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무족권덮집회의
그애.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개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1일 딸기를 먹었다. 9월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4일 생일이다. 그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애 아버지는 그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 쌓인 것을 그냥 들고 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애의 얼굴 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의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의 소머리에 징을 내려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베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애는 술집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참에 생색도 내고.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애의 누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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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쩌리방에서 봤던 글인데
다시 읽고 싶은데 제목이 기억안나고 내용만 단편적으로 기억이 나서
구글링으로 '작은 몸 그 애 아궁이 전화' 검색어로 찾은거야... ㅋㅋ
다시 봐도 슬프다.... ㅜㅜ
첫댓글 ㄱㅆ) 새벽이라 생각나서 끌올! 문제시 상냥하게 말해주세용....☆
개인적으로 월급은 적지만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준다는 말이 뭔가 먹먹....
돈 없으면 자기 먹고 사느라 급급할텐데.. 그렇게 가난하고 돈이 없어도 적은 돈이나마 글쓴이한테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고 사주고 싶어하는 그 애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거 같아서...
@너를 만난 그때부터 매순간이 봄이다 여시 눈물한방울은 진짜로 슬픈일에 다는 말머리에용! 흥미돋으로 수정 부탁드려요♡♡
@서재 헣 이거 예전에는 눈물난다는 댓글이 많아서 눈물한방울인줄 알았어용 ㅠㅠㅠ 수정했습니당!!
@너를 만난 그때부터 매순간이 봄이다 넵 빠른 피드백 감사합니다ㅎㅎ!
와 진짜 먹먹하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너무마음아파...
나는 왜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아 너무 슬프다...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걸까...
아...뭐라고 말해야될지 모르겠어...
맘아프다....
어뜨케...진짜....평생갈 기억이다..
아 너무 쓸쓸해..
맘이 아리다..
아..가슴이 먹먹하다..
볼때마다 가슴 먹먹해져 너무 슬퍼ㅜㅜ
ㅜㅜ슬퍼
진짜 나도 글쓴다면 이렇게 쓰고싶어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헐 남자라고 생각하고 읽으니까 더 대박.
헐 나는 당연히 화자가 여자라고생각함ㅜ 고정관념이란게 무서워
앗 나도나도 남자로생각했는데
이 글 대박 ㅠㅠ 화자가 남자일까? 여자일까?
읽을때마다 정독하게되는글...! 장편소설로 내주라주ㅜㅜ
이건 올라올때마다 정독이야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도 자연스럽게 남자x남자라고 읽히더라..... 그냥 느낌이 ㅠㅠ
이거대박인듯 첨읽어봤는데 진짜..여러생각든다..
버스에서 울었음 ㅠㅠ슬프댜
넘나 먹먹해ㅠㅠ맘아파...ㅠㅠ 소설이라는데 다행이란생각까지든다...
이거 진짜 내 최애글이야....... 내용 전개도 너무 좋고 그애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고 마지막도 너무 여운있게 끝냈어........ 진짜 너무 슬ㅍㅓㅠㅠㅠㅠㅠㅠㅠ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 중에 이게 갑인듯 ㅠㅠ
주기적으로 봐줘야하는 글이야 진짜 잘썼다
실화는 아니지? 되게 슬프다....먹먹하구 ㅠㅠ 안타깝구..
이글이 젤좋아ㅠㅜ 올라올때마다 정독하고 먹먹해져서 멍때림...
군대얘기 없이 4년간 대학 졸업하구 취업한거보면 여자아냐?!
이 글 정말 좋아해
어느부분이 남자같다는건지 1도 모르겠음
문득문득 자꾸 생각나는 글.
한번씩 찾아서 읽는글.. 덤덤해서 더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