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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콥 ⓒ gettyimages/멀티비츠
최고의 투수이자,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품을 가진 최고의 신사였던 월터 존슨은 월터 경(Sir Walter) 또는 백기사(White Knight)로 불렸다.
반면 존슨의 반대편에 서서 무시무시한 '다크 포스'를 뿜어낸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방망이를 든 난봉꾼' 타이 콥이었다.
타격의 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자 3명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야구를 재창조한 베이브 루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격 능력을 선보였던
테드 윌리엄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루스 이전> 데드볼 시대를 지배했던 콥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콥이 기록한 통산 타율 .366는 사이 영의 511승, 월터 존슨의 110완봉승과 함께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그를 제외하면 3할6푼대에 진입한 선수는 없으며(로저스 혼스비 .359, 조 잭슨 .356) 라이브볼 시대 이후로는 윌리엄스(.344)와 루스(.342) 만이 3할4푼대를 넘어섰다. 장타를 포기했던 토니 그윈(.338)과 스즈키 이치로(.333)도 콥의 타율에서 3푼 정도를 빼야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24시즌을 보낸 콥은 만 18세로 치른 데뷔 첫 시즌을 제외하면 41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23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1차례 타이틀을 차지하고 4차례 2위에 올랐으며, 리그 10위 내에 든 것이 20번이었다. 3번의 4할 타율과 함께 3할5푼 이상의 타율을 16번이나 기록했다.
데드볼 시대 타자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홈런이 적은 대신 타율은 높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콥이 뛰는 동안 아메리칸리그의 평균 타율은 2할5푼대에 불과했다. 타자들에게 가장 괴로운 해였던 1968년 아메리칸리그의 타율은 .230이었고 칼 야스트렘스키는 .301로 타격왕에 올랐다. 콥이 .377로 타격왕에 오른 1909년 아메리칸리그의 타율은 .244였다(지난해 AL 타율 .267).
콥은 단타만 치는 '똑딱이'가 아니었다. 콥(8)보다 더 많이 장타율 1위에 오른 선수는 루스(13)-혼스비(9)-윌리엄스(9) 3명뿐이다. 반면 도합 15차례 타격왕을 차지한 그윈과 로드 커루가 장타율 1위에 올라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은퇴 당시 콥은 안타와 득점을 비롯해 90개의 메이저리그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콥의 안타 기록이 깨지는 데는 57년(로즈), 득점 기록이 깨지는 데는 73년(헨더슨)이 걸렸다. 로즈는 콥보다 67개의 안타를 더 때려냈지만 대신 2619타수를 더 사용했다. 은퇴 후 81년이 지난 지금도, 콥은 안타-득점-3루타에서 2위, 출루에서 3위, 2루타와 도루에서 4위, 총루타 5위 등을 점유하고 있다.
![]() 콥의 질주 ⓒ gettyimages/멀티비츠 |
공포의 주자
콥은 야구 역사상 가장
'악랄한' 주자였다. 발이 워낙 빠르기도 했지만 천재적인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상대 수비의 허점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콥은 2루
도루를 시도하면서 자신이 완벽한 스타트를 끊었다고 생각하면 2루에서 슬라이딩을 하지 않고 아예 3루까지 내달렸다. 외야플라이
때 2루에서 홈으로, 단타에 1루에서 홈까지 내달린 장면 등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전설이다.
콥이 세운 한 시즌 96도루와 통산 892도루는 각각 47년과 49년 후에 경신됐다. 하지만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기록 하나가 있으니, 바로 54개의 홈스틸이다. 이는 역대 2위 맥스 커레이(33)보다 21개가 더 많은 기록이다.
콥이 진정으로 무서운 주자였던 건 너무도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콥은 상대 팀 선수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스파이크 날을 날카롭게 간 다음, 높이 쳐들고 슬라이딩을 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야수들은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콥은 재키 로빈슨보다 먼저 살해 협박을 받은 선수였다. 물론 그 이유는 달랐지만.
콥은 뛰어난 중견수이기도 했다. 동시대 선수인 '회색 독수리' 트리스 스피커는 2루 베이스 바로 뒤에 둥지를 틀고 수많은 안타를 잡아먹었는데, 통산 449개를 기록한 스피커 다음으로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는 바로 콥(392)이다. 콥은 데뷔 첫 세 시즌을 제외하고는 은퇴할 때까지 거의 중견수로 뛰었다.
악명
콥에게 야구는 목숨을 걸고 하는 전쟁이었다. 승리를 향한 그의 냉혹함을 지켜본 한 동료는 "콥은 아직도 남북전쟁이 끝나지 않은 줄 안다"며 몸서리를 쳤다.
콥은 1886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지아주 상원이었고 어머니는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콥이 데뷔하기 3주 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총을 쏴 아버지를 죽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강도인줄 알고 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정한 행각을 눈치챈 후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 침실 창문을 기어오르다 당한 것이었다.
콥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아버지는 끝까지 야구를 반대했다. 하지만 콥의 의지가 강한 것을 확인한 후로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콥은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믿은 것은 오직 자신의 방망이와 승리, 또 승리였다.
콥의 자존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904년 당시 가장 유명한 야구기자였던 그랜틀랜드 라이스는 '타이 콥이라는 17살짜리 유망주가 있는데 앞으로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제보 한 통을 받았다. 이후 이 편지는 콥 자신이 써서 보낸 것임이 밝혀졌다.
콥이 은퇴하고 30년이 지난 1958년, 한 기자가 '당신이 요즘 시대에 활동했으면 어땠을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콥의 대답은 '3할1푼은 쳤겠지'였다. 이에 놀란 기자가 정말이냐고 묻자 콥의 대답은 '나이 일흔둘에 3할1푼이면 됐지. 뭘 더 바라나'였다. 이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콥은 주위 사람들이 참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랑이 심했다. 콥이 자랑을 할수록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져갔고, 그럴수록 콥의 자랑은 심해져갔다.
이런 콥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게 한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베이브 루스였다. 루스에 대한 콥의 분노는 실력이 떨어진다는 자괴감이 아니라 루스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열광 때문이었다. 콥은 루스 식의 '한방 야구'보다 안타를 치고나가 그라운드를 헤집는 것이 훨씬 고차원의 야구라고 생각했다. 또한 홈런을 노리다 삼진을 당하는 루스를 보면서 혀를 찼다. 콥은 루스를 보면 '반 검둥이'라고 놀렸고, 루스는 흑인의 피가 섞이지 전혀 않았음에도 늘 상처를 받았다.
1920년 루스가 홈런 시대를 몰고 왔지만, 그렇다고 타격 스타일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콥이 1905년이 아니라 루스와 동시대에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은퇴를 4년 앞둔 1925년 한 기자가 루스를 칭찬하자 콥은 그 경기에서 홈런 3방을 날리고, 다음날 2방을 더 날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콥의 난폭함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는 여러 차례 흑인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으며, 뉴욕 원정경기에서 한 장애인 관중이 자신을 '반 검둥이'라며 야유하자 관중석으로 뛰어올라가 주먹을 퍼붓기도 했다. 조지아주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콥은 유색인종은 말할 것도 없고 북부 출신 선수들까지 싫어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북부 선수들이 유난히 많은 팀이었다. 콥이 이들과 잘 지낼 리 없었다.
![]() '날아차기'에 가까웠던 콥의 슬라이딩 ⓒ gettyimages/멀티비츠 |
1910년
콥은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하지만 왼쪽 타석이 1루에서 더 가깝다는 것을 알고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투좌타'가 됐다(이와 반대로 동네 친구들이 전부 우타석에 들어서는 걸 보고 우타자가 된 왼손잡이 리키 헨더슨도 있다).
1905년 디트로이트에서 데뷔한 콥은 만 20세 시즌이었던 1907년을 시작으로 1919년까지 13년간 11차례 타격왕을 차지했다. 모두 2위에 그친 1910년과 1916년이 아니었다면 '13연패'도 달성할 수 있었다.
1910년 정규시즌 마지막 날을 남겨놓고 콥은 리그 2위 냅 라조이에 9리 앞선 넉넉한 타율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타격왕은 확정적인 상황.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라조이가 마지막 경기에서 8타수8안타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콥은 0.0004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타격왕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라조이는 어떻게 해서 8타수8안타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라조이의 8안타는 3루수 쪽으로 댄 번트안타 7개와 외야수가 햇빛에 공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안타 1개였다. 콥을 증오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잭 오코너 감독은 3루수에게 엄청나게 깊은 수비를 지시했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라조이의 공은 잡지 말라고 했다. 오코너 감독은 이 사건으로 야구계에서 영구추방됐다.
그로부터 71년이 지난 후, 2번째 반전이 일어났다. 1981년 <스포팅 뉴스>가 1910년 라조이의 안타 1개가 실책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10년 타격왕은 콥에서 라조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보위 쿤 커미셔너는 이에 대해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콥의 명예의 전당 동판에는 아직도 콥이 12차례 타격왕에 올랐으며 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고 써 있다.
콥의 타이틀은 12개일까 11개일까. 사무국이 이를 수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한때 로저 매리스의 61홈런에 별표를 달았던 것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라조이가 마지막 날 때려낸 8안타를 생각하면 이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 콥이 가장 인정한 타자인 조 잭슨(오른쪽) ⓒ gettyimages/멀티비츠 |
고독
콥과 달리 야구를 배려와 신사의 스포츠라고 생각한 존슨은 자신의 공에 타자가 맞고 죽을까봐 몸쪽 공을 최대한 던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콥은 이런 존슨의 심리를 이용, 존슨을 상대할 때면 더욱 바짝 홈플레이트 쪽으로 붙어섰다.
그럼에도 콥이 존슨을 상대로 기록한 타율은 .233로 자신의 통산 타율보다 .133가 낮은 것이었다. 콥이 존슨으로부터 뽑아낸 31안타(133타수) 중에서 장타는 6개(2루타3, 3루타3)뿐이었다. 콥으로서는 기습번트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콥의 통산 기록에서 존슨 상대 성적을 빼면 타율은 .366에서 .368로 올라간다.
콥은 앞서 언급한 1912년의 '관중 폭행 사건'으로 영구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에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경기를 거부했고, 다음날 디트로이트는 동네에서 방망이를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아 경기를 치렀다. 스코어는 24-2. 리그가 난장판이 될 것을 우려한 밴 존슨 회장은 백기를 들고 콥의 출장정지를 10경기로 줄였다. 이에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경기에 복귀했다.
1921년부터 감독을 겸임한 콥은 1926년 역시 클리블랜드의 감독 겸 선수인 스피커와 함께 승부조작을 하다 걸렸다. 하지만 6년전 블랙삭스 스캔들을 처리하면서 조 잭슨을 비롯한 8명을 영구 추방시켰던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는 콥과 스피커를 다른 팀으로 보내는 것으로 이 사건을 덮었다. 콥은 청문회에서 자신의 편에 서준 코니 맥 감독의 필라델피아로 이적, 2년을 더 뛰고 은퇴했다.
1936년 첫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226명의 기자 중 단 4명 만이 콥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콥과 함께 오른 루스와 와그너가 받은 반대표는 나란히 11장이었다.
#1946년. 예순 살이었던 콥은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올드스타들의 자선경기에 초청받았다. 타석에 들어선 콥은 포수에게 말했다. "이봐 젊은이. 내가 힘이 없어 방망이를 놓칠지도 모르니 뒤로 물러나 앉게나" 포수가 뒤로 물러선 것을 확인한 콥은 번트를 대고 총알같이 1루로 뛰어나갔다.
은퇴 후 콥은 야구선수 최초로 재벌이 됐다. 연봉을 모은 것이 아니라 사업에 성공해서였다. 이미 현역 때부터 츄잉껌과 가터벨트 등 여성용 속옷사업으로 돈을 만지기 시작한 콥은, 1918년 코카콜라 주식을 시작으로 제너럴모터스 등의 주식을 사들였고, 부동산에도 투자에 떼돈을 벌었다(콥이 태어난 1886년 조지아주에서 탄생한 코카콜라는 1907년 콥을 광고 모델로 썼다). 적지 않은 스타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탕진, 은퇴할 무렵에는 빈털털이가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콥은 애틀랜타에 큰 병원을 지어주기도 하는 등 은퇴 후 적지 않은 사회사업을 했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1961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의 장례식에 온 야구인은 단 세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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