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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水를 따라 南으로 내려가서 瑞石, 月出에 오르고… …[제5편]
[호수(湖水)를 좇아 남(南)쪽으로 내려가다니, 半島 땅에 2차 천지개벽이?]
2026년 09월 27일
○ “반도(半島) 땅”
우리가 사는 반도(半島) 땅은 : 반도(半島) 땅에 대한 각 곳의 옛 지명(地名)은 제대로 알려있지 않고, ‘한반도(韓半島) 또는 조선반도(朝鮮半島)’라는 말은 근대사(近代史)에서 등장(登場)하는 문구(文句)다. 더불어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의 광활(廣闊)한 흑룡강(黑龍江) 이남(以南)의 땅에 대한 이름(地名)조차도 없어,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는, 19세기(世紀) 말(末)로부터 20세기(世紀) 초(初)에 걸쳐 일제(日帝)에 의해 대대적(大大的)으로 극비조사(極祕調査)가 이루어졌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음에도. 이걸 믿으려 하지 않는다.
21세기(世紀), 현재(現在)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민족(韓民族)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남북(南北) 3 천리(千里), 동서(東西) 수백(數百) 킬로미터【꼬불꼬불한 휴전선(休戰線)이 240㎞에 불과(不過)하다】에, 면적(面積)은 남북한(南北韓) 220,000㎢에 불과(不過)한 곳이다.
【반도(半島)의 본토(本土)는 약(約) 217,000㎢로, 오늘날 중국(中國)의 호남성[湖南省 : 211,842㎢] 보다 아주 조금 큰 면적(面積)을 가진 곳이다】
☛ 여기서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바탕으로, 삼한(三韓) 땅, 방(方) ‘4’ 천리(千里)를 면적(面積)으로 환산(換算)해보자 : 1,600×1,600=2,560,000㎢ 가 되는데, “2,560,000㎢”는 어느 정도(程度)의 크기가 되는지를 알아보자.
오늘날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 『해남성(海南省) 34,000㎢ + 절강성(浙江省) 102,000㎢ + 강소성(江蘇省) 103,000㎢ + 복건성(福建省) 122,000㎢ + 안휘성(安徽省) 140,000㎢ + 강서성(江西省) 167,000㎢ + 하남성(河南省) 167,000㎢ + 귀주성(貴州省) 177,000㎢ + 광동성(廣東省) + 180,000㎢ + 광서성(廣西省) 220,000㎢ + 운남성(雲南省) 394,000㎢ + 호북성(湖北省) 186,000㎢ + 사천성(泗川省) 485,000㎢ + 섬서성(陝西省) 일부(一部) 83,000㎢』를 모두 포함(包含)한 땅이 대략(大略), 방(方) ‘4’ 천리(千里) 안(內)에 포함(包含)되는 땅이다.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남해(南海)와 동해(東海) 연안(沿岸) 모두의 땅이다.」
• 일설(一說)에, 한국(韓國)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국(韓國)【본시(本是) 진(晉)에서 분리(分離)되어 위(魏), 조(趙)나라가 되어 삼진(三晉)으로 불렸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섬서성(陝西省), 하남성(河南省), 호북성(湖北省) 일부(一部)를 중심(中心)으로 ‘1’ 천리(千里) 땅을 가진, 갑병(甲兵) 30만(萬)을 가졌던 강대국(强大國)이 되었으나, 조(趙)와 진(秦) 사이에 끼어 있어 쇠퇴(衰退)하여, B.C 239年에 진(秦)의 공격(攻擊)에 여러 성(城)을 빼앗겼고, B.C 230년(年) 진(秦)의 재차(再次) 공격(攻擊)으로 한왕(韓王) 안(安)이 항복(降服), 망(亡)했다. 본시(本是) 희성(姬性)으로 한씨(韓氏)다.】이 진(秦)에 의해 망(亡)하자, 유민(流民)들이 남(南)쪽으로 이주(移住)하여 “한(韓)”이 되었다고 전(傳)해진다.
•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발행(發行) 인구조사(人口調査) 보고서(報告書)’【소화(昭和) 2年(1,927), 12월 15일 인쇄(印刷)】를 인용(引用)해 보면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보면 [AD 1,454年 단종(端宗) 2年, 갑술(甲戌) 정인지(鄭麟趾) 등에 의해 편수(編修)라고 기록하고 있다]
➊《경상도(慶尙道) 유수부(留守府)는 경주(慶州) 1곳인데, 당시(當時)의 경주(慶州) 호구(戶口)는, 「1,592호(戶)에, 남(男) 5,894 口, 여(女) 6,328 口, 합(合) 12,220 口」라고 하였다.
➋ 《그로부터 ‘700여(餘) 년(年) 전(前)’, 8세기(世紀) 신라(新羅) 경중(京中)【경주(慶州)】의 호수(戶數)는 178,936호(戶)【1 戶 : 5 口, 약(約) 900,000 口∼1 백만(百萬) 口】였으며, 1,360방(方)에, 55리(里)였으며, 35개소(個所)의 금인택(金人宅)이 있었으며, 또 사절 유택(四節遊宅)【春, 東野宅 夏, 谷良宅 秋, 仇知宅 冬, 加伊宅. :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라고 하였음】이 있었으며, 49대(代)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城)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고,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第四十九憲康大王代. 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歌吹滿路. 晝夜不絶.】》라고 하였다.
➌ 「서력(西曆 AD) ‘8’세기(世紀) 때의 경주(慶州) 도성(都城)은, 그 크기가 55리(里)【이보다 더 큰 도성(都城)은 어디에도 없었다. 낙양(洛陽) 도성(都城)이 55리(里)였다.】에 달했으며, 1,360방(方)에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일백만(一百萬) 이상(以上)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以後) ‘700’년이 흐른 뒤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서는 「1,592호(戶)에, 남(男) 5,894 口, 여(女) 6,328 口, 합(合) 12,220 口」이라고 했다.
「1백만(百萬)의 도회지(都會地)가 200여(餘) 년(年) 뒤에 고려(高麗)에 병합(倂合)되어버리는 바람에 도성(都城)으로써의 그 기능(機能)이 사라졌으나. 유수부(留守府)로의 기능(機能)은 계속(繼續)되었음에 비춰보면」 : 「1백만(百萬) 이상(以上)의 인구(人口)가 12,000명(名)으로 거의 황폐화(荒廢化), 소멸화(消滅化)되었다」라는 것은, 다른 도회지(都會地)나 도성(都城)과 비교(比較)해 보았을 때, 전혀 다른 양상(樣相)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인간(人間) 삶의 발자취로 보면 : 인류사(人類史)에서 일백만(一百萬) 이상(以上)의 인구(人口)가 700여(餘) 년(年) 뒤에 12,000 口가 되었다는 것은, 정복자(征服者)였던 왕건(王建)의 휘하(麾下) 병사(兵士)들에게 도성(都城)【경주(慶州)】의 남자(男子)들은 모조리 참수(斬首)되고, 여인(女人)들 또한 전부(全部) 포로(捕虜)로 끌려가 성(性) 노리개가 되고 노예(奴隸)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理解)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곧 ‘경주(慶州)’는 정복자(征服者)들에게 모조리 파괴(破壞)되고 황폐화(荒廢化)되어 인간(人間)이 살아갈 수 없는 황폐(荒弊)한 땅으로 변(變)했다고 봐야 한다. 맞는 말인가?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인가? 필자(筆者)는 학계(學界) 여러분들에게 반문(反問)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以後)에도 동도(東都)라는 이상(異常)한 이름으로 불리우지 않았는가? “남경(南京)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경주(慶州)가 동경(東京)이 될 수 있나?” 개성(開城)이나 한성(漢城)에서 바라보면 : 경상도(慶尙道) 땅이 남(南)쪽이 아니고 동(東)쪽에 있나?
☛ 그렇다면 「삼남(三南)이니, 삼남삼도(三南三道)니, 하도(下道)」란 말들은 모두 「남(南)쪽의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의 별칭(別稱)」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오로지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만이 홀로 “동(東)쪽에 치우쳐 있어 동경(東京)이 되었다”라는 건가?”」 이러한 ‘犬 소리’는 ‘초딩’에게도 통하지 않는 헛소리다.
➍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안(內)에 있었다는 「1,360방(方), 35 금입택(金入宅)과 사절유택(四節遊宅)」 등(等)은, 그 흔적(痕迹)이나 유적(遺蹟)들은 모조리 병화(兵火)로 소실(消失)되고, 흔적(痕迹)조차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인가? 【1,360방(方)이라는 것이 뭔가? 1,360 마을이 있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반도(半島) 신라(新羅)를 외쳐대는 건가?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은 여러 이름으로 호칭(呼稱)되어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있는데, 대표적(代表的)으로는 “진한(秦韓)”이라고 불렸는데, 그 연유(緣由)는 진(秦)나라 망인(亡人)들이 정처(定處) 없이 떠돌며 유랑(流浪)하다가 마한왕(馬韓王)이 이를 딱하게 여겨, 그 도움으로 겨우 정착(定着)했으며, 점점 발전(發展), 진한(秦韓)이 되고, 진한(辰韓)이 되었다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경주(慶州) 모처(某處)에서 알을 깨고 나왔다”라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사기극(詐欺劇)이다.」
그래서 ‘박씨(朴氏)’가 되었다고 했으나, ‘박(朴)’이라는 성(性)은, 이미 진(秦)나라 때에도 오늘날의 사천(四川) 땅에 있었던 ‘부족(部族)의 성씨(姓氏)’였다.
➎ 또 하나는, 당시(當時)【AD 1,910년(年) 인구조사서(人口調査書)】의「경상도(慶尙道) 전체(全體) 호구(戶口)는, ‘41,320’호(戶)로, ‘20여(餘)’만(萬)’에 불과했다」라는 점이다. 이러한 인구(人口) 현상(現狀)은, 「반도(半島) 서남(西南)쪽 경상도(慶尙道) 땅에 신라(新羅)는 없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 하는 명백(明白)한 기록(記錄)이다.
【三國遺事, 原典, 原文 /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南宅 北宅 亐比所宅 本彼宅 梁宅 池上宅[本彼部] 財買井宅[庾信公祖宗] 北維宅 南維宅[反香寺下坊] 隊宅 賓支宅[反香寺北] 長沙宅 上櫻宅 下櫻宅 水望宅 泉宅 楊上宅[梁南] 漢歧宅[法流寺南] 鼻穴宅[上同] 板積宅[芬皇寺上坊] 別敎宅[川北] 衙南宅 金楊宗宅[梁官寺南] 曲水宅[川北] 柳也宅 寺下宅 沙梁宅 非上宅 里南宅[亐所宅] 思內曲宅 池宅 寺上宅[大宿宅] 林上宅[靑龍之寺東方有池] 橋南宅 巷叱宅[本彼部] 樓上宅 里上宅 椧南宅 井下宅 : 又四節遊宅 : 春, 東野宅 夏, 谷良宅 秋, 仇知宅 冬, 加伊宅. : 第四十九憲康大王代. 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歌吹滿路. 晝夜不絶.】
☛ ‘원전(原典) 원문(原文) 기록(記錄)’에 충실(充實)해야 할 이유(理由)가 바로 위에서 언급(言及)된 조건(條件)들 때문이다. 오늘날의 행성(行星) 내(內)에서 이곳저곳에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시절(時節)의 도성(都城)이 널려 있으나, 도성(都城)인 곳은 처음부터 백성(百姓)들이 살아가기에 적합(適合)한 곳, 방어(防禦)에 유리(有利)한 여러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키는 곳을 골라 선택(選擇)하여 건설(建設)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도회지(都會地)는 수백(數百), 일천(一千), 이천(二千) 여(餘) 년(年)이 지난 오늘날에도 흥성(興盛)하여 그 옛 도성(都城)의 규모(規模)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황당(荒唐)한 결과(結果)를 보여 주고 있다.」 「평양(平壤), 한양(漢陽), 개성(開城), 경주(慶州), 부여(夫餘) 등을 보면 황당(荒唐)하기가 그지없을뿐더러, 그 땅이 「“방(方) 4 천리(千里)”에 달했다」라는 한국(韓國)의 78개(個) 나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외쳐대는지 그 연유(緣由)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기록(記錄)을 보자.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가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것인지를 말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더라도 정신(精神)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제정신(精神)을 좀 차려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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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耳溪集 10권 / 서문(序) : 帶方世稿序
《吾東人才之盛。必稱二南。盖其地靈亭毒。殊異於他路也。余嘗遵湖而南。登瑞石,月出之山。涉鳩林之野。放于耽羅之津。觀其峰巒秀拔。地氣明麗。宜乎出瓌偉奇俊之士也。: 우리나라에서 인재가 많이 나기로 꼭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을 일컬으니 신령스러운 땅의 화육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호수(湖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에 오르고 구림(鳩林)의 들판을 지나고 탐라(耽羅)의 나루까지 이르렀었다. 산봉우리의 수려함과 지기(地氣)의 맑고 밝음을 살펴보니 빼어나고 걸출한 선비(士)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는데… …,
㈠ 위의 글에서 「東人」이란 도대체 어는 나라 사람을 지칭(指稱)하는 걸까? ‘동국(東國) 사람’이란 뜻이다. 조선(朝鮮)이면 조선(朝鮮)이지 동국(東國)은 뭘까? 누구도 시원한 답변(答辯)을 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학계(學界)의 현주소(現住所)다.
‘동인(東人)’이 있다면 : 분명 ‘서인(西人)’이 있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누가 서인(西人)이라는 걸까?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해 놓았기로, 서인(西人)이란 서방인(西方人)을 말하며, 서융(西戎)이라고 했고, 서호(西胡)라고도 했다」라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이를 “조선(朝鮮)이 동방(東方)에 있었으니, 동국(東國)이라 했다”라는 설명(說明)을 한다. 그러나 이는 반(半)은 맞는 말이고, 반(半)은 틀린 말이다.
「동방(東方)」이라는 뜻은, 말 그대로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이 반도(半島)를 뜻한다는 말은 헛소리 중의 가장 악(惡)한 헛소리다.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인용(引用)하면 : 「夫 中 華 在 蔥 嶺 之 東 : 중화(中華)는 총령(蔥嶺)의 동(東)쪽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동방(東方)은, 총령(葱嶺) 동(東)쪽을 말한다는 것이고, 그곳에 중국(中國)이 있다.」라는 것이며, 「그 산은 동서(東西)의 정(正) 가운데에 있다 : 山 居 東 西 正 中.」라고 하였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보면 : 『동방(東方)은 우리나라 곧 조선(朝鮮)이라고 하였으니, 총령(葱嶺) 동(東)쪽 땅에 조선(朝鮮)이 있고, 중국(中國)이 그곳에 있으니, 중국(中國), 중화(中華)는 곧 조선(朝鮮)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 그 반대(反對)로 : 「총령(葱嶺) 서(西)쪽은, 서방(西方) 땅이 되고, 그곳에 사는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을 서융(西戎), 서호(西胡), 서이(西夷)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미친 헛소리로 취급(取扱)하는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은, 한민족(韓民族)에게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 중에서도 가장 악독(惡毒)하고, 악랄(惡辣)한 반역세력(叛逆勢力)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㈡ 「余嘗遵湖而南。登瑞石,月出之山。涉鳩林之野。放于耽羅之津。: 나는 일찍이 호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에 오르고 구림(鳩林)의 들판을 지나고 탐라(耽羅)의 나루까지 이르렀었다.」라고 말씀하셨다.
➊ 위의 구절(句節)을 보면 : 호남(湖南) 땅은, 호수(湖水)를 따라 남(南)쪽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여기에 나오는 「호수(湖水)는 말 그대로 호수(湖水)를 중심(中心)으로 놓고, 땅(地) 곧 지역(地域)을 나눌 수 있는 큰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다.
반도조선(半島朝鮮)에서 충청도(忠淸道)나 전라도(全羅道) 땅에 “큰 호수(湖水)”가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는 “호남(湖南)”이니, 호우(湖右)니, 호좌(湖左)니 하는 특정(特定) 지방(地方)의 별칭(別稱)과도 직결(直結)되며, 또한 ‘큰 호수(湖水)’에서 파생(派生)된 여러 지명(地名)이 있다.
곧 「호북(湖北), 호남(湖南), 호동(湖東)인 호좌(湖左), 호서(湖西)인 호우(湖右)」가 있으며, 큰 강(江)을 기준(基準)하면, 「강우(江右), 강좌(江左)가 있고, 강북(江北), 강남(江南)이 있다.」
그런데 이것도 아닌 것이, 반도(半島) 땅에는 지역(地域)을 나눌만한 큰 호수(湖水)가 없다. 그런데도 “호남(湖南)은 있는데 호북(湖北)은 없다. 또 강우(江右)도 없고, 강좌(江左)도 없다. 강북(江北)도 없으며, 강남(江南)도 없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전라도(全羅道) 땅을 지칭(指稱)하여 “강남(江南)”지방(地方)이라고 했다.”
“하(河)”가 없음에도 불구(不拘)하고, “하남도(河南道)”【공주(公州)와 운주(運州) 중심(中心)의 도(道)】라는 행정체계(行政體系) 이름은 버젓하게 만들어졌으며, 어디에 있는 어떤 강(江)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강남도(江南道)도, 산(山)의 남(南)쪽이라는 산남도(山南道), 또 바다에 닿아있는 해양도(海陽道)도 만들어졌다.
이 좁디좁은 땅을 가리켜 「넓고 넓은, 땅이 넓어, 수만(數萬) 리(里) 영토(領土)였다」라는 말이 과연(果然) 가능(可能)한 것인지, 또는 「그 땅이 동서(東西) 일만(一萬) 리(里)였다」라는 말을, 얼굴 뻔뻔하게 할 수 있는지조차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 지명(地名)이 되어버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설명(說明)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진실(眞實)을 모르는데 어떻게 답(答)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공통(共通)된 것은 「강북(江北)과 강남(江南)은 호북(湖北)과 호남(湖南)과 겹치는 곳이고, 호우(湖右) 및 호좌(湖左)는 강우(江右)와 강좌(江左)의 땅과 겹치게 되는데, 이것은, 그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할 수 없는 거대(巨大)한 자연환경(自然環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가 만들어진 땅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반도(半島) 땅은 너무도 협소(狹小)하고, 좁은 땅이기 때문에 이런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를 품을 수가 없다.” 【호남(湖南) 땅 동서(東西)가 겨우 ‘100㎞’에 불과(不過)하다】
➥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장강(長江)과 동정호(洞庭湖)’와 여러 개의 큰 호수(湖水)들이 있는 땅이다. 이곳은 동서(東西)로 1,500∼2,000㎞에 이르며, 약 4∼5 천리(千里)에 이르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余 嘗 遵 湖 而 南 : 나는 일찍이 호수(湖水)를 쫓아(따라) 남(南)쪽으로 내려갔다」라고 하였으니, 저자(著者)는 큰 호수(湖水)를 쫓아 남(南)으로 내려갔다는 뜻인데… …도대체 반도조선(半島朝鮮) 남방지대(南方地帶)에 어디에 어떤 큰 호수(湖水)가 있다는 말인지, 말 그대로 귀신(鬼神)이 곡(哭)할 노릇이다. 벽골제(碧骨堤)는 말 그대로 제방(堤防 : 둑)을 뜻하는 것이지 자연적(自然的)으로, 천연적(天然的)으로 형성(形成)된 호수(湖水)가 아니다.
결정적(決定的)인 말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기록(記錄)이다〉 필자(筆者)는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系) 여러 학자(學者)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이런 것들이다.
이런 기본적(基本的)이며, 아주 기초적(基礎的)인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 하나도 답변(答辯)이나 설명(說明)할 수 없다면 : 그게 어디 학자(學者)라고 명함(名銜)을 내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제천(堤川)에 있다는 의림지(義林池)의 지(池)가 그곳을 중심(中心)으로 지역(地域)을 나눌만한 큰 호수(湖水)라고 말할 수 있나? 저수지(貯水池)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저수지(貯水池)를 기준(基準)으로 호서(湖西), 호우(湖右)라고 했다는 설명(說明)이 진짜 웃긴다.’라고 여기지 않나?
진짜로 이 ‘저수지(貯水池)’를 기준(基準)으로 했다면 ‘지우(池右), 또는 지서(池西)’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저수지(貯水池)를 호수(湖水)라고 부르는 무지무식(無知無識)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벽골제(碧骨堤)는 제방(隄防)을 말하는 것이지, 벽골호(碧骨湖)라고 부르나? 많은 설명(說明)에도 벽골제(碧骨堤)는 저수지(貯水池)라고 하였다. 이것 또한 똑같은 예(例)로 “한문(漢文) 몇 자 때문에 멸문(滅門)당할 수 있다”라는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이러한 웃기는 황당(荒唐)한 일은 절대(絶對)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➌ 「余 嘗 遵 湖 而 南 : 나는 일찍이 호수(湖水)를 쫓아(따라) 남(南)쪽으로 내려가, 登瑞石,月出之山。涉鳩林之野。放于耽羅之津。: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에 오르고 구림(鳩林)의 들판을 지나고 탐라(耽羅)의 나루까지 이르렀었다.」 라고 하였는데,
• 「‘서석산(瑞石山)’은,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담양에 걸친 무등산(無等山)의 별칭(別稱)이라고 하였으니,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북(北)쪽 땅에 호수(湖水)가 남(南)쪽으로 길게 펼쳐져(늘어져) 있으니, 이 호수(湖水)를 따라【遵 / 좇을 준(遵) : 좇다. 따라가다】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에 올랐다」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아래의 글을 보자.
그러나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 북(北)쪽 땅에서 도성(都城)까지도, 그 어디에도 “호수(湖水)”라고 할 만한, 그 호수(湖水)를 따라서 남(南)쪽으로 내려갈 만한 “호수(湖水)”【湖水 : 사면(四面)이 육지(陸地)로 싸이고, 우묵하게 들어가 물이 괴여 있는 곳, 못이나 늪보다 훨씬 넓고 깊음 : 한컴 한자】는, 반도(半島) 땅에서 듣기 생전(生前) 처음인 것이다.
☛ 또 ‘사학(史學)을 전공(專攻)한 사학자(史學者)’들이 「“호수(湖水)와 지(池)와 제(堤)”도 구분(區分), 구별(區別)하지 못한다.」라고 하면 : 사학(史學)을 전공(專攻)해서 무엇에 쓸려 함일까? 이런 자(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어떻게 신뢰(信賴)할 수 있으며,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 참 답답하기 한(限)이 없는 우리 학계(學界)다.
『저자(著者)는 호수(湖水)를 따라 서석산(瑞石山),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에 올랐고, 이어서 구림(鳩林)의 들판을 지나, 탐라(耽羅)의 나루(津)까지에 이르렀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구림(鳩林)”은 나주(羅州) 일대(一帶)를 말한다고 하는데,
•「Naver, AI」에서는 말하기를 : 「구림(鳩林)은 단순한 자연 풍경만이 아니라 농경지와 호수, 산악 경관이 결합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밭두둑이 물고기 비늘처럼 교차한다는 묘사는 당시 사람들이 구림의 농지를 매우 질서 있고 풍요로운 모습」을 표현(表現)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구(鳩) : 비둘기 구(鳩)” 자(字)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밭두둑이 물고기 비늘처럼 교차(交叉)한다.”라는 모습으로 묘사(描寫)한다고 하는 것인지 필자(筆者)로서는 이해(理解)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물고기 비늘과 비둘기가 무슨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 고운집(孤雲集) 제1권 / 장(狀) / 예부 배상서 찬에게 보낸 장문〔與禮部裴尙書 瓚 狀〕편에서는 구림(鳩林)을 게림이라고 하였다. 즉 「無辱所知。示使鰈水儒流。鳩林學植。競勵觀光之志。皆增嚮化之心。이러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접수(鰈水 동방)의 유자(儒者)들과 구림(鳩林 계림)의 학도들에게 중국을 관광할 뜻을 격려함은 물론이요.」하였다.
… 도암집 제48권 / 행장(行狀) / 현감 오한 박공 행장〔縣監五恨朴公行狀〕: 《집이 영암(靈巖)의 구림(鳩林)에 있었는데, 구림(鳩林)은 호남 바닷가의 승경으로 물과 대나무, 언덕과 정원의 흥취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들판인 야(野)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 문곡집 제4권 / 시(詩) 146수 / 조경찬 어른의 안용당에 지어 보내다〔寄題曺丈敬璨安用堂〕: 《구림의 빼어난 경치 남쪽 지방에 드날리니 / 鳩林勝槩擅南隅》
… 구림(鳩林)의 들판 / 주(注) : 《구림은 현재 영암군 군서면 일대로 월출산의 서남쪽 줄기인 주지봉(朱芝峰) 아래이다. 구림이라는 명칭은 도선(道詵)의 탄생설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선이 갓 태어났을 때 숲 속에 버렸더니 비둘기들이 덮어 보호해주었다하여 그 숲을 구림(鳩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조그만 동네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 위에서 예(例)를 든 다른 분들의 구림(鳩林)과는 또 다른, 전혀 다른 설명(說明)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 「탐라(耽羅)의 나루」는 탐라(耽羅)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토(本土)에 탐라진(耽羅津)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는 것인지?
어디에서도 “탐라진(耽羅津)”이라는 지명(地名)은 없다. 다만 일반적(一般的)으로 “탐라(耽羅)의 나루(津)”로 이용(利用)된 것 같은 글자다.
(14) 이계집 제11권 / 송서(序) / 강진으로 부임하는 조학사 관보 홍진 에게 주는 송서〔送趙學士寬甫 弘鎭 之任康津序〕
《余於吾身。亦有親驗者焉。曩歲丁酉。獲戾淸朝。貶北塞之孔州。孔我東之極邊濱海。靺鞨之墟。魑魅之窟也。三春無花。八月見雪。衣無纊絮。食惟黍麥。余時年近六旬。旣不能其風土。又無醫藥以濟之。: 나도 내 자신에게서 직접 징험한 적이 있다. 나는 지난 정유년(1777, 정조 원년) 맑은 조정에 죄를 지어 북쪽 변방의 공주(孔州)에 폄직(貶職)되었다. 공주(孔州)는 우리나라의 변방 끄트머리 바닷가로 말갈(靺鞨)의 옛터이며 이매(魑魅)의 소굴로, 삼춘(三春)에도 꽃이 피지 않고 8월에도 눈이 내리며 옷에는 솜이 없고 음식은 오로지 기장과 보리뿐이다. 나는 당시 나이가 예순에 가까워 그곳의 풍토를 견딜 수 없었고 게다가 의원과 약조차도 없었다. 夫康去京不滿千里。視孔州減三之一也。戶按七千之富。地擅魚稻之饒。橘柚之包。竹箭之材。比諸北塞不毛之土。不可同年而語也。: 무릇 강진은 서울로부터 천 리가 되지 않으니 공주(孔州)와 비교하면 삼분의 일밖에 안 된다. 또 호구(戶口)【원문(原文)에는 호(戶)라 하였다.】는 칠천이나 되어 번성하고 땅은 물고기와 쌀의 풍요로움을 지니며 귤과 유자, 대나무살이 많으니 북쪽 변방의 불모지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 「강진(康津)은 1 천리(千里)가 되지 않으니, 공주(孔州)와는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한성(漢城)에서 공주(孔州) 곧 경흥(慶興)까지 ‘3’ 천리(千里)였다」라는 것이다.
「八 月 見 雪 : 8월에 눈(雪)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곳은 반도(半島)의 공주(孔州)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는 결코 숨길 수 없는 일인데, 겨우 229年 전(前)의 일이다.
혹시(或是), 한반도(韓半島) 땅에 이차(二次)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있어, 기후대(氣候帶)가 뒤바뀌는 현상(現狀)이 있었을까?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을 보면 : 이러한 일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말하고 있는 공주(孔州)는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흥(慶興)은 반도(半島) 땅 안(內)에 있다? 이래서 필자(筆者)는 국내(國內) 사학계(史學界)는 수치(數値)에 너무 무지(無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方) ‘4‘ 천리(千里)가 어느 정도(程度)의 면적(面積)이 되는지도 모르고,
동서(東西) ‘6,000’ 里가 어느 땅에서 가능(可能)한지도 모르고,
수만리(數萬里)가 과연(果然) 어느 정도(程度)의 면적(面積)이 되는지도 모르고,
일만리(一萬里) 영토(領土)가 과연(果然) 어디까지에 미치는가도 모르고,
동서(東西) ‘2’ 천리(千里)가 어디에 다다르는지도 모르고.
남북(南北) ‘4’ 천리(千里)가 어디에 닿는지 모르고,
한성(漢城)에서 ‘3’ 천리(千里)를 가면 어디에 닿는지 모르니… …도대체 아는 것이 뭔가?
• 동국(東國)의 여러 지리지(地理志) 또는 동사(東史) 등의 토산물(土産物) 편(篇)을 보면 :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남해(南海) 연안(沿岸) 땅에서 ”귤(橘), 유자(柚)“가 산출(産出)된다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반도(半島)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
「귤(橘), 유자(柚子)가 산출(産出)된다」라는 이야기는, 대대적(大大的)인 재배(栽培)는 아니더라고, 소규모(小規模)라도 백성(百姓)들이나, 또는 관(官)에서 재배(栽培), 또는 자생(自生)하고 있는 귤(橘)나무와 유자(柚子)나무를 관리(管理)하며, 채취(採取)하고, 도성(都城)의 임금에게도 공물(貢物)로 보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도(半島)의 강진(康津) 땅에 귤(橘)나무를 재배했다는, 또는 귤(橘)나무 자생(自生)하고 있었다」라는 흔적(痕迹)이나 사실(事實)은 없다. ‘귤(橘)’ 하면 제주(濟州)인데… …제주(濟州) 역시(亦是) 아주 최근(最近)의 20세기(世紀) 초부터 일본(日本)으로부터 묘목(苗木)을 들여와 재배(栽培)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반도학계(半島學界)의 어처구니없는 해설(解說)을 보면 : 《[주-D008] 귤과 유자, 대나무살 : 이 구절은 한유(韓愈)의 ‘송요도사서(送廖道士序)’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신기(神氣)에 감응한 것으로 백금ㆍ수은ㆍ단사ㆍ석영ㆍ종유ㆍ귤과 유자ㆍ대나무살ㆍ크고 굵은 좋은 목재는 어느 것 하나 감당할 수 없다. [其水土之所生, 神氣之所感, 白金ㆍ水銀ㆍ丹砂ㆍ石英ㆍ鍾乳ㆍ橘柚之包ㆍ竹箭之美ㆍ千尋之名材, 不能獨當也.]”》라고 풀이라고 힜는데… …왜 이런 풀이가 코미디처럼 들리는지를 보자 :
만약(萬若), 강진(康津)에서, “물고기와 쌀의 풍요로움을 지니며 ‘귤과 유자, 대나무 살’이 풍부(豐富)하게 산출(産出)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위에서 말하는 한유(韓愈)의 ‘송요도사서(送廖道士序)’를 인용(引用)하면서 글자 대부분을 쏙 빼놓고 「귤과 유자, 대나무 살’만 인용(引用)하겠는가?」 또 이것을 인용(引用)했다면 전라도(全羅道) ‘강진(康津)에서 귤(橘)과 유자(柚子)와 죽전(竹箭 : 대나무로 만든 화살)’이 산출(産出)되고 있으니 이를 인용(引用)한 것이리라!
「귤과 유자, 대나무 살」이 전혀 생산(生産)되지 않는 땅인데… …「귤과 유자, 대나무 살」가 많이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 어이없는 주석(註釋)이다. 이렇게 사족(蛇足)을 달면 : 스스로 무지무식(無知無識)하다는 것을 뽐내는 일이다.
【동사(東史) / 한자사전(漢字辭典)을 보면 : 동사(東史)는 중국(中國)에서 우리나라 역사(歷史)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조선인(朝鮮人) 스스로 동국(東國)이라고 하였으니 동국(東國)의 역사(歷史)가 동사(東史)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조선(朝鮮) 측이 아닌 남의 나라 측에서 서서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철저(徹底)한 식민주의(植民主義) 자(者),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다.】
【위에 언급(言及)된 조홍진(1,743~1,821) / 본관은 풍양(豊陽), 자는 관보(寬甫)이다. 1783년(正祖, 7)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강진(康津) 현감(縣監)에 제수된 것은, 1,796년(正祖, 20) 12월 20일이다.’라고 하였다.】
(14) 이계집(耳溪集) 14권 / 기(記) / 숙신씨의 돌살촉에 대한 기문〔肅愼氏石砮記〕
《山海北經曰。大荒之中有山。曰不咸。有肅愼氏之國。注云不咸。卽長白山。去遼東三千餘里。其人穴居衣皮。: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대황(大荒) 가운데에 산이 있어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하는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불함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이니 요동(遼東)에서부터 3천여 리 떨어져 있고, 그곳 사람들은 동굴에서 살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今鐵嶺以北長白以東。皆肅愼故疆也。余於丁酉。北出塞。道靑海之州。有肅愼古城。在州北三十里。土築於野。有壘壕之形。犂其地。或得石鏃云。越三年春。余南還留靑海。一日求肅愼古物。得石鏃一石斧一。皆靑色。堅如鐵。礪其尖。可剡木。古記曰。國東北出石砮。取之。必先禱于神。: 지금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북쪽과 장백산에서부터 동쪽은 모두 숙신씨의 옛 영토이다. 나는 정유년(1777, 정조1)에 북새(北塞)로 나가면서 청해(靑海)【북청(北靑)】의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숙신씨의 옛 성이 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었다. 들판에 흙으로 쌓은 것으로 성채와 해자의 형태가 남아 있었는데 그곳의 땅을 파보면 간혹 돌화살촉이 나온다고 하였다. 3년이 지난 봄철(1779)에 나는 남쪽으로 돌아가다가 청해에 머물렀다. 하루는 숙신씨의 옛 유물을 찾아보다가 돌살촉 한 개와 돌도끼 한 개를 발견했는데 모두 푸른색으로 단단하기가 쇠와 같아서 끝을 갈아보니 나무를 벨 수 있을 정도였다. 옛 기록에 “나라의 동북쪽에서 돌살촉이 생산되는데 얻을 때 반드시 먼저 신명에게 기도한다.”라고 하였다. 夫肅愼氏不知起於何代。而方其穴居而衣皮也。不解鍛鐵爲兵。乃楺木爲矢。磨石爲鏑。以逐鹿豕禦寇掠而已。: 숙신씨가 어느 시대부터 흥기(興起)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야흐로 동굴에서 살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쇠를 단련하여 무기를 만들 줄도 몰랐으므로 나뭇가지를 휘어 화살을 만들고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어서 사슴이나 돼지를 쫓고 도적들의 약탈을 막을 뿐이었을 것이다. 其樸且拙如此。及其後世。肅愼變爲勿吉。勿吉爲靺鞨。靺鞨爲女眞。女眞益强且大。爲金爲淸。而再有中國。: 그 질박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이러하였는데, 후대에 이르자, 숙신이 변해서 물길(勿吉)이 되고 물길은 말갈(靺鞨)이 되었으며, 말갈은 여진(女眞)이 되고 여진은 더욱 강해지고 커져서 금(金)나라가 되고 청(淸)나라가 되어 두 번이나 중국을 차지하였다. 向使石鏑石斧。至于今不變。特東北之一小夷耳。尙敢生心於上國乎。嗚呼。巧拙之變。而强弱之判。遂爲天下大患。安得使四海萬國。盡石其斧與鏑乎。중략(中略)》
➥ 위의 기(記) 구절(句節)에서 핵심(核心)은, 석노(石砮)【석기시대(石器時代)에 쓰던 돌로 만든 화살촉】이지만 : 『21세기(世紀) 오늘의 주어(主語)는, 숙신씨(肅愼氏)가 당시(當時)에 어느 곳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지 못하면 : 「1,000년(年)을 쇠 빠지게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해도,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외칠 수밖에 없는 쪽박 차는 신세(身世)로 전락(轉落)한다.」라는 사실(事實)이다.
위의 이계집(耳溪集)에서는 “불함산(不咸山)이 곧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곽박(郭璞)의 주석(註釋)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장백산(長白山)’이라는 내용(內容)은 없다.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는,
첫째로, 당시(當時)의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곽박(郭璞)의 주석(註釋)에는 “불함산(不咸山)은 장백산(長白山)이다.”라고 하였으나, 후대(後代)에 첨삭(添削)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강역(疆域)’ 편(篇)에서 저자(著者)가 진서(晉書)를 인용(仁用)하면서 『案 不 咸 山 即 今 長 白 山』이라고 하였으니, “후인(後人)이 “추가(追加)하였다(添)”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간에 「“불함산(不咸山)은 장백산(長白山)이고, 백두산(白頭山)이다”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 어디에도 “불함산(不咸山)은, 장백산(長白山)이 아니요, 백두산(白頭山)도 아니다”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㈠ [山海經 大荒北經] 古典 原文, :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慎氏之國 : 대황(大荒) 가운데에 불함(不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는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註釋 / 郭璞云 : 今肅慎國去遼東三千餘里 : 숙신국(肅愼國)은 요동(遼東)으로부터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라고 주석(註釋)하고 있다. 郝懿行云 : 肅慎國見海外西經 : 학의행(郝懿行)이 말하기를 : 해외서경(海外西經) 숙신국(肅愼國) 편을 보라 하였다.】
㈡ [山海經 海外西經] 古典 原文,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 숙신국(肅愼國)은 백민(白民) 북(北)에 있다.》【註釋 / 珂案 :大荒北經云 :大荒之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慎氏之國. : 원가(袁珂) : 대황북경(大荒北經)에서 이르기를 : ‘대황지중(大荒之中)에 불함(不咸)이라는 산이 있는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 산해경(山海經)에서 보듯이 「불함산(不咸山)은 장백산(長白山)인데, 그곳에 숙신씨(肅愼氏) 또는 숙신국(肅愼國)이 있다」라는 사실(史實)은 변(變)함이 없다. 문제(問題)는,
대황지중(大荒之中) : “대황(大荒)이란 넓고 넓은 거친 땅의 가운데”라는 뜻인데, “반도(半島) 땅의 백두산(白頭山)은 동(東)쪽의 끝 곧 극동(極東)의 한 모퉁이에 있어, 지중(之中)이라는 말과 전혀 다른 곳이다”라는 것이다. 또 핵심(核心)은 아래에 있다. 즉(卽),
㈢ 회남자전(淮南子傳)【淮南王 “劉 安” 기원전(紀元前, BC) 179∼122年】
【淮南子傳, 墜形訓 : 凡海外三十六國, 自西北至西南方 有修股民 天民 肅愼民 白民 沃民 女子民 丈夫民 奇股民 一臂民 三身民 自西南至東南方 有結胸民 羽民 讙頭國民 裸國民 三苗民 交股民 不死民 穿胸民 反舌民 豕喙民 鑿齒民 三頭民 修臂民, 自東南至東北方 有大人國 君子國 墨齒民 玄股民 毛民 勞民, 自東北至西北方 有蚑踵民 句嬰民 深目民 無腸民 柔利民 一目民 無繼民.】
《淮南子傳, 墜形訓 : 凡海外三十六國 :무릇 해외(海外)에 36개 나라가 있는데… …,
➊ 「自西北至西南方 有修股民 天民 肅愼民 白民 沃民 女子民 丈夫民 奇股民 一臂民 三身民 : 서북(西北)에서 서남방(西南方)까지다. 수고민(修股民), 천민(天民), 숙신민(肅愼民), 백민(白民), 옥민(沃民), 여자민(女子民), 장부민(丈夫民), 기고민(奇股民), 일비민(一臂民), 삼신민(三身民)이 있다.」
➋ 「自西南至東南方 有結胸民 羽民 讙頭國民 裸國民 三苗民 交股民 不死民 穿胸民 反舌民 豕喙民 鑿齒民 三頭民 修臂民 : 서남(西南)에서 동남방(東南方)까지에, 결흉민(結胸民), 우민(羽民), 讙頭國民(환두국민), 裸國民(나국민), 三苗民(삼묘민), 交股民(교구민), 不死民(불사민), 穿胸民(천흉민), 反舌民(반설민), 豕喙民(시훼민), 鑿齒民(착치민), 三頭民(삼두민), 修臂民(수비민)이 있다.」
➌ 「自東南至東北方 有大人國 君子國 墨齒民 玄股民 毛民 勞民, : 동남(東南)에서 동북방(東北方)까지에, 有大人國(대인국), 君子國(군자국), 墨齒民(흑치민), 玄股民(현고민), 毛民(모민). 勞民(노민)이 있다.」
➍ 「自東北至西北方 有蚑踵民 句嬰民 深目民 無腸民 柔利民 一目民 無繼民. : 동북(東北)에서 서북방(西北方)까지에, 蚑踵民(기종민), 句嬰民(구영민), 深目民(심목민), 無腸民(무장민), 柔利民(유리민), 一目民(일목민), 無繼民(무계민)이 있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劉安(前179年∼前122年)[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漢高祖劉邦之孫,淮南王劉長之子,西漢淮南王,現留名著《淮南子》,是古代科學思想的總合代表著作。劉安在中國文學史上有重要貢獻,他曾召門客,一同撰寫《鴻烈》(後世稱《淮南子》)。因為劉安雅好辭賦的關係,門客們善於辭賦,其所用的筆名有「淮南小山」、「淮南大山」等之類。《漢書》記載,漢武帝時劉安因被告謀反而畏罪自殺。 但是民間認為,劉安是道士,時常煉丹,因此而「得道成仙」,而且他沒服完的仙丹被家裏的雞跟狗喫了,造成「一人得道,雞犬升天」。受到民間信仰傳播,至今道教人士還奉祀劉安。相傳劉安發明豆腐,故業者奉之為行業神.】
•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에서 중요(重要)한 점은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를 중심(中心)으로 기록(記錄)하였는데, 특히 ‘36개 나라’에 대하여 각각(各各) 방위(方位) 별로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숙신민(肅愼民)=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은, 「“서남방(西南方)에서 서북방(西北方) 사이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 특히 동남(東南)에서 동북방(東北方)에 이르는 곳에는, 「“숙신민(肅愼民)=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현대(現代)의 사학계(史學界)’에서는 : 「동북방(東北方)에 “숙신국(肅愼國)=숙신민(肅愼民)=숙신씨(肅愼氏)가 있었다”라고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고 있다」라는 엄연(儼然)한 현실(現實)이다.
이것의 핵심(核心)은 바로 『“옛 조선국(朝鮮國)을 ‘불함산(不咸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 남(南)쪽에 있었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하여, “옛 조선영토(朝鮮領土)를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萬江) 이남(以南)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제(日帝)와 서세(西勢)가 만들어 놓은 술책(術策)이요, 고육지계(苦肉之計)다.”』 이걸 간파(看破)하지 못하면, 5,000년 조선사(朝鮮史)는 미로아(迷路兒)의 역사(歷史)가 될 수밖에 없다.
• 「숙신(肅愼)은, 읍루(挹婁)요, 물길(勿吉)이며, 말갈(靺鞨)이고, 여진(女眞)이다.」 말갈(靺鞨)은 ‘마자르족’으로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Magyarország [ˈmɒɟɒrorsaːɡ] 머저로르사그’로 옛 말갈 역시 ‘일곱 부족(部族)’이었으며,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 역시(亦是) ‘일곱 부족(部族)’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이루고 있는 종족이다.
• ‘이 정도(程度)의 논리(論理)’ 곧 역사해설(歷史解說)도 모르는 사학자(史學者)가 과연(果然) 있을까? 그러나 무시(無視)하고, 미친 척 “일제(日帝)가 넘겨준 반도(半島), 식민사학(植民史學) 논리(論理)”를 펼치는 것이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界)’인 것을, 누가 이를 말릴 수 있겠나!
‘우리 학계(學界) 논리(論理)’는 : 일제(日帝)로부터 이식(移植)받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더욱 발전(發展)시키며, 고착화(固着化)하는 것에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 해방(解放) 이후(以後) 80년(年) 동안 쇠 빠지게 노력(勞力)【힘들게 일함】과 노력(努力)【목적(目的)을 위해서 힘을 다해 애씀】을 퍼부었다.
그 결과(結果) : 옛 조선사(朝鮮史)는, 옛 조선(朝鮮)의 후예(後裔), 후손(後孫)인 반도(半島)의 국민(國民)으로부터 버림받았다.
☛ ‘특히 안타까운 점’은 : 애국애족(愛國愛族)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전향(轉向), 일제(日帝)와 한 몸이 되어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의 ‘식민(植民) 역사관(歷史觀)’을 교묘(巧妙)하게 편집(編輯)하여 민족(民族)을 위하여 헌신(獻身) 한 냥, 역사관(歷史觀)에 대한 판단력(判斷力)이 흐릿한 국민(國民)을 상대(相對)로 파고든다는 것이다.
여러 형태(形態)의 각종(各種) 언론(言論)들, 국가(國家),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 향토사학(鄕土史學),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과 그 학계(學界)는 지금 시간(時間)에도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화려(華麗)한 금수강산(錦繡江山)’ 3 천리(千里) 땅에 수놓기 위해, 쇠 빠지게 일하고 있다“는 현실(現實)이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인데,
더욱 얄밉게 하는 것은, 국가(國家) 예산(豫算)으로, 이들에게 직(直), 간접적(間接的)인 지원(支援)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표현(表現)해야 옳은 것일까?
○ 현실(現實)은, 후손(後孫)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가는, 잃어버린 조선사(朝鮮史)는 이제 갈 곳이 없어졌다. 결국(結局) 일제(日帝)와 서세(西勢)의 염원(念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누굴 원망(怨望)할 필요(必要)도 없다. 후손(後孫) 스스로 자신(自身)의 선조(先祖)를 버리고 있음에 누굴 탓하랴! 모두 스스로, 내 탓인 것을! 2026년 09월 27일, 추석(秋夕) 연휴(連休) 끝에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연행록과 북평사 또는 북쪽 변경지방의 도호부사를 연임한 옛 관리들의 기록을 보면 : "오늘날의 한반도 땅에 당시의 조정(朝廷)은 없었다"는 것이 확인 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 오늘날의 한반도 땅은, 옛 조선의 사대부들이 말했던 그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아무려면 : 관리들 그 스스로 가보지도 못한 1만리 서쪽과 서북쪽의 변방지대에 대한 지형지세를 설명핳 필요가 있었을까?
옛 조선의 강토.
분명한 것은,
한반도는 옛 조선의 천자의 교화가 미치는 곳이었으나,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면서... ...특히 권력다툼, 매관매직, 관리들의 부패, 무능력한 군주로 말미암은 마침내 동학난이라는 절망적인 난전을 벌였고, 이로 인해 외세들을 불러들였고, 그 결과는 마침내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학난을 동학혁명으로 만든다고 해서 진실이 밣혀지는 것은 아니다.
누가 난을 혁명으로 승격시켰나?
동학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외세를 불러들였고 마침내 일제(日帝)의 탐욕에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동학난'이 없었다면?
기독교 선교사들을 앞세운 서세의 탐욕과 일제의 영토 탐욕은 시기적으로 아주 적절하게 조선을 멸망에 들게 한 것이다.
* 어떤 이들은 "동학난"을 동학혁명으로, 민중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왜 일제(日帝)가 동학난이라는 난(亂)을 혁명(革命)이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을까?
그 동학난은 정말 민중울 위한 민중의 혁명이었을까?
기울어 가는 왕조를 위한 근왕(勤王)의 민병(民兵), 의병(義兵)이었을까?
* 현세의 사가들은 식민시학에 물들은 무리들이다.
이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함은, 어불성설이다.
* '지' 나라의 역사 조차도 왜곡하고, 조작하는 무리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나?
이 좁은 반도 땅에서,
사서에서도,
지리지에서도,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수 없다면 그게 무슨 사서요. 지리지인가?
* 동방이 어디고, 서방이 어디인지 조차 모른다면... ...반도는 동방이 아닌 극동 모퉁이 땅애 있는 것이다.
극동(極東)은 동방(東方)을 담을 수도 없고, 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동방은 수많은 극동을 담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 수만리는 온데 간데 없고,
동서 1만리는 코웃음치고,
동서 6천리는 온데 간데 없고,
동서 2천리는 동서 500리 600리로 둔갑했고,
남북 4천리는 겨우 3천리도 안 되는 땅으로 변모해버렸다.
*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나!
*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 18년 전에 "위에서 언급된 강진현감에 제수된 조학진"에게 주는 '이계 홍양호'의 시문 내용입니다. [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문암'님의 장약용선생에 대한 글 내용 인용]
* 아마도 정약용 선생의 다양한 문집속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제는 연휴를 긑내고 일상생활로 복귀해야 하겠습니다.
아쉽지만 말입니다.
그 무더웠던 더위가 "언제 그랬냐?" 묻는 것 같은, 초 가을 날씨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곳에 들리신 여러 독자분들,
늘 건강하세요.
강진은 원래 '탐강 : 탐강의 나루' 이므로, 즐길 탐 한자를 즐길 담 한자로 바뀌면, 광동성 서남부 반도의 핵심 도시 담강(잔장)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