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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33
물언아사(勿言我死)
[요약] (勿: 말 물. 言: 말씀 언. 我: 나 아. 死: 죽을 사)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을 상대가 알면 우리 편이 불리해지므로 그 사실을 숨길 때 쓴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전사할 때 한 말임.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등.
[내용]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순신(李舜臣)장군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학의 선구자인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 신도비명(神道碑銘)과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1572년(선조 5) 8월 그의 나이 28세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험당시 병법에 관한 문답(武經)을 하는 가운데 ‘황석공서(黃石公書)’를 논할 적에 시관(試官)이 묻기를,
“장양(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고 했는데, 과연 죽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이순신이 답하기를,
“한(漢)나라 혜제(惠帝) 6년에 유후(留侯) 장양이 죽었다는 내용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적혀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시관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무인(武人)이 능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다가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지금 함경도 삼수),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 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공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라 매번 재지(才智)가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 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 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공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어서 공을 맞이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세도가(勢道家)에 발을 붙이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중매쟁이를 쫓아 버렸다.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오므로,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내고 그 괴수를 쏘아 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의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 군관(軍官)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가두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은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고 죄를 인 채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음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됨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움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함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 중인 사천으로 달려감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함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음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감
*일본수군들은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함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함
*당항포 내만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음.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됨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함
*그는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함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의 적선을 격파함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림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음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공이 별도로 5백 석의 쌀을 모아 봉해 두자,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 것인가를 물으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신데, 만일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게 된다면, 배를 가지고 가서 임금을 모시고 와 나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 이것은 그때 임금이 드실 양식으로 쓸 것이다.” 하였는 바 생각의 원대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 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됨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됨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림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섬
남해(南海)의 적이 노량(露梁)에 와서 정박해 있는 자가 무수히 많았는데, 공이 도독 진린과 함께 밤 2경(更)에 출발하면서 하늘에 빌기를, “이 왜적들을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4경에 왜적을 만나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침에 이르러서 크게 깨뜨리고 적선 2백여 척을 불질렀다. 이어 남해(南海) 지경까지 추격하여 직접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하던 중에 날아드는 탄환에 맞았다. 좌우에서 공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공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숨지니, 향년(享年) 54세였다.
南海之賊來泊於露梁者無數。公與都督。二更。同發。祝曰。此讎若除。死亦無憾。忽有大星。隕於海中。見者驚異。四更。遇賊大戰。至朝大破之。焚二百餘艘。追至南海界。親犯失石而督戰。有飛丸中公。左右扶入帳中。公曰。戰方急。愼勿言我死。言訖而終。年五十四。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실록 1598. 11.27]
영구를 아산(牙山)으로 돌려 올 적에는 모든 백성들과 선비들이 울부짖으면서 제사를 올렸는데, 천 리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임금은 즉시 제관(祭官)을 보내어 조상(弔喪)하고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1등 공신에 이름을 올려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하였으며,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좌수영(左水營) 근처에 사당을 세워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하였으며, 호남 사람들은 수영의 동쪽 산마루에 비석을 세워 슬피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2월에 아산의 빙항(氷項) 선영이 있는 곳에 장사지냈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김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함
첫댓글 **
감사합니다. 늘 즐거운 시간되세요.
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을 상대가 알면 우리 편이 불리해지므로 그 사실을 숨길 때 쓴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전사할 때 한 말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충무공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어요
네에 읽을 수록 더욱 존경의 마음이 깊어집니다. 감사합니다.
남해에 가서 이글귀를 보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勿言我死)| " 눈물이 핑 돌았서요
감사합니다. 충신의 말 지금도 울립니다.
이 시간에 법정에 서있는 장군들은 아는지...
부꾸럼을 모르는.... 감사합니다.
가슴이 찡합니다.
그 시절에 나였다면 .
과연 나는 어찌했을까..
힘든 일이지요.. ~~*(*)*
감사합니다.
네에 귀감의 말씀이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