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6주일설교 누가복음20:19-26
본문: 누가복음20:19-26
제목: 어떤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은 누가복음20:19-26의 말씀을 가지고
“어떤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어떤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 때
행동이 달라집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녀에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도
아버지는 자녀에게 바르고 사랑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떤 행동할 할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바르게 될 때
우리는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그런 질문을 가지고
말씀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같은 본문의 말씀을 여러 번 설교를 듣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듣습니까?
또 그 말씀이네
또 그 설교하시네라고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씁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저도 설교를 했고
여러분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이야기로
선입관을 가지고 들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새로운 말씀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기다리며 들어야 합니다.
19절에서 보면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서 하셨다고
똑같이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마음과 생각이 같은 사람처럼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같은 사람처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들었으면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에게 적용하고 잘못인 줄 알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들을 거스리는 예수님이 정말 맘에 안 들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지키려는 성을 무너뜨리는 자로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줄도 모르고
도리어 예수님이 자신의 길만을 방해한다고 여겨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알고
따르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면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바리새 출신의 서기관과
사두개 출신의 대제사장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신학적으로 공통점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있습니다.
실제로 진정한 보수도 아니고 진정한 진보도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공통점이 없기에 싸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파 사람인 서기관과
사두개파 사람인 대제사장은
서로 다른 신학과 다른 목적이 있기에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뿌리가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이렇게 함께하게 되었나요?
요한복음18:31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없으니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종교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범죄자는 유대인이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재판정에 끌고 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정치적 범죄자로 죽이려고 하니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20절에서 보면 작전을 짜서 행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범죄자로 몰아야
로마의 손에 의해 죽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청하여
유대인들에게 봉기를 일으키게 하는 자로
몰아가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대제사장의 정탐꾼들이 예수님께 와서
미사여구를 많이 써서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말이 많은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형벌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에서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최악의 반역자만 죽일 수 있었습니다.
바라바는 로마에게 있어서 최악의 반역자였기에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라바는 살려주기를 원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여달라고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는 형벌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설득하고
백성들을 충동시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아 죽여
저주받아 죽은 극악무도한 자로
예수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자신들을 의인인체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까
옳지 않으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부르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상을 정복하여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셨습니다.
선한 척, 정말 궁금해서 묻는 척하였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술수를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주머니에는 데나리온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는 인두세를 말한다고 합니다.
장사나 농사를 짓고 내는 세가 아니라
사람 수대로 내는 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을 걷기 호구조사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인두세를 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특별히 열심당원들은 극히 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열심당원 같은 사람이 되어
로마당국에 의해 탄압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라고 하면 친로마 세력이 되어
열심당원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상황입니다.
이래도 문제가 되고 저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에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러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 간계를 알기에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예수님께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묻습니다.
이 돈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나라 동전 오백원짜리 동전에는 학이 있고
오백원이라는 한글과 숫자와 발행년도와
한국은행이라는 형상과 글이 있습니다.
미국 동전을 보면 우리와 비슷하지만
동전안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주화에는 앞면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을 가운데 새겨져 있고
황제의 형상에 삥 둘러서
카이사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라고
황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 되신 아우구스투스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법왕이란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동전 자체게 황제 숭배의 상징이며
황제를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카이사가 곧 황제가 주님이십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에 살면서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받지 않으면
인생 전반에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상인 조합에도 못 들어가고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어서
인생 전반에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사회 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를 주님으로 섬기지 않으면
가난과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각오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돈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인사를 할 때 신의 대리인
황제가 평화를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팍스로마나라고 합니다.
그들은 힘이 평화를 지켜 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힘이 무너지면 전쟁을 하고
힘을 가진 쪽에서 평화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나와 이웃 사이에 평화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데나리온에 있는 형상과 글은 무엇입니까?
신의 아들 황제가 평화를 내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을 합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상에서 세금을 잘 내고
하나님께는 헌금을 잘하라고 이분법 적으로 말 합니다.
하지만 원어상으로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번역해야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앞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느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쓰여야 하고 주를 위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세금 논쟁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과 세상일이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 가는 일도 농사를 짓는 일도 공부를 하는 일도
식사를 준비하고 자녀를 돌보는 일도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원리와
교회에서 생활하는 원리가 다릅니까?
다르게 산다면 그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행하는 삶은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단순한 세금 논쟁이 아닙니다.
삶의 총체적인 관점을 담아낸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까?
누구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책잡으러 보냈던 첩자들은 능히 책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가 막히게 맞는 말이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뭐라고 흠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두손 두발 다들고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나갑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전 인생이 그 말씀을 이루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내가 어떤 존재로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아닌
어떤 존재로 사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평생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로
그것을 하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존재가 되면
그 삶의 영역은 바르게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구약의 나실인처럼 구별된 존재로 드려지는 삶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별된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그런 나실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
그 존재로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존재로 살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는가의 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 싸움입니다.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어떤 일은 하면서
내가 꼭 이런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되는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는 일이
너무 가치 없고 쓸데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쓸데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버려지고 낭비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 살아간다면
그 일이 무엇이든지 소모되는 시간은 없습니다.
어느 자리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행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존재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