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용문산의 설욕
얼씬거리는 중공군 그림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중공군은 6사단 전면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1951년 5월 15일에는 한국인 민간복으로 변장한 중공군이 가평 남쪽의 도로에서 아군의 수색대 눈에 띄었고, 10여 명의 중공군이 강변을 따라 내려오는 장면도 나타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내용이 없었다. 포로를 잡아 중공군의 동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했는데도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각 연대에 중공군 포로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 연대는 전면의 수색과 정찰을 강화하면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월 16일에는 적지 않은 중공군 병력이 가평 읍내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정밀한 정찰을 강화한 결과 최소 연대 규모의 중공군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섰던 2연대 또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연대에서 결국 중공군과의 교전 끝에 포로 한 명을 붙잡았다. 6중대 병력이 수색 도중 중공군과 조우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잡은 포로였다. 이 포로를 통해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곧 용문산 일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중공군 공격은 5월 18일 시작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지던 5월 18일의 일기는 좋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하늘은 퍽 흐린 상태였다. 대규모의 적은 이미 5월 17일 밤의 야음을 틈타 홍천강 북안에 당도했으리라 보였다.
얼씬거리는 중공군 그림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중공군은 6사단 전면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1951년 5월 15일에는 한국인 민간복으로 변장한 중공군이 가평 남쪽의 도로에서 아군의 수색대 눈에 띄었고, 10여 명의 중공군이 강변을 따라 내려오는 장면도 나타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내용이 없었다. 포로를 잡아 중공군의 동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했는데도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각 연대에 중공군 포로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 연대는 전면의 수색과 정찰을 강화하면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월 16일에는 적지 않은 중공군 병력이 가평 읍내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정밀한 정찰을 강화한 결과 최소 연대 규모의 중공군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섰던 2연대 또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연대에서 결국 중공군과의 교전 끝에 포로 한 명을 붙잡았다. 6중대 병력이 수색 도중 중공군과 조우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잡은 포로였다. 이 포로를 통해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곧 용문산 일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중공군 공격은 5월 18일 시작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지던 5월 18일의 일기는 좋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하늘은 퍽 흐린 상태였다. 대규모의 적은 이미 5월 17일 밤의 야음을 틈타 홍천강 북안에 당도했으리라 보였다.
- 중공군 포병 화력이 전투에 나서기 전 사열을 받고 있다.
전방 경계부대라고는 했지만 사실 2연대는 단순한 경계 근무를 벌이는 임무가 아니었다. 그곳을 목숨으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주저항선에 올라선 핵심 전투부대였다고 해도 좋았다. 2연대로 하여금 중공군을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장도영 사단장은 나름대로 지형적인 이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중공군이 2연대에 막혀 머무는 저지선의 북방은 개활지에 가까웠다. 높은 산간 지형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지닌 장소였다. 높아 봐야 기껏 구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나지막한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변과 평탄한 지면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홍천강을 도하해 남하하는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에 막혀 머무는 동안 2연대 후방의 강력한 아군 포격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후방에 배치한 막강한 포병
앞에서도 설명한 대목이지만 6사단의 전투를 위해 미 9군단과 사단본부는 상당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특히 후방에 강력한 포병화력을 전개하고 적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사단의 27포병대대는 물론이고, 미 9군단을 비롯한 각 예하부대의 포병화력이 6사단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강력한 포를 늘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을 신속하게 뚫지 못하면 후방으로부터 날아오는 아군의 강력한 포병 화력에 몸을 숨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2연대장 송대후 중령에게 반드시 저지선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중공군의 동선(動線)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용문산 때문이었다. 해발 1157m의 용문산은 주변 모두를 감제(瞰制)하기에 안성맞춤인 고지에 해당했다. 인근 산간 지역의 어느 산에 비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올라선 아군은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이동시킬 경우 정확하게 그 행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6사단 2연대의 저지선에 걸려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하는 중공군은 낮은 구릉과 평탄한 벌판 지형에서 몸을 감추기 힘들었다. 용문산의 높은 고지에서 정확한 관측을 통해 중공군 병력이 몰려 있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던 아군은 후방의 포병부대에 신속하면서 빈틈없이 포격 지점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이 2연대의 저지에 막혀 평탄하고 너른 지형에 머무는 동안 강력한 미 공군의 공습 능력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2연대가 막대한 중공군의 병력을 얼마 동안 저지할 수 있느냐는 점은 용문산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 2연대의 진지 사수(死守)를 지시했던 것이다.<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