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 ; 일인석-눌암-빈터-빈대절터-팔공산장(무인) (23.03.26)
- 주요 관찰지점 탐색 (22.10.30 ,22.12.04 , 23.1.8 , 23.3.26)
1.일인석과 눌암
염불암 뒤로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일인석이다.
[일인석(一人石)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면서 잠시 앉아 퇴로를 궁리했다는 큰 바위가 일인석(해발 840m)이다. 팔공산을 향해 도주하던 왕건이 바위에 앉아 퇴로를 궁리하던 중 한 승려가 다가와 "이 자리는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승려는 절을 하고 "북쪽으로 가면 견훤군이 기다리고 있으니 남쪽으로 되돌아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이 바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서 일인석이라 부른다.]
"전체적인 모습은 뱃머리를 닮은 일인석 바위... 1687년 원주에 사는 정시한이라는 선비가 3년동안 삼남지방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쓴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일인석의 기록이 보입니다. ‘일인석에 올라서면 암자들이 보이고 전망이 있다’ 하는데 현재는 잡목이 우거져 조망은 거의 없지만, 그 당시에는 산이 벌목이 된 상태라 나무들이 없어 충분히 조망이 가능했을 것이라 보입니다.
산중일기는 절의 상황, 규모, 위치 등을 제법 자세히 기록한 일기형식인데, 당시 상황을 추측하기에 좋은 자료입니다. 당시 스님들은 염불암에서 뒤쪽의 수도사까지 왕래가 자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현재 수도사는 현재의 자리가 아닌 옮긴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좌측 바위와 우측 일인석
일인석 바위 위로 올라가면 "一人石" 이라는 각자가 있다.
물을 뿌리면 각자가 더 잘 보인다.
일인석을 뒤로하고 좀 더 올라가다 골짜기 방향(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굴이 있다. 눌암이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수도(修道)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하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바위굴이며 좌측 전면에 눌암(訥庵)이라고 각자가 새겨져 있다.
"눌암의 눌자는 지눌(知訥)의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지눌스님은 지금의 신령 거조암, 당시는 거조사에서 머물면서 수행을 하면서 동화사나 염불암으로 내왕(來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눌암이라는 글자는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래에 새긴 것 같습니다. 일인석에 새겨진 글자나 눌암이라 새긴 글자가 마모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이 새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굴 좌측 전면에 ‘訥庵’이라고 새겨져 있어 눌암이라고 알고 있지만, 322년 전에 쓴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바위로 된 ‘눌암굴‘이 있고, ‘눌암’이라는 암자가 ‘광석대(廣石臺)’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이름은 눌암굴입니다. 선비가 갔을 때 이미 광석대의 눌암은 없고 터만 있었다 합니다. 산중일기에는 눌암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수도(修道)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적혀있는데 눌암굴에서 수행한후, 눌암에서 보림하였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이곳 눌암굴에는 세칭 도사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울타리도 만들고 비닐 막을 둘러 숙식을 하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철거된 상태에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7-8명은 충분히 비박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면서, 여름에는 가까이 접근해야 보이고 겨울엔 유심히 살펴보면 멀찍이서도 보이지만 눈에 잘 뛰지 않는 은밀한 곳입니다.
또 다르게 불리는 이름은 ‘왕건굴’인데, 일인석과 가까운 거리이고 쫓기든 왕건이 충분히 이곳으로 피신하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2. 빈터.. 옛 주거터 ? ... 옛 절터 ?
팔공산온천관광호텔 뒤 계곡따라 올라가다 보면 빈터를 만나게 된다.
3. 빈대절터
내원능선과 대불능선 사이 골짜기(물방아골,물바위골)에 있는데 내원능선을 거쳐 가는 것이 쉽고 편하다.
원래 절 이름이 빈대절이 아니라 오래전에 작은 절 혹은 암자가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폐사가 되어 터만 남아 있어 빈대절터라 하는데 가장 간단한 설화는 절(혹은 암자)에 빈대(..지네)가 많아서 스님들이 살지 못하고 절에 불을 지른 뒤 떠났다는 것이다.
빈대절터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고 있으며,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이되고 전승되는 특징이 있다. 절이 융성하다가 빈대가 많아서 절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거나, 떠난 중이 다시 와서 보아도 절터 기둥에 빈대가 여전히 많더라고 하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4. (무인) 팔공산장(대피소)..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지 않아 잘 모르는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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