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벨-서서평 등 잠든 묘원...곳곳에 서양식 선교사 주택도 볼거리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 벽에 적힌 선교 목표. '조선의 짐을 들어주고 조선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라고 적혀 있다.
‘조선의 짐을 들어주고 조선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광주광역시 양림동 선교사 묘원엔 이런 문구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100년 전 당시 선교사들은 이런 선교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왔고, 평생을 헌신하다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가을 볕이 따사로운 이 묘원 입구엔 ‘오목사(吳牧師)’라는 석 자가 뚜렷이 새겨진 묘비가 서있다. 이 묘원에 처음 안장된 오웬(1867~1909) 선교사다. 1904년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호남지역에 정착해 목포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오 목사의 묘비 곁엔 유진 벨(1868~1925) 선교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 선교사 등의 묘비가 서있다. 유진 벨은 목포와 광주 선교부를 창설하고 광주 전남 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한 전남 선교의 대표적 인물.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유진 벨 재단’을 통해 북한의 결핵환자를 지원하는 등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서서평은 ‘한국 간호학계의 어머니’다. 1912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광주 제중병원 간호원장으로 일하며 고아와 한센인을 돌봤는데, 양딸로 거둔 고아가 13명에 이르렀다. 1934년 그가 별세했을 때 수중엔 현금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고 한다. 20여명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이 묘원엔 ‘영혼까지 웃게 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묘비도 있었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 광주 선교의 초석을 놓은 오웬 선교사(앞쪽)와 유진 벨 선교사의 묘비가 서있다.
광주에서 개신교의 역사는 1904년 유진 벨, 오웬 선교사 등이 양림동에 자리잡으면서 시작됐다. 미국 남장로교가 당초 선교 기지를 삼으려 했던 곳은 광주가 아닌 나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주는 유생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주로 옮겨온 선교사들이 자리잡은 곳이 양림동이었다. 시 외곽이었던 양림동 언덕은 고려시대부터 시신을 버리던 풍장(風葬) 터였다고 한다. 버려진 땅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땅이었던 셈이다. 선교사들은 이런 죽음의 땅에 선교 기지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사역을 시작했다.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이곳 유진 벨의 사택에서 1904년 예배를 드리면서 광주·전남 지역 선교사역이 시작됐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는 선교사들의 업적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잘 설치돼 있다.
당시 선교사들은 1893년에 합의한 ‘네비우스 원칙’에 따라 활동하고 있었다. 전도의 목표는 상류층보다는 근로계급, 여성과 청소년 중점 전도, 교육자 양성, 순한글 사용, 교회의 자립, 한국인 전도는 한국인 스스로, 의사가 본보기가 되어 깊은 환자를 감화하라 등의 원칙이었다. 이런 원칙 아래 선교사들은 서민들과 부녀자, 어린이, 고아, 행려병자 등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광주 제중원(광주기독교병원 전신)이 문을 연 것은 이듬해인 1905년 11월 20일. 놀란(Nolan·한국명 노라노) 선교사가 유진 벨 선교사의 임시사택을 개조해 병원 문을 열고 스무명의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9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제중원은 11월 20일부터 이듬해 1월 1일까지 1개월여 동안 293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2건의 큰 수술을 했다고 한다. 특히 예배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는데, 이 예배 자체가 사람들에겐 신기한 관심거리였다고 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렇게 ‘구경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잘 활용했다. 이렇게 진료와 예배를 통해 선교사들은 미신을 제거하고 선교를 하는 효과를 얻었던 셈이다. 남학생을 위한 숭일학교뿐 아니라 여학생을 위한 수피아여학교도 세웠다.
광주 양림동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의사였던 우일선 선교사는 한센인과 고아를 헌신적으로 돌봤다
현재 양림동은 ‘역사문화마을’로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양림동 일대를 거닐다보면 이국적 풍경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땅에 개신교와 근대 문화를 선물한 선교사들의 흔적이다. 네덜란드식 회색 벽동 2층 집인 오원기념각과 유진 벨 기념관, 수피아홀, 윈즈버로우홀 등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광주 사직공원 전망타워에서 본 양림동 전경. 호남신학대와 광주간호대학, 수피아여고 등 학교와 교회, 선교사 묘원 등이 한눈에 보인다.
그 가운데 ‘우일선 주택’의 주인 로버트 윌슨(1880~1963)은 외과의사이자 광주·전남지역 한센인의 수호자 같은 존재였다. 제중원 2대 원장이었던 우일선은 양림동에 한센인 집단 거주시설을 마련했다. 이 시설은 1926년 당시 조선총독부의 한센인 이주 정책에 따라 여수에 새 정착촌을 마련해 옮겨가게 되는데, 그곳이 훗날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1902~1950) 목사가 사역한 ‘애양원’이다.
광주 양림동에선 이렇게 조선의 짐을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영혼까지 웃게 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최흥진 호남신학대 총장은 “광주 정신의 모태는 선교사들의 희생 정신”이라고 말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10/22/SIS6KTKJEJH4FDHU35N6KUAC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