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2015년 12월 5일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린 구덕운동장 안쪽 풍경을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바깥 풍경에 대해서 읊으려고 한다....
경기를 마친 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정문 출구 쪽으로 양팀 선수나 관계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원FC는 기쁨을 만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테고, 아이파크는 패배와 강등의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테니 쉽사리 경기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아이파크는 일부 강성 팬들이 보인 거친 반응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무척 곤혹스러웠지 싶다.
경기를 마친 뒤 30여 분이 지나자 먼저 눈에 띈 건 심판진이었다. 이날 경기 주심이었던 우상일을 포함한 심판들이 구덕운동장 정문 출구에 서서 몇 분 이상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길을 끌어 사진에 담았다.
그러다 주심 우상일이 일행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떠남을 시작으로 다른 심판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직후 정문 출구에 대기하고 있던 백여 명의 팬들 가운데 일부가 김종혁에게 몰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다른 심판들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오로지 김종혁에게만 우르르 몰린 팬들이 "앞으로 좋은 판정 부탁합니다" 등 듣기 좋은 부탁의 말까지 곁들이는 걸 보면 2011년 FA컵 판정 오류 등 몇 차례 '대형 사고'를 쳤지만 그에게 기대를 거는 축구팬들도 무시 못할 정도로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때 '이날부터 아이파크 팬임을 선언한'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저 사람 인상 정말 좋아서 여자들에게 인기 참 많겠다. 그런데 저 얼굴만큼 축구도 잘하는 선수야?"
(몰라, 김종혁이 축구 하는 걸 봤어야 알지!)
그 뒤로도 30여 분이 흐른 뒤 수원 관계자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구덕운동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린 수원FC 팬들을 시작으로 수원 시장 염태영이 등장하자 아이파크 팬들 몇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가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가슴 뭉클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승리 축하합니다", "수원의 경기력이면 케이리그 클래식에서도 충분히 통할 겁니다.", "멋진 '수원 더비' 꼭 좀 부탁합니다" 등 귀를 즐겁게 하는 덕담이 내내 이어졌다. 그러자 입이 귀까지 걸린 시장 염태영은 연신 "감사합니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조아리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이때의 행복한 경험을 잊지 못한 수원 시장 염태영은 다음날 페이스북에 이런 문구를 올려놓았다.
이걸 보면서 조금 전까지 "아이파크 나가 D져라"를 목청껏 부르짖던 내 여자친구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저걸 보고도 뭔가 깨닫는 게 없냐? 보고 좀 배워라, 배워!!!"
그랬더니 아주 황당한 답을 주셨다.
"웃기고 있네, 팬들에게 상처를 줬으면 죗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지!"
구덕운동장 가기 전까지도 "이거 꼭 보러 가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하시던 분께서 언제 그리 열정적 팬으로 둔갑하셨나 몰라! 참 대단한 팬 납셨다.
이후 이날 결승골을 넣은 임성택을 포함한 수원FC 팀원이 차례차례 등장하자 팬들의 박수와 환호성도 더욱 커졌다. 그 가운데 자파가 등장했을 때는 "자파다!", "자파 최고다" 하는 함성소리까지 터져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수원FC 최고의 스타는 바로 감독 조덕제였다. 그의 모습을 담으려는 아이파크 팬들의 사진 플래시가 연신 터졌고, 여기저기서 사인 공세까지 퍼부을 정도로 조덕제는 이미 스타로 군림했다.
그리고 나서 10여 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아이파크 팀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흐릿한 조명만 불을 밝힌 가운데 처음 등장한 건 웨슬리였다. 그때까지도 아이파크의 실망스러운 경기력 때문에 아낌없이(!) 욕을 퍼부으려던 팬들 앞에 웨슬리가 얼굴 가득 눈물로 뒤덮은 채 나타나자 분위기는 일순 뒤바뀌었다. "웨슬리가 운다"고 누군가 외치자 그때부터 "웨슬리 힘내라!", "너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했냐", "오늘도 너 보러 왔다" 등 그를 향한 애정 어린 말이 쏟아졌다.
이 장면을 영상에 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파크 팀원이 차례로 나타났다.
처음엔 이들에게 또다시 욕설을 퍼붓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힘내라는 성원과 박수를 보내는 따스한 그림이 펼쳐졌다. 이범영의 경우에는 몇몇 꼬마 팬들이 사인을 해 달라고 매달리는 광경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동영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 정문 출구에서는 지지와 격려의 목소리가 뚜렷하다.
이 동영상 속에서 가장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와 같은 부산 교통공사 팬인데, 내셔널리그 김해시청은 물론 케이리그 대구FC의 팬까지 겸하는 '마당발 서포터즈'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프로축구 원년부터 지금까지 축구팬으로 남아 있는 중년 신사의 모습을 늘 볼 수 있다. 동영상 속에서 크게 울리는 목소리의 두 주역은 바로 그들이다.
선수들에게 보낸 따스한 성원의 목소리와 달리 감독 최영준이 등장했을 때는 조금 따가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똑바로 좀 합시다!", "추가 시간에 정석화는 왜 넣었습니까?"
그에 대해 최영준은 굳은 표정으로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사실 뒤의 질문은 나도 감독 최영준에게 꼭 하고 싶었다. 이미 승패가 갈린 추가 시간에 정석화를 넣은 이유가 뭔지 그가 꼭 좀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비교적 훈훈한 분위기로 이날 경기를 마감했으면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출입구 쪽 상황과 달리 성난 팬들 몇십 명이 아이파크 선수단 버스를 에워싼 채 거칠게 성토하는 분위기를 이미 조성한 상태였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어느 팬이 더러운 욕설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자 "매너는 좀 지킵시다"며 다른 팬이 제지하는 장면을 담았다.
아이파크 선수단 버스를 일부 강성 팬들이 가로막고 사과를 요구하자 주장 이경렬과 감독 최영준 단 둘이 '마지못한 듯' 그들 앞에 내려섰다. 그 둘 가운데 (윤성효가 내지른 X을 치우기도 바빴던) 뒤늦은 감독 최영준보다 주장 이경렬이 강성 팬들의 집중포화 대상이었다.
아이파크 주장 이경렬이 '대충 얼렁뚱땅 사과'한 뒤 감독 최영준과 함께 버스에 다시 오르자, 팬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아이파크 나가 D져라" 하며 거칠게 반발하는 걸 볼 수 있다.
그 뒤로 한동안 강성 팬과 선수들의 대치 국면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도 '분위기 파악 못한' 일부 아이파크 선수가 '폰질' 했다는 소리가 바로 뒷날 나왔지만 현장에선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진 않았던 걸로 안다........
강등이라는 참담한 결과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팬들과 '버스 안에서 폰질(?)하는 선수들'의 대치가 한동안 치열하게(!) 벌어진 뒤 마침내 아이파크 선수들이 버스에서 전부 내렸다.
이 상황에서 내 눈에 가장 두드러졌던 건 선수들을 향해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던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느 '할머니 팬'이었다. 그 할머니는 내 눈에만 이색적으로 들어온 게 아닌 듯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염려의 멘트'를 날리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시간까지 계셔도 괜찮으세요?", "할머니,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두고 가셔도 됩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 팬'의 답은.....
지금 한가롭게 나이를 따질 때가 아닐세!
동영상으로 미처 담아내지 못했지만 이 할머니를 내세워서 아이파크 팀원을 거칠게 다그치는 장면도 구덕운동장의 바깥에서는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아이파크 선수들이 전부 내리자 그들을 향해 일부 강성팬들이 '단말마의 비명' 같은 분노를 터뜨린 뒤에 2015년 12월 5일 구덕운동장의 바깥 풍경은 막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뒷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부산 교통공사의 팬이 덧붙이기에는 주제넘을 듯해서 관두는 게 낫지 싶다. 이날 누구보다도 목청껏 "아이파크 나가 D져라'를 외쳤던 내 여자친구가 1부 리그 승하강이라는 제도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구덕운동장 바깥에서 펼쳐진 여러 해프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상, 술이 엉망으로 취한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내지른 '2015년 12월 5일 부산 구덕운동장 바깥 풍경 이야기'였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훗날 이 글이 추억이 되고 클래식에서 부산이
옛명성을 다시 찾아 멋진경기하는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어 전에는 이분 닉네임이 '그런 날들이 있었지'였나 그랬던거 같은데
한국축구사의 한 장면을 기록해주셨네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와중에 버스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만든 버스네요^-^
잘 봤습니다. 이것또한 부산 역사의 하나로 남겠네요.
잘읽었습니다 ..
잘봤습니다... 솔직히 저때 풍경 궁금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