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 검찰 수사보고서 전문을 아래 1편에 이어 계속 연재합니다. 본문 중 소제목 번호는 1편 부터 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2편, 1980년 5월 19일 광주상황
9. 1980. 5. 19 - 11공수여단의 배치 및 시위 상황 08시 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아래와 같이 지시했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시키고 있으니 전단 공중살포 등 대책을 강구하여 선무할 것. 09시 30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요청했다.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 요소 요소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상가는 대부분 철시 상태에 들어갔다. 관공서나 기업체, 초중고교에서도 정상 업무나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동고·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는「공수부대 철수」와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하여 교내 시위를 벌였다. 금남로는 교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전남도청 앞에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거점에 배치되었던 11공수여단 61대대는 조선대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09시경부터 다시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 예상지역을 선별 점령하여 도로에 열을 지어 늘어서는 방법으로 시위대의 집결을 차단했다. 10시경 학생 등 시위대 200여 명이 기습적으로 충장로 파출소를 포위하고 경계근무중인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 3중대의 1개 지구 병력에 화염병과 돌을 던졌다. 10시 30분경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0여명이, 10시 40분경 충장로 일대에 시위대 2000여 명이 모여 화염병과 돌·보도블록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0. 1980. 5. 19 - 진압봉으로 가격, 옷 벗겨 연행 금남로 사거리·광주은행 본점 및 광주관광호텔 앞·충장로 1가·충금 지하상가 등지에서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쫓아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의 다방·여관·민간 등을 수색하고, 검거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차고, 도망을 막고 시민과 시위대를 구별한다는 이유로 옷을 벗겨 연행했다. 11시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대 3000여 명을 해산시키면서 200여 명을 체포했다. 11시 10분경 관광호텔 앞에서 돌과 각목으로 군경과 대치하던 시위대 300여 명을 해산하면서 107명을 검거하여 광주 동부경찰서 및 서부경찰서로 연행, 인계했다. 12시경 전남도청 주변에서 시위중이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로 들어갔다. 공수부대원들은 직원이 내린 셔터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진압봉으로 가격하면서 학생들과 신용협동조합 직원들까지 끌어내 도로에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건너편 무등고시 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고 고함을 치자 공수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격하고 밖으로 끌고 나와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14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도지사·교육감·검사장·광주시장·중앙정보부 분실장·지방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지역기관장들은 "군의 진압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하였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과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가혹한 진압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11. 1980. 5. 19 - 불붙은 기름통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폭발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철수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다시 시위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3시 30분경 시민·학생 등 시위대 4000~5000명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일부 시위대는 부근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 있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다. 대로변의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들고 돈을 던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15시 27분경 문화방송국(MBC) 앞에 집결한 시위대 3000여 명은 광주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의 태도에 격분,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 문화방송 사장이 직영(直營)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자제품점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다. 16시 15분경 장동 전신전화국 앞 사거리에 1500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였다가 공수부대의 진압에 밀려 분산하였다가 공수부대의 진압에 밀려 분산되었다. 16시 40분경 광주터미널 앞에서 시민·학생 1000여 명이 합세하여 가드레일과 공중전화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다. 광주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의 시위 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되었다.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공수부대원 300여 명이 가택 수색을 하면서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12. 1980. 5. 19 - 최초의 발포는 5월 19일 17시경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 제보를 받고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길 건너편에 이르렀다. 그 때 시위대의 강력한 포위 공격과 최루탄 연기로 인해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감각을 잃고 보도 턱을 들이받고 정지했다. 시위대 수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 속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M16 소총으로 위협 사격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김영찬(19세·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상을 입었다. 18시경 광주공원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여 「전두환 타도」 구호를 외치고 시위하다 해산했다. 18시 30분경 공원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을 입힌 채 기합을 주었다. 19시 30분경 공용터미널에 시위대 1000여 명이 공수부대와 대치하다가 해산했다. 13. 1980. 5. 19 - 육군본부의 공수여단 추가 투입 결정 육군본부는 1개 공수여단을 광주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한 다음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건의에 따라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18시 2군사령부에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추가 작전통제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23시08분 3공수여단에 광주 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23시 31사단 기밀실에서 정웅 31사단장은 예비군 훈련단장·최웅 11공수여단장·경찰국장·31사단 96연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지휘관회의를 개최했다. 5월 20일 오전에 투입되는 3공수여단은 전남대를 기지로 하여 전남도청 동쪽을 분원하여 작전을 수행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5월 19일 23시 40분 2군사령부는 '도시 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 형태에 대비' '대대 단위 기동타격대 보유' '조기(早基)에 분할 타격·체포' '소요군중의 도피 방지책 강구' '과감한 타격'을 내용으로 하는 군 충정작전지침 추가 지시와 '계엄군의 이상적 행동 강구' '이적행위자 단호 조치' '선량한 학생 및 시민 보호' 등을 내용으로 하는 2군사령관 훈시문을 시달했다. 이날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김안부(남·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하였고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 최승기(남·20세·학생), 김인윤(남·21세), 이인선(남·27세), 최미자(여·19세) 외 1명은 자상을 입었다. 14. - 보안사 조치 상황 5월 19일 보안사는 광주지구 보안부대의 상황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적에 따라 보안사 기획조정처장 최세창 준장을 광주에 파견했다. 16시경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한 최세창 준장은 이재우 광주지구 보안부대장의 건의를 받고 보안사에 연행자 조사요원과 예산의 지원을 요청했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1980년 5월 광주 1편, 5월 18일 상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