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신자와의 관계(롬 8:9-11)
“그러나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단정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이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는’ 사람이다.
더 이상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육신’이라는 말은, 타락과 죄의 결과로 성령의 감화가 전혀 없는 사람과 그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에 ‘육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영’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령이 그를 주관하고 그를 인도하고 있으며, 그는 영 안에서 행하고 있다.그는 ‘영을 좇아 행하고 있다’.
이것은 회심할 때 일어나는 크고 심오한 변화이다.
그는 전에 육신의 영역에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그는 영의 영역에 있다. 그는 전에 육신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서 2:2에서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이 세상 풍속을 좇아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제 영에 의하여 지배 받고 복종받는 영역에 있다.
롬 5:21에서는 은혜의 왕노릇으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왕노릇은 성령의 왕노릇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속한 영역인데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새로운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영 안에’ 있다.
더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에 있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거주의 개념 채용.
엡 2장 끝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롬 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요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며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거처를 삼는다’는 말은 그와 함께 ‘가정을 이루리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 않다.
고전 6;19,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요 17:6,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은혜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의
첫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소욕’이라는 용어는 ‘강하게 소원하다’, ‘강한 영향을 투입하다’라는 의미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려 강한 욕심을 내고 있다.
성령 역시 육체를 거스려 강한 욕심을 부린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바램은 우리가 육체의 영향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약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어떤 부모든지 자녀의 행복과 평판을 위해서 질투를 가지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질투하여 시기하는’ 성정을 가지는 정도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죄와 마귀에게 이용되는 극악한 영향에서 우리를 구출하고 구원하려고
성령께서는 ‘질투하는 시기’를 가지고 육체를 향해서 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계신다. 그는 모든 형태와 모양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로부터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방을 갈망하고 계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거룩, 온전함]를 갈망하고 계신다.
그 목표를 향해서 그는 우리를 인도하여 나가고 계시며
‘질투하는 시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열심을 내시고 계시는 것이다.
둘째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녀인 것을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시게 한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다.
비그리스인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영적인 관심[하나님을 의식]을 가진다. 그는 신령한 일[하나님의 임재 , 역사]에 맛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기도와 묵상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아닌 사람은 영적인 기능을 가지지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성경강해에 흥미가 없고 성경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그는 자기의 영혼과 영혼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령을 자기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삶 중에서, 이 감추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하나님께 다 들어 보인다.
우리 안에서 엄청난 변화는 이제 속 사람이지 겉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겉사람은 날로날로 부패한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있다”(빌3:20-21)라고 말한 것과 같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2.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한다.
왜? 진리 [ 현실이나 사실, 분명함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있어서 제1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이다.
‘육에 속한 사람’,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을 살다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성령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신지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환상을 본다거나 방언을 하는가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사모하는가?
그것이 최고의 표준이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어디서 이 지식을 얻는가? 신약과 구약에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성경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다.
성령이 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이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언제나 그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함으로 보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할 때 그들의 소망은 그들이 이러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었다.
4.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성령은 빛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며 거룩한 영이다.
우리 속에 있는 진정한 상태를 깨닫게 된다.
이런 일은 회심 전에 죄를 깨달을 때 일어난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것은 좀 더 깊어진다.
더 완전해지고 순결해지면 해질수록 모든 더러운 것이 더 나타나게 마련이다.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에 갈수록 더욱 더 애통하게 된다. 수세기에 걸친 모든 성도들의 간증은 “마음의 흑암이나 마음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죄를 지은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워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떨어질 때 그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반응이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세상의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구별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9,10절).
5.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여부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갈 5장에서 사도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시키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영에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갈수록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은, 밤 다음에 낮이 온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성령의 인도를 주장하면서도 온유와 겸손이 빠진 사람들의 예. 영적인 교만과 자기만족에 젖음]. 절제- 자제와 훈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근신하는 마음은 절제와 자제와 일관성과 훈련을 의미한다.
근신하는 마음은 충동이나 느낌에 또 가시적인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다.
결론
여러분 이런 일 가운데 어떤 증거라도 여러분 속에서 발견하느냐는 것을 말한다.
작은 증거나 흔적이 있으면 그리스도인이요, 매우 작은 영아요 갓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은혜 속에서 자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한다.
점점 성숙해가야 한다. 절망감을 갖지 말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여러분 속에 가냘픈 빛밖에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령은 ‘질투심’을 가지고 여러분을 갈망하고 계신다.
그의 바램은 하나님께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랑할 거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히울 수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