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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日. 맑음
인천 도심都心 걷기, 차이나타운과 인천 아가씨들.
인천의 성냥공장.
붕어빵에 붕어가 있는지, 대포집에 대포가 정말 있는지,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도 나를 과연 눈곱만큼이라도 사랑을 했었는지, 그리고 인천에 성냥공장이 있는지는 늘 궁금했던 사항들이었다. 내가 1976년 2월25일에 논산 제2훈련소에 입대를 했는데, 그 시절이 훈련병 개인화기가 M1 소총에서 M16 자동소총으로 바뀌던 시기라 두 가지 개인화기를 다 익혀야했다. M1으로 먼저 훈련을 마치고 난 뒤에 M16으로 바꾸어 들었더니 어찌나 가볍던지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M1은 2차 대전과 6월 남북전쟁이후 미군들이 사용하고 남겨놓은 것으로 우리나라 장정들 일반적인 신체조건에 비해서는 살짝 무겁고 컸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M16 자동소총이 다 좋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M16은 가볍고, 화력이 강력하고, 자동으로 연발사격이 가능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았으나 그 당시 첨단과학이 만들어놓은 대인對人 살상용 무기에 지나지 않은 반면에 낡고 무거운 M1 소총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 손때가 묻어 있어서 만약의 경우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동반자로서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내가 평소에 디지털 타입보다는 아날로그 타입을 선호하는 개인적 취향이 개입되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여자女子에 대한 상상력想像力과 먹는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그 지루한 훈련소로부터 시작해서 35개월20일이라는 군생활을 어떻게 보내야 했을까. 눈을 씻고 둘러봐도 여자女子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에서의 생활은 또 그대로 매력적인 대목이 없지는 않으나 그 생활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여자에 대한 온갖 상상과 추측과 전설이 주변에 난무하게 되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동안 생활을 하다 보니 여자란 진정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무료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서 남자들 또한 자기 구안책求案策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신병훈련 교육과정에 정식으로 들어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 듣고도 그 노래를 간단히 외워버렸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신이 났다.
그때 훈련소에서 처음 들어보았고 불렀으며, 자대自隊로 배치 받은 후에도 졸병 시절에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 박자를 맞추어 가면서 씩씩하고 우렁차게 아무데서고 그 노래를 불러야 했었다. 그 노래가 바로 ‘인천의 성냥공장’인데 노래 가사가 다소 직설적直說的이고 적나라赤裸裸해서 오해의 소지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그 노래는 결코 여성女性을 비하하는 노래가 아니라 지루하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려는 풋풋한 청춘들에게는 억압된 시간으로부터의 구원의 상징이자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고 보아준다면 정말이지 고맙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후로 나는 인천에 과연 성냥공장이 있는 것인지가 몹시 궁금했지만 마땅히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지난 2010년 8월13일(金)부터 인천근대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개화기 인천의 모습과 성냥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있었다. 내가 지금 그 팸플릿을 가져와 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나라 초창기의 붉은 우체통 사진과 함께 대한 성냥공업사에서 만든 여러 종류의 사각 성냥통 사진들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외국 문물이 처음 들어왔던 개화기의 주 항구인 인천에 철도가 건설되고, 전기가 들어오고, 은행과 호텔이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냥공장도 타 지역에 비해 일찌감치 설립되었던 모양이다. 부싯돌을 켜서 불을 만들다가 성냥을 켜서 불을 만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간편함은 아마 요즈음 컴퓨터에 버금 갈만한 사건이었을 테지.
주안역에서 인천역까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 신도림역에서 경인선으로 노선을 바꾸어 타면 역곡역, 부천역, 부평역을 지나 주안역에 이르게 된다. 주안역에서 내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디서부터건 내려서 걸으려 했는데 마침 주안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기에 나도 따라 내렸을 뿐이다. 지하철 출입구와 연결된 주안역 지하상가가 엄청 크고 넓다. 화려한 지하상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인천역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출입구 계단 위로 올라선다. 밖으로 나오니 따스한 2월 햇살이 먼 허공으로부터 흘러 내려와 땅 위에 골고루 내리쬐고 있는 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따뜻한 봄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기 시작한다. 아스팔트와 건물로 가득 차 있는 도심이라 아지랑이도 종달새 노래도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봄이 주변에 서성이고 있음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봄은 여자의 옷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얇고 짧아진 여자 옷을 보면서 흥겨워하는 남자의 가슴 속에서부터 봄이 오는 것이라고 말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여자女子는 봄을 부르는 전령사가 아니라 봄 그 자체自體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여자는 봄일뿐더러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름 혹은 가을 심지어는 겨울도 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는 전천후全天候 계절과 같은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도화역을 막 지나쳐 IT정보개발 진흥협회인가를 지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왕폐이王菲의 노래 몽중인夢中人 전주곡이 들려온다. 중경삼림重慶森林이라는 영화에 삽입되어 있는 이 노래는 중화권 최고의 가수라는 왕폐이의 명성에 걸 맞는 창법과 기교가 멋들어진,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이다.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두르고 차도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걸러내며 노래의 선율 위에 내 마음을 실어 놓는다. 음악 연주와 왕폐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날아가는 그곳까지 내 마음도 함께 날아간다. 노래의 여운이 스러져가자 눈을 떠보니 푸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같은 풍경이라도 빛의 농담濃淡과 빛의 각도角度가 달라지면 세상이 기이하고 신비롭게 보인다. 아마 천국이나 극락도 그 세상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농담과 각도가 빚어내는 오묘한 신천지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서 또 길을 걸어간다.
제물포역은 부평역이나 주안역에 비해 생각보다는 자그마한 역사다. 제물포라는 지명의 이름으로 미루어봐서는 예전에는 이곳이 인천 앞바다를 통해 큰 배들이 드나들며 포구浦口로 번창했던 시기가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항로가 막히면서 그 위세가 현저하게 위축되어 버렸으리라. 그 다음에 나타나는 도원역은 이름도 예쁘지만 역사도 멀리서보면 고깔모자처럼 생긴 예쁜 건물이다. 도원역을 막 지나쳐 오른편에 있는 철로 위로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면 철로 길을 따라가는 좁다란 흙길이 나온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아마 5,60년대에 지어졌을 한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다 이런 분위기의 동네라면 많은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놀고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철로가 지나가고, 빈터가 있고, 한옥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으면 어디서나 아이들이 들끓었던 내 어린 시절과는 상황이 많이 변하고 바뀌어 버린 듯하다. 딱지와 구슬을 치고, 자치기 놀이를 하고, 팽이를 돌리며 연을 날려야할 어린애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동인천역부터 인천역까지는 신포패션문화의 거리와 자유공원 지역, 원조 짜장면으로 유명한 공화춘共和春과 중국문화관을 껴안고 있는 차이나타운 권역, 그리고 구 일본은행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개항장 권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본격적인 관광 특구가 시작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는 일단 생각의 리듬을 늦추고 매의 원거리 시선이 아닌 멀뚱거리는 부엉이 눈으로 시선을 바꾼 뒤에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어간다. 이제부터는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영상과 감각과 냄새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의 모든 창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무엇이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그저 내버려둔 채 방관자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나 풍경에 섣불리 개입해서는 안 된다. 나를 완전히 풀어놓은 채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유유히 흘러가도록 그냥 놓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인천 역사驛舍.
인천 역사는 2층 시멘트 건물인데 일층 벽은 회색으로, 이층 벽은 분홍색으로 외장을 하고 있다. 인천 역사는 과거 한 때 융성했지만 지금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소도시의 철도 역사 모습을 잘 보관하고 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청량리 역사와 춘천, 그리고 수원 등 첨단시설의 역사에서 놀란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휘황찬란하고 떡 벌어지는 신新 역사로 건축하자는 만만치 않은 의견들을 물리치고 복고와 과거의 시간들을 그 자리에 고이듯 남겨두게 한 어느 분의 시원한 안목眼目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불과 백 몇십 년 전 개화기에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물과 문화가 바로 이 인천 역사를 통해서 서울과 조선 천지에 퍼지게 된다. 군산항, 목포항, 부산항도 개화기의 통로로서 한몫씩을 각기 부담하고 있었지만 인천항은 서울과 바로 통하는 목구멍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자리에 서 있는 인천 역사에는 쓸쓸한 거인의 애잔한 눈빛 같은 것이 서려있다. 인천 역사 안으로 들어가 본다. 검표대가 자동화 시스템으로 설치되어 있어서 검표기를 들고 서서 발차시각을 외쳐대는 역무원은 없지만 내 귓가에는 사람들이 몰려가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와 검표기로 열차표 한 귀퉁이를 찍어주는 딸깍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인천 역사를 통해 서울로 서울로 밀려들어갔을까?
차이나타운과 짜장면.
인천 역사 길 건너 완만한 경사로 입구에 중화가中華街로 들어서는 돌대문인 제1패루牌樓가 서 있다. 구불구불 서린 용이 새겨져 있는 돌대문은 중국인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양식의 조각 건물이다. 나중에 한중문화관 입구에서도 보게 되지만 용과 기린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상 속의 서수瑞獸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붉은 색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옷이나 등뿐만 아니라 각종 휘장이나 장식에도 붉은 색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용만큼은 누른 황색黃色을 칠하거나 사용해서 장식을 한다. 물론 황제의 옷도 황색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붉은 색이지만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색깔은 황색이라는 뜻이다. 중화가, 즉 차이나타운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에서 중국말이 들려온다. 붉은 등, 붉은 휘장과 장식들이 곳곳에 걸려 있고, 중국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물론 그보다 수백 배 많은 관광객들도 따스한 토요일을 맞아 무리지어 떼 지어 돌아다니고 있다.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슬슬 걸어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바로 여기가 차이나타운의 명소 중 한 곳으로 잘 알려진 북성동 원조 짜장면 거리다. 그 중 삼거리 정면에 있는 건물이 1908년 이전에 건립된 객잔客棧 형식의 중국식 화관 건축물로 지어진 구舊 공화춘을 대신해 새로 지어진 공화춘共和春이라는 원조 짜장면 집이다.
공화춘 건물 일층은 아애 대기실로 만들어놓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 구불구불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고 있다. 내가 대기실에 들어선 시간이 오후 1시55분인데 오후 세시가 지나 다시 이곳을 지나갈 때도 그 줄의 길이에는 별로 변함이 없어 보인다. 공화춘에 좌석이 250개라는데 짜장면으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만큼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위층 홀로 올라가는 이 속도로 보아서는 한 시간 여는 족히 기다려야 할 듯싶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구경을 하며 돌아다닌다. 제3패루인 선린문도 구경하고, 삼국지 벽화 거리와 제2패루인 인화문과 한중문화관도 둘러본다. 그리고 점심식사는 차이나타운에서 좀 떨어져 있는 신포 사거리 공용주차장 앞에 있는 향원香圓이라는 중국집에서 이 지역 분위기에 맞는 짜장면을 시켜먹게 된다. 이 집은 나름대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메뉴판과 함께 물을 셀프서비스가 아닌 도자기 컵에 담아 가져다주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전에 중국집이나 빵집에 가면 마실 수 있었던 오차라고 부르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누르스름한 물이다. 이 작은 서비스 하나에 나는 얼마나 많은 회상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감사를 한다. 겨울날 친구와 함께 짜장면이나 우동을 시켜놓고 탁자 앞에 앉아 후후 불어가며 마셨던 오차의 기억은 입보다 먼저 컵을 감싼 손바닥을 통해 가슴을 덥혀오던 추억 속의 우정에 다름 아닌 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짜장면의 발생지인 원조 짜장면 지역이라 하더라도 짜장면 맛이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 걸까?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개발된 최초의 짜장면과 지금의 짜장면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지난 50여 년 동안 짜장면에 관련되어 내게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추억하면서 내가 앉아 있는 탁자 앞에 올려놓은 짜장면 곱빼기를 쳐다본다. 푸르스름한 대접 안에는 희고 까만 한 움큼의 시간이 돌돌 사리를 틀고 담겨져 있다. 김 오르는 짜장과 하얀 면발을 쓱쓱 섞어 비벼가며 한 젓가락 한 젓가락씩 세월을 머금듯 입 안에 넣고 씹는다. 과연 원조 동네의 짜장면은 뭐가 달라도 다르기는 역시 다른 모양이다. 짜장면 사리가 목젖을 스칠 때마다 괜히 가슴이 울컥해져 온다. 면발 한 가닥 한 가닥마다 아스라한 100년의 세월들이 촘촘히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겠지.
은행銀行의 핵심核心은 금고金庫자리가 맞아.
내가 점심식사를 한 중국 음식점인 향원에서 한 블록만 올라가면 그곳이 역사문화의 거리인데 한중문화관까지 일직선상의 거리에 개화기에 인천에 세워졌던 근대건축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현재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舊 일본 58은행 인천지점, 인천 개장항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사용 중인 구舊 일본 18은행 인천지점, 인천 개항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舊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등이 그것들이다. 일본 58은행과 일본 18은행은 나란히 있어서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 중인 일본 18은행으로 들어간다. 내부는 몇 개의 전시실과 중앙홀로 구분되어 있는데 주로 근대 건축물 모형과 사진을 비치해놓고 그 아래 설명문을 첨부해 두고 있다. 그리고 중앙홀은 지붕 내부 구조가 보이도록 천장을 터놓은 채로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 한 군데 이색적인 곳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검은 나무계단 옆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짜여있는 자그마한 전시실인데 입구에는 엽서전시실이라고 명패가 붙어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왠지 내부구조가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사면 벽에는 개화기의 건축물들이나 도로들이 그려져 있는 옛 엽서들이 걸려있다. 슬슬 둘러보며 한참을 그 안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노란 줄이 그어진 완장을 차고 있는 해설사인 듯한 영감님께서 그 안으로 들어와 친절하게 이곳이 이 은행 금고자리였다고 알려주신다. 맞다! 어쩐지 여기에 한번 들어오자 다른 곳으로 나가고 싶지가 안더라니. 내가 옆에 서 있던 서로 친구인 듯한 두 여자 분을 보며 왠지 여기에 들어오자 주머니가 두둑한 느낌이 들었노라고 말을 하자 한 여자 분이 그러게요. 하면서 그럼 두둑해진 주머니로 한턱 내셔야죠. 하며 응수를 해준다.
꼭 해설사 영감님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하지 않으셨더라도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을 하면 이곳이 은행 안에 있는 금고자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은행에서 가장 튼튼하게 지어진 곳이 있다면 그곳은 금고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전시실도 천장은 완강한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데 일정한 넓이를 두고 철판 띠가 둘러쳐져 있고, 바닥은 두꺼운 화강암으로 깔려 있으며, 벽은 붉은 벽돌 한 장 반의 넓이의 두께로 쌓아놓았는데 외부 바깥쪽에는 다시 그 위에 시멘트로 마감을 해놓았다. 벽에는 조그마한 창窓이 하나 있는데 그 창 바깥쪽에는 묵직한 평철을 덧대어 쇠창살을 만들어 놓았고, 창틀도 나무가 아닌 튼튼한 쇠 창틀이다. 그리고 사무실로 사용하는 방이라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작아 보인다. 찬찬한 관찰 끝에 이 정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면 여기가 이 은행의 핵심인 금고자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예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금고 안팎을 세세히 보는데 만 이십 여 분을 더 투자하고 나서야 금고 안에서 사귄 친구인 두 여자 분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밖에는 여전히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공중에 따스한 햇살이 가득하다.
차이나타운에서 차 한 잔을.
근대건축 전시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인천개항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舊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이 있어서 그곳을 구경하기 위해 이번에는 함께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우표와 전화기, 우체통들을 구경한 뒤 2,3,4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는 각종 철도와 금융자료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곳 구舊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은 제 4전시실이 예전 금고자리였음을 그냥 알아본다. 두 여자 분께서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느냐 하며 물어오기에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아하! 하며 간단히 이해를 한다. 박물관 밖으로 나와서는 금고 안에서 두둑해진 주머니를 조금 열어 차를 한 잔 마시기 위해 찻집으로 들어간다. 한 분은 인천 사람이고, 또 한 분은 서울 사람인데 인천에 놀러온 친구를 인천 사는 분이 안내삼아 친구와 함께 구경을 다니는 중이란다. 우리들은 어쩌다 그 시간, 그 금고 안에 함께 있게 되어 수인사修人事를 함으로써 서로 상대방을 알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이란 알 수도, 납득할 수도, 마음대로 얻을 수도, 없는 일들의 연속인 셈이다. 불가언, 불가해, 불가득不可言 不可解 不可得 하기에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무수한 인연들 앞에서 부디 좋은 인연으로 항상 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는 우리에게 뭐가 더 필요할꼬?
(- 인천 도심都心 걷기, 차이나타운과 인천 아가씨들. -)
첫댓글 인천을 다녀가셨네요... 주안역부터 짧은 거리가 아닌데 대단하십니다.
도원역 조금 못 미친 곳에 최초 철도시공지 표지가 세워져 있습니다. 인천역사문화거리를 걷는 시발점으로 삼는 곳이고요
도원역 뒷쪽으로 넘어가면 한국최초의 서양식 학교 영화학교가 나오고 선교사회관이나 선생님 같은 문인들이 좋아할 헌책방거리가 그리고 문화의 거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배다리로 빠져나와 진고개길을 통하면 한국최초의 근대기생학교인 권번이 있는 율목동을 둘러보시고 옛 용동 큰우물자리로 내려와 동인천역을 보고 자유공원을 홍예문을 통해 오르셔서 차이나타운으로 가시고 이후 일정을 잡으시는 게 개항장 답사의 일상적인 길이죠.
이번 봄 한국에 가면. 청한 님이 써 주신 코스대로 인천답사를 해야겠습니다.
어느시장인지 기억에 없지만, 닭강정(?) 만드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인천하면 그걸 못먹고 온 아쉬운 기억만...ㅎ
이왕 인심쓰는 김에 어느 시장인지 알려주세요. 박식한 청한 님. ㅎㅎ
신포시장입니다.
이종원대장님의 글에도 나오는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 인천에 사는 저보다 더많은걸 보고가셨네요.. 사실 주안 제물포.배다리 동인천은 어찌보면 제 삶의 여정같은 곳인데..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어렸을때 살고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지금은 100년도 넘은 학교가 되었지요..동인천은 70-80년대 인천의 명동쯤 되었구요..이글을 보니 추억이 아른아른거려요^^
긴울림님은 그 어느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세심히 보시는것 같아요. 인천에 사는 저는 가야 그냥 짜장면이나 먹고 오는 정도로 대강대강 다녀왔었는데 부끄러워지네요.
어느 나라를 가던 '챠아나 타운'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관광객이면 꼭 들려야 하는 코스처럼 말입니다..
25년 전 오스트렐리아에 갔을 때 챠이나 타운을 홀로 걸었었는데 백화점보다 번성하고 활기가 넘치더군요.
일본 각지에도 차이나타운이 있고 늘 북적거립니다.
작년가을 '고오베'에 갔을 때, 차이나 타운에서 디너를 먹었는데,
비싼가격에 비해 맛이 별로라서 후회막급이었답니다.ㅎ
중국음식을 가장 좋아하는 저로써는 한국에 중국요리가 최고로 맛있다고 자부합니다.^^
자세히 열거해 주신 인천 개화기 때에 옛 건물들이 오래도록 남아있었으면 하는 염원과 함께...
봄날 인천기행을 떠날 때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인천에 다녀가신 긴울림님 글 보면서 참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고시절을 보냈고 직장생활도 했던 신포동 옆동네 답동 사동 . . .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쫄면과 만두로 유명했던 신포시장 신포만두집은 회사생활하면서 참 많이 찾았던 곳입니다.
인천항의 역사도 배우고 추억도 상기하고 좋은 시간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