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1980년 5월 20일 광주상황 15. 1980. 5. 20 -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추가 투입 5월 20일 0시부로 31사단에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추가로 작전통제 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01시 02분 3공수여단 소속 장교 255명·사병 1137명이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 07시 광주에 도착했다. 이로써 광주지역에는 공수부대 3개 여단 10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광주역에 마중나온 정웅 31사단장은 역장실에서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대대장들에게 광주시내 상황을 설명한 다음, 전남대에서 숙영(宿營)하면서 광주 서북부 지역을 담당,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11공수여단은 7공수여단 33대대를 추가 배치받아 광주 동부지역을 담당하도록 변경 조치되었다. 전교사(戰敎司)는… 05시 500MD 헬기 3대를 지원 요청하고, 05시 30분 2개 공수여단의 병력의 증원을 요청했다. 09시 31사단은 재차 광주시내 예비군 무기 6508정, 실탄 42만 발을 군부대로 회수 조치했다. 미회수 총기(銃器)는 공이와 노리쇠를 제거하고, 탄약은 매몰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했다. 06시경 11공수여단은 작전담당 구역인 광주 동부지역에 병력을 배치했다. 61대대는 금남로 2가 상업은행 일대에, 62대대는 충장로 광주우체국 일대에, 63대대는 금남로 3가 광주은행 일대에, 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 4가 한일은행 일대에, 7공수여단 33대대는 광주역에 배치되었다가 오후에 계림동 일대로 이동하였다. 전남도교육위원회에서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에 대해 임시 휴교조치를 내렸다. 상가(商街)는 절반가량 철시했다.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 1000여명의 학생·시민들이 집결하여 공수부대원들의 강경 진압을 성토하면서 금남로 방면으로 진출하였으나,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밀려 산개되었다. 10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소집한 2차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에서 기관장들은 아래와 같은 요구사항을 건의했다. '공수부대를 철수하든가, 철수가 불가능하면 공수부대 복장을 일반군인 복장으로 교체하여 줄 것' 10시 30분경 7공수여단 35대대가 배치된 한국은행 맞은편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30여 명의 남녀(男女)를 체포하여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12시 30분경 전남대에서 식사를 마친 3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시내에 투입되었다. 작전담당 구역인 서북부지역을 중심으로 11대대는 황금동 일대에, 13대대는 공용터미널에, 15대대는 양동사거리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했다. 12대대는 광주시청에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16대대는 전남대에 잔류하면서 여단 예비대 임무를 각 수행했다. 12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와 전교사 상황실에 설치한 7공수여단 지휘부에 들러 여단장 등을 격려하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만난 후 오후에 귀경(歸京)했다. 특전사는 전교사 기밀실에 상황판을 설치하고 전교사 건물 옥상에 전용무전기를 설치하여 공수여단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16. 1980. 5. 20 - 택시부대 등장으로 시위 격화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가 광주시내 일원에 배치된 후, 오전에 비교적 평온하던 상황과는 달리 오후에 들어 시위는 다시 격화되기 시작했다.「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 하지 않았다.」「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라는 등의 내용이 쓰인 유인물(油印物)이 곳곳에 뿌려졌다. 시위대들은 아래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계엄 철폐', '연행 학생 석방', '공수부대 철수',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13시 20분경 상업은행 앞에 200여 명, 14시 20분경 충장로에 200~300명, 전남도청 앞에 200여 명, 계림동 지역에 2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공수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는 계림동 광주고교 쪽으로 밀려 가면서 인도(人道)에 설치된 대형 화분과 가드레일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경(軍警)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15시 40분경 조흥은행 앞에 200여 명, 15시 50분경 금남로 2~3가에 5000여 명, 금남로 4가에 3000여 명이 운집했다. 금남로 4가에서 1가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를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쓰면서 저지하였으나 경찰이 밀리기 시작했다. 금남로 1가 쪽에서 공수부대가 진격하자 다시 시위대가 후퇴하는 등 공방을 계속했다. 16시경에는 전남도청 인근 지역에 집결한 시위대가 2~3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열 앞에 드럼통과 화분대 등을 굴리면서 군경의 저지선으로 접근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돌·화염병·쇠파이프·각목·칼 등을 소지하고 시위를 벌였다.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 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시위를 했다. 18시경 무등경기장에 1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軍)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했다.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광주역과 공용터미널을 거쳐 19시경 금남로 쪽으로 진입하여 전남도청 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했다. 금남로 1가 전남도청 앞에 저지선(沮止線)을 치고 있던 경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차량을 저지하려 했다. 선두 차량 10여 대가 계속 도청 쪽으로 전진하자,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차량 저지 특공조는 선두차량에 접근, 차량 유리창을 파손하여 차량의 전진을 저지했다. 시위대의 차량이 가로수와 바리케이드를 충돌하는 사이에 차 안으로 최루탄을 던져 놓고 차 안으로 쳐들어가 운전자와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타격하고 검거했다. 17. 1980. 5. 20 - 버스 돌진으로 경찰 4명 사망, 5명 중상 19시 30분경 다시 공용터미널 쪽에서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면서 저지했다. 경찰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시위대의 도청 쪽 진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19시 45분경 문화방송국(MBC) 앞에 모인 5000여 명의 시위대는 방송사에 '저녁 8시 뉴스시간에 광주 상황을 보도(報道)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도가 되지 아니하자, 20시 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다. 방송사 직원들은 셔터를 내리고 소화기로 진화(鎭火)하고,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도 소화탄을 던지면서 진화를 계속하였으나, 21시 45분경 문화방송국 건물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계엄병력은 후문을 통해 전남도청으로 철수했다. 20시경 노동청 앞·MBC·KBS 앞·공용터미널 부근·전남매일신문사 앞 등에서 수만 명의 시위대가 애국가를 부르면서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그 와중에 역전파출소·학동파출소·광주시청·방송국·서부경찰서 등이 피습(被襲)되었다. 20시 30분경 광주소방서가 시위대에 점령되고 소방차 4대가 탈취되었다. 20시경 시위대 약 3000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시 10분경 노동청 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버스를 몰고 온 김갑진, 배용주 등 2명은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버스를 몰았다" 20시 20분경 시위대가 역전파출소·양동파출소·학동파출소를 점거했다. 일부 시위대는 광주소방서에서 탈취한 소방차 4대로 사이렌을 울리며 가두(街頭)로 진출했다. 20시 50분경 광주시청이, 22시경 광주경찰서와 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되었다. 23시경 광주세무서가 불타는 등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지역이 사실상 시위대에 장악되었다. 21시 20분경 7공수여단 33대대는 '조선대를 방어하라'는 11공수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조선대로 복귀했다. 7공수여단 35대대는 11공수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23시경 전남도청 앞으로 집결함으로써 11공수여단은 사실상 시위 진압을 포기한 채 조선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를 계속했다. 24시경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노동청 앞과 전남대 앞에서 경찰관과 공수부대원 수명이 사망한 사실이 전파되는 등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實彈) 지급을 요청했다. 11공수여단 61대대장과 62대대장은 62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警戒用 實彈)을 15발 정도가 든 탄창 1개씩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18. 1980. 5. 20 - 돌진 차량에 권총사격 양동사거리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진압 작전을 하고 있던 3공수여단 15대대는 5월 20일 18시경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광주역으로 이동, 집결지 확보를 위하여 광주역 앞 도로를 차단했다. 광주시청에서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던 12대대는 광주역에 있는 15대대를 지원하고 "KBS 광주방송국을 보호하라"는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19시경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15대대와 합류했다. 광주역 앞에서 다섯 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쏘며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 공방을 벌이고 있던 12·15대대는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게속하자 인도(人道)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重傷)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한편 18시 30분경 3공수여단의 본부요원이 2.5t 차량 2대로 시내 작전 부대의 저녁식사 보급을 위해 전남대에서 500m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 이르러 시위대 2000여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전남대에 잔류하고 있던 16대대 병력이 출동, 최루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나 20시경 고속도로 쪽에서 차량 100여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몰려와 공방전을 벌였다. 16대대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대들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여 소강상태가 유지되던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22시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로부터 엄청난 수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각 대대에 '광주역으로 집결하여 전남대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시위대의 공세에 밀려 금남로 신탁은행 공터에서 자체 방호(自體 防護)에 치중하고 있던 3공수여단 11대대는 여단장의 광주역 집결 지시에 따라 22시 30분경 최루탄 발사 등으로 시위대를 돌파, 그 무렵 공용터미널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 진압 작전을 했다. 그 후 광주시청으로 이동한 13대대와 합류한 다음, 23시 30분경 11·13대대 합동작전으로 시가지를 장악하고 있는 시위대를 뚫고 광주역으로 이동, 12·15대대와 합류했다. 19. 1980. 5. 20 - 경계용 실탄 지급 지시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아래의 지시와 함께 22시 30분경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 "위협용(威脅用)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 본부대 병력 약 20명으로 지원조를 편성,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 발을 전달했다. 이어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 뒤쪽 도로와 광주시청 앞 사거리를 지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쳤다.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E-8 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 후 광주역에 도착하여 12·15대대에 경계용 실탄을 전달했다. 이어 광주역에 도착한 11대대에도 경계용 실탄을 전달했다. 3공수여단 소속 대대들이 광주역에 합류한 후에도 전남대 쪽과 KBS 방송국 쪽에서 시위대가 여러 차례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했다. 3공수여단은 장교들의 권총·M16 발포와 E-8 발사기 발포로 돌진 차량을 저지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들은 5월 21일 02시경 KBS 방송국에 배치되었던 31사단 경계병력 장교 4명·사병 35명과 함께 전남대로 철수했다. 5월 20일 밤 광주역 일대에서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김재화(남·25세), 김만두(남·44세), 김재수(남·25세), 이북일(남·28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으며, 최영철(남·39세), 김명환(남·16세), 나순돈(남·20세), 강인곤(남·20세), 김현택(남·24세)과 성명불상자(25~30세) 1명이 총상(銃傷)을 입었다. 시위대의 억센 저항에 부딪쳐 11공수여단이 전남도청 앞으로 밀리고,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 집결되어 전남대로 철수함으로써 전남도청과 조선대·전남대를 제외한 광주시 일원은 사실상 군경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시위대는 밤새도록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서·파출소 대부분을 공격하였다. 경계 병력이 철수한 KBS 방송국이 불타고,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17정이 탈취되었으며, 5월 21일 02시 13분 광주지역의 일반 전화선이 단선 조치(斷線 措置) 되었다. 5월 20일 23시 20분 2군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 실탄 통제, 특전사 임무 20사단에 인계 고려 등에 관한 추가 작전지침이 하달되었다. 이어 23시 32분 소요 확산 저지를 위하여 광주시 외곽 도로 봉쇄 지시가 하달되었다. 24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끌면 피차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며 보병 부대를 투입하고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 무렵 진종채 2군사령관도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를 건의했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1980년 5월 광주 1편, 5월 18일 상황 ☜
*1980년 5월 광주 2편, 5월 19일 상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