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제가 좋아했던 자매와 단 둘이 차를 몰고 데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퇴비 냄새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주책없게 “방귀 뀌었어?”하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 자기가 껴놓고 왜 나한테 그래?”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순진한 마음에 ‘내가 뀌었나?’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추궁을 하였더니 “그래, 내가 뀌었다. 내가 뀌었어. 아니, 그냥 넘어가 주면 되지, 그렇게 눈치가 없냐?”라고 도리어 열을 냈습니다. 저는 눈치 없었던 제 자신을 책망해야만 했습니다. 아직 방귀를 안 틀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밖에도 여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시절, 통화하다가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여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계속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다가, 제가 너무 다그쳐 물으니 그 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도 모르는 제가 한탄스러웠습니다.
이런 사이에서는 항상 불안합니다. 어떤 말에 상처를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심스러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조심스럽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관계라는 얼음이 그만큼 두텁게 얼지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와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과 형제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며 찾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그런 상황일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으로는 자신의 집안에 유다 지도자들로부터 미움 받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는 것은 가문의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를 초래한 것에는 당연히 어머니의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 말을 듣는 형제들이나 친척들은 매우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비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아픈 만면, 예수님은 성모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으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어머니는 당신의 말로 상처받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도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당신만큼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 없었기에 당신께서 그 분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음을 잘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 뜻을 ‘아멘’하고 받드셨기에 아드님이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통이 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거나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에겐 알 수 없는 고통을 내리십니다. 성인들은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끝까지 따라와서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했던 이방인 여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그 수많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는 그만큼 믿음이 큰 사람들의 몫입니다. 이태리 몬테팔코의 십자가의 글라라라는 성녀는 슬픈 얼굴로 당신의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시며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꽂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성녀의 심장을 열어보니 그 심장엔 그리스도의 수난도구들이 근육이 응고되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글라라 성녀로부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굳은 믿음은 항상 조심해야만 하는 부족한 믿음들에 대한 위로가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어머니에게만 짜증을 더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는 지금은 기분이 나쁠 지라도 영원히 어머니이실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예수님께 어머니는 피로 맺어진 그런 분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픔을 주어도 잘 받아줄 수 있는 성모님과 성인들처럼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조심조심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