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이 눕는 머리맡에는 전공 책과 더불어 늘
샘터사에서 발간한 명사들의 명언집, 그리고
연고 하나 면봉 하나가 놓여있었다.
가창골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대구를 곁 가로지르며
흐르던 그 옛날의 방천은 어른들에겐 시원한 쉼터요
아이들에겐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자연놀이터였다.
요즈음엔 그 가까운 곳, 김광석 거리 가까이의
수성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 여름. 그 방천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릴 적의 큰형
귀에 그만 물이 들어가 버렸다. 고막에 탈이 났는지
형의 귀에서는 늘 진물이 났고 그럴 때마다 큰형은
면봉으로 귀 안에 연고를 발랐다.
일찍 치료해주지 못한 어머니의 후회와 탄식, 형의
귀아픔을 동반하며 그 귓병은 오래도록 형을 괴롭혔다.
코를 한번 힘껏 팽~풀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형은
콧물감기가 걸리면 흐르는 콧물을 풀어내진 못하고
휴지로 닦아내어야만 했었다.
요즘이야 3D과에 속하지만 그 당시 외과의 꽃이라던
흉부외과에서 그것도 막 시작되던 소아 심장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되기로 진로를 결정한 형은
오래도록 미루어오던 수술을 결심했다.
청진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는 이유였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무렵이니 큰형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남문시장 가까이 있는 병원에서 수술 후 일주일
입원하게 된 형과 남은 식구들 돌보느라 형의 곁에서
마음껏 구완해 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이 막내인 내 몫으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어머니가 보자기에 정성껏 싸주신 밥과
밑반찬을 형에게 가지고 갔다가 형이 다 먹고 나면
가지고 오는 심부름. 싫증 내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나 또한 큰형을 따르고 좋아했으므로...
집에 돌아오면 얼른 보자기를 풀고 다 먹었나를
확인하시고는 형이 맛있게 잘 먹더냐고 물어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마음을 내가 알기에...
형이 혹 음식을 남길라치면,
"히야~ 다 묵어라. 엄마 걱정한다..."
"배 부르다. 많이 묵었다. 엄마 보고 맛있게 잘 묵더라 캐라."
"저녁을 작게 묵었나... 배 고푸네. 그라마 내가 묵으께."
저녁 먹고 나선 길이라 배가 불러도 그 정도야
너끈하게 먹어 치웠다.
그러던 날 중의 어느 저녁.
보자기 안에 짐 하나가 늘었다.
주전자 손잡이가 보자기 밖으로 나와있었다.
무슨 국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국이 있어야
밥을 잘 먹는 형을 위해 어머니는 국을 같이 싸 보내고
싶어셨던가 보았다. 주전자 입구를 비닐로 잘 싸서
막고 그 안에 국을 담으셨다. 냄비는 새기 쉬우니...
"똑바로 들고 가래이... 안 그라마 넘친대이."
"걱정하지 마이소. 잘 가지고 가서 형 다 먹이고 오께요."
버스를 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버스가 한번 덜커덩했는데 주전자...
아... 그 주전자 뚜껑으로 국물이 새어 나오는데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이왕 보내는 거 많이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가 주전자 가득 국을 담으셨던 것이다.
가뜩이나 솔솔 새 나오던 냄새 때문에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차가 덜커덩
거릴 때마다 출렁대는 국물은 자꾸만 넘쳐 나오고...
버스 바닥으로 국물이 흐르고...
급기야 옆에 앉은 사람은 싫은 내색을 하며 자리를
옮겨버리고...
내 얼굴은 당황한 채 붉어질 대로 붉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은 그 와중에도 자꾸만 밖으로
새나가고 있었다.
내리고 싶었지만 걷기엔 너무 먼 거리.
바닥에 내려둔 보자기를 들어 올려 다리 사이에
끼웠더니 흘러넘친 국물이 내 바지를 적셨다.
그래도 그게 마음이 편했다.
금세 축축해졌지만 참고 견딜만했다.
주전자의 국물이 반쯤으로 줄었을 무렵 버스가
목적지에 멈추었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내렸다.
'미안합니다~' 말이라도 하고 내릴걸...
형이 그 국을 남기면 욕이라도 한번 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죽을 상을 하고 들어선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을 했던지
형은 그 국을 맛있게 다 먹어주었다.
"인자 히야 저녁 심부름 안 할랍니다..."
집을 들어서며 입이 불퉁 튀어나와 심통을 부리는
나를 본 어머니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세 알아채셨다.
"국물이 샜구나~ 아이고 우짜노... 그 생각을 못했네.
엄마가 우리 망내이 우사시켜버렸구나~"
내 심통보다 더 미안해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다시 막내아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설움이 다 위로가
되었으므로...
"헤헤~ 나는 괜찮심다. 내일은 뚜껑도 비닐로 덮어
씌워주이소. 고무로 잘 감싸마 안 샐 낍니다."
어버이날, 지나간 어머니 추억을 떠올려보다가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보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얼굴의 연유를 찾아 나섰더니
잊지 못할 그 심부름에서 멈추어 섰다.
'어무이, 저 잘 지냅니다. 어무이도 잘 계시지예?'
첫댓글 어머님
잘 계실겁니다.
사랑과 인자함이
가득한 어머님이셨군요.
형님께서는
수술경과가 좋아
훌륭한 의사가
되셨겠지요?
막내로 자라셨지만
어머님께 효도하시고,
형님께도 잘 해 주신
마음자리닝께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봅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막내로 자라 눈치가 빤했던가 봅니다. ㅎ
형은 소아심장 수술을 잘 하는
의사로 열심히 일 하고 퇴직해서지금은 평온한 노후 즐기며 삽니다.
글을 읽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사랑이 진하게 배어 있는 글이라서 입니다.
어머니 사랑 형제 간 사랑 모두 다 사랑이었습니다. ^^~
가족이니까요...
흩어져 살지만 늘 함께 머뭅니다.
가창골이라면 물이 참 맑은 곳이지예?
가창에는 약수터도 있었던지
제가 살던 시골에서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약수를 마시러 가창까지 가시던 생각이 나네요.
사랑의 가족.
사랑으로 하나가 된 가족임을 글을 통해서
느끼게 되네요.
어머니의 사랑을 형에게 배달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담당하는 막내가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버스가 털컹일 때마다 주전자에서
넘쳐 흐르는 국물,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글을 읽는 제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ㅎ
그래도 계속 사랑의 도시락을 배달하는 막내.
잊지 못할 마음자리 님의 심부름.
어머니한테 막내는 사랑을 더 주고싶은
아들이 아니었을까요.
어머니도 계신 그곳에서 막내아들을
늘 응원하실 겁니다.
감기 앓느라 잠 못 이루던 밤도 이제 서서히
새벽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막강 가창골은 다 커고 나서야
가보았습니다. 계곡 깊어 물이
맑다고 들었습니다.
가창물이 수성못에 닿기전에
냉천이란 곡이 있는데, 맑은 물이
참 차다고 그렇게 불렀다네요. ㅎ
잠도 못 이룰 정도라니... 몸살과
열이 심한 감기 앓으시나 봅니다.
얼른 쾌차하세요~
마음자리님께서는
정이 샘이 되어 솟는 분입니다.
형제의 정도 어머니 가시고 나면
자연히 조금씩 옅어질텐데요.
옛 어린 시절의 맏형과의 우애
어머니의 끝이 닿지 않는 사랑을
찬란한 오월의 달에
더욱 간절히 생각 나는 것 같습니다.
마음자리님의 글을 통하여
어머니의 사랑과 형제들 간의 아름답던
시절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네요.
꽃과 연록의 새잎을 만나는
아름다운 계절에, 잘 지내셔요.
과분한 댓글에 몸둘 데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
그 정스럽고 따뜻했던 일들이
그냥 사라질까 겁이나 하나하나
기록해 아이들에게 넘겨주려는
바람으로 쓰는 글들입니다.
늘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포장 도로 얼마나 덜컹 거렸겠어요.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국물 중학생 아이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까지 타고 다니며
형님 밥 심부름 했던 맘자리 님 맘씨가
넘나 선하세요.
화목한 가족사랑 왠지 훈훈해요.
마치 5월은 가정의 달처럼!
참 난감했지요. ㅎ
돌아보면 우스운데, 처할 땐 심각하고
곤란해서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ㅎㅎ
마음님 글을 읽으며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키우던 누에의 뽕잎을 따러 가던 길의 키가 큰
미루나무와 물맑은 개천이 떠오르네요.
초등생 시절 어머니의 보디가드(?)겸 심부름을
위해 함께 가던 그 길이 어머니와의 저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왜 그런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지 못 했는지
후회막급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
어머님 따라 뽕잎따러 같이 가던 길에
어머님께 드릴 효도 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모 되어보니 그런 일이 다
효도구나 싶더군요. ㅎ
가정의 달 5월에
온기 넘치는 따뜻한 글이
선물처럼 카페 회원들에게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음자리님이 대구분이시군요,
제가 군생활을 대구에서 했고
수성못이니 가창이니 많이 들어온 지명입니다.
가창에는 브라보 포대..성주에는 알파 포대..
팔공산에는 방공포 여단이 있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아... 가을이오면님이 여름이면
무지 덥고 겨울엔 무지 추운
대구에서 군생활 하셨군요. ㅎ
2군 사령부와 50사단 K2공군기지,
미8군이 대구에 있어 대구 주변에
군 부대들이 참 많았습니다.
따뜻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심부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심전심으로 어무이도 형도 아마 빙그레 웃으실거같네요.
제가 어머니 도시락 배달 전담병이었지요 ㅎㅎ. 아버지 공직에 계실 때 숙직 도시락 배달도 제가 열심히 했습니다. ㅎ
어머나~어떡해요~
버스 안에서 국물이 흐르다니..
챙피하고 미안하고 그랬지요?ㅎ
그래도 착하신 마음자리님은
형님께 화도 안내셨나봐요
막내, 마음자리님!
저도 막내예요~~
요즘 친구들은 그런 경우 대략난감
이라고 하던데요. ㅎㅎ
아... 루루님과 막내라는 공통점이
있군요. ㅎ
참으로 가족애가 넘치는 가정의 모습에 내 마음도 훈훈해집니다.
아픈 아들에게 국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
열심히 심부름을 한 막내 마음자리님.
그 정성으로 아마 형님은 건강을 회복하였으리라 믿습니다.
네. 모든 일들이 잘 풀렸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하나의 에피소드였지요. ㅎ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정말 잘읽어습니다,
저도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머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지요
그런데 어머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였을때
참으로 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놀기에 바뻤지요
참으로 후회 입니다
사랑이 물처럼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 거꾸로 돌려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자식들 마음엔 다
후회가 남기 마련인가 봅니다.
저도 후회되는 일 참 많습니다.
'꼭지로 새어 나오던 어머니의 사랑'
그 나이에 참 난감했었을텐데 심부름을 계속 하신 마음자리님의 심성이 엿보입니다.
따듯함이 절로 나오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따뜻함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