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동 수료사
-김익수-
#시간
첫 방문 때의 어색함을 기억합니다. 도서관 같지 않았던 도서관. 아빠 고향집 근처에 있던 구멍가게 같이 생긴 도서관. 그 곳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의 어색함. 면접을 기다리며 도서관에서 동료들과 앉아있었을 때의 어색함. 여러 아이들 앞에 앉아서 질문에 답을 할 때의 어색함. 첫 날 밤의 어색함. 그러했던 하루의 어색함. 이제는 흐려졌지만 어렴풋해서 더 생각나는 어색했던 그 시간.
멈춰 버린 시간.
그대로 면접이 끝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활동 하겠냐는 전화. 약간의 침묵. 하겠다는 대답. 올 여름의 전부를 차지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활동을 하겠다고 대답한 사건은 여름의 시간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시간은 그 때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경험하겠다는 대답. 추동의 시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응답은 약간의 망설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건의 발생은 생각과 시간을 만들어 냅니다. 대상에 대한 생각과 시계로 확인하는 시간이 아닌 실제 경험되어지며 느껴지는 시간. 활동을 하겠다는 대답이라는 사건은 저에게 추동을 생각 하게하고 시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약간의 망설임으로 시작된 내가 경험하게 될 추동의 시간. 그 낯섦을 기다리는 시간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낯설기 때문에. 그 낯섦이 무서워서 기다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지말까 하는 생각이 가득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상황에 뛰어들면 사라지는 것이기에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의 시간과 추동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양식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나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겪으러 가야 했습니다. 긴장이 되었습니다.
#자전거 여행
약 13년 만에 탔던 자전거. 몸이 기억할지 말지 모르는데도 맡아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재작년 여행 기록이 소중했습니다. 어떤 분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며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여행 준비를 하며 크게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실제 그러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곤 아이와 대화하며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던 것. 그리고 함께 자전거 여행을 갔던 것. 이 두 가지의 일이 제가 한 일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일들은 아이와 가족 사이에 아이와 동네 형 사이에 아이와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 사이에서 자연스레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여행을 도우는 일이 자연스레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가족 이웃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준비. 굳이 제가 없어도 일어났을 일. 그것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편안했습니다. 걱정이 된다면 이 더위에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 했습니다.
새벽부터 벌떡 일어났던 상인이와 건이. 맛있는 아침을 챙겨주신 어머님. 자전거 점검 해주시고 트럭으로 대청댐까지 옮겨주신 아버님. 아이들을 대청댐까지 태워주신 건이 어머님. 출발하고 신탄진까지 가는 길 차안에서 소리 지르며 응원해준 가족들. 그래서 힘찬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관심이 여행준비 할 때부터 여행 시작하는 순간까지 계속 되었고 많은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수리도구를 빌려주시고 응원 편지를 써주신 도라지 선생님 대청댐으로 가기 전 호숫가에 나와 아이들을 응원해준 최선웅 선생님과 동료들.
모두에게 감사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묵묵히 부여까지 80km를 달린 상인이와 건이가 대견 했습니다. 옆에서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 코끝이 찡했습니다. 끝났지만 괜히 부여까지 가는 것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정말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다.
#얼굴
타인의 얼굴은 무한합니다. 어떤 응답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무한합니다. 그 무한함은 긴장감을 만듭니다. 기다림 끝에 마주하게 된 추동의 얼굴. 불편한 이방인의 얼굴인 나의 얼굴이 무한한 추동의 얼굴과 마주하였습니다. 이방인을 맞이하는 추동의 얼굴. 무한함 가운데 드러나는 환대. 기억에 남는 추동의 얼굴은 환대의 얼굴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그것에 대한 나의 응답은 감사함이었습니다. 불편함과 무한함이 만나서 발생한 사건은 환대와 감사였습니다.
환대의 얼굴을 바라보니 아늑했습니다. 아마 추동은 저희에게 선배들의 얼굴이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환대를 해주었나 봅니다. 선배들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도 감사받게 될 선배들이 될까요?
#만남
실재와 실재가 마주하는 것. 서로 꾸밈없이 실재로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 실재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결대로의 모습. 살아오면서 형성되어진 결. 이미지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미지는 소비되지만 결은 소비되지 않습니다. 나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결대로 추동을 만났는가. 확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눈치 보며 만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나는 동료들의 눈치를 보았고 선생님의 눈치를 보았고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나의 결대로 당당히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이 곳의 양식을 맞추는 것이 옳은 일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추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낮아져야 했으므로. 그 양식에 맞춰야 했으므로. 그래서 나는 나의 결대로 추동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봤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동료들 선생님과 함께하여 행복했습니다. 나의 결을 포기하게 만드는 행복이었습니다.
#인연
나타남과 사라짐. 인연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편적인 시간인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순간의 인연. 그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쉬운 것도 원래는 없습니다. 순간의 행위. 만남. 인연뿐입니다. 그것에 따르는 생각과 감정은 자극에 의해 자동적으로 응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적인 응답은 얽매임을 몰고 옵니다.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에 따라 생각에 따라 대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그냥 지그시 응시 하고 싶습니다. 감정이 생긴다면 생각이 생긴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추동에서 그렇게 했는지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번 인연을 지그시 응시 했는가. 인연에 얽매이지 않았는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 빠져있지는 않았는가. 어렵습니다.
추동과의 인연. 만남이 기쁘지 않고 헤어짐이 아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추동과의 인연에 대한 감정을 선택 하자면 기쁨만 선택하겠습니다.
애써봅니다.
#사랑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 존재라 하지만 본질이 존재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는가.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억하면 좋으니 사랑했습니다. 네 충분히 사랑하고 왔습니다.
#다시 시간
나는 추동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여전히 낯설게 여겨지는 추동의 시간. 영원한 이방인이기에 낯선 추동의 시간. 나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추동의 시간.
첫댓글 추동 아이들과 이웃, 최선웅 선생님, 권민정 선생님 고맙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익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