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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기훈을 잘 피하고 있었는데 내가 또 사고 아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뜨거운 물이 나오질 않았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리고 거실에 있는 온수조절기의 스위치를 올리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라라는 유치원에서 소풍을 갔고 집에 혼자 있는데 옷을 다시 다 갖춰 입고 아래층에 내려가기가 귀찮았다. 다시 온도를 올리고 젖은 머리를 감싼 채 뛰어서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난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줌마?”
목소리에 젖은 머리를 들추고 자세히 보니 기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그가 고개를 획 돌렸다. 그 순간 나도 허전한 가슴부위를 수건으로 다시 감쌌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괜찮아. 침착하자. 가슴 좀 봤다고 뭐. 세상이 두 쪽 날만큼 큰일도 아니잖아.’그가 나의 위 아래를 보았다.
“어딜 봐요?”
“볼 건 다 봤고 빨리 옷 갈아 입고 내려와.”
옷을 갈아 입고 거실로 내려가니 기훈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날 놀렸다.
“어이, 속물…노출 속물.”
“하지 마요.”
“나가자.”
“어딜요? “
“가자. 약속이 있어.”
그가 어딜 가자고 하는지 궁금했지만 왠지 그를 따라나서고 싶지가 않았다. 그와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 신중하고 싶었다. 그와 더이상 사적으로 가까워지면 안되는 거 아닐까? 정연언니가 진심으로 사장님 김석훈과 결혼했으면 좋겠다. 언니도 정상적인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는 여자다.
“바쁘니까 다음에요.”
“야!”
“진짜 바쁘다니까요. 아니 난 뭐 가자 그러면 쪼르르 따라가는 강아지에요?”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걸어가다가 그만 아줌마가 꺼내 놓은 청소기에 발이 걸려 옆에 있는 화분까지 안고 넘어지고 말았다. 화분이 박살이 났다.
“아야!”
화분에 부딪친 무릎이 너무 아팠다.
“가지가지 한다”
그가 무릎을 잡고 앉아있는 나를 보고 구급상자를 가지고 왔다.
“바지 올려 봐.”
그가 약을 꺼내고 난 바지를 올렸다. 순간 그와 난 좀 머쓱해지고 말았다. 무릎엔 아무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주 무쇠다리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갔다. 이럴 땐 무릎에 피라도 철철 나주어야 했다. 내가 왜 이런 걸 다 아쉬워하는 거지? 기훈이 내게 정성스레 반창고를 붙여주는 걸 보고 싶어서 내 무릎이 왕창 까지길 바랬단 말인가, 내가? 설마…
사과나무집에 들어온 후로 나는 왠지 도를 닦고 있는 느낌이다. 라라 할아버지가 달밤에 정원에서 맨손 체조를 하고 계셨다.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을 고스란히 석훈에게 물려준 것이 분명했다. 석훈은 매일 저녁 바둑 채널을 보면서 30분씩 바둑을 두고 나서야 하루를 마감하기 때문이다. 난 덩달아 체조를 하는 척하며 할아버지 곁에 다가갔다.
“허허허. 선생님도 하시게용? 소화도 잘 되고 좋아용.”
요즘 나한테 이렇게 ‘용’ 하고 다정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우리 엄마한테 있었단 말이죠?
“실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예, 말씀해 보세용.”
“저…저희 엄마를 아세요?”
라라할아버지가 운동을 멈추셨다.
“모친께서 얘기하시던가요?”
“아니요…그냥 뭐 어쩌다가 알게 됐어요.”
“선생님 수제비 먹은 날 그때 어머님 함자를 듣고 알았지. 얼마 전에 모친을 뵙고는 그때 우리 학교 국어선생님 정정연선생님이 김옥자여사 둘째 여식인 것도 알았어요.”
아, 이사장님이 언니와 내가 자매라는 걸 아신다. 하지만 그는 석훈에게는 내가 언니와 자매지간이라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으셨다. 큰언니가 살짝 떠보라고 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봐 버리다니…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무슨 말을 듣더라고 절대 놀라지 말아야지.
‘근데 실은 내가 밖에서 낳아 온 아들 …기훈이 바로 니 오빠다!’ 이런 말을 듣는다 해도? 제발 하나님…그것만은 아니게 해주세요. 그럼 이건 너무 뻔한 스토리잖아요!!
라라 할아버지와 처음으로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아무리 사양해도 그는 내 잔에 인삼주를 기어이 따르고야 마셨다.
“모친 닮았으면 술 좀 하겠지.”
엄마와 술잔을 기울이기까지 했던 사이였구나!
“석훈이한테는 아직 얘기를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모친께도 내가 차마 그 집 둘째가 우리 아들, 애 셋 딸린 홀아비 석훈이랑 만나고 있다는 말은 못했수다. 어떤 부모가 자기 딸 그런 …남의 자식 키우는 자리에 시집을 보내고 싶겠소. 나 내 욕심이지… 일단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습시다. ”
“네. 이사장님.”
“김옥자여사…여전히 고우시더구만. 30년 전인가 우연히 한번 본 것 빼고는 처음 만났지. 세월이 …참.”
그의 잔에 술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도 고개를 돌리고 한 모금 마셨다.
“선생님이 만든 수제비를 먹는 순간 목이 꽉 메어옵디다. ‘아, 이 맛이었구나. 잊고 있던 이 맛이구나.’…모친 함자 듣고 확실히 알았지만 수제비를 먹어 보면 알 수 있는 거였지….내가 수제비장사 했던 건 알고 있소?”“예.”“수제비 팔아서 백억 모았다는 건 다 거짓말이오.”“…”?“수제비 판 돈으로 종자돈 모아서 땅장사, 집장사를 해서 돈을 불렸지. 수제비 수백만 그릇 팔았대도 1억도 못 모아. 그리고 애초에 내 수제비가게는 맛대가리가 없어서 파리만 날렸었어요.”
그렇게 파리만 날리던 그의 충주 수제비가게에 어느 날 엄마가 찾아왔다고 했다. 혹시 일할 사람 필요하지 않냐면서.
“보시다시피 손님도 없는데 일없습니다.”
당시 라라할아버지는 이십 대 중반의 총각이었다. 총각이 수제비가게를 한다니 신기해서 오던 아줌마들도 맛을 보고는 발을 끊고 가게는 문을 닫기 일보직전 이었다. 그가 모은 전 재산이 그 가게에 들어갔고 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저 하루하루 가게만 열어놓은 상태였다.
“그럼…수제비 한 그릇만 주세요.”
엄마는 조용히 수제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저 수제비 이거보다 맛있게 끓일 수 있는데.”
그는 별 이상한 여자 다 있다고 하면서도 심심하던 차에 엄마에게 주방을 내주었다. 엄마는 재빨리 장을 보고 와서는 당장에 그에게 수제비 한 그릇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엄마의 수제비를 먹고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걸 느꼈다. 그날부터 엄마는 라라할아버지, 김대장의 수제비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엄마의 수제비는 소문이 나서 인근 지방에서 일부러 먹으러도 왔고 나중엔 옆의 가게를 사서 확장을 해야만 할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었다고 했다. 엄마와 하루종일 가게에서 일하며 라라할아버지는 엄마를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1년만 일을 하겠다고 말한 당찬 20살의 대학생이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을 한 자신과 여대생인 엄마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자주 오는 단골손님 중에 서울에서 내려온 남자 대학생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였다. 국문과에 다니는 이 대학생과 20살의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은 서로 호감을 느꼈다. 아빠는 국문과 학생답게 시집을 엄마에게 선물했고 그날 라라할아버지와 엄마는 처음으로 다투게 되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저희 서울로 이사 가요. 대학도 다시 등록해야 하고.”
그 말에 라라할아버지는 차갑게 응수했다.
“….알았습니다. 월급 챙겨 드리죠.”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그는 엄마를 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선을 보고 석훈의 엄마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가게를 비싼 값에 넘기고 서울에 올라와서 그는 우연히 엄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다. 집장사를 시작했는데 자신이 짓고 있던 집에 주방설비를 들여 놓는 남자는 바로 그 국문과에 다닌다는 대학생, 아빠였다. 아빠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아빠를 바로 알아봤다고 했다. 점심때가 되자 엄마가 아직 어렸던 큰 언니를 포대기에 업고 아빠의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다고 했다. 도시락을 먹는 우리 가족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후 라라 할아버지는 석훈의 엄마에게 이혼하자고 말한다. 자신이 왜 행복하지 못한지 당시엔 석훈의 엄마인 아내만을 탓했다고 했다.
하지만 부부의 연이 그렇게 쉽게 끊기진 않았고 라라 할아버지는 회사 경리였던 기훈과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래서 그 회사 경리가 기훈을 임신했고 돌이 된 기훈의 엄마와 아기가 사과나무집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석훈의 엄마는 이혼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했다. 그 부분을 말할 때 라라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때 너무 젊었고 어리석었었다고 자책하셨다. 라라 할아버지의 이혼으로 석훈은 충주에서 엄마와 함께 외가댁에서 자랐다. 석훈이 13살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4년 후 기훈의 엄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해에, 17살이 된 석훈은 사과나무 집으로 다시 돌아와 기훈과 아빠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충주의 석훈의 엄마가 석훈을 말하자면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유학을 보낸 셈이다.
“내 인생에 그러니까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 김옥자. 석훈엄마, 기훈엄마. 근데 내가 살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까 이상하게 같이 살 비비며 지지고 볶고 산 애들 엄마들보다 손목 한번 잡아 본 적이 없는 김옥자여사가 더 보고 싶어집디다. 첫 정이라 그런가…날 이만큼 잘 살게 하려 준 은인이라 그런가 ..자꾸 찾아보고 싶고 덕분에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소. 모친 가게 그만둘 때 고맙다고 저금한 돈 뚝 떨어내 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못돼 먹어서 월급만 달랑 던져주고 말았어요. 대학생 남자 만나는 게 속이 뒤틀려서 그런 거지.”
“그동안 저희 엄마를 찾고 계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지. 막상 찾으면 또 뭐하나 싶어서… 죽기 전에 혹시 우연히 라도 보게 되면 내가 은혜는 꼭 갚아야지 하긴 했지. 근데 이렇게 만나게 된 거요. “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인지..엄마는 그 멋쟁이 시를 읊던 대학생 오빠랑 결혼해서 지금은 남의 집 음식을 해주시고 하루에 삼만 원을 벌었다고 기뻐하시는데 당시 중학교 졸업의 열등감 투성이였던 수제비가게 주인은 한 학교의 재단이사장이 돼서 300평짜리 정원에 오늘도 여유롭게 사과나무를 한 그루 심으셨다. 사실 라라 할아버지가 우리 엄아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고 한 말에 로또 다섯 자리라도 미리 본 양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술을 한잔 더 기울이고 말했다.
“내 이런 얘기 창피하지만 만약 선생님 부친과 사별하셨다거나 헤어진 상황이라면 …남은 여생 같이 하자고 말하려고 만났었어요.”
“누구 맘대로요?”
갑자기 석훈이 부엌에 들어섰다.
“사장님…”
라라할아버지가 언성을 높였다.
“지금 선생님하고 얘기 중이었다. ”
“아버지! 충주에 엄마가 있어요. 멀쩡히 살아계시다구요. 근데 뭐요? 누구랑 남은 여생을 같이 하고 싶으셨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드실 수 있어요? 그렇게 엄마를 비참하게 쫓겨낸 걸 그렇게 그땐 젊고 어리석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다 용서되는 건가요? 아버지는 끝까지 이렇게 엄마를 비참하게 만드시는군요. 지금 그 김옥자여사 따님 앞에서 끝까지 우리 엄마를 비참하게 만들고 계시다구요!”
“니 엄마랑은 예전에 끝난 사이야. 여기서 니 엄마 얘기가 왜 나와?”
“설마 진심은 아니시겠죠? 살 부비고 산 엄마보다, 지지고 볶고 산 기훈엄마보다 정다라씨 모친이 더 그리워요? 엄마가 충주에서 얼마나 외롭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계시는지 잘 아시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세요?”
“안다 알아! 니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아. 이십 년전 에는 충주시내 제일 높은 빌딩이 니 엄마꺼였다. 니 엄마가 이상한 사내들만 만나서 다 들어먹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니? 그것도 내 탓이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제 엄마예요. 아버지는 엄마를 한 번이라도 불쌍하게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없으시죠?”
“뭐가 불쌍해? 넌 아직도 니 엄마 신세가 저렇게 된 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니 엄마이기 전에 그 사람 내 마누라였어. 부부문제는 자식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니 엄마가 널 키우면서 얼마나 내 욕을 했었는지 너 고등학교 때 이 집에 발들이면서 날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날 인간말종이라도 되는 양 대했지.”
“적어도 엄마는 결혼생활에 충실했어요. 바람을 피웠던 건 아버지예요.”
“시끄러! 니 엄마 니가 부쳐주는 생활비 받으면서 부족한 게 없이 사는 사람인데 뭐가 불쌍하다고 아직도 40이 넘어서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이 뒤집혀져?”
난 서둘러 거실로 자리를 피했지만 둘의 목소리가 그곳까지 다 들렸다. 기훈이 거실로 내려왔다.
“형 왜 저래?”
그쪽으로 가려는 기훈를 밀고 배란다로 나갔다.
“잠깐만요.”
“왜 그래?”
“기훈씨가 지금 나서면 불난 데 기름 붓는 거에요.”
“뭐야?”
“괜히 제가 이사장님 옛날 일 생각나게 만들어서….”
“이게 무슨 냄새야? 너 또 술 마셨니?”
“이사장님이랑 한잔 했어요.”
그가 놀랐다.
“우리 아버지랑? 니가? 근데 냄새가 왜 이래?”
“인삼주...”
그가 자신의 입을 가리려 했고 난 그의 손을 치웠다.
“고만 좀 해요. 환자 같애.”
“나 인삼냄새 못 맡아.”
“이래갖고 사회생활 어떻게 해요? 아니 친구들이랑 술자리는 해요? 밥은 같이 먹어요?”
“몇몇 특정 음식에만 예민한 거야. 잔소리는... 같이 산다고 우리 식구 다 된 기분이냐?”
정말 이 인간은 일보 전진했다 싶으면 열 보 후퇴를 하게 만든다.
“예, 예. 가정교사 주제에 제가 감히 망극합니다. 도련님.”
그가 픽 웃었다.
갑자기 안에서 고함소 함께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기훈과 난 부리나케 거실로 향했다. 라라가 자다 깨서 나와서 울음을 터뜨렸다. 바닥에는 부엌에서 거실 쪽으로 던진 듯 깨진 술병이 보였다. 석훈이 무서운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기훈이 깨진 유리조작을 치우며 나에게 말했다.
“라라 데리고 올라가.”
라라를 데리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서진이가 방문을 열어보곤 다시 꽝 문을 닫아버렸다. 영진의 방은 조용했다. 영진은 수영이때문인지 요즘 방에서 거의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라라에게 책을 읽어주려 했지만 라라는 책으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난 불을 끄고 대신 침대 옆 램프를 켜놓고 그림자 놀이를 시작했다. 라라가 관심을 보였다. 난 라라에게 강아지, 꽃게와 같은 손가락을 이용한 그림자들을 보여주었다. 기훈이 문을 열었다.
“쌈촌!”
기훈이 라라옆에 앉았다.
“쌈촌. 이거 봐. 이게 뭐게?”
라라가 손가락으로 모양을 만들자 한쪽 벽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강아지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고양이?”
“틀렸써요. 강아지. 해피야 ! 해피.”
“아, 진짜! 해피랑 똑같이 생겼네!”
“플리즈 메이크 모어. (please, make more). 다라, 해줘요, 다라. 저스트 게스. (just guess). 삼촌.”
난 손을 모아서 모양을 만들었다. 그림자는 주전자모양이 되었다.
“모지? 모지? 모지? 아! 주정자. 주전자에요.”
라라는 기훈이 대답하는 걸 못 참고 대답했다. 라라의 천진한 목소리에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는 알까? 자신의 미소가 백 억 짜리 라는 걸?
“둘이 여기서 잘 거야?”
그가 물었다.
“나 여기서 자. 라라 여기서 자요.”
라라의 말에 내가 기훈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겠죠?”
그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너 ‘엘.이.에이.브이.이’ 하면 라라 어떡해? 너무 정붙이지 마.”
그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영어로 엘이에이브이이 (leave)는 ‘떠나다’. 영국에서도 가끔 아이 앞에서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던 거다. 예를 들어 “지금 얘 ‘씨.에이.앤.디.와이(candy)줘도 돼?”한다. 만약 안된다는 대답을 들을 건데 아이가 이미 ‘캔디’ 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아이가 당장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상황이 곤란해지니까 아이가 이해 못 하도록 스팰링을 대신 말하는 거다.
그가 내가 떠난 후에 라라가 날 그리워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기훈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움이 뭔지 그게 얼마나 힘든 감정인지…다섯 살 때 엄마를 잃은 어린 기훈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석훈이 자신의 아버지와 우리 엄마의 인연 때문에 언니와의 관계를 끊는다면? 설마…석훈이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하지만 오늘 본 그의 모습은 다분히 과격하고 감정적이었다. 술병을 던진 건 라라의 할아버지였지만 마지막에 고함을 친 건 석훈의 목소리였다. 만약 석훈이 정연언니가 나와 친자매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직도 설레게 한 그 김옥자 여사의 딸이 자신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그 정정연 국어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편으론 기훈이 나의 배다른 오빠나 뭐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정연언니가 석훈 때문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상했다.
다음날 라라와 온갖 물감을 꺼내서 놀고 난 후 목욕탕에서 라라를 씻기고 있는데 석훈이 들어왔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가 어제 일을 얘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어머님에겐 아무 유감이 없습니다. 모친께서 저희 가정사와는 상관없는 분이신데…어제 일로 라라선생님이 라라를 돌보는데 장애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
‘정정연선생님이 제 친언니라도 상관없으신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일 역시 언니나 이사장님이 밝힐 문제지 내가 중간에 나설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 라라가 갑자기 일어나서 내 옷을 잡아 당겼다.
“다라 들어와요. 바스(bath) 해요! 같이 해요!”
라라가 세게 당긴 건 아니었는데 옷이 쭉 늘어나 버렸다. 내가 얼른 옷을 잡고 등을 돌리자 라라가 말했다.
“그림 있다. 다라 몸에 그림 있어요. 나도 여기 있는데”
라라가 자신의 팔에 붙은 스티커 그림을 보여주고는 가까이서 내 어깨에 있는 타투를 보았다. 몸에 문신이 있다는 사실이 창피하지는 않았지만 석훈이 보게 되는 이 상황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옛날에 한 건데..지우긴 하려구요.”
석훈이 말했다.
“지우는게 좋겠네요.”
뜻밖의 그의 견해가 당황이 되었다.
“아…이런 거 안 좋아 하시는 구나. 하긴 좀 놀았던 여자같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우는 게 맞죠.”
“…”
“저 내일 충주 내려갑니다. 하루나 이틀은 걸릴 것 같습니다.”
“혼자 가시나요?”
“네.”
그날 밤에 난 석훈의 서재 앞에서 서성거렸다. 언니가 그 김옥자여사의 딸이며 나와는 자매지간이라는 사실을 다 듣고 그가 충주 모친 집에서 마음 정리를 하고 오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떡하지? 언니는 하필이면 이럴 때 전화가 안 돼? 집에도 없고. 지금이 좋은데 ..지금 언니가 사장님을 만나서 속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갑자기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석훈과 기훈이 함께 나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석훈이 물었다.
“아..아니에요.”
내가 그냥 가려 하자 석훈이 나를 잡았다. 그가 내 팔을 잡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기훈 앞에서 보란 듯이..
“제가 아는 피부과 의사한테 소개 해 드릴게요. 찾아가 보세요.”
“피부과?”
기훈이 물었다. 그는 서재 문을 나설 때부터 상당히 불편한 심기였던 것 같은데 이젠 무서운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석훈이 내 어깨 위에 정확히 문신이 있는 부분에 그의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타투. 다라씨랑 어울리긴 하지만 과거는 그만 지우는 게 좋지 않겠어요?”
기훈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훈과 나와의 둘만의 비밀을 내가 석훈과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기훈에게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첫댓글 매일 연재해주시면 감사 또 감사...
가족사가 다양하고 소박해서 마음이 편안하고 재미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