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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전통파와 혁신파의 그림 감상-
<중국 수묵화의 법고창신>:2009년 10월 14일-2010년 1월 9일, 서울대학교박물관
이가염, <붉은 매화가 핀 정원>, 1980년, 66.5×45cm, 개인소장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매화가지는 긴 세월을 견뎌온 신산스런 시간을 보여주듯 심하게 꺾이고 구부러져 있습니다. 정자 속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처럼, 매화꽃이 떨어져 눈처럼 휘날리던 어느 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먹을 강하게 쓰는 이가염이지만 그의 먹은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아무리 쓰라린 기억도 추억속에 잠기면 꽃잎처럼 화려하게 변신을 합니다. 당시에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 밋밋하게만 느꼈던 시간이었는데 말이예요. 자신의 인생에서는 한 번도 꽃이 핀 적이 없다 생각하시는 분 계세요? 그렇다면 오늘 제가 이가염이 키운 매화꽃을 한가지 꺾어 드리겠습니다. 이 꽃 받으시고 꽃 향기를 맡으시면서 잠시 시름을 잊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당신께 바치는 저의 헌화가(獻花歌)입니다.
1) 해파
먼저, 중국 근대의 그림이 어떻게 헤쳐 모여를 했는 지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아편전쟁(1840) 이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자 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상해는 인구가 순식간에 늘어났고 서양의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도시로 변모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 화가들은 후원자를 찾아 부가 넘쳐나고 활기가 넘치는 상해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 결과 상해는 일시에 화단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는데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을 ‘해상화파(海上畵派)’ 혹은 ‘해파(海派)’라 부른니다.
해파는 다시 문인적 성향을 지닌 직업화가군과 대중 취향적인 직업화가로 나누는데 전자를 ‘금석화파(金石畵派)’ 후자를 ‘사임(四任)’이라 불렀습니다. ‘금석화파’는 금석학을 공부한 화가들이 직업화가로 활동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지겸, 오창석, 왕진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금석화파의 오창석과 사임의 임백년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되어 해파의 그림 성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오창석, <복숭아>, 1914년, 176.5×45.5cm, 개인소장
2.오창석, <보랏빛 꽃이 핀 등나무>, 1921년, 151×81cm, 개인 소장
3.오창석, <홍매>,1922년, 131×34cm, 홍희미술관 소장
4.오창석, <갈대꽃>, 1923년, 114×31cm, 개인 소장
오창석(吳昌碩:1844-1927)은 절강 출신으로 서법과 전각에 뛰어난 기량을 보여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서예와 전각, 금석학에 심취하였는데 그림에 글씨를 많이 써 넣는 문인화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는 주로 가게 개업 선물로 줄 있는 꽃 그림이나 자손번창과 부귀를 상징하는 등나를 많이 그렸습니다. 강한 채색을 과감히 구사하는 그의 화풍은 금석화의 격조에 꽃그림이라는 대중성을 버무린 절충적인 성격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기(氣)를 그려야지 형(形)을 그리려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그는 서양홍(西洋紅)같은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한층 높였습니다. 그의 밑으로 왕진(王震), 진형각(陳衡恪), 제백석(齊白石), 반천수(潘天壽)같은 젊은 화가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는 개혁파들이 과학적이고 사실성을 강조하는 그림들을 양산하는데 위기감을 느끼고 ‘중국화학연구소(中國畵學硏究所)'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청년들에게 전통회화의 우수성을 설파하는 강의를 실시하였습니다. 전통회화, 하면 무조건 어렵게만 생각하고 감히 전통의 대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서는 우리들을 향해 일갈을 하는 것 같아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중국의 근대 회화가 풍성해질 수 있었군요.
5.임백년, <늙은 고양이>, 1889년, 102.3×85cm, 홍희미술관 소장
6.임백년, <종규>, 1893년, 130×65.5cm, 홍희미술관 소장
7.임백년, <봄바람을 쐬며 차를 마시다>, 1892년, 132.9×53cm, 홍희미술관 소장
임웅, 임훈, 임예, 임이(임백년)로 대표되는 ‘사임’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화목을 다루었는데 임웅이 사임의 리더였습니다. 임웅의 제자였던 임이(任?:1840-1895 혹은 임백년)는, 세련되고 깔끔한 화면 처리와 화려한 색조, 기발하고 참신한 주제로 사임 화가들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임백년 못지 않게 개성적인 작품 화가로 허곡(虛谷:1823-1896)이 있습니다.
2)전통화파
중화민국 설립 이후 화단은 크게 전통파와 혁신파로 나뉩니다. 전통파는 해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시대감각에 순응한 개성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제백석, 황빈홍, 부포석, 반천수, 부심여 등을 들 수 있는데 역시 이 번 전시회에 반천수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①제백석
8.제백석, <개구리>, 101×34cm, 홍희미술관 소장
9.제백석, <새우>, 1930년, 134×34cm, 홍희미술관 소장
10.제백석, <삼추도>, 154×67cm, 홍희미술관 소장
제백석(齊白石:1864-1957)은 호남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림 공부는 『개자원화 전』으로 독학으로 시작하였는데 12세 때부터 40세 무렵까지 고향에서 소목장(小木匠)을 업으로 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화초, 영모, 초충류의 명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화훼 초충을 즐겨 그리고 새우, 개구리, 병아리 등 새로운 소재를 많이 발굴한 그는 전각(篆刻)에도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50세 이후 북경으로 이사하여 서비홍의 주선으로 북평예술학원 교수를 지낸 그의 생애는 대기만성의 모델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후기에 강세황이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석도(石濤), 서위(徐渭), 팔대산인(八大山人) 등 양주화파의 화풍을 이어받으면서도 자유롭게 감흥을 표현한 그는 중국문인화의 마지막 장식하였습니다.
그림에 관한 얘기는 편안하게 감상하시도록 왠만하면 입을 다물려고 했는데 <새우>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어느 날 제백석이 자신이 그린 새우 그림을 펼쳐놓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동네 아낙이 그림 속의 새우를 보더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쳐다보더랍니다. 너무 생생하게 그려서 혹시 진짜 새우를 올려놓았나, 착각했던 것이지요. 신라 시대 때 솔거가 그린 벽화속의 나무를 새가 진짜로 착각해서 날아 들다 부딪쳐 죽었다는 설화가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하면 진짜로 착각했을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보게 되었습니다. 역쉬~얼마 전에 이마트에서 사다가 둘째 아이를 위해 소금구이를 해 주었던 왕새우가 생각나더군요.
②황빈홍
11.황빈홍, <무이기유>, 1947년, 104.5×35cm, 홍희미술관 소장
12.황빈홍, <모랫가에 정박한 배>, 31×91cm, 개인 소장
황빈홍(黃賓虹:1865-1955)은 문인이면서 미술서적 발간에 앞장선 대학교수입니다. 안휘성 출신인데 황산을 좋아하여 황산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저도 제가 살고 있는 동네 뒷산을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상적으로는 개혁주의자로 반청운동을 하다 고향에서 상해로 추방당했습니다. 산을 사랑하는 것과 사상은 별개의 문제군요. 추방당한 후 당시 신문화의 중심지였던 상해에서 상무인서관의 미술책임자로 수많은 화집과 이론서를 출간하였는데 중국화론서를 편집 제작한 『미술총서美術叢書』발간하였습니다. 북경예전 교수를 거쳐 1948년에는 83세의 나이로 항주예전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절에 전통화들의 작품을 임모하면서 실험을 통해 필법과 묵법을 독학으로 연구하여 적묵법(積墨法)을 완성하였습니다. 만년에 적묵이 더욱 강해져서 화면의 거의 검정빛으로 되자 사람들은 그를 '묵빈홍(黑貧虹)'이라 불렀습니다. 이가염(李可染)같은 검은 산수의 수호자들을 태어나게 한 모체가 바로 황빈홍입니다. 그는 묵빈홍답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묵색(墨色)이 묘하면 설색(設色)이 없어도 된다. 한 점의 묵은 수십 종의 색이 있으며 고수만이 가능하다.”
이 문장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본바탕이 뛰어나면 화장을 안해도 된다. 본바탕은 수십 가지의 색조 화장품으로 낼 수 없는 색을 품고 있는데 이 색은 고수도 칠할 수 없다."
하물며 성형수술무용론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아는 사람은, 계란형 얼굴이 아니어도, 키가 작아도 예쁩니다. 얼굴이 사각형이어서, 키가 작아서 루저라고 놀림을 당하면 당당하게 받아 치세요. 그래, 나는 루저다, 어쩔래? 이 루저도 못된 인간아!
③반천수
13.반천수, <노란 연꽃>, 1965년
14.반천수, <안탕산화>
이번 전시회에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전통화파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가 반천수입니다. 반천수(潘天壽:1898-1971)는 문인화가로 오창석에게 서예와 전각 지도를 받았습니다. 절강 출신으로 어려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임모하면서 그림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는 상해미술전과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쳤습니다. 서양화의 구도는 직접 사생을 통해 얻지만 중국화의 구도는 투시원근법이 필요하므로 발췌하여 사용하며, 서양화는 명암이 중심이지만 중국화는 선이 중심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중국화의 서구화를 찬성하지 않는다. 예술은 민족정신이며, 예술과 과학은 다르다. 과학의 진보는 인류공동의 목적이지만 예술은 각 민족의 특수한 정신이며 특수한 정취이다.”
작품도 좋지만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④장대천
15.장대천, <승선협을 여행하며>, 1975년, 143×75cm, 개인 소장
16.장대천, <저녁 안개 비낀 풍경>, 1980년, 70×138cm, 개인 소장
17.장대천, <빗속의 연꽃>, 1982년, 68×135.8cm, 개인 소장
전통화파 중 장대천, 황군벽, 부심여는 대만 수묵화단에 큰 영향을 주어서 ‘도해삼가(渡海三家)’로 불립니다. 그 중에서 장대천(張大千:1899-1983)은 복고에 기초를 두고 각종 화파의 특징을 습득하여 품격높은 작품세계를 성취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돈황의 불교 예술에 깊은 영향을 받아 당송 이전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브라질을 비롯한 세계 명승지를 두루 답사한 그는 청록발채(靑綠潑彩)산수화의 화풍으로 작업하였습니다. 그는 초대형 사이즈의 작품을 선호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대작이 전시되었습니다.
⑤부심여
18.부심여,<차가운 겨울 강가의 낚시>,84×143cm, 개인 소장
부심여(溥心?:1896-1963)는 청나라 황실의 후예로 송대 회화를 기초로 삼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해혁명 이후 황실이 몰락하자 부모를 따라 계태사로 이주하였다는데 영화《마지막 황제》의 ‘푸이’와는 어떤 관계인 지 궁금합니다. 베를린대학에 유학하여 천문학과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작품 활동을 한 그는 국민당 국민대회에서 만주족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습니다. 확실히 ‘마지막 황제’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 감상하는데 왜 이런 그림외적인 사항들이 궁금한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황실의 후예답게 전통을 기반으로 한 그림세계를 견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창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습니다. 그러나 어부를 그린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뒷배경이 거의 생략된 채 앙상한 고목사이로 보이는 어옹(漁翁)의 모습이 왠지 스산하면서도 막막해 보입니다. 노인들은 흔히 겨울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내년에도 다시 뵙기를 기원합니다. 할아버지.
⑥황군벽
19. 황군벽, <지팡이를 짚고 시를 읊다>, 1974년, 119×59.5cm,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황군벽은 유학을 다녀온 적은 없으나 외래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광주(廣州)지역에서 활동하여 흔히 혁신파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작품에서 그다지 혁신적인 느낌을 받지 못해서 그냥 전통파에 묶었습니다. 예로부터 무수히 많은 작가들이 주제로 삼았던 <지팡이를 짚고 시를 읊다>는 제목의 작품에서 서양화의 데생과 수채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이이 조금 참고될 뿐입니다.
3)혁신파
1911년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에게 청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혼란을 거듭하다 청일전쟁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일전쟁 도중 공산당과 국민당은 혈투를 벌이게 되고 1949년에 공산당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막이 열립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중국은 무술변신운동(1898년), 신해혁명(1911년) 5.4운동(1919년)을 통해 봉건제도 타파와 사회변혁의 실현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특히 5.4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채원배(蔡元培1868-1940)는 북경대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신문화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목판화운동을 주창한 노신(魯迅, 1881-1936)을 강사로, 진보적인 잡지《신청년》의 주필 진독수(陳獨秀:1879-1942)를 문과대 학장으로 초빙하여 북경 대학을 신문화의 중심지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서법연구회를 만들어 서비홍, 진형각, 임풍면 등의 화가들을 초빙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림에서도 많은 화가들이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고 귀국해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 창의적인 표현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혁신파라고 합니다. 혁신파는 서비홍을 필두로 해서 임풍면, 부포석, 이가염, 오작인 등의 작가들이 있습니다.
①서비홍
20. 서비홍, <겨울매화>, 1943년, 92×30.5cm, 개인소장
21. 서비홍, <닭이 우니 날이 밝아오다>, 1944년, 102×46cm, 개인소장
서비홍(徐悲鴻:1895-1953)을 빼고 중국 근대 회화를 논할 수는 없겠지요. 화가로, 교육가로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입니다. 행여 이번 전시회에 <우공이산>이 왔을까, 기대를 걸었지만 역시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그는 화가집안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임모를 했습니다. 강유위의 중체서용론의 영향과 1917년 일본 유학에서의 문화적 충격으로 중국화개량론을 구상했습니다. 중국화 개량론이란, 소묘로 훈련된 과학적인 사실성을 중국화에 대입시키자는 것입니다. 이 이론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는데, 유학 시절 소묘와 낭만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서양회화의 상징성보다는 형(形)의 사실성에 더 큰 흥미를 가져 데생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는 '5.4 운동의 아버지' 북경대 교장 채원배의 추천으로 서법연구회에서 강의를 했고 중앙미전 원장을 지냈습니다. 1922년 귀국 후, 북평미전 교장을 지내고 장조화(蔣兆和), 오 작인(吳作人), 유발서(劉勃舒) 등의 후진 양성을 양성했습니다. 중국 고사나 역사적 사실을 서양화법으로 그리는 일에 몰두했는데 <우공이산도>는 서양의 명암법을 인물에 적용하고 배경 산수는 전통화법으로 처리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②임풍면
22. 임풍면, <풍어>, 65×131cm, 개인소장
23. 임풍면, <남천문>, 78×156cm, 개인소장
24. 임풍면,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68×68cm, 개인소장
중국의 마티스라 불리는 임풍면(林風眠:1900-1991)은 1919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 에콜 드 보자르에서 수학했습니다. 마티스의 포비즘에 심취하여 포비즘 정신을 중국화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간결 하면서도 핵심을 포착하는 선묘는 중국 여성, 경극 배우, 새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6년간 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항주예전을 설립하였는데 마티스, 루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야수파의 생략된 조형과 강렬한 색상을 중국화에 대입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렬한 색상과 수묵의 깊은 무게가 한 화면에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 서양화의 속사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실적인 조형 감각을 익히도록 강의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중국예술의 부흥을 위해서 나는 지옥으로 들어갔다”
③부포석
25. 부포석, <소나무 아래에서 물소리를 듣다>, 109×62cm, 홍희미술관소장
부포석(傅抱石:1904-1965)은 일본의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 미술사 공부를 하고 남경사범대 학과 중앙대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몽당붓을 주로 사용하여 투박한 효과를 연출한 그의 그림은 필법은 거칠지만 매우 시적인 흥취를 추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붓질을 한 듯한 그의 필법이 왠지 심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림도 한 장만 올렸는데 전시장에는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낭세녕(郞世寧)은 중국 그림을 배우는 데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중국인의 눈에 들 어오지 않는 것은 그가 중국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여 시정(詩情)있는 그림을 그리 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문인화의 시적 정취를 강조했는데 글쎄요, 제 눈에는 영...
④이가염
26. 이가염, <공원의 휴식>,51×44.5cm, 개인소장
27. 이가염,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 1984년, 94×57.5cm, 개인소장
28. 이가염, <소나무 숲속의 목동>, 1987년, 89×55.5cm, 개인소장
29. 이가염, <파초에 글을 쓰다>, 1985년, 133×69.5cm, 개인소장
30. 이가염, <봄비가 내리는 촉산>, 1982년, 81.4×50cm, 개인소장
31. 이가염, <강가의 마을>, 1988년, 84×52.5cm, 개인소장
32. 이가염, <아름다운 이강>, 1988년, 65×105.5cm, 개인소장
중국 근대 회화사에서 이가염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송나라때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대관산수의 전통이 이가염에 와서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변신을 한 것 같습니다. 이가염(李可染:1907-1989)은 16세에 상해사립미술전문학교(유해속이 창립) 사범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반천수에게서 오창석 계열의 그림 배운 그는 강유위를 만나 중체서용론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21세 때 채원배가 설립한 서호국립예술원에서 임풍면을 만나 형상의 과학적인 관찰과 소묘의 사실적인 묘사방법을 배워 철저한 현장스케치를 실천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역시 만남은 중요합니다) 서호예술원은 ‘서양미술 소개’, ‘중국 예술 정리’, ‘중서 예술 조화’, ‘시대예술 창조’를 강조하였는데 40세에 북평예전 교수시절 황빈홍의 제자가 되어 적묵법을 배웠습니다. 음...또 위대한 스승을 만났군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서비홍과 제백석을 만나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제백석의 필을 논하면서 그의 선이 마치 현(弦)과 같다고 감탄을 했습니다.(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를 느낄 수 있을지...부럽습니다) 끝없는 사생여행과 기본기(조형능력, 전공에 대한 기본능력, 회화도구의 사용능력, 사생)를 강조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단지 대상을 바라보는 일에 불과하며 사생을 통하여 그 대상 을 형상화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
이번 글은 이가염에서 시작해서 이가염으로 끝냅니다. 그의 그림도 12명의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이 올렸습니다. 누구는 겨우 한 작품 올려주고 누구는 그림 전체를 올려주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지 모르지만 마음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요. 이것이 글 쓰는 사람의 특권이라면 지나친 비약일런지요.
서울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박물관 전시회에서 오랫만에 중국 근대 회화를 감상했습니다. 임풍면의 작품은 이번만큼 많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고검부와 고기봉, 장조화와 반천수의 작품이 없어 조금 아쉬웠지만 곧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에 또 전시장을 찾게 될 테니까요. 이번 전시회는 대만 국립역사박물관과 서울대학교박물관의 문화교류 협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교류는 자주 가져서 다음에는 서비홍의 대작과 장조화의 작품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동 입니다. 한참 머물며 감상하고
모시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예~저도 감사합니다 선생님~늘 행복한 시간 되세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작품을 잘 감상했습니다. 고서마을 회원들도 함께 감상 하도록 모시고 가겠습니다.
님! 고맙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좋은 그림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_ *
좋아하는 <해파>의 작가들을 만나 눈과 마음까지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이가염, 오창석, 제백석, 임백년, 반천수등...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스크랩 해갑니다.
눈씻고 잘쉬다 갑니다.감사^^
좋은 작품 즐감합니다.~~
귀한 작품들...,열심히 배워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