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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다양한 출처: 세실, 동*, 혜영)
1월 10일 강론은 맨 밑을 보세요.
(아래 두 사진은 세실)
(아래 사진 19개는 동*)
(아래 사진들은 혜영)
에밀리 그림
들꽃의 할망 인형
†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1월 10일 주님 공헌 후 금요일
문정현 김성환 이어돈 김선태 금악성당 대전 이주사목 모이세
주례 이어돈 신부님
강론 서경희 스테파노 부제님
안녕들 하십니까?
여기모인 우리 모두는 안녕들 못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강론을 준비하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몇 가지 그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지난 10월에 부제로 서품을 받아서
아직 서품대장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새 부제입니다.
강론은 8분엣 12분 사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신
교수신부님의 가르침을 아직 잊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 강정에서 드리는 미사강론은 길면 길수록 좋다는 그 말을
어딘 선가 들은바가 있다 보니 8분~12분을 넘어서는 강론을 준비해야하는
그 부담감이 망설였던 그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많은 선배신부님들 앞에서
특히나 이곳 강정마을의 최전선에서 매일의 변수들을 겪으며 활동 하시는
신부님들 앞에서 강론을 해야 하는 이 부담감은 정말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를 주례하시는 본당 신부님께서 하시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아침까지 강론 하겠다는 결정을 미루고 또 미루면서
이렇게 깨달을 수 있었던 제안에서 발견 되었던 가장 큰 부담감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선배신부님들 앞에서
강론을 해야 하는 그러한 부담감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가에서 활동하시는 모든 평화 지킴이들
신부님과 수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강정마을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지킴이분들께 들었던 죄송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죄송한 마음이 드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우리 모두가 들었듯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강론하기로 제 마음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 본당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신부님 많이 부담 되지만 제가 강론을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신부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스테파노는 해군기지에 어떻게 반대를 하냐고?” 그래서 제가
“반대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뭐 양심에 따라 하는 거니
잘 해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제게 심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12월 24일 용산 철거현장에서 성탄 전야미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미사에 참여하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살고 있었던 터라 많은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언론을 통해서만 쌍용 자동차의 참혹한 진압 현장과
불길이 치 솟는 용산 투쟁현장을 접하기만 하면서 생존을 위한
그리고 양심을 위한 또한 인간답게 살기위한 투쟁과 저항에 대해서
저는 그저 수수방관만 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너무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 저 스스로를
용서하겠다는 그러한 의미로 그 현장에 가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을 했었고 또한 언론을 통해서
볼 수 없었던 그 현장의 생생함에 다시 한 번 놀라며 왜? 이제야
오게 되었는지 저 스스로를 자책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서 실재로 처음 보게 된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태세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용서 해 보겠다고 그곳에 갔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두려움 때문에 사라졌고 그저 계속해서 두렵기만 했습니다.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매섭게 부는 그 찬바람은 더욱 춥게 느껴졌고 미사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곳에 계셨던 분들이 아마도 이곳에 계실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마 이런 빚진 마음에서 2010년 가을부터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저항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체 그저 시간을 내서 대한문으로
또 여의도로 두물머리로 또 명동을 찾아다니며
또 이런 마음으로 제게 전설적 인 문정현 신부님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 계신 몇 몇 분과도 안면을 트게 된 것이 그때부터입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쫒아 다니면서도 늘 제 마음 한편은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위한 보속의 의미미가 컸었고 그저 머릿수 하나
채워 보겠다는 심정이었을 뿐 그곳에서 과연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소리를 내어 연대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저는 깊이 있게 시간을 내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11년 여름 휴가차 제주도로 여행을 왔다가
강정마을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 한번 찾은 적이 있습니다.
마을에 접어들면서 이집 저집 꽂혀 있는 깃발과 현수막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을 것 같은 그러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구럼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망루에서
불편함을 마다않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텐트생활을 시작하는
활동가들의 텐트에서는 뭔가 알 수 없는 그러한 역동과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망루와 텐트를 지나서
구럼비에서 본 바다는 너무나 파랗고 아름다웠습니다.
또 제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 주었습니다.
구럼비에 맨발로 맨손으로 올라 구럼비를 밟으며 만지며
제 살로 느낄 수 있었던 그 구럼비는 너무나도 부드러웠습니다.
여느 돌덩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부드러움에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그러한
포근함 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럼비에서 마을로 나오는 길에 앞서 가는 어느 활동가의
가는 다리를 보았습니다.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모기에 물린 상처,
너무나 처참하게 보였습니다. 많이 가려울 텐데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붉은발 말똥게 한 마리 지나는 것을 보고는 마치 신을 본 것 마냥
쫒아가며 뛰었던 그분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내 강정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되면 생태변화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 할 것이라며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달음질치며 쫒아갔던 구 뒷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여기계신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들은
구럼비의 그 포근함을 다른 곳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어
이곳에 계씬 곳이 아닐 것입니다.
붉은발 말똥게를 쫓아 달음질치는 그 기쁨을 만끽 할 수 없어서
이곳으로 모여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 더 많은 자연 생명체들을 통해서
만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여기에 왜 모여 있는 것 입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구럼비의 파괴라는 것에 붉은발 말똥게의 멸종에
또한 강정마을의 분열을 봐서 좀더 포근한 생명과 일치된 평화를
지향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곳에 한분 두 분 모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은 힘겹고 지치는 삶일지라도 매일 매일 이곳에서
축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으십니다.’ 라는 그 나병환자의 청에 손을 내밀어
그에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고하시면서
그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2천 년 전 그 유다지방에서 나병 환자는 그 어느 집단에도
속 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보면 그렇게 까지 죄인취급을 받았던 그 사람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분께 다가갈 수 있었고 그분께 주님이라고
말을 걸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 할 정도의 자유는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때보다 발전되고 성장한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저 단지 구럼비의 포근함을 느껴보고 싶다고 한 것이
붉은발 말똥게의 귀여움을 보고 싶은 것뿐인데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생명을 보살피고 보존하며 함께 누리며
살고 싶다고 하는 것뿐인데 잡아가고 가두고 범법자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현실이 지금 이곳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며칠 전 박도현 수사님의 대한 기사를 보고서는
기쁨과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연관기사들의
제목을 보면서 강정마을의 문제에 대하여 그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장미 빛 같은 희망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의심이 좀 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법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수사님의 석방에 기뻐했었고 수감 중인 다른 분들도
곧 풀려날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현 정부가 어떤 정부인데 제가 잠시 착각을 하고
희망을 가졌었나 봅니다. 박수사님의 집행유예 판결이 나던 날
오전 미사 중에도 여기에서 늘 상 일어나는
그러한 몸싸움이 일어났을 것이고 제가 바보처럼 이러한 것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분명 누군가의 손목이 비틀어 졌을 것이고
또 누군가를 감금 아닌 감금을 지금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또한 누군가를 잡아낼 구실을 잡아보겠다고 카메라를 켜고
수많은 채증에 바빴을 텐데 말입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집행유예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저는 뭡니까?
정말 한심한 저를 봅니다. 그리고 너무나 한심한 이 정부를 보게 됩니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러한 꼼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또한 한심하게 놀아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모인 우리 형제자매여러분 지금 전국 곳곳에서
시국미사와 그러한 선언들이 이어지며 지속적으로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그러한 시국선언이 줄을 잊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국선언문의 주된 내용은 현 정부는 이런 꼼수를 통해서
국민들을 더 이상 우습게 우롱하지 말고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그 헌법 1조의 정신에 따라
현 정부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것에 대한 촉구입니다.
이러한 촉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을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는 요한 1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그 생명을 이미 빼앗겨 버린 것에 대한
또한 짓 밟혀 버린 것에 대한 불평과 주장이 아니라
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자 하는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
즉 양심에서 비롯된 외침이며 선언입니다.
여기계신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 아래 강정천에 흐르는 물과 여러분들의 수고의
피와 땀으로 늘 이곳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또한 여러분들의 매일의 숙제는 맑고 푸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정천의 물과 여러분들의 수고의 피와 땀에 함께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고 그 성령은 오늘 독서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따른 양심의 소리와 외침
바로 성령 즉 진리에 의한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냅니다.
그래서 진리를 간직하여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구럼비의 포근함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찾도록 합시다.
붉은발 말똥게의 짚게 발을 간질이고 괴롭힐 수 있는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우리 모두 함께 찾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