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조의 지식백과
이선희
울타리를 벗어나니 본능이 살아나네요
본래 소속이 야생이라
작은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가 있어요
머릿속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눈이 밝아 안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어요
빠르게 맹수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훔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판단하지요
날개는 펼 수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본 적은 없어요
자꾸 불어나는 몸집
퇴화된 아늑한 날개 속에 고개를 파묻고는 해요
자신을 숨기는 법도 알아야 하거든요
식성은 아무래도 잡식성이 유리하겠지요
초식과 육식 때로는 모래와 돌까지 삼켜요
삶이 다 초원은 아니라서
때때로 사막 같은 곳이라서
무리 속에서 태어나고
무리 생활을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날개가 역할을 못해서 다리로 나섰어요
이 다리 좀 보세요 달릴수록 강해져요
태생의 억척은 타고나지 않았어요
다행일까요?
새 중에서는 달리기 잘하는 가장 큰 새거든요
세링게티 국립공원에서 사진 한 장 보내요
자칼 매 하이에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멋지게 폼 좀 잡아봤어요
아 셀프 사진은 아니예요
----{애지}, 2024년 봄호 에서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크고 무거운 죄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원죄이고, 너무나도 오만방자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지옥이 만원’이라고 해도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자의 주체성을 빼앗고 말살하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체들의 주체성을 빼앗고 그 동물들을 가축화시키거나 인간화시켜왔던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을 가축화시킨다는 것은 그 동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기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고, 가축으로 길들일 수 없었던 동물들은 그 동물들의 야생성을 박탈하여 수많은 동물원에서 경제적 이익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사육을 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가축화시킨 동물보다도, 야생성을 박탈당한 동물보다도 더욱더 불행하고 비참한 생활에 빠진 동물들이 있으니, 그것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화시킨 동물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고양이나 개와 앵무새들마저도 자기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야생성을 버리고 인간화시켜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자유와 습성과 종족의 번식기능마저도 다 빼앗기고, 온갖 농담과 재롱과 웃음을 강요당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동물병원의 수의사는 반려동물의 생체실험과 수명연장을 담당하는 악마이고, 동물원의 조련사는 반려동물들의 마지막 야생성까지도 박탈하여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악마이며, 마지막으로 수많은 반려동물들의 짝인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반려동물들을 다양하게 분장시키고 오래 오래 끌고 다니며 고문치사시키거나 자기 자신의 죽음과 함께 순장당해 줄 것을 강요하는 악마의 역할을 담당한다. ‘반려동물’은 ‘인간만세 사업’이며, 그 어떤 말보다도 더욱더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도, 당신도 반려동물을 위해 살고, 반려동물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 전재산을 다 바치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천당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타조는 타조목 타조과에 속하는 새이며, 날지 못하는 새를 대표하는 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조의 수컷은 키가 2.5m에 달하지만, 절반은 목의 길이이고, 몸무게는 155kg이나 되며, 현존하는 새의 알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타조는 5마리에서 50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살고, 대개는 초식동물들의 무리 속에서 살지만 도마뱀과도 같은 동물성 먹이도 잡아먹는 잡식성 동물이고, 우리 인간들은 타조의 알과 고기와 깃털을 얻기 위해 사육하기도 한다.
이선희 시인의 [타조의 지식백과]는 세링게티 국립공원의 타조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 타조의 ‘주체성(야생성)의 회복’과 ‘홀로서기’를 기원하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본래 소속이 야생이라” “울타리를 벗어나면” “본능이 살아나고”, “머릿속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을” 더욱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작은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눈이 밝아 안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고, “빠르게 맹수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훔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판단”하게 된다. 타조는 생각하는 동물이 아닌 바라보는 동물인데,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보다 바라보는 것이 종의 보존과 생존경쟁의 장에서 더욱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타조는 눈으로 보고 눈으로 생각하며,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 보호와 모든 먹이활동을 눈으로 하게 된다. 날개는 펼 수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고, 퇴화된 날개 속에 고개를 숙여 머리를 파묻기도 한다. 식성은 아무래도 잡식성이고, 초식과 육식은 물론, 때로는 모래와 돌까지도 삼킨다. 무리 속에서 태어나고 무리 속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러나 세링케티 국립공원의 타조는 “혼자 있는 것”을 더욱더 좋아한다. “이 다리 좀 보세요, 달릴수록 강해져요.” 하지만, 그러나, 태생의 억척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은 야생의 터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다행일까요?/ 새 중에서는 달리기를 잘하는 가장 큰 새”라는 것은 세링게티 국립공원의 사육장과 울타리를 뚫고 가장 아름답고 멋진 타조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대자연과 우주를 자기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원으로 삼을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조의 눈은 ‘생각하는 머리’보다도 더 좋은 눈이고, 타조의 다리는 그 어떤 새의 날개보다도 더욱더 튼튼한 다리이고, ‘홀로서기’를 이룩하고 ‘고립무원의 삶’을 즐길 줄 아는 타조는 “자칼 매 하이에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영원한 황제의 삶’을 즐기고 있는 타조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