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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
로마서 10:5-15
‘나는 아버지입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신마비 장애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위대한 아버지 딕 호이트의 감동스토리를 담은 책입니다.
아들인 릭 호이트는 목에 탯줄이 감겨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는 바람에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의사들은 식물인간과 마찬가지인 아들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딕은 절대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아들을 위해 특수 컴퓨터 장치를 설치해주고 아버지와 아들은 기계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달리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휠체어를 끌고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마라톤 풀코스 64회, 보스턴 마라톤 26회 참석, 세계 철인 3종 경기 6차례, 단축 철인 3종 경기 206차례 완주 그리고 미국 대륙 6000km 횡단 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내게 됩니다.
책 본문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저는 할 수 없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들아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입니다.’ 의 책 표지는 휠체어를 탄 채 웃고 있는 48세의 아들을 69세의 아버지가 밀면서 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독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라는 타이틀로 이 부자의 감동스토리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라는 타이틀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스토리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전신마비 장애라고 하는 절망을 뛰어넘어 희망이라고 하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발걸음이 있고 그런 발걸음은 사회를 훈훈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듣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름답지 못하고 사회를 경악시키는 추악한 발걸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가롯 유다의 발걸음이 그 동산을 향해 급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를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향해가고 있던 가롯 유다의 발걸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마귀가 보낸 발걸음이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을 잡는데 공을 세우고 돈을 받기 위해 가롯 유다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보낸 발걸음은 범죄의 길이요, 타락의 길이요, 불행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를 향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이 달려가는 발걸음의 여정이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발걸음 속에는 자기만을 위한 발걸음이 있고, 남을 해롭게 하는 발걸음이 있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구원의 발걸음이 있는가 하면 멸망의 발걸음이 있고, 희망과 미래를 주는 발걸음이 있는 반면 절망과 낙심만을 주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범죄의 길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있고, 쾌락과 정욕의 길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발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향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입니다.
이 발걸음을 학자들은 성육신이라고도 하고, 도성인신 하셨다 고도 합니다만 사도바울은 이 발걸음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세상을 향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자기를 비우신 겸손의 발걸음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발걸음이었습니다.
이 발걸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모든 인류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측면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아직도 접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 중의 하나는 5절에 나와 있는 대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는 레위기 18장 5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이러한 바울의 설명대로 하나님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율법의 의 대신에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인 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 구원을 받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도 위험에 처할 때 자기 부인을 동생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는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제 서재를 정리하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가서 맨 위의 책장에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책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다리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까 밑에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더러움이 다 보였습니다.
책장 위의 먼지며, 창문틀에 끼어 있는 이물질 등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얼마나 더러울까?’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볼 때는 별로 발견되지 않고 다 깨끗한 것 같은데 높은 곳에서 우리의 구석구석을 다 보실 때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행함으로 즉 죄를 짓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새로운 의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새로운 의가 없으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가 있겠습니까?
이 구원의 진리를 주시기 위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러기에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발걸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은 이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발걸음입니다.
제가 삼성카드를 쓰고 있는데요, 이 카드를 쓰면서 생기는 포인트는 얼마의 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 소멸됩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몰라서 두 번이나 포인트가 소멸되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는지 한 번은 그쪽에서 전화가 와서 다짜고짜로 선물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소멸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덕분에 조그만 선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여러분, 우리가 알지 못하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알아야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모르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전파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구원의 진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듣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하나님으로 부를 수 없고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로운 의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셨지만 이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향하신 발걸음이 아름답지만 그것 못지않게 이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볼 때 초대교회이후 1780년대까지는 선교에 관한 한 교회가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787년 어느 날 영국의 한 젊은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 젊은이는 성경을 너무 좋아해서 성경을 계속 읽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이것이 너무나 당연히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시는 사실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은 이 청년이 어떤 모임에서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리랜드 박사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 앉게.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면 자네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가 있네. 그런 광신자 같은 소리를 하지 말게.”
그 청년은 그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청년은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저를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세계 지도를 만들어 그곳에 복음을 접하지 못한 나라들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에 동조하는 자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유명한 윌리암 케리입니다.
이 윌리암 케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의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배를 탔던 그 윌리암 케리의 발걸음보다 더 아름다운 발걸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전기를 보면 이런 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박사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나 제가 없이도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에 하나님은 당신이나 저를 통해서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복음 없이 주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포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2011년도 대각성전도집회를 선포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9월 10월 두 달 동안 기도하고 전도하여 10월 마지막 주일, 11월 첫째 주일에 전도 집회를 개최하여 어떻게든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려고 합니다.
전도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부족했다면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고 여러분의 발걸음이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은 지금 어디를 향해, 무엇을 향해, 누구를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간을 들여 전도하십시오. 물질을 드려 전도하십시오. 정성을 다해 전도하십시오. 믿음으로 전도하십시오.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이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쉰들러의 한 생명에 대한 애착, 한 생명을 구원하지 못한 아쉬움을 함께 느껴보면서 여러분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다시 한 번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쉰들러 리스트, 2008년 300만 성도 운동 자료집에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