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시집____
01번째 ‘디카시집’, 인상적으로 기록될 만한 작은 사건
- 김왕노 디카시집, 『게릴라』
박완호
시는, 크고 작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때로는 과격하게 변신해 가며 적응해 왔다. 최근 우리 시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의 다양한 변화 양상 가운데 소위 ‘디카詩’라고 불리는 양식의 유행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으로 이해된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는 지점에서 이상옥 시인을 비롯해서 몇몇 발 빠른 시인들에 의해 시작된 ‘디카詩’ 운동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5~6행 안팎의 짧은 시가 결합된 시 양식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문화 환경의 변화에 어울리는 시적 변신을 추구해 왔다. ‘디카詩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 자신을 포함한 상당수의 시인들은 그것이 지닌 시적 정체성에 반신반의하며 어느 정도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녔던 게 사실이다. 사오 년쯤 전, 경남 고성에서 열린 ‘디카詩’ 축제에 초대를 받아 참가하면서 그날 찍은 바닷가의 공룡발자국 사진에다 「네가 다녀간 흔적」이라는 제목을 가진 짧은 시를 쓴 것이 내가 겪은 최초의 ‘디카詩’ 체험이었는데, 딱 한 번의 경험이었지만 그 동안 ‘디카詩’에 대해 내가 지니고 있던 편견을 씻어내는 기회로 삼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2004년 무렵, 이상옥 시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김충규 시인이 당시에 운영하던 출판사인 ‘문학의 전당’에서 시와 사진을 결합한 『고성가도』(문학의 전당)라는 시집을 내면서 ‘디카詩’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는데, 그때 시작된 ‘디카詩’ 운동은 이번에 김왕노 시인의 디카시집 『게릴라』의 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1992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펴낸 여러 권의 시집을 통해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남성적인 어조를 바탕으로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울림을 지닌 시세계를 꾸준히 선보여온 김왕노 시인의 신작 시집인 『게릴라』는 계간 『디카詩』가 의욕적으로 발간한 디카시선 시리즈의 첫 번째 시집이라는 역사적 성격과 함께 시인 특유의 빼어난 시적 사유를 바탕으로 ‘디카詩’가 지닌 시적 정체성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는, 뜻깊고도 인상적인 시집이라고 할 만하다.
『게릴라』에 실린 시들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삶과 세계의 본질을 발견해내는 시가 지닌 중요한 본질을 간과하지 않는 미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고삐처럼 넥타이로 목을 묶고서
소처럼 일하러 가야 될 곳이 없다.
Tying the neck with a necktie like a rein
I should go to work like a cattle, but there is no place.
- 「백수 An Unemployed Man」 전문
넥타이 하나가 벽에 걸려 있는, 흔하디흔한 일상의 한 장면 속에서 시인은 “일하러 갈 곳이 없는” 현대 사회의 백수가 처한 현실을 예리하게 간파해 낸다. ‘넥타이’를 ‘고삐’처럼 목에 묶고서 ‘소’처럼 일하며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현실이란 또 얼마나 아프고 불행한 것인가? 김왕노 시인은 2행밖에 안 되는 짧은 표현 속에 그러한 사유를 담아내는 능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준다. 또한 석양 무렵 공중에 떠 있는 크레인을 담은 사진과 “종일 우리가 들어 올린 것은 허무뿐이었다.”라는 한 문장이 결합된 「저물녘의 독백」이나 “갈 수 없는 나라일수록 저리 불빛이 찬란하다.”(「불구의 날」 전문) 같은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적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생의 본질을 한 마디로 집약해 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피를 나눈 죄로 여기 꼼짝없이 다 모였다.
All came here without exception because they committed the sin of blood sharing.
- 「10월 17일 어머니 임종 Attending Mother’s Funeral on October 17」 전문
언어만으로 표현된 시와는 달리, 거기에 시적 대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이 결합되었을 때, 독자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고스란히 마주치게 된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어떤 순간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김왕노 시인은 돌아가신 모친을 모신 영안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그대로 시 속에 담아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을 감춤 없이 까발리는 놀라운 면을 보여준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가족의 얼굴과 결합한 “피를 나눈 죄로 여기 꼼짝없이 다 모였다.”라는 짧은 문장은 디카詩가 지닌 ‘자기 폭로’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앞의 시 말고도 아들의 사진을 그대로 공개한 「힘세다. 스마트 폰」 같은 작품을 통해 김왕노 시인은 자기 삶의 영역과 그 속에 존재하는 존재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한 점은 그가 지닌 특유의 가족주의적 사고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우리 이렇게 뭉쳐 산다. 갯내에 취해/ 서로에 취해 우레로 태풍으로도/ 끊어놓을 수 없는 길고 긴 혈육으로”(「만수산 드렁 칡이 아니더라도」 전문)이나, “얼굴에 눈썹과 입과 코를 그리지 않아도 안다./ 본관을 아버지 어머니 성함을 묻지 않아도 안다./ 서로의 목덜미를 핥는 늑대 같은 형제라는 것을”(「형제들」 전문)처럼 가족주의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여러 작품을 통해 혈육에 대해 지니고 있는 남다르면서도 끈끈한 유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로드 킬한 너를 본다. 죽자 한 톨 모이를 쫓던
길 위의 삶도 뼈를 비우고 날던 운명도 접었다.
푸르던 하늘도 재단해 잿빛 수의로 입었다.
잘 가라, 잔혹한 인간의 나라를 떠나 새의 나라로
I see you road-killed. On dying, you folded the life of pecking on / One grain on the road, and the fate of flying with empty bones. / You are in the grey shroud cut out from the blue sky. / Farewell into the birds’ world away from the cruel human country.
- 「구암리에서의 조문 A Condolatory Call at Guam-ri」 전문
앞의 시처럼 『게릴라』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때때로 마주치게 되는 비극적인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작품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로드 킬한 새의 모습과 같은 비극적인 장면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는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로드 킬이 도사린 위험한 식사”(「길 위의 식사」 부분)를 즐기는 새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생의 비극적 본질을 간파해내는 지점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나도 한 때 네게 번져 재가 되는 들불이고 싶었다.
I also once felt like being a wildfire that ran to you and lay in ashes.
- 「구암리의 저녁 무렵 At the Dusk in Guam-ri」 전문
사랑과 그리움은 김왕노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은 『게릴라』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그러한 주제 의식이 이전의 시집을 통해 그가 보여주었던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기 이전의 언어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극히 간결해진 언어 표현’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의 변화는 사진이 지닌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살려내는 동시에 시의 언어가 지닌 예술적 성격을 살려내려는, ‘디카詩’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오늘 밤 석등에 불 밝히면 오라
전생에 두고 온 사랑 하나야
죽어서 두고 온 내 뼈로
궤나를 만들어 종일 분다는 사랑아
Please come when the stone lamp is lighted, / My only love I left in my previous life. / With the bones I left at death, my love is said to have / Made the Gwena and blown it all day.
-「오늘 밤, 내 사랑아 My Love, Tonight」 전문
‘디카詩’가 우리에게 언제까지 유용한 것으로 존재할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남다른 가치와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디카詩’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시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써, 시를 우리의 삶 속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이 ‘詩’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한, ‘디카詩’를 단지 사진에 붙어 있는 짤막한 글 정도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적 자세를 바탕으로 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 ‘디카詩’를 말 그대로 ‘詩’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일 것이다. ‘디카시집’ 시리즈의 첫 번째 시집인 김왕노 시인의 『게릴라』는 그 길에 과감하게 첫발을 내딛은, 인상적으로 기록될 하나의 작은 사건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박완호/ 1965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내 안의 흔들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아내의 문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너무 많은 당신』이 있고김춘수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