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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꿈과 인생여정의 두 길
1. 창조주로부터 받은 인생길[피조물]의 구분과 하나의 선택권(자유의지)
1) 좁은 길: 창조주를 숭경하고, 인간사랑의 우애와, 창조주 하나님과 그 예언의 약속을 믿고 생명 바쳐 의지하며, 진리말씀(성경)과 성령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조건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양심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사랑과 희락, 화평과 인내,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절제의 생애로 하늘 나그네와 순례자로써, 하늘나라를 향하여 끊임없이 걸어가서, 하늘나라 백성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생복락의 길을 추구하는 길.
2) 넓은 길: 창조주의 존재하심보다, 가시적인 자연환경과 인간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며, 한 번뿐인 인생의 생로병사의 길을 선호하고, 자유 분망하게 방종으로 이기적인 욕망과 쾌락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서, 서로 경쟁하여 다른 인간존재들을 다스리고, 추앙받고 지배하면서 나 자신만의 영락을 위해, 우주순환과 자연천연계의 흐름을 거역하고, 인간적 악행으로 선과 악의 분명한 양심을 거슬리며, 스스럼없이 살다가는 내세의 끝을 외면하는 길.
2. 창조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의 길(창조주 하나님을 깨닫는 3가지 방법)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천연자연계의 이타적인존재의 순환과, 인간을 위한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하신 은혜의 현실인지와, 인간역사의 문명과 과학적 유전법칙에 따른, 정신세계와 육체적인 세포의 의과학적인 오묘함과, 양심의 생로병사 생존의 현실에서도 인간과학의 실체로 증명되고 있음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내가 존재한다는 현실적 인정과 존재가치 중요성은, 창조주께 영원한 경배와 영광을 드릴 분명한 당위성과 찬양드림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하심은, 하늘에서 벌어진 ‘피조물’의 제1서열의 천사장이 대적마귀(사단, 용, 뱀으로 별칭)의 변질과 배반으로 발생된 선악의 대 쟁투가, 인간역사의 영생복락의 자유의지를 순종을 조건으로 주신, 창조주의 모든 사랑과 자비의 은혜를 말살시키고,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적하는 참사로, 하늘에 악을 생성시킴으로 인간은 추악한 사탄마귀의 포로로, 영생의 존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었고, 참혹한 생애로 살게 되어버렸다.
3. 자연의 법칙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 참혹함
자연천연계의 파괴적 모습의 기이한 지구 종말의, 성경적 예언말씀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성취되며, 이기적인 악행으로 민족과 나라간의 전쟁은 더욱 치열하고, 인간심성이 창조주의 경고와 예언으로 경고하신 그대로, 행한 대로 죄악으로 멸망해 가고 있으며, 인과응보의 우주법칙은 눈앞에서 두렵고 떨림과 비참히 죽어가는, 생명들의 모습이 순간순간 생방송으로 동영상을 통하여 보여 지고 있어도, 남의 집 불구경하는 자의 비명에 모두 묻혀버리고 마는 것 같다.
양심이 무딘 종말론적 쏠림은 아직도, 성경의 “노아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외치는 설교는 메아리 없이 소멸되고, 두려운 저주의 대상이 내가 아닌 것에 안도하는, 악하고 악한 인간들 양심은 천벌을 자초한 두려움과 후회의 절망은, 오금저리고 기절한다는 성경예언이 확인되고, 실체적으로 증명되어 모두가 세상말세의 소리가 만연되고 있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무섭고 두려운 지구 종말의 카운트다운은, 기고만장한 과학자와 권력자 그리고 우상숭배로써 거짓교리로 현혹한, 미국의 정치권과 가톨릭의 세계적 종교통합과 거짓선지자들의 출몰과 이적기사와 방언이, 귀신 부르는 무당과 죽은 자들로 변신한 악령의 초혼자가, 모든 종교에서 꼭 같은 지절거림 소리로 악령미혹에, 함께 발광하는 이적으로 인간의 종말을 촉발하고 있다.
가톨릭 교황을 미국정치권과 거짓선지자 중심이 되어, 세계적인 독재적 지도자로 내세워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오직 성경말씀의 진리대로 생애 하는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의 말씀인 “십계명” 준수 자를, 지구 재난의 중심세력으로 지목하고 박해하여, ‘중세암흑시대’와 같은 ‘일요일법령’의 마지막 귀신의 이적기사와, 함께 일어날 준비가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곧 가시화되어 신속히 법령화 선포 될 것이며, 만국이 악령과 함께 저들을 따를 것이다.
세계적 재난의 대상을 성경진리인, “십계명의 토요일 안식일” 준수자들을 제물로, 무서운 ‘일요법령’으로 오직 성경말씀을 높이 들고 믿음의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운 재림을 준비하는 거룩한 존재들을, 투옥하고 박해와 죽임으로 하늘의 천벌은 더욱 빨리 실행될 것이다. 성경말씀에도 없는 재림주님이 벌써 이 땅에 내려왔다고 떠벌리고, 사탄마귀 본체가 재림 예수님으로 위장하고, 선한모습으로 분장하여 세계를 주름잡고, 마귀자신을 재림예수로 믿으라고 가톨릭교황과 미국권력, 거짓선지자를 앞세워 주장할 것임을 성경말씀은 예언하셨다.
우상숭배와 무지하고 미혹된 거짓종교와 정치권력의 모함으로, 불쌍히 생존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유혹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아픈 자를 치료하며 선행으로 대우받고 또한, 악령의 지배하에 탄압하고, 사탄마귀의 음모에 합세하도록 이적기사로 속이고 또 속여서 모두모아, 함께 태워서 세울 수없는 고속열차에 실어서 “지옥 불”로 손살 같이 끌고 가고 있음을 알라.
이 진리를 깨닫고 아는 자는, 오직 성경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가진 자”로써, 다시 “심판의 주로 재림하시는 재림신앙과, 부활신앙을 믿는 남은 무리” 밖에는 없을 것임을 명심하여, 지금 즉시 성경말씀과 성령역사에 복종하고 회개하여 구원의 대열에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 드린다.
4. 성경말씀과 예언의 신을 통한 우리의 믿음과 신앙관(좁은 문)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고 말씀하셨다. 또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고 말씀하셨다.(2SM -2기별243.4)
이 길들은 서로 구별, 분리되고, 반대방향 가는 길로. 한 길은 영생, 다른 길은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한다. 나는 이 두 길이 다른 것과, 그 길로 여행하는 자들이 다른 것을 보았다. 그 길들은 서로 반대되는데, 한 길은 넓고 평탄하고, 다른 길은 좁고 험하다. 그러므로 그 길로 여행하는 자들도 품성과 생애와 의복과 대화에 있어서 서로 반대된다.(1T 1증언127.1)
왜 극기와 겸손의 생애가 그처럼 어려운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죽으면 살기가 쉽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애굽의 파와 마늘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세상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가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는다.(1T131.2)[애급음식습관들]
치료봉사(1)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우리는 다만 한 번만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 생애를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큰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친절하고 자아희생적인 정신과 확고한 목적을 요구한다. 아무리 작은 등불일지라도 그것이 꾸준히 켜져 있는 동안에는 많은 다른 등을 밝혀 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좁은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재능이 적고, 우리의 기회가 많지 못하고, 우리의 학력이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가정에 주어져 있는 기회들을 충실히 이용함으로써 우리에게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생애의 원칙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가정의 문을 열게 되면 우리는 생명을 주는 능력의 물결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서 치유의 물결이 흘러나와 오늘날 불모(不毛)와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과 미와 결실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MH 치료봉사 355.1)
그리스도인 생애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다만 온유하고 인내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것만이 아니다. 물론, 이런 덕행도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또 용기와 힘과 정력과 굳센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극기의 길이다. 이 길에서 많은 곤란과 실망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GW 복음교역자 290.1)
좁은 문은 들어가기에 어려운 문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증을 통하여 남녀들이 세상과 세상이 붙들고 있는 애정들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또한 온 마음과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셨다. 넓은 길은 들어가기가 쉽다. 그것을 통하여 들어가는 데는 인간의 마음에 쓰라림을 주는 제재가 필요치 아니하다. 넓은 길에는 극기와 자아 희생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타락한 식욕과 본래 타고난 경향이 넓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거기에는 자아 방종과 교만과 질투와 악한 생각과 돈을 사랑함과 자기를 높이는 것들이 나타날 수 있다(원고,165,1899).(TMK304.2)
우리는 길이 협잡하고 문도 좁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에 그 넓이는 무한하게 된다(서신,138,1897).(TMK 내가 그분을 알고자 304.4)
교회증언 4권(1) -나는 완전한 모본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그대에게 가리키는 바이다. 그분의 생애는 사욕이 없는 자선으로 특징지어졌다. 귀중한 구주!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가! 하늘은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온갖 이기적 관심을 포기한다 하여도 너무 값이 쌀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길이 선천적 마음에 더 든다고 하여 그 길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 자신을 벗어나게 할 여유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굴복과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영생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고뇌한다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4T218.2)
5. 자아가 죽는다는 것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침례는 아주 엄숙하게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앙 고백으로 자아는 죄 된 생활에 대하여죽는다. 물이 수침자를 덮을 때에 온 하늘이 보는 앞에서 쌍방이 언약을 맺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는 물 무덤으로 내려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무덤에서 일어난다. 하늘에 계신 세 분의 크신 능력자들이 보고 계신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임석해 계신다.—성경주석[E.G.화잇]6권,1074.(FLB 146.3)
믿음과 행함(1)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 전에 먼저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는 불법이니라”(요일 3:4).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
계명이 사울의 양심에 새겨졌을 때 죄는 살아나고 그는 죽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 받은 자아를 보게 되었다. 죄인이 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자기의 유죄를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성경상 성화를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다.(FW 31.2)
그리스도를 나타내자(1) -내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을 갈망한다. 오, 그분의 사랑스런 형상이 완전하게 반사되기를 원한다! 그분께 전체를 드리기를 원한다!
자아가 죽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온전한 구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는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내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영광은 하나님께 있다. 나는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춘 것을 안다.(RC350.5)
산 채로 장사된 사람들—거듭남은 우리 시대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그토록 많은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성화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루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원고 148, 1897). (6BC 1075.7)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자아란 전혀 없다. 자아는 죽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생애하시는 때에 그 생애에는 이기심이란 전혀 없었다. 우리의 성정을 지니고서 그는 남을 봉사하는데 온전히 헌신한 생애를 사셨다. (HP 166.3)
하늘을 향하여(2) -하나님께 충성하려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수 있고 우리가 소원하는 희망이 되실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게 될 것이다.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가”하고 솔직하게 자문해보라. 내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영생에 대한 나의 모든 희망이 그분에게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UL 위를쳐다봄283.2)
인간 그 자체에는 영광이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그가 가진 모든 것, 다시 말해 이성, 감화력, 언변, 영적 식별력과 같은 그의 재능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해 얻어진다.... 이기심을 제거하는 것이 힘든 것은 자아가 쉽게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은 가장 약한 죄인까지도 믿음의 손이 구주의 손을 굳게 잡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자보다 더한 사람이 될 수 있다.(UL322.4)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2)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낡은 생애의 수정이나 개량이 아니요, 본성의 변화이다. 자아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성령의 힘 있는 활동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질 수가 있다.(MYP 청년157.1)
그리스도께서는 전부를 요청하신다. 만일, 그분이 그보다 적게 요구하신다면, 그런 낮은 수준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너무나 값비싸고 엄청난 희생이 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믿음은 분리되라고 외친다. 우리는 세상, 죽음, 열심 없는 공언자들을 닮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 이 길은 자아부정의 길이다. 길이 너무 협착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 좁은 길에 너무 자아를 부정할 일이 많다고 생각이 들거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말이 나오거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셨는가?” 라는 자문을 해보라. 이 질문은 우리가 자아부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다 그늘 속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다 (1TT 81.3)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극기와 자아희생의 생애를 실천하기를 바라시며 그러한 생애야말로 우리들의 의무를 원만하게 수행하는 만족감을 갖게 할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당신 스스로 십자가상에서 굴욕적인 죽음을 맞고
교회증언 2권(9) -그대는 거듭거듭 말해 왔다. “나는 나의 성질을 잡을 수 없다.” “나는 말해야 한다.” 그대는 온유하고 겸손한 정신이 없다. 자아가 잔뜩 살아있다. 그대는 그것이 상하거나 모욕을 당치 않도록 항상 지키고 있다. 사도는 말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골 3:3). 자아를 죽인 사람은 그리 즉시 느끼지 않으며, 거슬리는 모든 것을 저항하려는 자세가 없다. 죽은 자는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죽지 않았다.
만일 그대가 죽었다면, 그대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었다. 지금 그대가 보고, 그대를 괴롭히는 만 가지 것도 눈에 걸리지 않고 지나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그대는 영원한 것을 알게 되며 이생의 사소한 문제를 초월할 것이다. (2T425.1)보셨는데 우리들에게 요구된 희생 때문에 불평을 해야만 하겠습니까?(2SM 2기별206.1)
이러한 일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성경을 면밀히 연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 살고 있는 자들의 엄숙한 위치를 발견하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며 경건의 외양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산 연합을 이루는 것을 우선적인 의무로 여기게 될 것이다. 저들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까지 감히 안심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는 죽게 되고 교만은 영혼으로부터 쫓겨나며 저들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친절하심을 본받게 될 것이다.— 원고28,1890.(2SM 2증언 389.2)
가정과건강-사도 바울의 생애는 자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운 생애였다. 그는 “나는 날마다죽노라”(고전 15:31)고 말하였다. 날마다 그의 뜻과 욕망은 의무와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될지라도, 그는 자신의 성향대로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YHH337.3)
그대는 자아에 대하여는 죽음을 경험해야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자아는 고려되지 않아야 한다. 교만, 자아 사랑, 이기심, 탐욕, 탐심, 세상에 대한 애착, 증오, 의심, 질투, 악한 추측, 이 모든 것은 굴복되고 영원히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이런 악들을 교정하여 그분의 오심을 위한 도덕적 적합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준비는 그분이 오시기 전에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생각하고 연구할 주제이며, 열렬한 마음으로 물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보이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1T 1증언705.1)
주께서 그대들을 도우사 예전에 느껴 보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되기를 기도한다. 주께서 그대들을 도우사 자아에 대하여 죽고, 그대들의 가정에 개혁의 정신이 생겨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대들 가운데 와서 그대들을 돕고, 그대들이 승천에 적합하게 되기를 기도한다.(2T376.2)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빛이 그들의 모든 생애가 오직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산 것이었음을 드러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과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행위를 싫어하신다. 율법 없이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한 흑암 중에, 그들은 자신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계명이 그들의 양심에 계시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죄 아래 팔려 있는 것과 육욕적인 마음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아는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3T475.1)
생애의 번민, 속을 썩이는 매일의 염려, 그 가슴 아픔과 짜증의 대부분은 제어되지 않은 성질의 결과다. 가정의 조화가 종종 성급한 한마디 말과 함부로 하는 언어 때문에 깨어진다.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번의 기쁜 미소, 온유한 정신으로 발한 평화롭고도 인정해 주는 말은 진정시키고 위로해 주고 축복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될 것이다. 자아를 지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지배이다.
온유하고 조용한 정신을 옷 입는다면, 생애를 그처럼 쓰라리게 했던 문제의 백 가지 중 아흔 아홉은 해결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조급한 말과 육욕적인 기질을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너무 예민해. 나는 성질이 급해.” 이것은 성급하고 격정적인 말로 가한 상처를 조금도 고쳐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다른 사람보다 본래 성미가 급하다. 그러나 이 정신은 하나님의 영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 본성적인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새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주관하셔야 한다. 그렇게 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정직과 진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4T 348.3)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힘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완전히 의지해야 한다. 자아는 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에서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5T219.3)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처럼 일하려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런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곧 영혼에게 생명이 된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6T125.2)
우리는 위기의 때에 살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우리의 품성에서 올바른 도덕적 기품을 계발하기 위하여 참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기를 권한다. 마음과 심령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그 때에 자아는 죽게 되고 진리는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우리의 품성을 형성할 때 진리는 그 실체를 보여줄 것이다. 진리가 믿는 자에 의해 명상될 때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이며 점점 더 밝아질 것이다. 진리는 높이 평가되며 마음을 소생시키고 활기를 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거룩함의 완전한 표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의 포부에 활력을 줄 것이다.—리뷰앤드헤럴드, 1899.2.14.(RC 그리스도를반영111.6)
어떤 종류의 그릇이 주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가? 빈 그릇이다. 우리가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영혼을 비울 때 우리는 사용될 준비가 된다.... 마음과 심령은 성령에 의해 감동함을 받으며 자아가 죽을 때 진리는 끊임없는 확장과 새로운 발전을 할 수가 있다.—리뷰앤드헤럴드,1899.2.28.(RC114.6)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1(4) -내적인 감정의 통제—그대의 생각까지도 그리스도의 뜻에 굴복시킬 때 그대는 명랑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마음을 면밀히 살피고 날마다 자아에 대하여 죽으라.(1MCP 그리스도인마음품성125.3)
사랑은 자아가 가려질 때 저절로 솟아 나옴—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려질 때, 참된 사랑은 저절로 솟아 나온다. 그것은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성화된 의지의 결정이다. 그것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과 영혼과 품성 전체의 변화, 즉 자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는 것에 있다. 우리의 주인이시오 구세주께서는 당신에게 우리 자신은 드리라고 요청하신다.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자아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서 적합하다고 보시는 대로 사용되도록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순복하는 지점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행복하게, 유용하게 혹은 성공적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다.—Lt 97, 1898. (6BC, 1100, 1101).(1MCP206.1)
교만을 민감으로 착각한 사람에게 준 권면—그대는 너무 민감했으며, 너무 깊이 느끼며, 너무 고통을 많이 당한다는 변명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대를 하나님 앞에서 능히 변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는 교만을 민감으로 착각했다. 자아가 돋보인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민감성이나 교만도 죽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그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2MCP638.1)
높은 부르심(4) -그대의 앞에는 자아방종의 넓은 길과 자아희생의 좁은 길 즉 두 길이 있다. 넓은 길에서는 그대는 이기심과 교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길에서는 모든 무거운 짐과, 범하기 쉬운 죄악들은 벗어버려야 한다.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과 영광과 불멸로 인도하는 길 이것들 중에 어느 길을 그대는 택하였는가?—(청년지도자,1902년2월13일).(OHC8.2)
그러나 당신의 현재 마음상태는 하나님의 뜻 아래 굴복되지 않았다. 자아 곧 가련하고 연약한 자아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나타나고 있다. 자아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평안이 심령을 차지할 것이다. 당신이 복음교역자로 일하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꾀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되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엄숙한 명령아래 있다.(VSS 육성화법과 노래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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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글]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열한시 279호 발췌]
그대가 잊힘을 당하거나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 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찮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써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진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 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겪으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죄 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