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2015년 다해 사순 제3주일
복음: 루카 13,1-9
요즘 사순 특강이 많고 새 학기 강의들이 부담이 되어서 그런지 목이 뻣뻣해져 여러 가지로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작년 요맘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조금 유명세를 타면서 생긴 병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들이 더 많이 기대하게 되면 거기에 맞추기 위해 더 많은 부담을 가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저항합니다.
강사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김창옥 강사도 여러 부담감에 시달리고 결국 우울증까지 와서 강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갖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프랑스 수도원에 가서 두 달 정도 피정을 하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몇 년을 또 감사하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다시 우울증이 왔습니다. 이번엔 강사로서의 부담감을 줄이며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연기를 해보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만 하는 것보다는 그 부담이 분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지인을 통해 영화 ‘기술자들’에 처음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대사는 단 한 마디, 뒤에서 차가 툭 들이받으면 운전하다 뒤를 돌아보며 욕을 걸쭉하게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 한 마디가 너무 어색하여 NG가 무려 16번이나 나게 되었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감독에게 오히려 욕을 먹으면서 전에 어떤 영화배우가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강사님은 그 목소리 가지고는 영화 못 합니다.”
김창옥 강사는 누가 들어도 매우 멋진 목소리의 소유자입니다. 성악 전공자이고 ‘보이스(목소리)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 상처들을 치유해주며 자신의 본래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영화를 못 한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연기 수업을 더 받고는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 목소리는 자신의 본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귀에 좋게 들리도록 포장된 목소리였다는 것입니다. 본래 강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청중이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 특이한 내용이 없는 일상의 삶을 강의하기 때문에 웃기거나 목소리를 더 좋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강의와 차별을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장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으니 영화에서 나와야하는 조직깡패의 그 걸쭉한 욕이 강사의 목소리로 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웃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옷을 잘 입은 사람의 도도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 모델의 얼굴로 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그저 옷걸이 역할만 해야 하는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을 짓는다면 사람들은 옷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더 돋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이 교만이 우리를 경직되게 하고 긴장하게 하고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회개는 이런 자신을 죽이는 일인데 그렇기에 회개는 항상 겸손과 관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 특이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는 왜 심은 것일까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어떤 하인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하인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하인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나옵니다. 같은 비유지만 다른 복음에서는 모두 열 미나씩 맡겼다고 나옵니다. 만약 주인이 공평한 분이라면 왜 불공평하게 달란트를 맡기겠습니까? 이는 심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하느님은 공평한 분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덜 받았다고 느껴 그 능력을 주님을 위해 쓰지 않고 땅 속에 묻어놓는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포도밭의 무화과나무 한 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밭에 있으면 다 포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하다는 교만이 쌓여있으니 주님께서 그 나무를 온전히 열매 맺게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주님께서 도구로 쓰실 텐데 여전히 특별하다고 믿으니 결국 베어버리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자신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남이 곧 실로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태생소경의 눈을 진흙으로 만들어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란 뜻이 바로 이 참된 세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탑’이 있었습니다. 탑은 성의 망루를 의미하는데 항상 ‘교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바벨탑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특별하여 하느님과 맞먹을 정도가 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이란 뜻이 혼돈입니다. 아무튼 그 바벨탑이 무너져 예루살렘 시민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회개의 상징으로 사용하십니다. 열여덟은 성경에서 ‘열 + 여덟’이 합쳐준 숫자입니다. ‘10’은 보통 ‘계명’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법이고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8’은 부활, 혹은 새로 태어남을 뜻합니다. 여덟째 날(일, 월, 화, 수, ... 토, 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교만을 죽이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곧 회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해 그 피가 그들이 바치던 제물을 물들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제물은 본래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가 가장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과 같은 이사악을 바치는 것이 가장 좋은 봉헌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은 바치지 않고 형식적으로 남는 것이나 주님께 바치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봉헌이 아니라 그날 생활비까지 다 바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봉헌에는 우리 자신의 피가 섞여 있어야합니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마치 하느님께 적선이나 하듯이 꾸깃꾸깃한 돈을 봉헌함에 던져 넣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내가 바치는 제물에 내 피가 섞여있는지 항상 살펴야합니다. 그 봉헌을 함으로써도 내가 조금도 불편해지지 않는다면 이는 위선적인 회개 없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엘 고어는 미국 부통령까지 지냈다가 2000년 부시와의 대통령 선거에서 석연치 않은 몇 표의 차로 선거에서 떨어졌고 대법원에 항소했으나 패하여 그 결과에 승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정치인생이 끝장난 것입니다. 엘 고어는 어렸을 때 자신이 한 아이와 선생님과 있었던 일을 비유삼아 자신을 뽑아주지 않은 미국시민들에게 살짝 원망을 말을 던집니다. 즉, 지리시간이었고 선생님이 세계 전도를 폈는데 남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서로 합치면 하나가 될 것 같아 한 학생이 “본래 저 둘은 한 땅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물었는데,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땅이 어떻게 움직이냐고 그 학생을 몰아세웠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학생은 약물 중독자가 되어 폐인이 되었고, 그 선생님은 정계에 진출하여 알아주는 정치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살려야한다는 환경운동을 펼쳤던 자신은 떨어뜨리고 일자리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던 부시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절망적인 결과를 잘 받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던 환경운동을 끊임없이 이어갔으며 ‘불편한 질실’이라는 책과 영화를 통해 2007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내세웁니다. 어쩌면 주님의 뜻을 이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전혀 다른 꿈을 꾸고 계신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은 특별해야 한다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다르게 사용하려고 하십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려면 내가 힘을 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바람에 내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포도밭에 심겨진 다른 포도들과 똑같은 포도나무에 불과합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혼자만 특별하려고 하다가는 결국 잘려 버려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 때문에 특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특별하려고 하지 맙시다. 모든 계획도 꿈도 노력도 그분께 맡겨드립시다. 내가 특별해지면 그분은 나를 통해 어떤 열매도 맺게 할 수 없으십니다. 제주도의 한 게스트 하우스가 유난히 붐빈다고 합니다. 어떤 여자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자매는 평소에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을 하고 가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 목소리가 하도 힘이 없어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이렇듯 내가 평범해지면 그분은 나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힘을 빼야 그분이 나를 통해 노래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평범해 졌다는 증거는 바로 긴장하거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맡긴 평화로운 삶인 것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