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4) 사람을 살리는 R&D
한국이 ‘살아갈 만한’ 사회가 되려면
몇 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국가 R&D’(국가 차원의 연구개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R&D 참여자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결과 지금까지 국가 R&D의 경험은 한마디로 ‘산화(散華,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R&D’라는 말로 정리되었습니다.
수주기관에서는 형식적 성과를 만들기 위해,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위해, 그리고 기업은 손쉽게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의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R&D를 하고 있었습니다.
R&D를 발주하는 공공기관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이미 했던 연구를 다시 하는 일도 있었고, 연구자나 기업이 기술개발을 하더라도 공공에서 후속 현실화 작업을 하지 않아 사장(死藏)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국가 R&D의 표면적인 성공률은 높지만, 기획 단계에서부터 낮은 목표치를 잡고 이를 초과 달성하거나, 법적·제도적 측면(인허가, 시장진입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류상으로만 실현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예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가 R&D에 비효율성이 있다고 하여 갑작스럽게 연구비를 삭감하고 해외연구자와 협력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것은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상 연구용역은 발주처가 결과물을 소유하지만, R&D는 개발자가 결과물을 소유하게 됩니다.
지금 같은 허술한 관리시스템으로 외국 연구진(기업)과 R&D를 추진할 경우, 한국은 논문 몇 편만 얻고실제 R&D로 인한 과실(果實)은 외국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국가 R&D가 난맥상((亂脈相)을 보인 이유는 국가가 진행한 R&D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측면이 있고, 관계부처 간 연구 정보가 공유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까지 연구 결과를 총망라한 빅데이터 플랫폼을 제대로 구축하고 앞으로 꼭 해야 할 R&D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국가 R&D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KPI(핵심성과지표)를 합리적으로 설정하고, 공공에서는 이를 엄격히 관리하면서 동시에 연구자들의 상황에 맞는 유연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평가는 논문실적이나 계량화된 실적보다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고 실제 현장과 소비자인 국민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으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공공은 꽃만 화려하게 피고 곧 시드는 R&D가 아니라 열매를 맺고 그 과실을 국민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마지막 현실화 단계(개발된 기술의 유통)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중요하게 발견한 것 한 가지는, 한국의 R&D는 R&D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R&D를 추진하는 단계는 물론 모든 과정에서 철학과 윤리적 검토(개발되는 기술이 인간과 자연에 미칠 영향)가 함께 진행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심각한 자살 문제에 대해서도 모든 사회적 영역을 포함한 근본적인 R&D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자살 연구는 표면적인 자살 원인을 찾거나 유가족을 통한 자살 원인 추정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국의 사회적 기질을 자세히 분석하고 사람들이 살맛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요인들을 찾고, 이를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는 기술이 접목된 그런 R&D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3일, 황순찬 베드로 교수(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