칭기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부친은 예수게이 바가투르, 모친은 허얼룬이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친(칭기즈 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 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그는 1206년에 열린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그는 먼저 통일 국가의 기구를 정비하였다. 즉 씨족적 결합 관계를 해체 하고,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부장을 천호 집단(千戶潗團)의 장으로 임명, 새 전제적 권력자로서 가 한(可汗)에 예속하는 유목 영주제를 확립하였다.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고 있던 몽고족이 불세출의 영웅 징기스칸에 의하여 통합되면서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이며 광대한 정복왕국을 건설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난 후, 카스피해의 북쪽 회랑을 통하여 러시아 평원으로 진출한 몽고군은 1223년에 갑자기 러시아의 남동부에 나타나서, 러시아와 뽈로베쯔 연합군을 깔까의 전투에서 격파한 다음, 볼가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후 13년 쯤 경과한 1236년에 몽고군은 갑자기 우랄산맥을 넘어와 거의 전 러시아를 학살과 파괴의 참화속으로 몰아넣었고, 1240년 끼예프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약 4년 동안에 걸쳐서 몽고군은 러시아인들의 성곽과 도시들을 차례로 파괴하였고 눈에 띄는 모든 주민들을 몰살시키면서 전 러시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몽고군 원정대장 바투는 중앙유럽을 휩쓴 다음 아드리아해 북부를 거쳐서 귀로에 발칸반도의 중부와 흑해연안을 평정한 다음, 볼가강 하류 가까이에 위치한 사라이에 수도를 정하고 킾착칸국(Zolotaja orda)을 건설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몽고의 지배체제는 속령 러시아의 공후들이 몽고의 칸을 대군주로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러시아에서 속령 군주권은 러시아 공후들이 몽고의 칸으로 부터 그 직위를 허가받아야 보호될 수 있었다. 러시아의 공후들은 이 허가장(러시아어로 jarlyk)을 수여받기 위하여 몽고의 대군주에게로 직접 나아가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쳐야 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러시아의 공후들은 처음에는 몽고의 관리인을 통하여, 그리고 후에는 몽고측이 지명한 러시아의 공후를 통하여 세금과 공물을 꼬박꼬박 지불하여야 만 되었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종종 몽고군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지배권은 1240년 부터 1380년 까지 대략 140년 동안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모스끄바의 드미뜨리 대공이 1380년에 꿀리꼬보의 벌판에서 '몽고군 불패의 신화'를 깨뜨린 이후에도 거의 100년 동안이나 몽고의 러시아 지배는 미약한 상태로 나마 끈질기게 연장되었다. 몽골인은 자기들이 「탱그리(하늘)의 명령을 받고 태어난」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고 생각했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이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세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외국의 군주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하며 편지를 보낼 때도 항상 탱그리의 명령을 근거로 삼았다. 그 좋은 예가 고려에 보낸 서한이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칭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구르, 카라키타이(西遼), 호레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구르는 톈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카라키타이는 탈라스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레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라키타이는 중국의 요나라가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계 카라한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족의 왕자 퀴츨뤽은 칭기즈칸에게 쫓기자 카라키타이에 접근, 군주 귀르한의 호의를 산 후 카라키타이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호레즘의 군주 술탄 무하마드와 결탁해 카라키타이를 멸망시켰다. 카라키타이의 서부는 호레즘이, 동부는 퀴츨뤽이 차지했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1218년 퀴츨뤽이 머물고 있던 카슈가르에 2만명의 몽골군을 파견했고 이에 힘을 얻은 무슬림 토착민들이 봉기해 퀴츨뤽을 처형했다. 이제 아시아내륙은 동부의 몽골, 서부의 호레즘 두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호레즘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전역과 이라크 일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였으며, 카라키타이를 멸망시킨 후 우르겐치와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부 등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술탄은 해지는 곳의 군주였다. 몽골과 호레즘은 친선을 다짐했지만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술탄은 전형적인 이슬람왕조의 통치자이며 매우 야심찬 알라신의 사도였다. 그는 자신을 한 왕조의 통치자로서보다는 이슬람세계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탄이 알라의 통치권을 전세계에 구축하라는 알라신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칭기즈칸은 이기는 동물만이 살아남는 야생의 생태, 즉 초원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존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초원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었다. 1218년 칭기즈칸은 5백마리의 낙타에 동방의 온갖 진귀한 물품을 실은 커다란 캐러밴을 편성, 4백50명의 사절단을 호레즘왕에게 보냈다. 사절단이 호레즘의 첫번째 성 오트라르에 도착하였을 때 성주 이날측이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물건들을 빼앗아버렸다. 낙타몰이꾼 한 사람만이 탈출, 필사의 도주 끝에 몽골에 도착해 이 사실을 알렸다. 칭기즈칸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칭기즈칸은 즉각적으로 호레즘과의 전쟁을 개시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귀족으로 구성된 사신을 호레즘의 술탄에게 보내 이날측의 도발에 항의했으나 술탄은 오히려 사신 한명을 처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수염이 권위의 상징인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모욕이었다. 이슬람 학자 나사위는 『이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슬림의 피가 흘렀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술탄의 행위에 대해 듣고 언덕에 올라 모자를 벗고 하늘을 향해 사흘 낮과 밤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고난을 일으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에게 복수할 힘을 주십시오』 칭기즈칸에게 있어서 복수는 도덕적 의무였고, 하늘의 뜻이었다. 호레즘 정벌에 나선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9년 이르티슈강에 도착하였다. 몽골군은 여기서 도하전투훈련을 벌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호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몽골군은 그해 가을 호레즘 변방도시 오트라르에 접근했다. 칭기즈칸이 즐겨쓰는 책략이 호레즘 공격에도 적용되었다. 첫째, 심리전을 사용한다. 공격에 앞서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된 통치자임을 천명하고 적국의 군중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방침을 공포하고 점령후에는 그대로 시행한다. 둘째, 적국에 대한 연구와 첩보를 강화하여 그 정보에 기초하여 적국의 내적 취약성을 폭로하고 교란작전을 펴서 적국 지도층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셋째,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장하여 종교적 핍박을 두려워하는 현지주민의 지지를 끌어낸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평소 호의적으로 대해온 대상들을 이용해 호레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군주가 하늘이 정한 온세계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과거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해 호레즘 백성들의 대항의지를 꺾고 심리적으로 무력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칭기즈칸은 1220년 2월 오트라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으나 오트라르는 결국 몽골군에 함락되어 이날측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고 도시는 그후 다시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다음 공격목표인 부하라를 손쉽게 함락하고 풍요롭게 번창하던 실크로드의 진주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사마르칸트 공격은 칭기즈칸에게 호의적인 이 도시의 대상들과 무슬림 지도자들이 항거를 하지 않음으로써 쉽게 끝났다. 성에서 대항하던 투르크군 3만여명은 도시민 대표들이 투항한 다음날 항복했으나 모두 무참히 처형당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을 무너뜨리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세계의 제국을 건설해 동서양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몽골제국이 출현하기 전에도 유라시아의 초원을 무대로 등장했던 여러 유목국가들이 있었지만 중동이나 유럽을 직접 침략했던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과거 스키타이인들이 중동으로 들어가 아시리아제국을 무너뜨렸고, 아틸라의 훈족이 센강을 건너 로마―고트 연합군을 대파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가 로마를 포위한 일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곳에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었다. 몽골인들의 정복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의 건설자인 칭기즈칸이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이 지역들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초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응징」을 위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칭기즈칸 사후에 실현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 두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과 몽골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중동에서는 험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는 소위 「암살자단」이 골칫거리로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킵착, 불가르와 같은 유목민들의 활동이 몽골제국의 외곽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몽골세력을 분쇄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군사귀족들도 가축만 풍성한 초원이나 칸의 직할지인 북중국과 중앙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고 그 과실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정복이 추진되었고, 그것은 칭기즈칸의 경우와는 달리 「정복」과 「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몽골군의 러시아 원정은 1235년에 단행되었다. 원정군은 모두 12만명에 이르렀다. 칭기즈칸의 장손 바투가 총사령관이자 우익군을 맡고 오고데이칸의 장자 구육이 좌익군을 담당하여 1236년부터 볼가강을 건너 작전이 시작되었다. 1237년 킵착과 불가르를 경략하고, 그 다음 해에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1240년 수도 키예프를 잿더미로 만든 몽골연합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갔다. 1241년 4월9일 저 유명한 리그니츠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몽골군에 맞섰던 2만명의 폴란드―게르만 연합군은 괴멸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크로아티아로 들어갔다. 헝가리 국왕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고 이교도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의 소집을 외치는 교황 그레고리9세의 호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몽골군의 말발굽을 저지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이때 몽골군은 갑자기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몽골 초원에서 오고데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몽골 장군들에게는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 누가 다음 칸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그들의 운명에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기독교도들과 전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투는 몽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관계가 나쁜 구육이 칸에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남러시아 초원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고 이것이 킵착한국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로부터 거의 3백년 동안 「타타르의 멍에」에 매여 살았고 그 상처는 지금도 러시아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중동 정복은 이보다 약 10년 뒤에 시작되었다. 쿠빌라이칸이 즉위한 뒤 자기 동생 훌레구를 보내 「암살자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없애도록 한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암살자단도, 이미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칼리프의 바그다드도 몽골인들에게 그다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훌레구의 군대는 1258년 1월29일 바그다드를 포위했고 2월10일 마지막 칼리프가 항복했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교외의 벌판으로 끌고 가 카펫에 만 뒤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 칼리프는 아무리 유명무실했을지라도 기독교권의 교황과 같이 이슬람권의 단일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칼리프의 죽음과 칼리프체제의 소멸은 모슬렘들에게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칼리프 대신 이교도 몽골인이 다스리는 일한국이 들어섰고 이로써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 시베리아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인들이 파괴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더러 최초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도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서히 과거의 번영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여러 지역과 문명이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서 통합되면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방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는 마르코 폴로의 글이 보여주듯이 보다 정확한 지식으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상인들은 초원과 사막과 바다를 누비면서 경제에 활력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유라시아대륙 북방 초원의 조그마한 부족 이름에 불과했던 몽골. 그러나 「푸른 이리와 늑대의 후손」인 테무진이 「바다의 왕」 칭기즈칸이 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수천년간 응축돼왔던 기마민족의 힘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초원의 바람처럼 대륙을 휘몰아쳐 갔다.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리라』1245년에 교황의 친서를 들고 온 사절 프라노 카르피니에게 칭기즈칸의 손자 구유크칸이 답한 유명한 「세계정복선언」. 칭기즈칸의 세계정복은 그의 손자대까지 이어진다. 몽골군대가 이렇듯 세계를 제패하고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는가. 몽골군대의 기마병은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적은 수로 현대 미국도 하기 힘든 중국과 중동―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윈윈(Win & Win)」전략을 수행한 것은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몽골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 가족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보급로가 따로 필요없는 전선 형성 등 독특한 전술운영을 했던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추었었다. 칭기즈칸 군대는 또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활용하였다. 호레즘왕국의 변방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칭기즈칸은 『그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닛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학살의 소문은 다른 전투에서 적의 군사들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바그다드를 칠 때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를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사용하는 등 직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다양한 병법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의 특성만으로는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근 1백50년간 경영한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몽골비사(秘史)는 칭기즈칸의 충신 야율초재(耶律楚材)도 「말(馬)로써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정처없이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의 내부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몽골 아래의 평화)를 이뤄낸 것은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이전의 유수한 정복자와 달랐던 것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리더십을 갖춘 점이었다. 요즘 말로 「세계화」의 시각을 갖춘 리더십이었던 것. 둘째, 칭기즈칸의 「자유무역주의」정책은 파괴됐던 실크로드 도시를 다시 번성하게 했고 몽골제국에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14세기 초의 원(元)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인 보호에 대한 통상조약을 보면 「캐러밴(낙타대상)의 도난에 대해선 원이 변상한다. 세금은 일률적인 매상세 3.3%만 내고 관세는 물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셋째, 칭기즈칸이 세운 「역참(驛站)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참제도는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라는 역을 두고 숙박시설 식료 말을 구비해 놓은 것.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까지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데이가 죽은 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면서 몽골제국은 차츰 몇개의 칸 국(汗國)으로 분열되어갔다. 특히 1259년 일한국의 카잔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종교를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일한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몰살당했고 쿠빌라이칸은 이슬람신도들을 탄압, 중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종교에 관용하라던 칭기즈칸의 충고를 듣지 않은 몽골인들은 분열했고 잇단 경제 정치적인 갈등으로 결국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또 전쟁을 통해 건설된 몽골제국은 정복이 끝나고 전리품의 유입이 중지되자 정복된 정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세계에서 두번째의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2백50여년간 몽골인에게 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인들은 칭기즈칸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주의를 철저히 탄압,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나 구소련 붕괴 후 자주성을 되찾은 몽골은「칭기즈칸의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칭기즈칸의 신화」가 강요된 오랜 침묵을 깨고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다시 「모든 것을 세울」 수 있게 될까.
이후 칭기즈칸은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 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획되었으나 칭기즈 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로마 원정이 예정대로 행해졌다면 세계사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복된 지역은 자식들에게 분봉 통치하게 하니, 뒤의 4한국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개국 군주로서의 비범한 재능은 내정·외정 양면에 있어서 잘 엿볼 수 있으며, 그의 동서 문화의 존중, 종교의 보호, 각종 제도의 정비 등은 유목 사회를 국가로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게 하였다. 칭기즈 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칭기즈 칸은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다. 1227년 8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사냥도중 밑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전투중 무릎에 맞은 화살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며, 이밖에도 벼락에 맞았다, 탕구트 국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그와 동침할 때 국부에 상처를 입혀 그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죽자 몽고군 지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 했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 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8. 몽골의 기독교 선교 역사
1)아시아교회: 13-14 세기 교회는 몽골제국 치하에서 생존했다.
1. 기독교의 상황: 팍스 몽골,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 길을 열어준, 짧은 기간의 상대적인 평화와 대륙의 통합, 그리고 종교의 자유, 비단길을 따라 Herat, Samarkand, Kashgar, Almalik(or Tangut), Navekath(위구르 경내), 북경에 독립적인 대주교구 설정.
a. Keraits(Turko-Mongolian) 선교: 12세기 혹은 13세기에 전 종족이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종족은 훗날 한 몽골족의 시시한 족장이며 징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친절히 대해주었다. 12세기말 케레이트족의 기독교 족장인 Toghrul Wang Khan)은 테무친의 보호자가 되었다. 실제로 이 사람은 프레스터 요한의 이야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케레이트 네스토리안은 징기스칸의 성문법인 야사(yasa or yasak)의 많은 부분을 체계화시켰다. 그리고 결혼관계를 통해 몽골 황실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렸다. 징기스칸은 케레이트를 병합한후 토오릴의 동생 자아 감보의 세딸을 가족으로 맞이한다.
Ibaka-beki -징기스칸의 아내
Bektulmish- 징기스의 장남 Jochi의 정실
Sorkaktani- 징기스칸의 4남 Tolui의 아내(3아들은 나중에 몽골의 대칸, 중국의 황제, 일칸)
b. 몽골제국: 13세기는 아시아 기독교의 전성기
Jochi-바투 Golden Horde(ordu는 군주들이 머무는 천막을 말한다. horde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유목민은 군주의 천막을 중심으로 이동한다) 사후 기독교인 아들 사르탁이 승계한다.
Chagatai-트랜스옥시아나와 Turkestan을 포함한 동부중앙아
Ogetai(2대 대칸)-kuyuk(3대 대칸)
Tolui(핵심부 통치자)-기독교도 왕비 Sorkaktani 와의 소생 중 3명이 칸에 오름
몽케-4대 대칸(기독교인을 아내로 맞이함) 세계정복의 꿈 가짐
쿠빌라이-중국 정복, 5대 대칸, 원황제
훌라구-무슬림 페르시아 정복하고 일칸국 창시자됨
몽케의 막내동생 아릭 부케-기독교인/ Then Arabuccha came out to meet his brother the Chan, and the monk and we perceiving that he would have to pass beside us, advanced toward him with the cross. He recognized us, for he had been previously to our oratory, and held out his hand and made the sign of the cross at us like a bishop. 루브룩의 기록에서
소르칵타니 베기-사후 성녀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대립관계: 첫째와 넷째- 둘째와 셋째
1) 원나라에서 기독교
쿠빌라이의 집권(1260-1294): 종교에 대한 혼합주의적 관대함, 동생 아릭부케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자신과 뜻을 같이한 몽골 기독교인 모임과 기독교 비밀 결사의 도움으로 쿠빌라이와 권력 투쟁(1260-1264)을 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사촌이자 기독교도인 Nayan은 1287년 중앙아 통치자 카이두의 반란에 동참하여 군기에 십자가를 달고 싸웠으나 졌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는다. 쿠빌라이는 몽고 전통에 따라 모든 종교에 관대하였다. 그 이유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샤머니즘에 기초를 두면서도 자신의 불교도 왕비를 따라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밀교형태). 그러나 무슬림을 제국의 재정과 조세징수 분야에 사용하고 유교 사당을 수도에 세우고 황제숭배를 포함한 조상숭배를 장려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옹호하기도 한다.
쿠빌라이는 고도로 문명화된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중재자를 통하여 통치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기독교인을 포함한 외국 관료들의 힘을 신장시켰다. 원 제국은 4계급으로 통치하였다. 즉 제1계급은 몽고적 특권계급, 제2계급은 이방인들로서 제색목인(여러종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라하는데 한족이 아닌 신하들과 모사들이다. 중앙아와 서아시아인들, 페르시아인들. 마르코 폴로같은 서양인들이 속했다. 제3계급은 북중국인이며 제4계급은 남중국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급에서 제1과 제2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289년 쿠빌라이는 늘고있는 기독교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었고 쿠빌라이의 모사 이사(Ai-hsueh, 서아시아 출신으로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점성술과 의학을 공부한뒤 구육시대에 관도에 올랐고 쿠빌라이기 즉위한 뒤 1273년에 정섬과 의학을 담당하는 부서-후일 광혜원-를 관장했고 일칸국의 아르군에게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275년 황실도서관에 해당되는 비서감을 관할)라는 네스토리안 기독교도 사무를 총괄하는 승복사의 장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한림원의 승지가 되어 수세기에 걸쳐 유명한 전중국의 학문적 역할을 했다. 그는 황제에게 행하는 현명한 충고로 유명했다. 그의 5 아들이름은 엘리야, 덴하, 흑총, 기와르기스(조오지), 루가 등이었고 고관을 역임했다. 원서(Yuan Shi)에 따르면 이 기관은 동방교회를 관장하며 그 장은 원제국에서 위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그리고 원서에는 1289-1320년 동안 72개의 교회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330년 경 원제국내 네스토리우스교도의 수는 3만명정도이며 매우 부유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타난 네스토리안의 분포도
사마르탄트, 카슈카르(자신들이 교회와 종교를 가지는 투르크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오 약간있다), 야르칸드(주민들은 마호메트교를 믿지만 일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도 있다), 탕구트(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일부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사라센들도 있다), 긴긴 탈라스(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우상숭배자들과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다), 숙주(기독교도도 있고 우상숭배자들도 있다), 감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기독교도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 도시에 세 채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다), 에르주울(대부분의 주민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우상숭배자와 마호메트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링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며 마호메트를 숭배하기도 하고 약간의 기독교도들도 있다), 에그리가야(사람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의 교회도 세 채가 있다).
남송이 멸망한후 남중국에도 기독교가 확산된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세르기스의 일곱교회이다. 마르 세르기스는 네스토리우스교도, 1277년 양자강 하류에 있는 진강로 총관부의 부다루가치로 임명되어 5년 재임하면서 그곳에 여섯군데에 교회를 건립했고 항주에도 한 군데에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동기는 꿈에 계시였다. 그가 세운교회는 다음과 같다.
(a) 대흥국사: 철옹문 근처에 있던 자신의 사택에 세운 것으로 원명은 Bash Humra 즉 머리된 교회
(b) 운산사: 서진에 있는 수토산에 지은 것으로 원명은 Tash Humra 즉 반석교회
(c) 취명산사: 수토산위치, 원명은 Duta'ur Humra 즉 안쪽에 위치한 교회
(d) 사독안사: 단도현 개사에 세운 것, 원명은 Talui Humra 즉 거울교회
(e) 고안사: 등운문 밖 황산에 세운것, 원명은 염카야 훔라
(f) 감천사: 대흥국사 옆에 위치. 원명은 Mar Giwargis Humra 즉 마르 기와르기스교회
진강부에 교회와 기독교인 거주(인구의 1%)했고 주교가 초청받아왔다(불국에서 마르카시야마르시레문아피스코파)
기독교도는 진강외에도 양주, 천주, 장주등지에도 확인된다.
만주와 고려에서의 기독교: 12세기초 요금 교체기에 기독교가 만주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고 교려에 들어와 활동하던 네스토리우스 교도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다(1300년 정도행성의 평장사로 임명되어온 기와르기스(활리길사)).
2) 중앙아 몽골에서의 기독교
대칸 경쟁에서 패배한 차카타이는 중앙아를 누비며 유목민으로 산다.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동서양의 대상 교역로를 장악하나 1269년 두부분으로 나뉜다. 즉 동, 서 투르키스탄이다. 그리고 1266년 여섯째칸인 무바락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동투르키스탄은 오그타이계 카이두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샤머니즘을 고수하였으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를 보호해주었다.
서투루키스탄은 차카타이 후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은 점점 타쉬켄트, 보카라, 사마르칸트로 집중되면서 국가 행정은 무슬림 관리들에게 맡겼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이미 9세기부터 이슬람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큰 도시에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존재했다. 전쟁외의 모든 부분은 이슬람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1301년 카이두 사후 동투르키스탄의 많은 부분이 서투르키스탄에로 편입되었고 기독교는 점점 더 무슬림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된다.
1326년 도미니칸 선교사인 Mancasol의 도마가 방문하여 사마르칸드에 세례 요한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자 교황은 도마를 사마르칸드의 감독으로 임명한다. 1334년 통치자 부잔은 네스토리우스교에게 교회를 재건할 수 있게 했고 프란시스칸이 차카타이 칸국의 수도 알말릭에서 사역하게 했다. 차카타이 칸국의 마지막 칸인 칭쉬(1334-1338)은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살해 당한다. 칭쉬의 사후 알말락에서 기독교인들이 대량 학살된다(알말릭의 감독 리차드와 여섯명의 프란시스칸 순교). 마리뇰리의 방문으로 교회 하나를 세울수 있었고 세례를 행하고 설교하였다. 이시쿨 호수 부근 차카타이 칸국의 핵심부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1249년과 1345년 사이에 죽은 공동묘지 발굴).
2) 몽골 페르시아(일칸국)에서의 기독교
Hulegu(1256-1265): 기독교인 도쿠즈 카툰(토오릴의 손녀로 톨루이의 부인이었다가 톨루이사후 훌라구에게 인계됨)을 아내로 맞이한다. 도쿠즈 카툰은 서방원정시 훌레구를 동행한다. 압바스조를 공격할 때 몽골군의 첨병대 지휘관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며 서방으로 이동시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지방의 기독교를 믿는 종족들이 대거 합류. 1258년 바그다드를 멸망시킬때 교회로 피난한 기독교인은 보호되었다. 새로운 콘스탄틴으로 부상된다. 1259년 기독교 장군이 이끄는 후레구의 군대는 시리아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십자군에 의해 개척된 지중해 해안의 기독교 통치자와 연합으로 무슬림 이집트를 점령하려고 진군한다. 그러나 이집트에 패배한다. 이유: 1. 1259년 대칸 몽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권 승계 문제로 후레구는 1만여명의 군사만 남기고 몽골로 철수, 2. 몽골왕실의 내분, 3. 십자군들의 배신(몽골보다 무슬림 이집트를 도움), 4. 살라딘 사후 이집트는 노예전사들이 주축이 세운 터키왕조인 마멜룩조에 의해 전문적으로 준비된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시리아에서 떠나 유프라테스로 돌아갔다. 쿠빌라이의 대권승계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훌라구는 수도를 Maragheh로 정하고 관대한 페르시아인 역사학자 Juvani를 바그다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후레구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감을 가졌으나 말년까지 세례받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기독교보다는 불교로 개종했을지도모르는 샤머니스트 절충주의자였다. 1265년에는 후레구와 기독교인 아내 도쿠즈와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Makika가 사망한다.
훌라구의 아들 Abaqa(1265-1282)은 이슬람으로 둘러싸인 국제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기독교국과 동맹을 맺기위해 비잔틴의 황제 Michael Paleologus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로마의 교황과 아라곤의 제임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별 외교적 성과는 없었다. 아바카의 부인 Kotai는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의 중요인물: 바르 헤브레우스(1226-1286) 역사학자이며 1264년 페르시아 야곱파 대주교로 임명된다. 야곱파 신도들에게 소망과 신뢰를 주었고 파괴된 야곱파 교회를 재건하였다. 몽골 왕정의 신뢰를 얻었으며 1284년 성직체제를 재편하면서 12명의 새주교를 서품하였다. 그는 네스토리안과 상호관계성을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교회일치운동).
http://www.newadvent.org/cathen/02294a.htm
http://syrcom.cua.edu/Hugoye/Vol2No2/HV2N2GLane.html
Ahmad Teguder(1282-1284) 기독교도인 Kutai 카툰과 훌레구사이에 태어났고 세례를 받고 니콜라스라는 영세명을 가졌다. 그러나 칸 취임식에서 자신의 이슬람 개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Ahmad라는 이슬람 이름을 얻었다. 기독교를 탄압. 분개한 장군들은 무슬림보다 아바카의 장남 Arghun의 주위에 집결하였고 Teguder는 처형되었다.
Arghun(1284-1291) 호라산의 태수요 아바카의 아들로서 불교도와 기독교의 지원으로 테구데르를 제거하고 칸이됨. 아르군의 부인 우룩 카툰은 케레이트족으로 도쿠즈 카툰의 질녀이자 기독교도였다. 또 다른 부인은 툭탄인데 아바카의 후실이었는데 기독교도였다. 1287년 교황과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 네스토리안 랍반 소마를 파견하였다. 1289년과 1290년에 무슬림 이집트에 대한 기독교 유럽과의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Arghun의 죽음과 1291년 예루살렘에 있던 십자군의 라틴 왕국의 최후 요새가 이집트인들에 의해 함락되면서 십자군 전쟁은 끝난다.
http://chass.colostate-pueblo.edu/history/seminar/sauma/saumaletter.htm
중요인물: 마르 야발라하 3세: 본명 Mark, 1245년 내몽골의 토잔에서 부제였던 바이엘의 네 아들중 막내로 출생, 웅구투(Ongut)족이다. 신심이 깊었고 종교적 수련을 위해 북경에서 은둔자로 유명한 랍반 소마을 찾아가서 수도사된다.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여 순례하다가 1280년 35살에 Cathay 와 Ong의 대주교로 임명된다. 1281년에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로 임명된다. 몽골제국의 터키적 요소와 몽골적 요소를 결합하였고 페르시아, 중국, 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모든 요소를 결합하여 전아시아의 총대주교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랍반 소마: 북경에 살던 순회사제 위구르족 시반과 아내인 케암타사에에서 태어났다. 늦게까지 자식이 없어서 오랜 기도와 금식 끝에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이름도 Bar Sawma 즉 금식의 아들이다. 어려서 신심이 깊었고 북경의 한 교회의 집사로 있었다. 20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은둔자되기로 결심하여 3년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다. 북경의 대주교 마르 기와르기스에게서 체발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7년간 수행하다 산중의 동굴에 들어가 은거한다. 마르코스를 제자로 받고 그의 제안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한다.
1287년 로마로 파송된 몽골 외교관이며 감독 Gaykhatu(1291-1295): 아르군의 동생, 친기독교적 입장을 유지, 바이두에 의해 살해당함.
Baydu(1295) 훌레구의 손자, 마지막 기독교도 칸.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임을 공헌하고 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다녔지만 무슬림이 무서워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말했다. 바이두가 정권의 중요한 자리를 기독교인에게 주자 불만을 품은 무슬림은 호라산에 세력을 둔 아르군의 아들 가잔을 설득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케 하며 반란을 일으켜 바이두를 처형한다.
Mahmud Ghazan(1295-1304) 불교도였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무슬림의 지지를 받아 바이두를 몰아내고 칸이됨. 이슬람이 다시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가 된다. 일등공신 나우르즈는 모든 교회와 불교사원과 시나고그를 파괴하고 사제들을 능욕하고 공납과 세금을 바치게 한다.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는 감금당하고 고문당한다. 가잔은 일 칸이 아니라 이슬람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대칸과 독립된 위치에 있음을 나타낸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를 핍박하고 1297년에는 아르빌에서 대학살을 감행한다. 그 외 바그다드, 하마단, 타브리즈, 마라게에서도 교회가 파괴되었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박해와 무질서로 가잔은 기독교도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Oljeitu, Muhammad Khudabanda (1304-1316): 가잔의 동생, 어머니는 케레이트의 공주 우룩 카툰, 어려서 세례도 받고 니콜라스라는 세례명도 받았으나 성장해서는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기독교에 대해 냉담, 마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1307년 기독교국 그루지아의 왕과 백성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명령하고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을 받았다. 1310년에 아르빌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대학살당함, 기독교도를 거의 보호해주지 못한다.
아부 사이드(1316-35): 마지막 군주. Oljeitu의 아들, 12살에 일칸이 된다. 기독교도를 보호할 여력없었다. 분열의 늪에 빠지고 5개의 속국으로 갈라졌다.
1317년 총대주교 야발라하는 사망하고 14세기 말 기독교는 쇠락하였다.
c. 인도의 기독교
6세기 이전에는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총대주교의 권위와 시리아어, 네스토리안 신학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7세기에 페르시아 교회의 대주교구로 승격되면서 구조적인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7-8세기에 인도의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10세기에 정치적으로 일종의 독립적인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2. 기독교의 쇠퇴(13세기 전성기, 14세기 쇠퇴기, 16세기 소멸기)
동아시아에서 1294년 쿠빌라이의 죽음, 서아시아에서 1295년 일칸 가잔의 이슬람에로의 개종은 아시아 기독교의 쇠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으로 네스토리우스교의 공동체 파괴(이시클 호반 부군의 공동묘지와 600여개의 비석은 1337-9년의 흑사병에 대한 증거),
14세기 말 광신적 무슬림인 티무르의 30년에 걸친 정복전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아의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와 동서간의 교역단절. 티무르는 냉혈적인 잔인함과 정치적 계산하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힌두교도들을 학살하였다.
1368년 원의 멸망후 명대의 기독교는 명대 중반까지 존재했으나 16세기 중반에는 거의 사라진다(기독교인은 무슬림이나 유대인인이나 불교도로 흡수되고 교회는 불교사원으로 바뀐다).
몽골족에서는 1578년 알탄 칸이 티베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몽골인들에게 개종을 강권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잔존했다. 서아시에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과 학살로 신자들은 우르미아 호수와 반 호수 사이에 있는 히카리 산지로 피신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총주교 선출방식이 특정 가문에서 세습되는 형태로 바뀐다. 총대주교는 독신이므로 숙질계승이 이뤄지고 이로 인한 암투로 교단은 분열된다: 신파(교황청과의 연맹 추진)와 구파(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로 분열된다. 구파가 카톨릭으로 선회하자 신파는 반카톨릭으로 선회한다. 1843년 쿠르즈족과의 충돌로 10만 신도가운데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 대전중 쿠르드족과 터키정부의 탄압으로 4만 신도들이 히카리 산지를 떠나 이라크 북부의 모술 평원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독립국을 세우려는 희망으로 연합국에 협조하며 터키와 싸웠다. 그러나 전후에도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 흩어져 살았다. 이라크 독립후 이라크의 지배를 거부하고 시리아로 들어가려던 신도들은 입국을 거부당하고 귀환도중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즈족, 베두인들이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한다. 신파에 속하는 총주교 마르 시몬은 1940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동방 앗시리아 교회’로 알려진다. 이라크 영내에 남아있던 신자들은 바그다드에 근거를 둔 구파 총주교의 감독을 받게 된다.
15세기 말 페르시아 총대주교가 외곽으로 피하여가자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교회와의 관련성이 소멸된다. 교회는 쇠퇴하여가며 로마카톨릭의 거대한 선교물결과 조우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a. 서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페르시아교회의 신학은 종교 통합적이기보다 배타적이었다. 그리고 시리아 종교와 비잔틴 종교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은 있었으나 로마적이라거나 외래적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교회는 늘 자신들을 로마나 비잔틴교회와 신중하게 분리해왔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네스토리안은 페르시아적으로 보였고 무슬림보다 더 많은 신용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력이 사회의 지도력보다 열등한 것과 정부의 의존은 심각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일 칸국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기독교의 보호장치가 사라져버리자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는 몰락을 경험한다(이슬람의 도전).
b. 동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중국적 관습과 이념에 물들어서 종교적 활력의 상실(한화), 카톨릭 선교로 인한 내부 균열(네스토리우스교나 카톨릭이나 선교의 대상은 한인이 아니라 외지인이었다. 그리하여 카톨릭이 선교한 주된 지역은 네스토리우스교의 근거지였던 북경과 천주, 양주, 항주 등이었다).
3. 아시아교회의 특징과 쇠퇴원인
a. 특징
1) 철저한 훈련-수도원적 교육
2) 복음전도의 열정
3) 적응
b. 쇠퇴원인: 장벽을 돌파하지 못했고 협곡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타자성과 외래성이 기독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 교회의 고립: 초기 아시아교회(에뎃사를 중심한 시리아시대 250년 이전)는 주변의 교회의 분리되고, 고대 아시아교회(니시비스와 셀루키아 테시폰을 중심한 페르시아시대 661이전)에는 기독교 서방뿐아니라 시리아교회와 분리되고, 중세 아시아교회(바그다드를 중심한 아랍시대 14세기말이전)는 교구의 지리적 광대함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교구간의 분리가 심화되고, 근대 아시아교회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와 분리되어 하나의 소외된 종파로 여겨졌다.
2)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의 역사를 변화시킬수 있는 충분한 숫자의 신자를 가지지 못했다. 1000년까지 서방의 기독교인수는 3천 500만명 정도이며 동방의 기독교인수는 1천 200만명 정도였다. 숫적으로 소수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박해: 4세기의 가혹한 페르시아의 박해, 일종의 소수종족으로 간주되어 끊임없는 받는 사회적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이익.
4) 권력자에의 의존: 아시아 교회는 서방의 콘스탄틴같은 인물이 없었다. 제국의 호의를 일시적으로 받은적은 있으나 국가종교로 등장하지 못했다. 기독교의 운명은 비기독교인 통치자의 관대함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초기 몽골시대외에는 권력자들이 비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이었다. 아시아 제국은 소수 종족을 핍박하기보다 통제하면서 허약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소외로 인해 교회는 확장보다 생존에 초점을 두게 된다. 기독교 게토.
5) 종교적 내향성: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외래적이었으나 타자성을 강하게 가졌다.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은 시리아인으로 불렸고, 남인도에서는 하나의 카스트와 같은 공동체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도 기독교인은 교회예배용 언어가 시리아어여서 시리아인으로 불렸다. 아시아교회는 종족적 입장에서 소외된 것이 아니라 종교문화적인 입장에서 소외되었다. 당나라에서 기독교는 시리아교나 페르시아교로 불렸다. 교인은 현지인이 주였으나 지도자는 페르시아인이었다. 몽골에서도 기독교는 페르시아교나 어떤 부족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우주성을 가지고 현지에 뿌리내리고 토착화가 되지 못했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구에 가서 서구의 종교가 되었던 것과 반대로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문화적 패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기독교의 타자성과 외래성이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근대 제국주의적 서구선교의 결과로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6) 아시아 종교와의 조우: 서방에는 이방종교가 사라져갔으나 아시아에는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다. 이들은 강력한 국가종교가 되어 기독교로의 개종을 반대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거대한 사회적, 지적, 종교적 장벽을 구축하였다.
7) 교회의 분열: 7세기의 니시비스 학교의 분열, 다투는 감독들, 확립되지 못한 성직자들의 삶과 체제는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진 권력자들의 개종을 막았다.
8) 신학적 미성숙-서방에는 기독교 신학이 철학의 도전으로 인해 성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도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기독교는 신학을 성숙시킬 여유와 도전을 가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