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정필(1569~1625) 승혜솔향술첩 熊廷弼 承惠醇醪帖
출처:서령인사 소스:이페어케이
그림 번호: 959
평가 RMB: 80,000-120,000
거래가격RMB: 1,092,500(커미션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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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정필(1569~1625) 승혜솔향술첩
종이책 렌즈(편지 1쪽, 발 2쪽)
식문: 은혜를 베풀고 술과 술을 삼가 저장하여 대접한다.국경 경찰이 좀 느려지면, 늘 함께 기뻐한다.그 날 밤의 대저보를 찾아보다.답장합니다만, 어제 근공과 약속을 하고, 먼저 17일에 노부모님을 찾아뵙겠습니다.다행히 그 때가 왔다. 정필돈의 머리였다.좌충우돌.
발문:웅정필, 자는 백이 아니고 강하인.만력 25년 향시 제일, 내년 성진사관직을 수여하고, 병부 상서 겸 우부도 어사로 승진시켜, 상상방보를 하사하였다.검. 랴오둥을 거쳐 山海關에 머물고, 天啓初年에 이르러, 순무와 함께 독광하였다.영병왕은 화정이 맞지 않아 조정에서 우화정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정필은 그 뜻을 행하지 못하였다.광녕에는 병사가 사십만 명이 있는데, 정필은 문을 닫아걸고 일을 멈추었다.우둔한 병사가 오천 명이나 되는데, 경전의 약간의 허명만 있을 뿐이다.이 년 정월에 대병사를 모시고 서평으로 몰아 양교를 탈취하고 화정병이 먼저 달려갔다.중군 손자가 공을 얻은 자는, 화정을 복심으로 임명하였는데, 결국 잠복하여 화정을 생포하려 하였다.공로, 광녕 반장들을 거느리고 병사를 광녕으로 들어가 화정 200리, 경사 대진을 쫓았다.2월에 화정을 잡으면 파정필이 답사를 한다.4월, 정필과 화정이 동시에 논사하였다.5년 8월, 정필을 시에 홀로 버리고 구변으로 전하여 위충현에게 유죄로 인정되었다.어사량몽고리를 가리켜 정필이 군자금 17만 원을 훔쳤다고 한다.어사 유휘는 정필의 가문이 백만 위안이고, 의적이 좌군(佐軍)이며, 실충현(實忠賢)이 바로 교지엄추( 矫志严 追 。)하여 돈을 다 모을 수 없어 족속이 파괴되었다고 한다.장하지현 왕얼위안은 정필이 담비 모따기를 가지고 노는 것을 꾸짖었다.장남 조규규는 독살했고, 조규모는 억울하다고 했다.그 옥이 그 두 비복을 벗기고 사십을 타박하다.원근에 분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숭정 원년, 조칙으로 추장을 면한 가을, 공부의 주무 서얼일 송정필이 억울하게 말하기를, 정필이 함락되어 전수에 이르러 시체를 모셨고, 본산은 추장하였다고 한다.신하는 그 당시에 시험하여, 그 죄가 충분하지 못함을 깨닫고, 노동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졌다.광녕병 13만 명이 화정에 소속되어 있다.정필은 요병 5천 명을 지원하여 우둔에 주둔하였다.화정이 13만일 때 무너지고, 정필이 5천 명이 된 것과 달리 그 기세는 우뚝 서고, 정필의 죄가 안정되리라 믿었다.화정이 서부를 위한다면 정필운은 반드시 부족할 것이다.화정신 이영방은 안으로는 정필운이라 믿음이 부족할 것이다.노력하지 않는 일, 기이한 일, 정필의 죄는 없다.또한 각 읍의 절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원래 파병했던 말의 흥행을 취소하였다.헛되이 이름만 들어도 정필은 죄가 편안하다.세 갈래 길이 동시에 함락되자 정필 사장은 1년도 못 되어 호피역역에 들어가서는 적을 제압하고 요양성 아래 열책사포를 뚫어 금탕을 만들었다.명령이 행해진 바와 같이 어찌 유구관외수인하겠는가.지금 당장 죽이는 것은 논하지 않고, 그 소명이면 반드시 죽으면 그만이다.그 재주가 한 때 덮여 있었는데, 그 기세가 맹렬하여, 변론이 분분하여 뭇사람의 노여움을 샀고, 살기를 같이 하였다.정필이 답사되었을 때, 날이 갈수록 빛이 없어져 그의 억울함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소장의 말이 더욱 간절하여, 그 아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조칙하였다.5년, 화정이 시작되고 주검이 되다.정필은 몸길이가 칠 척이고 담력이 있어 병사를 잘 알고 좌우로 쏘았다.요요를 준수한 이래로, 기율을 이길 수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욕설을 잘 하며, 남보다 아래를 위하지 않아, 옛 물적 감정이 깊지 않다.졸인은 용씨로 인해 연루되었고, 가문은 헐어졌고, 여야의 억울함은 성기가 있는 선생이 모셨다.광서 6년 차인 경진(1880)은 8월 기망지길(奇望之吉)을 기해 청포 뒤에 학거한 후쿠다 세면수(福田盥手)가 책을 바쳤다.도장을 찍다: 후쿠다(주) 군가사마(백)
감장인: 순방 컬렉션(백)
기록: 1.<배매산방몇상서>,청황정란집청도광 6년(182년)6) 각본.
2.명대명인의 편지 선택지 P700-701. 국립도서관 출판사2008년.
설명: 동규존구장.거복전 제발.
XIONG TINGBI LETTER
Ink on paper , mounted ( one page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
Literature ( part ) : 1 . Books on the Stand in the Baimeishan Studio , block-printed in 1826
Note : Inscribed by Ju Futian .
Provenance :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
화심:23.5×22.5cm 제발:35×20.5cm×2
RMB : 80 , 000-120 , 000
저자소개: 웅정필(1569~1625), 글자백을 날고, 강지대를 울리며, 호북강과 호북강을 이룬다.하인. 명말의 장수.만력이 진사, 초나라 당.관직에서 어사를 추어하여 요동을 순시하다.만력47년(1619년)에 병부로 우시하였다.낭대 양호경략요동, 망명 모집, 군령 숙성, 전차 제작, 화기관 제작, 준성을 옮겨 수비하다.관지병부상서어하상방보검.천계 원년(1621년) 건주반군이 랴오양을 함락시키고 죄수 신세가 된 그는 당쟁에 빠져 있다가 거세당에 의해 5년(1625년) 살해되고 구변으로 이어졌다.숭정제가 양민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유저로는 《웅양민 공문서집》이 있다.
소장자소개: 동규존(1831~1908전)순선호인성초무교(지금의 닝보하이수구) 사람.동괴오자(童槐五子)를 위하여 광서원년(1875) 거인(擧人)하여 중헌대부(中憲大夫)에게 4품계집을 하사하였다.부복건성사주사.가부는수장하고서화골동품은정감별하였다.득명인풍도생초서축은 오랜 세월 동안 모사하여, 초서에 능숙하고 또 선량하다.전· 해서. 광서 16년(1890)에 『鄮山書院碑記』를 쓴 책이다.
熊廷弼(1569~1625) 承惠醇醪帖
图录号: 959
估价RMB: 80,000-120,000
成交价RMB: 1,092,500(含佣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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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廷弼(1569~1625) 承惠醇醪帖
纸本 镜片(信一页,跋二页)
识文:承惠及醇醪,谨贮以待。边警稍缓,常合乐而卜其夜。日来邸报尚复杳然,昨与谨公为约,先以十七日奉老父母小坐,幸临况之。廷弼顿首。左冲。
题跋:熊廷弼,字非百,江夏人。万历二十五年乡试第一,明年成进士。授推官,累擢至兵部尚书兼右副都御史,赐尚方宝剑。经略辽东,驻山海关,时天启初年也,与巡抚督广宁兵王化贞意不合,朝议右化贞,以故廷弼不得行其志。广宁有兵四十万,而廷弼关上无一卒,止驻右屯兵五千,徒拥经略虚名而已。二年正月间,会大兵,逼西平,掠平凉桥,化贞兵先奔。中军孙得功者,化贞素任为腹心,至是遂潜降,欲生缚化贞以为功,乃率广宁叛将迎大兵入广宁,追逐化贞二百里,京师大震。二月逮化贞,罢廷弼听勘。四月,廷弼、化贞并论死。五年八月,独弃廷弼于市,传首九边,以有事获罪于魏忠贤也。御史梁梦环谓廷弼侵盗军资十七万。御史刘徽谓廷弼家资百万,宜籍以佐军,实忠贤即矫旨严追,罄资不足,婣族家俱破。江夏知县王尔玉责廷弼子貂裘珎玩,不获,将挞之。其长子兆珪自刭死,兆珪母称冤。尔玉去其两婢衣,挞之四十。远近莫不嗟愤。崇祯元年,诏免追脏,其秋,工部主事徐尔一讼廷弼冤曰,廷弼以失陷封疆,至传首陈尸,籍产追脏。而臣考当年,第觉其罪无足据,而劳有足矜也。广宁兵十三万,尽属化贞。廷弼止援辽兵五千人,驻右屯。化贞十三万一时尽溃,廷弼五千人,不同溃足矣,尚望其屹然坚壁哉,廷弼罪安在。化贞仗西部,廷弼云,必不足仗。化贞信李永芳内附,廷弼云,必不足信。无一事不力争,无一言不奇中,廷弼罪安在。且屡疏争各镇节制不行,屡疏争原派兵马不兴。徒抱空名,廷弼罪安在。所谓劳有足矜者,当三路同时陷没,廷弼经理不及一年,俄进屯虎皮驿,俄迎扼敌兵于横河上,于辽阳城下凿河列栅埋炮,屹然树金汤。令得竟所施,何至举楡口关外拱手授人。而今俱抹杀不论,乃其所由必死则有故矣。其才即笼盖一时,其气又凌厉一世,揭辩纷纷,致撄众怒,共起杀机。当廷弼被勘逮之时,天日辄为无光,足明其冤。状言尤切实,诏许其子持首归葬。五年,化贞始伏诛。廷弼身长七尺,有胆知兵,善左右射。自辽按辽以来,功不胜纪,性刚负气,好谩骂,不为人下,以故物情不甚附。卒为阘茸牵累,身殱家破,朝野冤之,有性气先生集。光绪六年岁次庚辰(1880年)八月既望之吉,青浦后学居福田盥手敬书。钤印:福田(朱) 军假司马(白)
鉴藏印:莼舫收藏(白)
著录: 1.《拜梅山房几上书》,清黄定兰辑,清道光六年(1826)刻本。
2.《明代名人尺牍选粹》一卷P700-701,国家图书馆出版社,2008年。
说明:童揆尊旧藏。居福田题跋。
XIONG TINGBI LETTER
Ink on paper, mounted (one page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Literature (part): 1. Books on the Stand in the Baimeishan Studio, block-printed in 1826
Note: Inscribed by Ju Futian.
Provenance: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画心:23.5×22.5cm 题跋:35×20.5cm×2
RMB: 80,000-120,000
作者简介:熊廷弼(1569~1625),字飞白,号芝冈,湖北江夏人。明末将领。万历进士,楚党。由推官擢御史,巡按辽东。万历四十七年(1619年),以兵部右侍郎代杨镐经略辽东,招集流亡,整肃军令,造战车,治火器,浚壕缮城,守备大固。官至兵部尚书,御赐尚方宝剑。天启元年(1621年),建州叛军攻破辽阳,沦为囚犯的他又不幸陷入党争,后为阉党所害,五年(1625年)被杀,并传首九边。崇祯帝赐谥襄愍。遗著有《熊襄愍公文集》。
鉴藏者简介:童揆尊(1831~1908前),原名会,字莼舫,号少眉。鄞城醋务桥(今宁波海曙区)人。为童槐五子。光绪元年(1875)举人,诰授中宪大夫四品衔户部福建司主事。家富收藏,精鉴别书画古玩。得明人丰道生草书轴,追摹日久,遂工于草书,又善篆、楷。光绪十六年(1890)曾书《鄮山书院碑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