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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러시아와 25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 강남영(52) TRC코리아 대표는 “러시아와 비즈니스할 때 중요한 것은 끈기”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한·소 수교(1990년) 직후인 1991년 모스크바 유학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모스크바 유학 중 삼성그룹 기술사업실의 모스크바 주재원으로 채용돼 러시아의 고급기술을 사들이는 ‘기술 헌터’로 일했다. 지금은 대(對)러시아 무역·마케팅 및 기술이전 사업을 하는 TRC코리아를 이끌고 있다.
강 대표의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부인은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이다. 그는 25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러시아, 지금부터 10년이 기회다’(라온북)란 대(對)러시아 비즈니스 지침서를 펴냈다. 책에는 러시아의 각종 상거래 관행과 보드카와 사우나 매너 같은 소소한 팁들도 가득하다. 주간조선과 만난 지난 6월 15일도 그는 러시아 출장길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다.
강 대표는 “러시아의 현재 상황은 1998년 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 때와 비슷하다”고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으로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가 장기화되면서다. 또 셰일가스 혁명으로 국제유가마저 폭락하면서 석유·천연가스 등에 의존해 온 루블화 가치마저 반토막 났다. 이로 인해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탈출이 이어지고 있다.
강 대표는 “이런 상황은 한국 기업에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금수조치가 이어지면서 러시아의 바이어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대체수입선을 물색 중이다. 또 한국 등을 모델로 자원의존형 경제구조를 제조업 위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번에 러시아에 갔을 때는 과거에는 만날 수조차 없던 바이어들을 대거 만나고 왔다”며 받은 명함을 수북이 늘어 놓았다.
러시아 경제 상황도 한 고비를 넘겨 안정화 추세다. 달러당 30루블에서 60루블까지 치솟았던 루블화는 52루블로 안정화 단계를 밟고 있다. 강 대표는 “이런 틈을 타서 중국 기업들은 러시아 기업을 사들이는 등 러시아 시장에 돌진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삼성전자가 TV와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고, LG전자는 에어컨과 세탁기 시장을 휘어잡고 있다. 현대차의 솔라리스(한국명 엑센트) 같은 차는 러시아에서 ‘국민차’ 대접을 받는다. 이는 1998년 러시아 외환위기 때가 계기가 됐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유럽과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러시아 시장을 떠났다. 하지만 삼성, 현대차, LG는 의도치 않게 탈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러시아에 발이 묶였다. 이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다.
러시아에 남은 한국 기업들은 볼쇼이극장 후원, 톨스토이 문학상 후원 등 현지 공헌사업을 벌였다. 외환위기가 끝나고 2000년대 초반 유가가 반등하자 한국 기업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은 데 따른 반사이익을 거뒀다. 강 대표는 “가전매장 매대에서 변방에 있던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대접받으며 매대 중앙으로 올라온 곳도 러시아”라고 했다. 이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반복됐다. 1998년 사태로 교훈을 얻은 현대차는 일본 도요타, 미국 포드 같은 자동차 기업이 철수할 때 딜러망을 대폭 늘리는 모험을 강행했다. 이에 현대차의 러시아 시장점유율은 되레 높아졌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