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 무한(山情無限) / 정비석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玩賞)하며, 몇 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 ― 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오천 척의 망군대(望軍臺) ──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峰)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峰)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仞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에 단풍이 선혈(鮮血)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중략>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달빛에 젖으며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이 태형(笞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 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플류도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