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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따다줘] 06
1. 씬. 강하의 집 전경 (밤)
빨강E : 우리는 청소하는 6남매랍니다.
2. 씬. 강하의 집 거실 (밤)
-빨강, 청소기 들고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처럼(에이프런, 두건 쓰고,) 동생들, 모두 머리에 두건 쓰고, 청소 도구들 하나씩 들고.
남이는 두건 쓴 채 소파에 앉아 놀고 있는.
빨강 : 그럼 다같이 오늘도 열심히 해볼까요?
동생들 : (동시에) 예 써. (하면서 경례 붙이고)
-열심히 구석구석 청소를 하는 빨강과 동생들.
들어오는 태규.
태규 : 뭐하는 거야? 다들?
빨강 : 보면 모르니, 완벽한 가정부가 되고자 하는 진빨강과 그의 동생들이 힘을 합쳐 집안을 때 빼고 광내고 있잖아?
자, 다들 쉬지 말고 열심히.....
동생들 : (열심히 청소하는데)
태규 : (한심하게 보면서 빨강의 팔을 잡고 옆으로 잡아끄는) 이런 걸로는 큰 삼촌 마음 바꿀 수 없어,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좀 생각해봐.
빨강 : 다른 방법 뭐?
태규 : 미인계라든지?
빨강 : (보면)
태규 : (위 아래로 훑으며) 안 될까?
빨강 : 나 청소해야해.
태규 : (다시 빨강 잡으며) 이런 걸로는 안 된다니까. 큰 삼촌 마음 바꿔야 하잖아?
빨강 : (똑바로 보면서) 나 네 큰 삼촌 마음 바꿀 마음 없어. 네 큰 삼촌은 저렇게 독종으로 살다가 죽으라고 해.
3. 씬. 지하방 (밤)
-동생들 지쳐서 앉아있는. 빨강, 우유 병 물고 잠든 남이 입에서 우유병 빼내고 조심스럽게 눕히는.
빨강 : 다들 수고들 했어. 어서들 자.
-문 열리는. 태규 들어서는.
태규 : 다들 수고 했는데, 피자들 먹고 자자.
-동생들 와 하고 소리 지르는.
빨강 : 네가 무슨 돈이 있다구?
태규 : 살만 하니까 사겠지. 애들 일만 시키고 그냥 재우면 되겠어? 자, 자. 맛있는 피자를 열심히들 먹어볼까요.
초록 : 봐, 봐. 이 오빠라니까.
태규 : 뭐가?
4. 씬. 2층 거실 (밤)
-빨강, 강하의 방을 바라보고 있는. 망설이는 느낌으로 잠시 보다가 입술 굳게 깨물고 노크하는.
5. 씬. 강하의 방 (밤)
-강하,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
강하 : (돌아보지 않은 채) 들어와.
-문 열리는 소리. 들어와서 서는 빨강.
강하 : 뭐야? 빨리 말하고 나가.
빨강 : 저기....
강하 : (돌아보는) 제발 내가 집에 있을 땐 여기 좀 올라오지 말죠.
빨강 : .....
강하 : 뭡니까?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하고....
빨강 : (무릎 꿇고)
강하 : (당황해서 보다가 일어서서 싸늘하게) 무릎 꿇는 게 습관인가 보죠?
빨강 : (보면)
강하 : 낮에 회사에서도 그랬다면서요? 거기 팀장한텐 먹혔나보죠? 그러니까 그 방법을 또 써먹는 거겠지만.
빨강 : 네. 저 이런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인정받을 능력이라는 게 없으니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애원을 해야지.
강하 : 그쪽 팀장한텐 통했는지 모르지만, 난 아닙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시죠.
빨강 : 한달만.....시간을 주세요. 딱 한달만이요. 그 안엔 꼭 나갈 데 마련할 테니까.
강하 : 난 애들 벅적이는 시끄러운 집은 딱 질색입니다.
빨강 :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그럼 한 달 동안 나가 사시던가요?
강하 : (어이없어서 보는)
빨강 : (내가 왜 이러냐, 눈 감았다 뜨고)
강하 : 지금 말이 안 된다는 건 본인도 알죠?
빨강 : 알아요.
강하 : 그럼 두 말 하지 맙시다.
빨강 : 가정부 필요하시잖아요?
강하 : 댁같이 애 다섯이나 딸린 가정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빨강 : 절대 시끄럽게 안할게요. 애 다섯 있는 티 절대 안내고 살 테니까 한번만 양보해주세요.
강하 :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빨강 : 그럴 이유 없어요. 그러니까 양보해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문 벌컥 열리면서 뛰어드는 태규.
태규 : 이렇게 애원하는데....
강하 : 넌 또 뭐야?
태규 : (무릎 꿇고 있는 빨강 보고 입 벌어지는) 무릎까지 꿇은 거야?
빨강 : 나가 있어, 넌.
태규 : 사람이 이러는 거 아니지, 삼촌.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빨강 : 넌 나가 있으라니까.
태규 : (빨강 옆에 무릎 꿇고) 큰 삼촌 나 약 끓을게.
강하 : 뭐?
태규 : 다시는. 다시는 약 안할게, 큰 삼촌.
강하 : 너 약 한 거야?
태규 : 음악 하는 놈, 그건 기본이잖아.
강하 : 저번에 검사 받았을 때는 정상이었잖아?
태규 : 요, 요즘엔 검사에 안 걸리는 신종도 많아.
강하 : 사기 치지 말고 나가라.
태규 : 빨강이랑 애들 고생하면서 사는 거 보고 나도 느낀 거 많아. 이 따위로 살지 말아야겠다고 이 악물고 결심한 게 있다니까.
그런 면에선 빨강이랑.....
빨강 : 나 스물다섯이라니까, 누나라고 해.
태규 : 지금 넌 그게 따지고 싶냐?
빨강 : 내가 위아래 모르는 것들은 참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태규 : 나 지금 너 도우려고 이러는 거거든.
빨강 : 그럼 그건 나중에 따지고 계속해라.
강하 : (그런 말을 주고받는 두 인간이 한심하고)
태규 : (강하의 발에 매달리면서) 삼촌. 빨강이랑 동생들은 나한테 인생의 스승이야. 약 끊고 이젠 진짜 인간답게 살게.
강하 : 너 정말 약 했던 거야?
태규 : 미안해, 삼촌. 하지만 이젠 정말 안할 거야. 그러니까 제발 얘들 좀 있게 해줘.
나 얘들 쫓겨나면 절망해서 또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6. 씬. 거실 (밤)
-태규, 빨강, 계단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 내려오는.
계단 밑에 서서 마주보고, 갑자기 손잡고 펄쩍 펄쩍 뛰는.
빨강 : 고마워, 고마워, 태규야.
태규 : 먹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먹혔다, 먹혔어.
빨강 : 너 약 정말 끊을 거지?
태규 : 나 약 안 해.
빨강 : (멍하니 보면서) 그럼 진짜 사기 친 거야?
태규 : (쉿) 나 연기력 죽이지?
빨강 : (다시 손 잡고 펄쩍 펄쩍 뛰는) 나 너한테 아카데미 상 주고 싶은 거 있지?
태규 : 아냐, 난 그래미 상 받아야 해.
빨강 : 그래, 그럼. (하는데 들어서는 준하) 지, 지금 오세요?
준하 : (두 사람을 보면)
태규 : (얼른 준하 앞으로 가서 자랑스럽게) 빨강이랑 동생들....
빨강 : 누나라고 하라니까.
태규 : 아, 좀. 작은 삼촌, 작은 삼촌. 한 달 동안 있어도 된대. 큰 삼촌이 그래도 된다고 했어.
준하 : (빨강을 보면)
빨강 : 태규가 도와줬어요.
태규 : 뭘 자기는 무릎까지 꿇고 애원 했으면서.
준하 : 왜 자꾸 무릎을 꿇어요?
빨강 : 네.
준하 : 어쨌든 다행이네요. (방으로 들어가는)
태규 : 언제 또 무릎 꿇었어 자기?
빨강 : .....
7. 씬. 식당 (밤)
-빨강,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준하, 들어오는.
빨강 : (일어서며) 뭐 드릴까요?
준하 : 아니에요, 물 좀 마시려구....
빨강 : (얼른 냉장고에서 물 꺼내 따르는)
준하 : (식탁 위에 놓인 종이에 눈길을 주는)
빨강 : (물컵 건네면서) 계약서 하나 쓰는 중이예요.
준하 : 계약서요?
빨강 :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어떻게 아셨어요?
준하 : (보면)
빨강 : 저 회사에서 무릎 꿇고 있었던 거.
준하 : 효과는 있습니까?
빨강 : 내일 출근은 해보라고 하셨어요.
준하 : 그것도 다행이네요. (물컵 들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면)
빨강 : 저한테 신경 많이 써주셔서 고마워요.
준하 : .....
빨강 : 그리고....
준하 : (돌아보면)
빨강 : 어제 마당에서 저한테 그러지 않으셨으면, 저 오늘도 거기로 출근했었을 거예요.
준하 : .....
빨강 : (꾸벅 인사하면서) 정말 고맙습니다.
준하 : (보다가 나가는)
빨강 : (얼른 앉아서 종이에 뭔가를 쓰고)
8. 씬. 강하의 방 (밤)
-강하, 파자마 꺼내는데, 노크 소리.
강하 : 또 뭐야?
-들어오는 빨강.
강하 : (진짜 귀찮다는 표정으로) 또 뭡니까?
빨강 : (공손하게 두 손으로 종이 내밀면서) 사인 좀 해주셨으면 해서요.
강하 : (뭔가 해서 종이를 받아드는) 계.약.서. 원강하는 진빨강과 그의 동생들을 한 달 동안 절대로 이 집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 계약을 어길 시엔 어떤 법적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약속한다. (기가 막혀서 보는) 이게 뭡니까?
빨강 : 그냥 제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안전장치라고 생각해주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
강하 : 대체 여기 어떤 법적 처벌이라는 건 뭘 말하는 겁니까?
빨강 : 그게 그냥, 그렇게 써야 진짜 계약서 같을 거 같아서.
강하 : 이런 애매한 계약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거 모릅니까? 한 달 동안이라는 게 언제부터 언젠지, 동생들이라는 건 대체
누구누구를 말하는 건지, 법적 처벌이라는 제제 사항은 대체 뭔지? 이러니까 따오는 계약마다 무효가 되는 거 아닙니까?
빨강 : 아무 의미도 없는 거겠지만, 변호사님의 양심을 믿을게요. 그러니까 사인 좀 해주세요.
강하 : (보다가 하는 수 없이,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만년필 뚜껑을 여는데)
빨강 : 주소랑 주민등록번호 랑도 써주시면 고맙겠는데....
강하 : (보면)
빨강 : 그래야, 덜 애매할 거 같아서.
9. 씬. 2층 거실 (밤)
-빨강, 계약서 종이를 들고 나와서 주먹 불끈 쥐며 아싸 하는.
10. 씬. 강하의 집 전경 (아침)
11. 씬. 2층 거실 (아침)
-태규, 몸 비비 틀면서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오는. 화장실 문고리를 잡는데.
강하, 방에서 나오는.
태규 : (놀라서) 안녕히 주무셨어요? 큰 삼촌. (얼른 뛰어서 내려가는)
강하 : (저게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12. 씬. 거실 (아침)
-준하, 화장실 앞에서 난감한. 태규, 옆에 와서 서는.
13. 씬. 화장실 (아침)
-주황, 변기에 앉아있고, 파랑, 의자 놓고 서서 세면대에 오줌 싸고 있고,
노랑, 초록 욕조 안에다 머리 대고 샤워기로 머리 감고 있는.
노랑 : 샤워기 좀 줘.
초록 : 나 아직 샴푸 남았단 말이야.
주황 : (준하, 태규 보면서) 그 문 좀.....
-준하, 태규 화장실 문 앞에서 난감한.
준하 : 어, 그래. (문 닫아주려고 하는데)
태규 : (문 고리 잡고) 주황아 나 정말 쌀 거 같은데.
주황 : 죄송해요.
준하 : (문 닫아주려고 하면서) 죄송하다잖냐.
- 빨강, 식당에서 나와.
빨강 : 아니, 얘들이 아직. (문 벌컥 열어젖히고) 팀장님 씻고 출근 하셔야 하는데 니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빨랑들 하고 나오라고 했지.
파랑 : (의자에서 내려서며) 난 다 했어.
태규 : (화들짝) 그럼 다음엔 나.....
준하 : (잡으면서) 야, 너도 저기다 싸려구?
빨강 : 죄송해요. 다들 출근하신 다음에 하라고 했는데, 빨리 하고들 나오겠다고 해서...
태규 : 안되겠다. (현관을 뛰어나가는)
주황 : 저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준하 : 그래. 이왕 기다린 거 좀 더 기다리지 뭐.
노랑 : (초록에게) 봐, 인간성은 팀장 아저씨가 짱이라니까.
빨강 : 떠들지 말고 빨리들 하고 나오지 못해.
준하 : 그런데 또 뭐 태우시는 거 같은데요?
빨강 : (화들짝) 어떡해, 어떡해.
14. 씬. 식당 (아침)
-빨강, 뛰어 들어오면. 가스불 위 석쇠에서 까맣게 탄생선.
빨강 : (또 맨손으로 석쇠를 들었다가 아 뜨거 하면서 바닥에 떨구고, 얼른 치우려고 앉는데, 앞에 발이 보이고, 고개를 들면,
식당 앞에 서있는 강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강하 : 애들 다섯이 북적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게 뭡니까?
태규 놈은 마당 나무 밑에서 일보고 있고, 애들은 아래층 욕실을 차지하고 서서 준하는 씻지도 못하고 있고,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까?
빨강 : (일어서며) 말이 안 되죠.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데 투명 인간들도 아니고,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게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거였죠.
강하 : (뭐야, 이 여자)
빨강 : (앞치마 속에 손 넣고, 종이 꺼내 앞에 내미는)
강하 : (보고)
빨강 : 계약서엔 그런 조항이 없는데요, 변호사님. 애들을 투명인간처럼 안보이겠다고 하는 조항이요.
강하 : 적반하장이란 말은 압니까?
빨강 : 그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안 그렇겠어요? 어른도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하물며 애들이 그런 게 가능하겠어요? 그만한 상식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태규, 뛰어 들어오면서.
태규 : 변호사란 사람들이 원래 법에만 강하지 상식엔 약하거든. 빨강이 말이 상식적으로 너무 딱딱 맞지, 큰 삼촌?
강하 : 너 아침부터 찬물 샤워 좀 해볼래?
태규 : (얼른 빨강이 뒤로 숨으며) 아니, 난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아직 샤워도 안한 거 같은데 얼른 가서 해 큰 삼촌.
2층 욕실은 텅 비어 있잖아.
강하 : (보다가 나가는)
빨강 : 넌 왜 끼어들어서 더 열 받게 만드니?
태규 : 그냥 나도 모르게 확 뛰어들게 되는 걸 어떡해? 큰삼촌이 자기한테 당하는 거 보니까 너무 너무 고소하다.
빨강 : (버럭) 누나라고 하랬지.
15. 씬. 거실 (아침)
-강하, 식당에서 나오고, 주황, 파랑, 노랑, 초록, 욕실에서 줄줄이 나와 강하 앞을 지나가며. 안녕히 주무셨어요?를 외쳐대는.
준하 : (신문 들고 서서 보다가 강하 옆으로 다가서며) 애들 인사성 밝지?
강하 : (열 받아서 걸어가려고 하면)
준하 : 진빨강씨 참 바람직한 인간상인 거 같지 않아?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상식에도 강하고.
16. 씬. 회사 로비 (아침)
-걸어오는 재영.
뒤에서 정신없이 남이 업고 뛰어오는 빨강. 빨강, 엘리베이터를 잡으려고.
빨강 : 잠깐만이요, (를 외치면서 달려가다가, 재영의 어깨를 밀치게 되고)
재영 :(비틀하고)
빨강 : (보지도 않고) 죄송합니다. (하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진하는데)
재영 : 진빨강씨?
빨강 : (돌아보고, 굳어지는)
재영 : (다가오는) 진빨강씨가 왜 자꾸 우리 회사에 나타나는 거죠?
빨강 : ......
17. 씬. 사무실 (아침)
-빨강, 걸레 들고, 남이 업고, 책상 닦고 있는. 직원들 눈총 주며 걸어 나가는.
입구에 서성이던 은말 얼른 들어와서.
은말 : 출근 때는 남이 나한테 맡겨. 다들 (눈 모아 뜨고) 요렇게 쳐다보는데.
빨강 : 그러다 은말씨도 짤리라구. 어차피 들켰어. 그냥 밀고 나가야지 어쩌겠어.
은말 : 넌 불도저냐, 뭘 그렇게 자꾸 밀고 나가냐?
18. 씬. 재영의 사무실 (아침)
-재영, 책상 앞에 앉아있고, 그 앞에 서있는 팀장.
재영 : (일어서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애까지 업고 나오는 직원을 계속 근무하게 해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영순 팀장님답지 않게 왜 이러시죠?
팀장 :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직원이 아닙니다.
재영 : 가능성이 있어서 5년 동안 실적이 전국 최하위인 건가요?
팀장 : 그건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아서 그런거구.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저도 달라질 겁니다.
재영 : 그걸 기다려주자구요? 왜 그래야하죠?
팀장 : 전국에서 실적 1위 팀을 이끄는 제가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직원이니까요.
19. 씬. 사무실 (아침)
-빨강, 열심히 청소하고 있는. 들어오는 팀장.
빨강 : (눈치 보는)
팀장 : (들고 있는 청소 도구 보면서) 청소로 눌러 앉을래?
빨강 :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보는)
팀장 : 딱 한달이야. 한달 안에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넌 평생 있으나마나 미스진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빨강 : (팀장 손 덥석 잡으며) 팀장님, 팀장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진짜, 진짜 열심히 할게요.
-시간 경과.
팀장, 치약 세트 정도 10 상자 책상 위에 놓는.
빨강 : (물끄러미 바라보는)
팀장 : 내가 예전에 고객들한테 돌리다 남은 거야. 가지고 나가봐.
빨강 : (울컥해서) 팀장님?
팀장 : 너 이뻐서 이러는 거 아냐. 못난 누나 만나서 생고생 하고 있는 어린 게 안타까워서지.
네 동생 놀이방에라도 맡기려면 미친 듯이 뛰어다녀.
빨강 : 네, 네, 그럴게요.
팀장 : 새 고객 만들려고 하지 말고, 보유하고 있는 고객부터 하나하나 찾아다녀. 진빨강을 아는 고객이면 고개부터 저을 테니까
이거 들고 찾아가서 그냥 어떻게 지내시냐고 인사만 해. 알았어?
빨강 : 네, 팀장님.
20. 씬. 회사 일각 (낮)
-빨강, 남이 업고, 두 손에 치약 세트 5개씩 들고 의욕에 불타는 표정으로 서있는.
은말, 진주 그런 빨강을 보면서.
은말 : (치약 세트 만지면서) 웬일이랴? 실적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인간이 뭔 맘을 먹고 이런 것까지 네 손에 들려줬다니?
진주 : 어제 석고 대죄한 게 약발이 있었나보다.
은말 : 머리까지 풀고 했으면 갈비 세트 같은 거 들려줬을지도 모르는데, 아깝다.
진주 : 어쨌든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었으니 천만다행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빨강 : 한 달이야. 딱 한 달. 집도 회사도, 그 안에 솟아날 구멍 꼭 뚫어야해. 나 갈게. (돌아서는)
21. 씬. 병원 전경 (낮)
민경E : (화가 난 목소리로) 없어지셨다뇨?
22. 씬. 병실 (낮)
-민경, 간병인, 서있는.
간병인 : 화장실 갔다가 왔는데.....
민경 : 화장실은 이 안에도 있는데 왜 밖으로 가세요?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없어지셨단 말이에요?
간병인 : 화장실 갔다 오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잠깐.....
민경 : 어떻게 일을 이런 식으로 하세요?
23. 씬. 인구 사무실 (낮)
-인구, 강하, 서류 보고 앉아있는.
인구 : (서류 보면서) 멀티샵 인공 허가가 좀 늦어지는 거 같은데. 다른 수를 써야 하는 거 아닐까?
강하 : (보면)
인구 : 오픈 날짜는 잡아놓고, 홍보도 하고 있는데, 허가가 늦어지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냐?
윗선에 줄을 대서 빨리 좀 서둘러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강하 : 법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괜히 이쪽에서 조급한 것처럼 굴면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인구 : 그럴까? 이런 대규모 공사엔 떡값도 좀 오고가고 그래야 정감이 있는 거 같아서 말이다, 나는. (하는데 핸드폰 울리고,
번호 보고) 어, 그래? 웬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벌떡 일어나며) 뭐 아버님이 없어지셔?
강하 : (일어서는)
24. 씬. 택시 안 (낮)
-달리는 택시, 뒷좌석에 환자복 위에 코트를 걸친 정회장 창 밖을 두려운 눈빛으로 보고 있다.
기사 : 할아버지? 고속버스 타는데 가자고 하셔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더니 여기 아니라고 하시고, 배 타는데 가자고 하셔서
인천항까지 갔는데도 여기 또 아니라고 하시고, 정말 어디로 가시자는 거예요?
정회장 : 그...그게....우리 큰 아들이 섬에서....의료봉사를 하는데....
기사 : 그러니까 그게 어느 섬이냐구요? 섬이름을 아셔야 가든지 말든지 하시죠.
정회장 : (두리번거리다가) 저....여기....좀......
기사 : (차 세우고, 미터기 보면 30만원 넘는 액수다) 돈은....있으신 거죠?
정회장 :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현금이 5만원 정도밖에 없다. 그 돈을 꺼내 내밀며) 가진 게 이게 전분데.....
기사 : 아, 할아버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정신 온전한 노인네가 아니다 싶어서 내가 그냥 내려놓고 가고 싶더라니.
(그러다 지갑에 꽂힌 카드를 보고) 카드 있으세요?
25. 씬. 동네 길 (낮)
-예전에 빨강이네 동네. 정회장, 두리번거리며 힘겹게 걸어가는.
26. 씬. 병실 (낮)
-민경, 전화 하고 있는데. 간병인 아줌마 죽을상을 하고 서있고.
급하게 들어오는 인구, 재영, 강하.
민경 :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장님.
인구 : 어떻게 된 거야? 아버님이 없어지셨다니?
민경 : (전화 끊고) 저 아줌마가 자리 비운 사이에 나가셨나봐.
인구 : 아줌마는 대체 뭐하신 거예요?
간병인 : 죄, 죄송해요.
강하 : 병원 안은 잘 찾아본 건가요? 아직 거동도 불편하신데 멀리 가진 못하셨을거 같은데요.
민경 : 병원 CC 티브이에 병원을 나가시는 모습이 찍혀 있어요.
재영 : 환자복을 입고 나가셨을 테니까 금방 눈에 띄실 거예요.
민경 : 우리 집 아줌마가 할아버님 드실 반찬 해오면서 산책하실 때 걸치시라고 코트를 가져다 놨단다.
그걸 입고 나가시는 게 찍혀 있어.
인구 : 아니, 그 아줌마는 왜 시키지 않는 짓을 하고 그러나?
(간병인 보면서) 이 아줌마나, 저 아줌마나 아줌마들이 왜 이렇게 말썽이야.
27. 씬. 동네 길 (낮)
-빨강이 출근하던 길의 동네 계단. 정회장, 힘없이 주저앉아 난간에 기대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는.
그 앞을 뛰어가던 만수. 홱 돌아보고.
만수 : 어. 할아버지다.
정회장 :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
만수 : (앞에 와서 서며) 할아버지. 저기 경철이네 이사 가. 거기 쓰레기 대따 많아. (정회장 팔 잡아끌며) 가자, 할아버지.
정회장 : 너.....누구냐?
만수 : (보다가 킥 웃으며 옆에 앉아) 너....누구냐? 난 만수다.
정회장 : (얜 뭐지 하는 눈빛으로 만수를 살피는)
만수 : 근데 할아버지 어디 갔다 왔어?
정회장 : 너.....나 아냐?
만수 : 너....나 아냐? 안다. 빨강이네 없어서 딴 데 가서 쓰레기 줍는 거야?
정회장 : 빨....
만수 : 할아버지. (얼굴 가까이 대고) 난 안다.
정회장 : 어?
만수 : 빨강이 엄마 아빠. 트럭이 죽였다. 내가 다 봤다, 보물 찾으러 갔다가.
정회장 : .....
만수 : 난 그럼 바빠서. (의미심장하게) 저쪽 산에 유에프오가 있는 거 같아. 내게 외계인 만나면 니들은 쓰레기 어디다 버리냐고
물어봐줄게. 내가 연락하면 빨랑 와. (휘리릭 달려가고)
정회장 : (일어서며) 얘....얘야? 날....어떻게 아는 거냐? (하지만 만수는 이미 내뺀 뒤고) 그 놈 참 번개 같네.
(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는.
플래시 컷으로 흐린 시야에 빨강이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모습. 고개를 돌리는데.
초록이 병을 들고 서있는 모습이 흐린 시야로 쓱 지나가고. 어지럼증을 느끼며 난간을 꼭 붙잡으며) 빨....빨....강이....
28. 씬. 슈퍼 (낮)
-빨강, 남이 업고, 아줌마, 아저씨와 얘기하고 있는.
아저씨 : (치약 세트 보며) 뭘 이런 걸 다 가져와.
빨강 : 제 고객이시잖아요.
아줌마 : (분유 두 통 챙기면서) 몇 만 원짜리 건강보험 하나 들어준 것도 고객이라고.
빨강 : 왜 이러세요? 저한테는 제일 중요한 고객이신데요.
아줌마 : (분유 들고 와서 빨강의 손에 쥐어주며) 남이 가져다 먹여. 엄마가 계실 땐 이유식도 섞어먹이곤 하셨는데 이젠....
(울먹해지고)
아저씨 : 아, 거 애 마음 아프게.
아줌마 : 남이 우유 좀 늦게까지 먹어야 할 거다.
빨강 : 네. 갈게요.
아저씨 : 이런 선물까지 가져왔는데, 보험도 하나 더 못 들어주고 어쩐대?
빨강 : 아니에요. 그냥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아줌마 : 그래, 종종 좀 들려.
-아줌마, 아저씨, 빨강, 가게 앞까지 나와서 배웅하고.
빨강 : 버스 오네요. (하면서 달려가 마을버스에 올라타는)
-마을버스 안. 빨강 자리에 앉으면서.
빨강 : (분유통 보면서) 남아, 나중에 성공해서 이거 다 갚아드려야 해, 누나가 고맙다고 하는 거랑, 네가 고맙다고 하는 거랑은
다르단 말이야. (업혀 있는 남이 돌려 안고 얘기하느라. 창 밖으로 걸어가고 있는 정회장을 보지 못한다.
정회장과 마을버스 스쳐지나가는. 창가에 앉은 빨강의 모습)
29. 씬. 분식집 정도 (낮)
-빨강, 남이 업고, 주인 여자에게 치약 세트 내밀고 있는.
주인 : (못미더운 표정으로) 이런 건 뭐하러....
빨강 : 그냥 쓰시라구요. 장사는 잘 되시죠?
주인 : 요즘 장사 잘 되는 집이 어디 있어?
빨강 : 그러게요, 다들 어려우시다고 하드라구요.
주인 : 근데 나 저번에 그 계약 다른 사람한테 들었는데. 아가씨한테 들어준 건 뭐 문제가 있어서 안 된다며?
빨강 : (민망해서) 네. 제가 좀 실수를 해서.
주인 : 가져온 거니까 잘 쓸게. 저녁 장사 준비하려면 지금 좀 바쁜데....
빨강 :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고 돌아서는데)
주인 : 근데 왠 애기를 업고 다녀?
빨강 : (머쓱하게) 네, 제 동생이예요.
주인 : 동생? 동생을 업고 일을 하러 다니는 거야?
빨강 : 네. 다른 동생들도 있는데, 얜 너무 어려서 제가 데리고 다녀요.
주인 : 어머니, 아버진?
빨강 : ......사고로 얼마 전에.....그럼. (돌아서는데)
주인 : 저기....새로 나온 거 싼 걸로 뭐 괜찮은 거 있나?
빨강 :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시간 경과.
빨강, 팜플렛 놓고 설명하고 있는. 주인 앞에 앉아있는.
빨강 : 이게 중복 보장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주인 : 알고 있는 거야? 아는 거야?
빨강 : 그게.....여기 어디 있을 텐데, 어디드라. 있었는데.....
-손님들 들어오고.
주인 : (일어서며) 오늘은 안 되겠네. 나중에 제대로 알아서 한 번 더 들리던지.
빨강 : (실망스러운)
30. 씬. 길 (낮)
-빨강. 남이 업고 걸어오면서.
빨강 : 다른 땐 말도 징그럽게 잘하면서 왜 고객 앞에만 서면 반편이같이 횡설수설인데? 너 정말 이러면 안돼, 진빨강.
한달 밖에 없다구. 한달 밖에. (울리는 핸드폰 번호 보고 의아해 하면서) 여보세요? 우....태...규?
31. 씬. 재즈 바 앞 길 (낮)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빨강. 재즈 바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태규, 빨강을 발견하고 반색하고 달려오는.
태규 : 자기?
빨강 : 너 정말?
태규 : 나 자기 사업 파트너다.
32. 씬. 재즈 바 안 (낮)
-다섯 명 정도의 친구들 뺑 둘러앉아있고, 빨강, 남이를 업고 치약 세트 하나씩을 돌리는.
빨강 : 약소하지만 제 성의라고 생각해주시고.
친구1 : 이런 거 막 받아도 되는 거냐? 난 정말 보험 들 생각 없는데.
-태규, 빨강 뒤에 서서,
태규 : (억압적으로) 주면 받아씨.
친구1 : 그래, 받긴 받는데.
태규 : 자기, 남이는 나한테 주고 자긴 업무 계속 봐.
-친구들 킬킬거리며 자기래, 자기, 어쩌고저쩌고.
친구1 : 마흔 여덟 번째 운명의 상댄가 보다.
친구2 : 아냐. 쉰 번은 훨씬 넘었을 걸.
빨강 : (태규를 노려보면)
태규 : 얘들 보험 하나도 없는 애들이야.
빨강 : (희망에 찬 표정으로 친구들을 돌아보면)
친구2 : 야, 젊은 놈들이 보험은 무슨. (일어나려고하면)
태규 : 그냥 좀 듣지?
-시간 경과.
태규, 남이 안고 어르고 있는데. 친구들 뺑 둘러앉아 있고, 빨강 팜플렛만 어지럽게 쫙 펼쳐놓고 버벅이고 있다.
빨강 : 연금 보험은 한 살이라도 젊으셨을 때....
친구1 : 자꾸 같은 말만 하지 마시고, 그러니까 정확하게 얼마씩 내면 되는 건데요?
빨강 : 그. 그러니까 스물 세 살이시니까.... (팜플렛 뒤적이고)
태규 : (안쓰러워서) 계산기 줄까? 야, 계산기 어딨냐? 계산기?
친구2 : 요즘은 다 노트북 같은 거 가지고 다니지 않나.
빨강 : 제가 오늘은 가지고 다닐 게 많아서 노트북을 두구 왔더니.
친구3 : 그럼 정확하게 원금 찾을 수 있는 시점이 어딘 거예요? 3년, 5년?
빨강 : 그렇게 빠르게는 아니구요, 그러니까 그게 10 몇...년인가...
친구1 : 헉이다. 10몇 년도 지나야 원금을 찾는다고. 그럼 그게 손해잖아.
빨강 : 아니,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 게 아니고. 보험의 특성이라는 게 비 올 때를 대비해서....
친구2 : 일찍 원금 찾아서 우산 사면되는 거 아닌가?
33. 씬. 재즈 바 (밤)
-빨강, 남이 업고, 태규와 걸어 나오는.
빨강 : 고맙다.
태규 : 자기 왜 그래?
빨강 : (시무룩하고)
태규 : 아까운 선물만 왕창 날렸잖아. 한 껀도 못하고. 자식들 뭘 그렇게 따지고 난리야.
그냥 들으라고 하면 하나씩 들어주면 되는 거지. 자식들 우정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
빨강 : 내 설명 듣고 보험 들기 쉽지 않아.
태규 : 정말 왜 그래? 내가 봐도 자기는 업무에 문제가 좀 있드라. 자기 말 버벅이고 그러는 타입 아니잖아?
빨강 : 그런 걸 우리 속담으로 집안 퉁수라고하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맨날 그랬어.
집 안에서만 뻥뻥 큰소리지, 진짜 일 할 땐 반편이 노릇한다구.
34. 씬. 경찰서 (밤)
-인구, 민경, 재영, 강하 급하게 들어오는. 정회장, 의자에 쪼그리고 잠이 들어있는.
인구 : (다가가 정회장을 잡으며) 아버지? 아버지?
정회장 : (부시시 눈 뜨고)
인구 : 아버지? 왜 이러세요? 정신도 없으시면서 도망가시면 어쩌냐구요?
정회장 : 인구야?
인구 : 네, 아버지, 인구 여기 있어요.
정회장 : 찾을 수가 없다, 네 형. 어딘지.....네 형 간 데가 어딘지.....통 생각이 안나.
35. 씬. 병실 (밤)
-정회장,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고. 인구, 민경, 재영, 강하 서있는.
인구 : 우리 아버지, 정말 왜 이렇게 내 가슴을 찢어놓으시냐?
민경 : 그래도 천만다행이야. 금방 돌아오셔서. (강하에게) 오늘 괜히 원변호사까지 번거롭게 했네요.
인구 :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강하가 남인가. 이제 곧 우리 집 사람이 될 텐데.
민경 : 그만 가 봐요. 고생 했어요.
강하 : 그럼. (인사하고 나가는)
-재영, 따라 나가고.
인구 : 당신, 너무 그러지 마라. 강하한테 너무 쌀쌀맞아 보인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민경 : 누가 누구 사위라는 거야?
인구 : 사랑은 국경도 넘는다는데.....
민경 : 그건 지가 넘고 싶어야 넘는 거야. 강하 쟨 그럴 마음 전혀 없는 애니까 재영이 꼴만 우습게 만들지 말고
당신도 태도를 분명히 해.
인구 : 우리 재영이가 누구냐? 지가 한다면 하는 애야. 재영이 쟤가 저 하고 싶은 거 못한 적 있어? 쟤 당신 닮아서 독해.
민경 : 나 그 말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인구 : 당신도 참 유별나다, 엄마가 딸이 자기 닮았다는 말을 왜 그렇게 싫어해? 똑똑한 딸이 엄마 닮았다고 하면....
민경 : 하지 말라구, 그 말.
인구 : (주눅이 들어서 갑자기 돌아서서 정회장 붙잡고) 아버지. 또 그러시면 저 정말 미쳐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36. 씬. 병원 로비 정도 (밤)
-강하, 재영 걸어오는.
강하 : 들어가라.
재영 : 이런 느낌 나 좋아.
강하 : (보면)
재영 : 나한테 일 생겼을 때 오빠가 옆에 있어주는 거. 특히 그 일이 우리 가족 일일 때, 그건 남남이 해주는 일은 아니잖아?
강하 : 네 아버님이 내 아버지라는 분 친구셔. 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날 친손자처럼 챙겨주시던 어른이시구.
그냥 사람 된 도리로 오는 거니까 다른 의미 부여하지 마.
재영 : 어쨌든, 느낌은 괜찮다구. 근데 그런 거 일일이 따져서 그건 아니다 하는 것 자체가
뭔가 그렇게라도 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되는 심리적 부담 같은 거 아닐까?
강하 : .....
재영 : 가까이 하지 말자, 이성은 그렇게 속삭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가게 되는 감정을 포장하려는 심리적 제어 같은 거?
강하 : 나 너를 상대로 그렇게 복잡한 생각 안 해. 내 모든 행동을 네 식으로 해석하지마라. (돌아서는데)
재영 : 왜 꼭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는 분이라고 불러?
강하 : (순간 멈추고)
재영 : 가까이 가지 말자고 속삭이는 그 이성 말이야. 쟤와 엮이면 난 내 아버지라는 분의 친구분을 장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부담감 아니야?
강하 : (돌아보며) 그럼 알겠구나?
재영 : 뭘?
강하 : 나한테 세상 여자가 다 여자로 보여도 왜 넌 여자로 안 보이는지? (돌아서서 걸어가는)
37. 씬. 강하의 집 전경 (밤)
38. 씬. 지하 방 (밤)
-빨강, 남이 재우고 있고, 동생들 상에 둘러앉아 책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빨강 : 분위기 좋잖아, 학구적이고. 숨어산다는 핑계로 그동안 신나게 땡땡이들 쳤지, 하지만 이젠 어림도 없어.
신학기 되면 무조건 성적 10등씩 올리는 거야.
초록 : 난 올 백이라 1등인데 어떻게 10등을 올려?
빨강 : 초록이 넌 빼고, 진주황, 진노랑 니들은 알지?
주황 : 중학교 공부하고 초등학교 공부하고 같아?
빨강 : 그래서 초등학교 땐 공부 무지하게 잘 하셨어요?
주황 : 그래도 난 중간은 간다. 누난.....
빨강 : 진주황 입 다물어.
주황 : (입 삐쭉이는데)
노랑 : 우리도 다 알아.
초록 : 엄마가 언니 집에서 양양거리는 거 다 양만 받아 버릇해서 그런 거라고 언니 성적표도 보여주고 그러셨단 말이야.
빨강 : (입술 깨물며) 엄마는 진짜.
초록 : (파랑 노트 보면서) 야, 아버지지, 아바지가 뭐야? 아바지가? (쥐어박는)
파랑 : 왜 때려?
초록 : 바보니까 때리지.
파랑 : 큰 누나?
빨강 : 왜?
파랑 : 우리 집 가난한데 나 꼭 학교 가야해?
빨강 : 뭐?
주황 : 임마, 그럼 학교 안가고 나가서 돈 벌래?
파랑 : 아니, 난 아직 어리니까 돈은 못 벌고. 부자는 버는 것보다 안 써야 되는 거라면서? 초록 누나 그랬어? 안 그랬어?
초록 : 그게 뭐?
파랑 : 그러니까 내 말은 학교 가면 돈도 많이 들 거 아냐. 가방도 사야하고, 스케치북도 사야하고, 크레파스도 사야하고.
빨강 : 그래서?
파랑 : 내가 집에 있으면 그 돈 안 쓰게 된다 그거지.
주황 : 참 머리 쓴다.
파랑 : 그치 않아? 큰 누나?
빨강 : 초록아, 노는 주먹 뭐하니?
초록 : (주먹으로 파랑 머리 쾅 내리치고)
파랑 : 이래서 내가 머리가 나빠지는 거야, 몽유병도 안 낫는 거구.
노랑 : 난 파랑이 쟤하곤 생각이 좀 달라.
빨강 : 넌 또 무슨 생각?
노랑 : 파랑이는 남자니까 결혼해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를 해야 하지만, 난 여자잖아.
주황 : 여자는 공부하지 말라는 법 있냐?
노랑 : 여자는 시집 잘 가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빨강 : 넌 진짜 어린 애가 왜 그렇게 생각이 촌스럽니?
노랑 : 맨날 언니가 한 소리잖아? 명품 옷 사는 것도 남자 하나 잘나면 되니까 투자하는 거라면서?
빨강 : (할 말이 없고) 옛날 옛적에 하지 말고, 어서 공부들이나 해. (일어서며) 언니는 가서 쌀 불려놓고 올 테니까,
주황이 너 애들 딴 짓 못하게 감시 잘해.
39. 씬. 식당 (밤)
-빨강, 쌀 물에 담그고 있는.
빨강 : (천정 올려다보면서) 엄마, 아빠? 딴 건 다 그만두고. 제발 그거 하나만 신경 좀 써줘. 쟤들.....나처럼 안 되는 거.
40. 씬. 지하방 (밤)
-빨강, 들어오면, 동생들 모두 잠들어있고.
빨강 : 공부하라고 하면 참 빨리들도 자지. (이불 여며주고. 가방에서 팜플렛 꺼내는)
41. 씬. 마당 (밤)
-빨강. 나와서 팜플렛 들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심호흡 하는.
빨강 : 아....아.... (목 가다듬고) 고객님, 이 상품으로 말씀드리자면, (한톤 씩 놓아가는) 유니버셜 연금보험의 특성은....
보장자산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0년인 넘어야 원금을 찾게 되시니 처음엔 손해란 생각이 드시는 게 당연합니다.
(이젠 거의 웅변을 하는 수준으로 우렁차게, 못에 핏대까지 세우고) 고객님? (손짓까지 과하다 싶도록)
지금까지 알고 계시던 진빨강에 대해선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젠 보험과 상관도 없는 내용들로 웅변을 하고 있는)
있으나마나, 미스진, 네 맞습니다, 맞고요. 하지만 그 있으나마나 미스진이 갱생의 길을 걷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과거의 있으나마나 미스진은 잊어주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 진빨강을 한번 믿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락, 바락 소리 지르며 마당을 걸어 다니며 외치고, 가슴을 쥐어뜯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생쇼를 하고 있는 빨강의 모습들)
42. 씬. 강하의 집 앞 (밤)
-강하의 차와 경찰차 동시에 와서 멈춰서는.
강하, 경찰1 동시에 차에서 내리는.
강하 : (인사하는) 무슨 일로?
경찰1 : 주민 신고가 들어와서요.
강하 : (태규 이자식이 또)
-문 안에서 들려오는.
빨강E : 이 진빨강 고객님의 진정한 동반자로 거듭나고자 하오니 믿어주십쇼. 믿어주세요.
강하 : (이건 또 뭐야?)
43. 씬. 강하의 집 마당 (밤)
-강하, 경찰1 문 열고 들어서면, 빨강, 혼자 필에 취해 마당을 오가면서.
빨강 : 있으나마나 미스진 고객님께 실망을 드린 거 사실입니다. 저도 그런 제 과거가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을 지경이지만, 이렇게 다시 고객님을 찾아뵙게 된 것은....
강하E : 지금 뭐하는 겁니까?
빨강 : (돌아보고, 놀라서 캑캑거리는)
44. 씬. 마당 (밤)
-빨강, 고개 숙이고 주눅이 들어 서있고, 강하, 경찰에게 인사하는.
경찰1 : (빨강에게) 앞으론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 동네 분들이 얼마나 예민하신데.
(강하에게) 가족분들 때문에 변호사님이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조카분이 좀 잠잠하다 했더니.
강하 : 제가 다시 주의를 주겠습니다.
경찰1 : 그럼. (인사하고 나가는)
강하 : (문 닫고 돌아서서 빨강을 보는)
빨강 : (눈치 보는)
강하 : 술도 안마시고, 참 그러기 쉽지 않으실 텐데.
빨강 : (자기고 모르게) 저도 잘못했지만, 좀 심한 거 아닌가요?
강하 : 뭐가 말입니까?
빨강 : 예전에 제가 살던 동네에선요, 술 먹고 밤새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그래도 절대 경찰이 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거든요.
그냥 살기 힘들어서 누가 저러고 있겠거니, 혀나 몇 번 차고 말았지 인간미 없이 경찰 아저씨 불러 재끼고 하는 일은
없었다구요.
강하 : 그게 인간밉니까? 공중도덕이 없는 거지?
빨강 : 공중도덕은 없는지 모르겠지만, 도둑 하나 없는 동네였어요.
강하 : 가난을 미화 시키려고 하지 말아요. 훔쳐갈 게 없어서 도둑 하나 없었던 건지도 모르니까.
빨강 : 예전에 좀 보여주지 그랬어요. 지금 같이 밥맛없는 모습. 그럼 5일도 안 쫓아다녔을 텐데.
강하 : 난 원래 이랬어요. 보고 싶지 않아서 안 봤던 거겠지. 날 동아줄로 생각했을 테니까.
빨강 : 그러네요. 썩은 동아줄인 건 몰랐거든요. (그러다 문 앞에 서있는 준하를 발견하고, 헉) 팀장님, 이제 오세요? 늦으셨네요.
준하 : 네, 야근을 좀 하느라.
빨강 : 그럼 출출하시겠네요, 라면이라도 끓여드릴까요?
준하 : 그래주면 고맙구요.
빨강 : 빨리 들어오세요. (하고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준하 : 왜 또 마당에서 혈전이었던 거야?
강하 : 고성방가라고 주민 신고 들어가서 경찰 출동하게 만들었다, 저 여자가.
준하 : 뭘 어떻게 했는데, 경찰까지 출동을 해?
강하 : 난 설명도 못하겠으니까 저 여자한테 가서 물어봐라.
준하 : 신기하네.
강하 : (보면) 뭐가?
준하 : 형이 여자하고 그렇게 많이 말하는 건 처음 봐.
강하 : (짜증스럽게) 저 여자가 자꾸 말을 시키잖아.
준하 : (앞으로 쓱 지나가면서) 형이 신경질 내는 것도 처음 봐. 여자 때문에.
45. 씬. 거실 (밤)
-준하, 강하 들어오면, 빨강, 식당 입구로 다가와.
빨강 : 라면에 계란 넣을까요?
준하 : 좋죠. 형도 같이 먹자. 형은 계란 안 넣는데.
빨강 : (아니꼬운 눈빛으로) 계란 안 넣은 라면 끓여드려요?
강하 : 됐습니다.
-뛰어 들어오는 태규, 강하와 부딪히고.
강하 : 넌 좀.
태규 : 미안, 미안 삼촌, 아 진짜 춥다.
빨강 : 태규야? 라면 끓여줄까?
태규 : 진짜?
46. 씬. 강하의 방 (밤)
-강하,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 위로.
준하E : 형이 여자하고 그렇게 많이 말하는 건 처음 봐.
강하 : (혼잣말로) 저 여자가 말 시켜도 절대 대꾸 하지 않는다.
47. 씬. 식당 (밤)
-태규, 준하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빨강, 물을 따라 놔주는.
태규 : 와, 라면 진짜 환상이다. 꼬들꼬들하니 진짜 맛있다, 그지? 삼촌?
준하 : 라면은 좀 끓이시네요.
빨강 :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라면 하난 호텔 주방장 실력 못지않거든요. 집에 밥이 떨어져서 라면 끓여먹는 날이 워낙 많아서.
태규 : 자기 그렇게 가난했던 거야?
빨강 : 아니, 가난했다기 보단, 어떤 할아버지가 내 밥까지....뭐 그런 일이 있었어. 근데 너 자기라고 하지 말랬지?
태규 : 우리 자기 화낼 때 너무 귀엽지 않아?
준하 : (수저로 태규 머리 때리면서) 하지 말라잖아.
빨강 : (준하에게 물컵 가까이 놔주면서) 고맙습니다. (태규에게) 태규 너 그러는 거 아니야. 어린 게 어따 대고 자꾸.
버릇없이 그럼 못써. 미국에서 자라서 모르겠지만, 우리나란 동방예의지국이야.
(국자로 계란 떠서 준하의 그릇에 담아주면서) 라면에 든 계란 요게 또 별미죠.
준하 : 고맙습니다.
태규 : 왜 왕건이를 삼촌한테 줘?
빨강 : 장유유서도 모르니 넌?
태규 : 무슨 계란 먹다가 유서를 써?
준하 : (수저로 다시 때리면서) 그냥 좀 먹어라.
-강하, 들어오는.
빨강 : 뭐 드려요?
강하 : 물 좀 가지러 내려왔습니다. (물컵 들면, 빨강 냉장고에서 물통 꺼내는. 라면 먹는 태규와 준하를 보는)
준하 : 형도 좀 먹지 그래? 빨강씨 라면 진짜 잘 끓여.
태규 : 큰 삼촌은 라면에 계란 안 넣어.
빨강 : 끓여드려요?
강하 : 됐습니다. (물통과 컵을 들고 나가려고 하면)
준하 : 무슨 물을 통째로 들고 가?
강하 : 참 별 참견을 다 한다. (나가는)
태규 : 큰 삼촌 배고픈 거 아냐? 저것도 카리스마 때문일까? 배고픈데도 라면 끓여달라는 소리는 못하는 거?
준하 : 참 별 참견도 많지. 어서 먹기나 해, 라면 불어.
48. 씬. 강하의 방 (밤)
-강하, 물통 들고 들어오는. 컵에 따라 벌컥 벌컥 마시는.
49. 씬. 지하방 (새벽)
-빨강, 상 위에 엎뎌 잠이 들어있는. 빨간색으로 줄그은 팜플렛들.
-핸드폰 울리면.
빨강 : (놀라 눈 뜨면서) 이자율이 4퍼센트 일때는..... (고개 흔들고. 핸드폰 끄고 일어서는)
50. 씬. 식당 + 거실 (새벽)
-빨강. 밥 앉히고, 생선 손질하고. 나물 무치고, 햄 썰고, 찌개 올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거실, 준하 방에서 나오는. 식당 쪽으로 움직이는.
준하 : 벌써 일어난 거예요?
빨강 : 팀장님은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직 7시도 안됐는데. 어머,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푸석하세요?
라면 드시고 주무셔서 그러신가보다.
준하 : (얼굴 만지면서) 아니에요. 회사 일을 가지고 와서 끝내고 자려고 했는데 지금이네요.
빨강 : 그럼 한잠도 못 주무신 거예요? 낮에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시려구요?
준하 : 종종 있는 일이라 괜찮아요.
빨강 : 어서 세수하고 오세요, 커피 타드릴게요.
-시간 경과.
커피 머신에서 커피 따라 의자에 앉는 준하 앞에 놓아주는 빨강.
빨강 : 어떡하죠? 입 깔깔하실 텐데. 국 안 끓이고 김치찌개 준비했는데.
준하 : 상관없어요. 저 그렇게 예민한 놈 아닙니다. (커피 마시고) 커피 맛 좋은데요.
(고개 돌리고 하품 하는 빨강을 보고) 빨강씨도 한잔 마시고 해요.
빨강 : (애매하게 웃으며) 그럴까요? (커피 따르는)
준하 : 회사 일에 집안일에, 남이까지 업고 다니면서 힘 많이 들죠?
빨강 : 우리 엄마가 예전에 그러셨어요. 제일 미련한 인간이 힘만 많이 들고 되는 일이 없는 인간이라구요.
준하 : (보면)
빨강 :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쓸쓸하게 웃으면서) 제가 꼭 그 짝이에요. 힘은 드는데 되는 일은 없는.
준하 : 나하고 비슷하네요.
빨강 : (보고)
준하 : 우리 형은 절대 집까지 회사 일 들고 들어와서 하는 법이 없어요. 회사 일은 회사에서 마무리 짓고 말죠.
빨강 : 그래도 매일 컴퓨터 앞에 계시는 거 같던데?
준하 : 남는 시간엔 자기 개발이라는 걸 하죠. 근데 전 못 그래요. 한 달에 몇 번씩은 회사 일 싸들고 들어와서
머리 싸매고 밤새야 해요.
빨강 : 그거야 워낙 일을 열심히 하셔서 그런 거잖아요.
준하 : 아니요. 능력이 딸려서죠. 비밀 한 가지 알려줄까요?
빨강 : (보면)
준하 : 집에 와서 일 할 땐 문 꼭 잠그고 해요. 형이나 태규한테 들킬까 봐요.
빨강 : 왜요? 집에 와서 일하는 거 알면 뭐가 어때서요?
준하 : 쪽 팔리잖아요.
빨강 : (웃으며) 팀장님도.
준하 : 빨강씨가 어머니 얘기해서 나도 큰 비밀 하나 털어놓은 거니까 꼭 지켜줘요, 비밀.
빨강 : 네. (입에 자크 닫는 시늉하면서)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요.
준하 : (일어나며) 이 꼬마들 일어날 시간 된 거 아닌가?
빨강 : 일어나도 오늘부턴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다들 출근하신 다음에 나와서 세수도 하고 밥도 먹고 그러라구요.
어젠 계약서까지 받았으니 있는 동안은 편하게 지내보자 그랬던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 같더라구요.
준하 :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어요? 한번 마음먹었으면 쭉 밀고 나가야죠?
빨강 : 제 별명이 있으나마나 미스진 말고 또 뭐 있는지 아세요?
준하 : 뭔데요?
빨강 : 간 쓸개 줏대 진빨강.
준하 : 네?
빨강 : 줏대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구요.
준하 : (웃는)
51. 씬. 거실 (아침)
-준하, 현관으로 의자 들고 들어오는. 태규, 방에서 하품하며 나오는.
태규 : 작은 삼촌 뭐해?
준하 : 야, 너도 광에 가서 의자 가져와.
태규 : 그건 왜?
준하 : 식구가 늘었으니 식탁 의자도 늘려야 할 거 아냐?
-식당에서 나오는 빨강.
빨강 : 어머, 팀장님,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애들은 방에서 먹어도 되고, 출근 하신 다음에....
준하 : 있는 동안은 한 식군데 밥은 같이 먹어야죠. 그래야 빨강씨도 덜 힘들 거 아니에요.
빨강 : (고마워서 바라보는)
태규 : (두 사람 사이 번갈아보는) 작은 삼촌도 그 생각했구나, 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고에서 식탁 의자부터 꺼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생각 참 잘 맞는다.
52. 씬. 지하방 (아침)
-주황, 노랑, 초록, 이불 개고 있고.
주황 : (이불 똘똘 말고 있는 파랑 이불 벗겨내고 있는)
파랑 : (대롱대롱 매달려서) 좀만 더 잘래.
주황 : 누나 출근 할 때까지 자고 있을래?
초록 : 새 나라에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야.
노랑 : 난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거 알면서도 일찍 일어나잖아.
-남이, 일어나서 우는.
주황 : (남이 안으면서) 우리 남이도 일어났네, 참 부지런한 애기예요. (파랑 발로 걷어차면서) 남이도 일어났다. 어서 못 일어나.
-태규, 문 여는.
태규 : 뭣들 하니? 나와서 세수들 하고 밥 먹어야지.
주황 : 우린 나중에 하면 되요. 다들 나가신 다음에.
태규 : 안돼. 내가 싫어. 니들도 있는 동안은 우리 식군데 밥도 같이 먹고 그래야지.
주황 : 안 그래도 되는데요.
태규 : 내가 싫다니까, 어서들 나와.
초록 : 난 정말 저 오빠가 마음에 들어.
노랑 : 그래도 성공하긴 힘든 스타일이야.
53. 씬. 식당 (아침)
-빨강, 우는 남이 업고 서서 밥을 푸고 있고, 주황, 반찬 놓고. 노랑, 초록. 수저 놓고.
파랑, 몰래 몰래 햄 주워 먹다가 주황에게 쥐어 박히고.
태규, 빨강 옆에 서서 남이에게 오르르 하면서 쫓아다니고.
준하, 강하 들어오는.
강하 : (여덟개 의자가 놓여있는 식탁 보고, 뭐야 하는 표정)
준하 : 있는 동안은 같이 먹자고 내가 그랬어. 빨강씨도 출근해야 하는데, 밥 따로 먹는 게 너무 번거롭잖아?
강하 : .....
태규 : (얼른 강하 앞으로 와서) 나 이제야 진짜 한국에 온 거 같아. 대가족 문화, 이런 게 진짜 한국 생활이잖아.
(의자까지 빼주면서) 제일 어른이시니까, 앉으세요, 큰 삼촌.
강하 : (어이가 없지만,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는)
파랑, 얼른 물 따라서 강하 앞에 놓아주는.
강하 : (파랑을 보면)
파랑 : (꾸벅 인사하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강하 : 일어난지 한참 됐다.
준하 : 자, 자 다들 앉아서 식사하죠.
태규 : 오늘 아침은 진짜 진수...밥상, 반찬....
준하 : 그냥 앉아라.
-시간 경과,
강하의 멍한 표정. 울고 있는 남이 업고 서서 달래며 밥 먹고 있는 빨강.
아이들 정신없이 밥 먹고, 반찬 위에서 젓가락이 부딪히고.
준하 :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뭐.
빨강 : (강하 눈치 보고) 얘들아, 얘들아, 천천히 좀 먹어. 우리 애들이 워낙 밥만 보면 속도전이 몸에 밴 애들이라서요.
그렇지 않으면 반찬 하나도 자기 차지가 안 되는 집안 분위기에 익숙하다보니.
-아이들 강하의 눈치를 보는.
태규 : 그러지 말고 어서들 먹어. 저 아저씨는 원래 저런 분이시니까.
강하 : (태규를 보면)
태규 : 한 달 동안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큰 삼촌. 자, 니들 먹고 싶은 대로 먹어.
-다시 정신없이 먹기 시작하는 아이들.
54. 씬. 지하방 (아침)
-빨강, 출근 준비하고, 남이 안아 올리는데. 동생들 앞에 쭉 서있고.
태규, 들어오는.
빨강 : 왜?
태규 : 남이 두고 가라구.
빨강 : 남이는 왜?
태규 : 나 오늘 공연 없어. 내가 애들이랑 집에서 남이 데리고 놀면 돼.
(남이 뺏어 안으며) 아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볼까요. 미스터 진?
55. 씬. 회사 복도 (아침)
-은말 서있고, 진주, 은말 허리 두드려주는.
진주 : 노인정에 불 안 들어와?
은말 : 빈 노인정에 불 넣어주냐?
진주 : 그럼 냉골에서 자는 거야? 은말씨?
은말 : 전기장판 하나 있어. 아이고 됐어, 그만해,
진주 : 곗돈 타면 보일러 잘 들어오는 방부터 얻어. 또 자식들한테 뺏기지 말고.
은말 : 이젠 뺏길 돈도 없다. 나도 삭신이 쑤셔서 더는 노인정에서 못 자겄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빨강.
은말 : 아니, 너 남이는 어따 두고?
빨강 : 늦었어, 늦었어. (냅다 뛰어가는)
은말 : 쟤 남이는 어쨌다냐?
56. 씬. 사무실 (아침)
-직원들 나가고 있고. 팀장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 보고 있고, 빨강 그 앞에 주눅이 들어서있는.
빨강 : 죄송해요. 어제 한 건도 못했어요.
팀장 : 내가 너더러 계약 따오라고 했어? 그냥 가서 인사만 하고 오라고 했잖아.
빨강 : 그치만.
팀장 : (책상 밑에서 작고 긴 상자 열 개 꺼내주면서) 오늘도 어제처럼 하는 거야. 알았어?
빨강 : 네. (꾸벅 절하고) 고맙습니다.
팀장 : 나 밑지는 장사는 안하는 사람이야. 이거 다 헛수고로 만들면 알아서 해? 너?
빨강 : 네, 팀장님.
57. 씬. 사무실 앞 복도 (아침)
-빨강, 선물 상자 들고 나오는데, 은말, 진주 서있다 끌고 가는.
빨강 : 나 바빠.
58. 씬. 회사 일각 (아침)
-은말, 진주, 빨강 서서 얘기하는.
은말 : 내가 원팀장 걔는 좀 쓸만한 애다 싶더라니까. 청소하는 사람들한테 인사도 싹싹하게 잘하고 하는 것만 봐도.
진주 : 그 놈이 그놈이랄 때는 언제고? 그 태균가 뭔가 하는 애, 네 은인이다.
빨강 : 응. 애 착해.
은말 : 그래, 그 노마 잘 구슬러서 네 꼬봉으로 만들면 쓰겄다.
빨강 : 나 그렇게 이기적인 인간 아니야.
은말 : 네가 그런 말 우리한테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빨강 : 나 오늘 이거 다 돌려야 해. 수고. (얼른 뛰어가는)
은말 : 그냥 돌리지만 말고, 계약을 따와.
진주 : 그래. 한달 있으면 방 얻어서 나가야 하잖아. 하루에 한 껀 씩 한다는 정신으로 밀어붙여.
59. 씬. 병원 복도 정도 (낮)
-복도 의자에 앉은 환자와 빨강. 빨강, 팜플렛을 들고 열심히 설명하지만.
환자 : 아따 그 아가씨 야그 듣다가 숨 넘어가겄네. 빨랑 빨랑 말 좀 못혀요.
빨강 : 그, 그러니까. 이렇게 교통사고를 당하셨을 땐.....
환자 : 당하셨을 때는 대체 뭐냐구?
빨강 : 그러니까요. 이 상품은 중복 보장도...... (굳어져서 버벅이는)
-그 모습을 보게 되는 장수.
60. 씬. 회사 일각 (낮)
-장수, 은말, 진주 서있는.
장수 : 위장 환자 잠복 나갔다가 우연히 봤는데, 아무래도 빨강씨는 이 일이 천직이 아닌 거 같아요.
은말 : 걘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우리하고 있을 땐, 입에 모터 단 것처럼 말도 얼마나 잘하냐?
진주 : 병이야, 병. 뭘 팔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입에 쥐부터 나는 거야.
은말 : 그래서 보험 위판을 어떻게 할 거라구?
장수 : 이참에 이직을 생각해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은데요, 저는.
은말 : 이차장이 취직자리 하나 알아봐줄 거여?
장수 : 아니, 제가 알아보겠다는 것보단.
진주 : 그럼 하나마나한 소리는 뭐하러 해요?
장수 : 저도 안타까워서 그러죠. 한 달 안에 이사갈 집은 마련해야 하는데, 저러고 있다간 길바닥에 나앉을 거 같으니.
빨강씨, 계속 저런 식이다간 또 짤릴 텐데.
-재영, 걸어오는. 세 사람 앞을 스쳐지나가고.
은말 : 우리 얘기 들은 거 아니냐?
진주 : (장수에게 신경질적으로) 다 아는 얘길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떠들고 그런대요? 그러길?
장수 : 진주씨는 왜 저한테만.....
진주 : 저한테만 뭐요?
장수 : 다른 사람한테는 다 천사같이 그러면서, 저한테만 너무 잔인하신 거 같아요. (입 가리고 홱 돌아서서 가는)
진주 : 왜 저래?
은말 : 잔인하다잖여. 근데 못 들었겠지?
61. 씬. 사무실 (낮)
-팀장, 재영 서서 얘기하고 있는.
재영 : 팀장님에 대한 예우로 마지못해 복직을 허락하긴 했지만 잘 생각하셔야 할 거 같네요. 5년 동안 회사 이미지를 실추 시켜온
직원을 계속 근무 시키는 모험을 왜 계속해야하는지 저는 의심이 가는데요. 어떠세요? 팀장님은?
62. 씬. 상가 (낮)
-빨강, 이불 가게 앞에서 입 운동을 하고 있는.
빨강 : 이 상품의 특징은....자영업을 하시는 고객님께는 안성맞춤인.... (울리는 핸드폰) 네. 팀장님.
63. 씬. 사무실 (낮)
-빨강, 팀장 마주서있는.
팀장 : 너 뭐하고 다니니?
빨강 : 네?
팀장 : 뭐하고 다니냐구?
빨강 : 고객님들 만나서 선물도 드리고....
팀장 : 드리고?
빨강 : 상품 설명도 드리고...
팀장 : 너더러 누가 그런 거 하라디?
빨강 : 네.
팀장 : 넌 문제가 뭔지 알아? 가르치는 사람 맥 빼지게 만드는 거. 있으나마나 미스진으로 살기 싫다면서? 달라지겠다면서?
빨강 : .....
팀장 : 그럼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거 아냐? 씨도 뿌리기 전에 낫 들고 벼 베겠다는 너 같은 애가 우리 업계에선 제일 문제인 거야.
지 얼굴에 먹칠하고, 회사 얼굴엔 똥칠하는 거거든.
빨강 : 어...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먹이며) 모르겠어요. 팀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저도 그냥 선물만 드리고 인사만 하고
나오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없어요. 한 달 뒤면 길바닥으로 나앉아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려면 계약을 한 껀이라도
따야 하는데, 그래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기는데..... 입만 열면 멍청한 소리나 하고 있는 제가......
(울면서) 저도 싫어 죽겠어요.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가.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잘 해야 하는데, 빨리 잘해야 하는데....
팀장 : 인생사는 게 왜 어려운 줄 아니?
빨강 : (울면서 보는)
팀장 : 인생엔 속성반이라는 게 없거든.
64. 씬. 지하방 (밤)
-아이들 모두 잠들어 있고, 빨강, 조심스럽게 남이 업고 있는.
65. 씬. 동네 큰 길 (밤)
-빨강, 남이를 업고 걸어가는.
준하, 운전해서 오다가 빨강을 보는. 빨강, 전철역 계단 옆에 멍하니 서는.
준하 :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빨강을 보는)
66. 씬. 전철역 내 (밤)
-빨강, 남이를 업고 서서 지나가는 전철을 멍하니 바라보는.
준하,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빨강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67. 씬. 전철안 (밤)
-빨강, 남이를 업고 올라타는. 다른 문으로 올라타는 준하.
-늦은 밤이라 승객이 많지 않은, 대부분 졸고, 책도 보고, 신문도 보고.
빨강 : (손고리 잡고 서서) 죄송합니다. (인사하고) 늦은 밤에 귀가하시는데, 쉬셔야 하는데, 방해를 하게 되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사람들 뭐야, 하는 시선으로 빨강을 하나 둘 보기 시작하는.
빨강 : 저는 진빨강이라고 합니다, 보험 회사에 다니는데..... 회사에선.....(조금씩 목소리 톤 높여가면서) 있으나마나 미스진으로
불립니다. 그만큼 제대로....하는 일이 없습니다. 카드 빚까지 늘려가면서 명품이나 사들이는 정신 나간 인간이
바로 저였습니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아직도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동생이 다섯이나 되거든요.
-사람들 서서히 빨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빨강 : 한 달 뒤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전 아직도 제대로 하는 게 없습니다.
고객님들 앞에만 서면 버벅이고.....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땐 잘만 떠들다가도 고객님들만 뵈면.....입이 굳어져서......
겁이 납니다. 내가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겁이 나서 말이 잘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이렇게 피곤하신 여러분의 휴식을 방해하게 됐습니다. 이젠 정말 정신 차리고 잘 살아야 하는데,
겁이 나서.....자꾸 겁이 나서 이렇게라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얼굴도 모르는 여러분 앞에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으면 고객님들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해드려서.....
(인사를 하는데)
-승객 몇이 박수를 치는.
준하, 깊은 시선으로 빨강을 바라보고 있고.
빨강 : (울음을 참으며 연신 인사를 하는)
-인사하는 빨강과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준하의 모습 한 화면에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