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죠? 세상 어떤 일이든 어려운 점은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어렵다고 타협하고 양보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린이집 하나 없는 정당에서 무슨 보육정책을 논합니까? 어린이집은 반드시 개원합니다. 차질없이 준비하세요”라고 실무자에게 결론을 내렸다.
■전문■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현관 밖에 내 그림자만 비춰도 “왕이모 왔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던 사랑스런 조카들이 웬일인지 조용했다. 내가 다가가도 쭈뼛쭈뼛 뒷걸음질 치고, 당장 달려와 안기며 뽀뽀세례를 퍼붓던 경원이마저 저만치 떨어져서 나를 쳐다만 봤다.
“빰에 붙인 반창고에 겁을 먹은 걸까? 전과 같이 활짝 웃지 못하는 내 표정이 어색한가?”
나는 아이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다들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오랜만에 보는 왕이모한테 뽀뽀도 안 해줄거야?”
구석에 서 있던 단이가 반창고를 붙인 내 빰의 상처 부위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왕이모, 이제 안 아퍼?”
‘아, 그랬구나.’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들이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응, 이제 이모 다 나았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왔지. 이제 괜찮아.”
“진짜?”
갑자기 조용하던 꼬맹이들이 평소와 같이 우르르 내 품에 안겼다. 소리도 지르고, 뽀뽀도 하고, 장난도 걸고, 같이 새로 배운 율동을 하자며 손을 끌었다. 언제 쭈뼛거렸냐는 듯이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노래를 부른다.
“대표님 습격당하시는 장면을 애들이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보고 와서는 한참 울었어요. 누가 우리 왕이모 아프게 했냐면서요. 다 같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빨리 왕이모 건강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도 했어요. 대표님이 계속 아프다고 생각해서, 아마 그래서 선뜻 곁에 못 다가섰나 봐요.”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내 조카들··· 이모 걱정 많이 했구나.”
언론과의 인터뷰나 특강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식구도 없고 자녀도 없이 외롭지 않으세요?”
평소에는 “바빠서 외로울 틈도 없어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해왔지만, 내겐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 있다. 나를 ‘왕이모’라 부르는 일곱 명의 천사들과의 인연은 2004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밤늦게 퇴근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성 당직자의 전화통화를 들었다. 일이 많아 야근을 해야 하는데 어린이집에 두고 온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다급하게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평소 여성의 왕성한 사회 진출과 저출산 극복은 보육정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 통화 내용은 충격이었다.
여성 보육정책에 힘쓰겠다고 공약해온 정당이라면 앞장서서 직원들의 보육을 책임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보육정책은 구호뿐이지 않느냐는 볼멘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내 집이었구나’라는 생각에 착잡했다.
다음 날, 나는 당사 내 어린이집 설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그러자 “투자 대비 효과가 미비하다”, “당사에 공간이 없다”, “돈이 없다”, “직원들이 애들을 안 데려올 것이다” 등의 반대 의견이 쏟아져나왔다. ‘그래, 같은 이유로 일반 기업에서도, 공공기관에서도 어린이집 없이 여성들에게 보육을 떠맡기고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죠? 세상 어떤 일이든 어려운 점은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어렵다고 타협하고 양보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린이집 하나 없는 정당에서 무슨 보육정책을 논합니까? 어린이집은 반드시 개원합니다. 차질없이 준비하세요”라고 실무자에게 결론을 내렸다.
2004년 7월 1일, 한나라당사 안에 있는 ‘신나는 어린이집’은 그렇게 해서 문을 열었다. 개원식 날은 나의 가족 일곱 명이 늘어난 첫날이었다. 17개월부터 만 두 살이 채 안 되는 일곱 아이들은 그야말로 천사였다. 어린이집이 낯설어 툭하면 울음을 터뜨렸지만, 우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그 후부터 나는 일정이 바쁠수록, 당 안팎의 사건사고가 많을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신나는 어린이집에 들렀다.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왕이모”라고 소리치며 품에 안기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근심 걱정이 다 날아가는 듯했다. 보좌진이 다음 일정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아무리 사인을 보내와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기는 힘들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의 보물도 늘었다. 왕이모를 그린 거라며 내민 부채, 새해 카드···.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소중한 보물들이다.
지금 어린이집에는 새 식구가 늘어 열한 명의 꼬마들이 생활한다. 그런데 당사가 여의도로 이사 갈 경우 “어린이 집은 함께 옮기기 힘들다”는 부정적인 말이 또 나오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보육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장해주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여성이 육아와 보육의 부담에서 해방된다면 그만큼 국가 경쟁력도 높아진다. 나는 당사에 어린이집을 설립한 뒤 여성 당직자들이 마음 놓고 근무하게 되면서 업무 효율이 훨씬 높아진 것을 직접 체험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맡긴 여성 당직자는 물론이고 어린이집을 만든 당의 경쟁력도 높아진 것이다.
나는 정책을 펴는 사람도, 정책의 혜택을 받는 사람도 피부에 닿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마음껏 사회생활을 하며 능력을 펼치고,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명랑하게 자라야 한다. 보육정책을 펴는 사람도, 혜택을 받는 사람도 모두 행복한 그런 정치를 하고 싶다.
첫댓글 이렇게 따뜻한 마음과 냉철하면서도
추진력있는 보배이신 대통령님 모습에
그리움이 밀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