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눈이 펑펑 내리는 오후 다섯 시쯤에 수원 연화장으로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수원 연화장은 장례식장과 화장장을 함께 갖춘 보기 드문 장례식장으로 산 속에 있어 운치도 있고 좋은 시설과 친절한 서비스로 호평을 받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다만 대중교통은 접근성이 좀 떨어지는 것이 문제이고, 외진 산속이다 보니 택시도 콜을 하기 전에는 탈 수가 없는 것이 조금 단점인 것 같습니다.
어제 저는 친구와 함께 요즘 생각하기 어려운 따뜻한 마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6007번을 타고 광교차고지에서 내렸는데 눈이 펑펑 내려 우산을 쓰고 걸어갔습니다. 거기서 연화장까지가 약 800m라고 하는데 언덕이고 눈이 내려 조금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다니는 차는 없었습니다.
제가 500m쯤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11번 시내버스가 와서 서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문 안으로 기사님을 보니까 빨리 타시라고 해서 차에 탔더니 거기 천안에서 조문을 오는 제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는데 그 친구도 놀랐습니다.
종점에서 차를 내려 연화장 가는 길을 기사님에게 물었더니 시계를 보고는 다섯 시 5분인데 그 차는 30분에 시내로 들어가는 차인데 여기서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고 눈이 오니 연화장까지 태워다 주겠다면서 친구만 태우고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가다가 혼자 걷는 저를 보고 저 분도 조문을 가는 것 같다고 하면서 차를 세우고 저를 태웠는데 우연히도 친구와 만나 같이 가게 된 것입니다.
버스 기사님께 장례식장에 태워다 달라고 할 얘기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는데 나이가 든 사람이 눈 오는데 고갯길을 한참 걸어가야 한다고 친구를 태우고 출발했고 저까지 태워다 줘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성함도 모르고 인적 사항은 전혀 모르지만 저와 친구는 어제 천사를 만난 마음이었습니다. 수원시 11번 시내버스 기사님들, 그리고 모든 시내버스 기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치인들이 이런 기사님들을 1/100이라도 본 받아서 일을 한다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멋진 나라가 되겠습니까?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 있겠나.”
놀랐다. 시간을 두고 세 번 놀랐다. 정치인 이재명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축약된 표현이 가능할까, 먼저 놀랐다.
승리 지상주의. 수단이 무엇이든, 방법이 무엇이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 형수 욕설 논란과 여배우와의 불륜 스캔들, 부인의 법인카드 유용 논란을 거쳐 대장동 의혹 등 숱한 사법 리스크에 허덕이면서도 엄연히 원내 1당 대표이고 차기 대통령 1순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 그 원천의 일단을 명징하게 봤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11월 28일 오후, 이 말을 했다. 한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 나가 “내년 총선에서 1당을 놓치거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부ㆍ여당의 폭주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현실의 엄혹함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현행 선거 방식을 고집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당시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은 위성정당 없는 준연동형 선거제를 유지하면 총선에서 국민의힘에 35석 뒤진다는 분석을 전했다고 한다. “선거는 승부 아닌가.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 있겠나. 어쨌든 선거는, 뭐 무조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로는 이겨야 한다.”
이 대표는 2년 전 대선에서 ‘위성정당 없는 연동형 비례제’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런 그가 지금, 내가 지게 생긴 판에 국민 약속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그 어떤 약속도 내 정치적 이익을 훼손할 수 없다! 400만 민주당 당원 모두가 그리 말해도, 이 대표 본인조차 그리 생각한다 해도, 이를 입 밖으로 내선 안 됐다.
자신을 차기 대통령 1순위의 국가 지도자로 꼽고 있는 국민들을 초라하게 만들어선 안 됐다. 멋있게 지는 게 결국 이기는 거라고,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내주고 지킬 원칙은 설 땅을 잃고 어떤 동물이 더 평등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게 될 거라고 말했어야 했다. 버젓한 그가 놀랍다.
해선 안 될 그의 말이 나오고 두 달여, 우리는 결코 목도해선 안 될 상황을 보고 있다. 4·10 총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건만 비례대표 의원을 어떤 방식으로 뽑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온 국민이 이 대표의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 됐다. 과거의 병립형 비례제로 돌아가야 하느니, 연동형을 사수해야 하느니 하며 민주당이 친명과 비명으로 갈리고, 친명도 둘로 쪼개진 채 갑론을박만 거듭하고 있다.
전 당원 투표에 부친다더니 사흘 뒤엔 이 대표에게 일임한다며 ‘이재명당’의 면모만 새삼 과시했다. 심지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 대변인조차 한시가 급하다며 이 대표의 ‘결심’을 채근하고 나선 판이니 선거제에 관한 한 이재명 1인 천하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놀라야 할 대목은 이 지점이다. 경기 규칙을 선수가 정하는, 이 대표가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 방식을 골라잡는, 그런데 뭐가 유리한지 계산이 복잡해 심각한 결정 장애에 빠진 이 일련의 기괴하고 반민주적인 상황에 놀라야 하고 정치 지도자의 중대한 식언(食言)에 대해 무딜 대로 무디어진 우리의 감각에 놀라야 한다.
대통령제엔 다당제보다 양당제가 부합하고, 그러려면 전국 득표율에 맞춰 비례대표 의석을 나눠 갖는 병립형 비례제가 다당제의 발판인 연동형 비례제보다 정치 체제의 정합성 측면에서 타당하지만 제도의 장단을 따지기에 앞서 이렇듯 비틀어진 논의 과정에 대한 비판조차 잊은 우리의 자화상에 놀라야 한다.
불체포특권 철폐 약속도 접은 사람 아니냐, 뭘 기대하겠느냐 하는 냉소적 체념과, 멋있게 지는 건 정말 아무 소용없고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하는 가치 왜곡은 모두 우리의 길이 아니다. 거짓이 진실을 대체하는 데 따른 결과는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게 아니다. 실세계의 방향 감각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인간 상실을 깊이 파고들었던 한나 아렌트의 경구가 거듭 절절하다.>서울신문. 진경호 논설실장
출처 : 서울신문. 오피니언 진경호 칼럼, 멋있게 지는 것의 소용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해부터 선거제 당론을 정하지 못한 채 4개월간 오락가락 행보를 반복해 왔습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위성정당을 금지하는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통한 다당제 실현”을 공약했던 그는 현행 ‘준연동형’ 유지와 과거 ‘병립형’ 회귀 사이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갈팡질팡 행보를 보여 왔습니다.
이 대표가 결심하지 못하자 친명(친이재명)계 지도부는 선거제 결정을 위한 전(全) 당원 투표를 시도하다 당 안팎에서 “무책임하다”는 거센 반발이 일자 철회하고 2일 당론 결정을 이 대표에게 위임했고, 이 대표는 결국 총선을 65일 앞둔 5일에야 현행 유지 방침을 확정했습니다.
국민의힘도 “병립형으로 회귀하지 않는다면 위성정당을 창당하겠다”고 나서면서 결국 거대 양당이 시간만 끌다가 선거에 임박해서야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의 룰’을 정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수원시 11번 시내버스 기사님은 운행 중에 25분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버스를 타고 온 승객이 눈 속에 고갯길을 한참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자기 쉴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버스를 운행했습니다.
아마 10분 정도 손해를 봤을 겁니다. 그걸 계산한다면 종점에서 내린 승객이 어떻게 가든 신경을 쓸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이 눈 속에 초행길을 가는 것이 안쓰러워 자신의 쉴 시간을 줄여가면서 기꺼이 봉사를 했습니다.
이재명이 아마 이 얘기를 듣는다면 ‘그 기사 미쳤구먼, 왜 손해를 보는 일을 해?’ 할지도 모릅니다.
수원시 11번 시내버스 기사님들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한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2회 영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