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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예산문인
조선후기 예산문인은 조극선, 조익, 박두세, 윤봉구, 현상벽, 한홍조, 이재위, 김정희, 이남규, 남정일헌 등이 있다. 17~18세기에는 예산에서 학문이 크게 요동쳤다. 조선 후기의 강문팔학사와 실학자들이 예산에서 여러 명 배출되었다.
조극선은 조선일기의 대가이다. 『인재일록忍齋日錄』 과 『야곡일록 冶谷日錄』 두 일기는 조선시대 일기문의 백미로 후대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표제를 달아 내용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일기로 기록성과 진솔성이 잘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암촌 박두세는「요로원야화기」는 『홍길동전』과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잇는 소설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강문팔학사는 여덟 제자이다. 남한강 유역인 황강촌[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수재寒水齋에서 수학하였다. 여덟 제자의 명단은 조금씩 다르다. 한원진韓元震, 이간李柬, 윤봉구尹鳳九, 채지홍蔡之洪, 한홍조韓弘祚, 현상벽玄尙璧, 윤혼尹焜등을 칭했다. 이들 중 문인 중 윤봉구, 한홍조, 현상벽 등 세 명이 예산 출신이다.
병계 윤봉구는 덕산 사람으로 호론파湖論派인 한원진과 함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전개하였다. 호락논쟁에 참여한 중심인물로 꼽힌다. 덕산면 상가리 일대의 가야산 계곡에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빗댄 지명을 붙여 현재의 가야구곡伽倻九曲이 되었다.
관봉 현상벽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여 외암 이간과 함께 낙론파洛論派로 꼽힌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10권 5책의 『관봉유고(冠峰遺稿)』를 남겼으며, 예산읍 관작리에 송시열宋時烈,권상하 등을 배향하는 사우인 집성사集成祠의 건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암촌 한홍조는 금오산 아래 관작리冠作里 검곡黔谷에서 살았다. 매우 총명하였음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 권상하의 시문집인 『한수재집(寒水齋集)』여러 곳에서 한홍조에 대한 칭찬을 발견할 수 있다. 직접 시를 써 주기도 하였다. 한홍조의 여러 저술 중 『강상문답(江上問答)』이 유명한데, 권상하가 제자들과 당론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가 유명하다.
1.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1595 ∼1658〕
한양漢陽이며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595년(선조 28)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 출생했다. 조선시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예산현禮山縣’ 〔인물人物〕편에 나온 문인이다.
이명준李命俊, 박지계朴知誡, 조익趙翼 등에게서 배웠다.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었다. 종부시주부·공조좌랑을 역임하고 한때 은거하였다. 그 뒤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시폐時弊와 자강지책自强之策을 간곡히 진언하였다.
병자호란 후 순창군수, 형조정랑, 사어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8년에 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당시 좌의정이던 조익의 강력한 추천으로 성균사업成均司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조정에서 강화부사, 순창군수, 익산군수, 공조정랑 등에 임명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사헌부지평으로 관직에 복귀한 후 곧 장령이 되었다.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을 거쳐 이듬해 다시 장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조극선의 일기는 『인재일록忍齋日錄』 과 『야곡일록 冶谷日錄』이다. 『인재일록』은 15세(1609)부터 29세(1623)까지 쓴 일기로 성장기의 조극선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야곡일록』은 30세(1624)부터 41세(1635)까지 쓴 일기로 12가지의 규례에 따라 기록체계가 잘 되어있다. 두 일기는 조선시대 일기문의 백미로 후대에 평가받고 있다. 표제를 달아 내용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일기로 기록성과 진송성이 잘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저서『야곡집冶谷集』,일기저술『삼관기』,『인재일록忍齋日錄』, 『야곡일록冶谷日錄』이다.
2. 포저浦渚 조익趙翼〔1579 ∼1655〕
조익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존재存齋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시문에 능하며 풍양인豐壤人. 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현실정치의 부패 앞에서 정치세계를 포기하고 운둔의 길을 택했을 때와 영면의 세계로 운동을 달리한 이후 평가가 높다.
저서로는 『곤지록(困知錄)』·『중용주해(中庸註解)』·『대학주해(大學註解)』·『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이 있다.
묘소는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 아래에 문화재 보호각과 유품 및 유물 전시관이 있고 재실에는 조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후 광주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새해다짐/元朝箴
앞으로의 남은세월, 일분일초 아껴야지. 다시 한 번 놀이하면, 망할 인생 확실하다.
此後歲月, 一刻可惜. 若復把翫, 虛生也必.
차후세월, 일각가석. 약부파완, 허생야필.
- 『포저집(浦渚集)』28권 「원조잠(元朝箴)」
<작품해설>
새해 아침에 지은 「원조잠元朝箴」의 한 구절이다. “갑진년 새해 아침 금서지 나가는데 공부는 충실하지 못함이 한스러워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 앉아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 자신을 다 잡고자 잠箴을 지었다. 모두 64구 256자 이다. 허송세월 말고 마음을 다잡아 공부에 정진하자는 다짐의 내용이다.
3. 동암東岩 박두세朴斗世〔1654∼1733〕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사앙士仰이며, 예산군 대흥면 금곡 사람이다. 1650년(효종 원년)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에서 아버지 박율朴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호는 동암東岩이다. 성장기에 예산군 대흥면 금곡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678년(숙종4)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집필을 하였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작품으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삼운보유(三韻補遺)」,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가 있다.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갈신에 있다.
「요로원야화기」는 박두세가 조선시대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한 내용을 담아 쓴 서사적 작품이다. 『요로원야화기」내용 전체를 원문대로 소개하려 했으나 양이 방대하여 차후 미룬다. 최근에 예산읍 이명재 시인이 집필한『디지털예산문화대전』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 소개한다.
「요로원야화기」는 요로원의 주막을 배경으로 하여 하룻밤 동안 주인공인 손님[나]과 서울 양반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그려 내는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처음 부분과 끝 부분, 일부 설명을 제외하고는 손님과 서울 양반의 대화체로 구성되었다.
과거에 실패한 시골 선비가 요로원 주막에서 서울 양반을 만나 대화로써 당대의 세태와 정치제도를 풍자하는 것이 「요로원야화기」의 주요 내용이다. 사건 전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발단:초라한 행색의 선비[나]가 요로원 주막에서 서울 양반[손님]과 만난다. 전개-거만한 서울 양반을 속이기 위하여 어리숙한 시골 사람으로 행세하며 서울과 시골 양반의 풍속을 해학적으로 풍자한다.
·위기-서울 양반이 속은 걸 알고 부끄러워하고 서로 한시를 지어 화답한다. 풍월 화답 사이로 학문과 수양하는 태도와 부패한 과거제도를 비판한다.
·절정: 뜻이 통하는 친구가 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로 분열된 정치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밤을 지새운다.
·결말: 날이 밝아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진다.
「요로원야화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엮어 간 서사적 구조가 특이하다. 실제 경험을 펼침으로써 관념적이고 허구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사실성을 구축하고, 하룻밤 사이의 정경을 대화로 그려 냄으로써 형식적 파격을 이룰 수 있었다. 학문하는 자세와 양반의 허구성, 사회제도의 문제점과 당쟁 비판을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대화 속에 담아냄으로써 객관성을 구축한 새로움은 물론, 해학과 풍자를 뛰어난 문장으로 구현한 것 또한 눈여겨볼 요소이다.
「요로원야화기」는 수필 문학으로 볼 것인가, 소설 문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끝나지 않은 작품이다. 고전소설이 충분히 정착되기 이전인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용재총화(慵齋叢話)」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같이 야담류의 서사적 구조를 지닌 수필로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는 문학 갈래 구분의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고전소설의 발전 단계에 보이는 서사적 구조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야담류가 지니지 못한 창작성, 표현 기법 등에서 18세기 소설의 바탕을 이룬다고 평가된다. 소설은 15세기 후반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로 시작되었으나 대중과 유리되었고,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이 나온 것이 17세기였다. 이때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되었고, 김만중金萬重의 소설이 17세기 후반에 나오면서 소설은 대중 속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요로원야화기」는 『홍길동전』과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잇는 소설 작품으로 볼 때 소설 문학의 발전 과정이 분명하게 규명될 것으로 평가된다.
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7)와 윤봉오尹鳳五(1688~1719)형제
덕산 사람으로 호론파湖論派인 한원진과 함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전개하였으며 호락논쟁에 참여한 중심인물이다. 덕산면 상가리 일대의 가야산 계곡에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빗댄 지명을 윤봉구가 붙여 현재의 ‘가야9곡伽倻九曲’이 되었다.
저서 60권 30책의 『병계집屛溪集』이 있다.
5. 관봉冠峯 현상벽玄尙壁〔1673∼1731〕
예산인으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며 외암 이간과 함께 낙론파洛論派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 발전시겼다. 예산읍 관작리에 송시열宋時烈·권상하 등을 배향하는 사우인 집성사集成祠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저서『관봉유고冠峰遺稿』이다.
6. 암촌岩村 한홍조〔1681∼1712〕
강필팔학사 중 한명이다. 예산 사람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갈고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 부인 열녀 우봉이씨 정려는 봉산면 궁평리 있다. 저서『강상문답江上問答』, 『동유록東遊錄』, 『구봉선생래파변九峰先生來派辯』이다.
높은 재주 바른 길에 스스로 출중한데
외길 산 멀리 찾아 뜻이 너무 근면하다.
나는 선사에서 직자 하나 받았으니
작별함에 이걸로 그대에게 주노라.
高在政路自超群 遠訪窮山意太勤
고재정략자초군 원방궁산의태근
我受先師一直字 臨分0以贈吾君
아수선사일직자 임분0이증오군
-『한수제집(寒水齋潗)』에서
<작품해설>
한홍조는 그의 부친(한윤원)에 따라 수암 권상하 문하가 되어 인정을 받았다. 권상하가『한수제집(寒水齋潗)』에서 한홍조에 대한 칭찬을 해주며 시를 지는 듯하다.
7. 이명준李命俊[1572~1630]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 진사재進思齋이다. 조선 후기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다. 계축옥사로 유배당했다가 인조반정과 함께 복직하여 병조참판에 올랐다. 1631년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 묻혔다. 평생 검박하게 지냈기에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기에 인조가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저서로는 『잠와유고潛窩遺稿』이다. 1631년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 묻혔다.
8. 구완九畹 이춘원李春元(15713 ~1634)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九畹이다. 1571년 한성 훈도방 경제[현재 서울의 남산 및 중부경찰서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이춘원의 할아버지인 이윤우가 덕산현 고산[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기반을 잡아 살면서 예산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저서는 『삼옥풍류三玉風流』 ,『구원집(九畹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56-9번지 함평이씨 묘역 내에 있다.
9. 이사관 李思觀(1705 ~1776)
덕산현 대덕산면 이리(현재 삽교읍 이리)에서 태어났다. 이기환李基漢에게 입후했다. 덕산현 내야면 內也面, 봉명동 鳳鳴洞(현재 봉산면 봉림리)를 오가며 성장했다. 묘지는 봉산면 사석리에 있었으나, 2011년 봉림리로 후손이 이장했다.
10. 이재위李載威〔1745∼1826〕
1745년(영조 21) 덕산 장천리[現,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출생했다.
저서『물보』는 1770년경 이가환과 그의 아들 이재위李載威가 엮은 어휘집『물보』를 발간했다. 물건의 이름을 한자로 적고 그 아래 한글로 우리말 이름을 기록하였다. 상하 양 편으로, 상편 4부 21목과 하편 4부 28목으로 되어 있다.
묘는 고덕면 상장리 있었다. 1987년 후손들이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매산묘원으로 이장하였다.
11. 김려金鑢(1766~1821)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藫庭이다. 부친은 덕산현감을 지낸 김재칠金載七이다. 노론계의 비중 있는 명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화를 입어 생애를 대부분 유배지에서 보냈고 유배지에서 농어민과 친밀하게 지내며 많은 시문과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담정유고』 12권, 자신을 포함한 문인 16명의 글을 모아 『담정총서(藫庭叢書) 』,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등 야사 편집, 『우해이어보』,우산잡곡(牛山雜曲)등이 있다. 묘소는 예산군 신양면 연리 두지동에 있다.
12.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출생. 경주김씨慶州金氏 일문이 예산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입향한 이후이다. 추사 김정희는 박제가朴齊家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선행 실학자의 실증적 연구 방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적인 새로운 경학을 수립함. 서예에 있어서도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체를 남길 만큼 조예가 깊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우리고장의 자랑이다. 시와 문장, 글씨, 고증학과 금석학 등 다방면에서 많은 저술과 업적을 남긴 만능 대학자이다. 중국과 제주도등 여러 곳에 훌륭한 작품이 산재되어 있다. 과천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물 유적이 다행스럽게 회수하여 추사박물관을 건립하여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산군은 추사의 진품작품 확보한 것이 상당히 저조하다. 아쉬움이 남는다.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뚫어지게 했고 붓 일천 자루를 닳게 하였다. 이처럼 추사 김정희는 뛰어난 재기와 피나는 노력을 다하였다. 가시밭의 형국의 고난에 찬 제주도 유배 시절에 ‘세한도’와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벼루가 뚫어지도록 제자에게 9999분을 얻더라도 나머지 1분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땀을 흘려 작품집을 만들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저서를 불태웠다. 글과 그림에 정진하면서 완벽하려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단 1%노력도 소홀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부실하거나 불성실을 주위사람과 본인을 인정하지 않았다.‘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선시대 세도정치에 휘둘려 10여 년간 남쪽으로 귀양 가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고초를 겪었다. 그런 고초 속에서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리키고 외부와 접촉하여 많은 서신을 교환하였다. 그런 흔적은 청나라 옹방강 등 학예인과의 왕성한 긴밀한 교류한 흔적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어려운 삶속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을 완성해 나가는 진정한 위대한 위인이다.
고택과 묘소, 필적 암각문 등의 유적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있다.
저서는『완당전집阮堂全集』,『완당척도』,『담연재시고』, 그림으로는『세한도』등이 있다.
시골 집/村舍
장독대 동편엔 맨드라미 몇 송이
푸르른 호박넝쿨 외양간을 타 오르네.
조그만 마을에서 꽃 소식을 묻노라니
접시꽃 한 길 높게 붉은 꽃을 피웠네.
數朶鷄冠醬瓿東 南瓜蔓碧上牛宮
수타계관장부동 남과만벽상우궁
三家村裏徵花事 開到戎葵一丈紅
삼가촌리징화사 개도융규일장홍
※ 수타數朶 : 몇 떨기 계관鷄冠 : 닭벼슬. 맨드라미의 생김새가 닭벼슬 같다 하여 닭벼슬꽃이라 부른다. 장부醬瓿: 장독. 남과만南瓜蔓: 호박넝쿨. 우궁牛宮 :외양간. 삼가촌三家村: 세 집 사는 마을 작은 마을. 징徵:징험하다 살펴보다. 융규戎葵:접시꽃의 별칭. 일장홍一丈紅: 한 자나 붉다. 이 또한 접시꽃의 별칭이기도 하다.
<작품해설>
닭 벼슬처럼 생긴 맨드라미가 장독대 옆에 붉게 피었다. 호박넝쿨은 외양간 옆 벽을 타고 올라 지붕을 덮었다. 한갓진 대낮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기웃대는 눈길에 멀대 같이 큰 키에 붉은 꽃을 주렁주렁 매단 접시꽃도 보인다. 닭 벼슬 꽃 맨드라미나, 둥근 꽃은 넙직넙직 피우며 꼭대기로 올라가는 접시꽃은 모두 자손들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 잘되라는 뜻으로 심는 꽃이다.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13.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
한말의 문신이자 독립운동. 신채호申采浩의 스승이다. 관직에 있으며 일제에 강하게 대응할 것을 수차례 상소하였다. 저서는『수당집修堂集』과『기삼비사記三婢事』등이다.
감명/鑑銘
오로지 거울이 밝기 때문에
사물을 비춤이 거짓이 없다네.
오직 거울이 공변되기 때문에
곱거나 밉거나 군말이 없어라.
惟其明故 照物無僞
유기명고 조물무위
惟其公故 姸媸無異議
유기공고 연치무이의
- 이남규李南珪 『수당집(修堂集)』
<작품해설>
『수당집(修堂集)』실려 있는 <감명>과 <뜻이 정해지지
않으면> 고전명구로 전해오고 있다.
14. 남 정일헌貞日軒 南氏〔1840∼1922〕
남편 성대호成大鎬, 16세에 예산의 성씨 집안으로 시집와 20세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나뭇더미에 불을 붙여 분신하려 했으나 시어머니가 구원하고 타일렀다. 『주역』과 『시경』 탐독했다. 도고산과 덕봉산 아래 있던 자신의 집을 도운각道雲閣이라 이름 짓고 정일헌貞一軒이라는 편액을 붙임. 정일헌 편액의 ‘정일貞一’은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나 그 이치는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을 딴 것임. 이에 남씨의 호가 ‘정일헌’이 되었다.
1894년 11월, 간양리 앞에서는 북접 동학군과 관군의 관작리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정일헌은 피난을 하면서 자신의 일부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남아 있는 원고를 모아 1896년 경 시문집을 간행하고자 조선 말기의 학자 이건창李建昌의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일헌貞一軒남씨南氏 사후 양자 성태영成台永이 어머니의 유고 시를 모아 1923년 『정일헌시집貞一軒詩集』간행했다. 저서는「정일헌시집貞一軒詩集』이다.
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존구이구명사행차파주 1
이 몸은 아들 없고 남편도 없어
시부모만 믿었으나 끝내 시어머니 여의었네.
시동생의 아들 바랐으나 기르지 못했으니
어느 때에나 양자를 데려올 수 있으리오?
此身無子又無夫 只恃舅姑竟失姑
지시구고경실고 차신무자우무부
望弟生兒兒未育 何時蜾臝負蒲蘆
망제생아아미육 하시과라부포로
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존구이구명사행차파주 2
남들은 자식 있으되 나는 양자를 구하니
병든 시아버님 길 떠나매 그 얼마나 눈물 흘렸던가?
밤낮으로 기도하고 바라는 일 오직 예 있으매
총명한 아들 어느 곳에서 찾아오시려나?
他人有子我求螟 病舅登程淚幾零
타인유자아구명 병구등정루기령
日夜祈望惟在此 鳳雛何處生寧馨
일야기망유재차 봉추하처생영형 \
<작품해설>
남정일헌이 예산읍 간양리로 시집와 아직 양자가 없을 때 시아버지가 파주로 양자를 구하러 간일을 술회한 한시이다.
※ 참고문헌
1. 「고덕면지」총사 - 최완수
2. 「충남학의 이해」- 충청남도, 충청남도평생교육진흥원
3. 「예산의 고지도와 지리지」- 여지도서
4. 「디지털예산문화대전』-다음 검색
5. 「내포의 예산학 』- 묵향·문향으로서의 예산(이향배 충남대교수)
6. 「한국학중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7. 「충청도예산동학농민혁명』-인문지리학적 관점에서 본 내포정신의 형성과정
(예산지역을 중심으로) -안외순(한서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8. 『덕산면지』
9. 『역주 정일헌 시집』- 문희순 역주
10. 『자암 김구를 만나다(김충희)』- 예산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