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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국불교 (1)
미국불교사에서 1970년대는 1960년대 미국사회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샴발라센터를 창립하여 백인불교 포교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고, 나로파 대학교를 건립한 쵸감 트룽파 린포체가 1970년에 미국에 입국하면서 70년대 미국불교사의 테이프를 끊었다, 또 1979년에 달라이라마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에 한국불교 포교에 큰 족적을 남긴, 숭산, 법안, 도안 스님등이 미국에 들어온 시기이다. 또 달라이 라마가 처음으로 미국에 들어왔으며 1975년 샤론 실즈버그,잭 콘필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메사츠세츠 베어리에 Insight Meditation Society(IMS)를 설립했다. 이 설립은 위빠사나 보급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아시아의 남방불교 스승들에게 명상을 배운 샤론 살즈버그, 잭 콘필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베어리에서 인사이트 명상협회를 설립한 것은 미국불교사에 큰 사건이었다. 위빠사나 명상운동은 그 독특한 특징 때문에 가장 대중적인 미국 불교형태로 발전하기가 수월했다. 선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전통적으로 승려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던 명상수행에 재가자들이 참가해서 일어난 운동이다.그러나 전반적으로 위빠사나 명상은 종교로서가 아니라 붓다가 가르쳐준 수행법을 사용하여 깨달음과 정신의 치유를 촉진하는 자각의 기술로서 제시된다. 선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도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일반적인 성격이 변했다. 1970년대에 지도자들은 위빠사나 명상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테라와다에서 위빠사나란 수행의 출발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위빠사나 명상은 자아의 비실체성, 우주의 무상함, 그리고 고의 보편성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 사용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 통찰명상은 전통적인 테라와다 수행의 맨 첫 과정인 메타(자애) 명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미국현대사에서 불교와 아주 관련이 큰 이민법 개정이 있었다. 이 시기에 흑인들이 민권 운동을 계속했고, 베트남 전쟁이 심화되었으며, 반전 운동과 히피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개정 이민법으로 동양인들이 대량으로 미국에 들어올 수 있는 법이 1965년 10월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1970년대 미국불교사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6 서구에서 활동하는 Insight Meditation society Teacher 들을 위한 워크삽 참가자들
‘미국불교(Buddhism in America)’의 저자 ‘리처드 휴지스 시거’씨는 미국불교사의 1960년대와 70년대를 접목하여 ‘60년대’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대략 1963년부터 70년대 중엽까지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인 ‘60년대’라는 말은 당분간 미국 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될 것 같다. 대략 그 무렵에 미국의 개종불교는 주로 선에 몰두해 있던 소수의 구도자 공동체로부터 훨씬 대규모로 더 많이 분화된 공동체로 성장했다. 급증하는 반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영적인 대안을 찾아 나섰다가 선, 니치렌(일련정종), 티베트, 테라와다 등의 불교 형태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 가운데서, 그리고 해외에서 스승을 찾아냈다. 남북전쟁 이전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희박하게 이어져오던 역사적 선례들이 이 기간 동안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소위 오늘날 미국 개종자 불교의 활기찬 복합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60년대는 또한 이민자 불교에 극적인 영향을 준 시기이기도 하다.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자가 급증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가 될 때까지 대다수의 관측자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이민자들은 일찍이 1840년대에 중국 불교도와 일본 불교도가 서부해안에 도달했던 시절에 미국 불교가 형성되는 데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5년 이후에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아시아의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미국 불교에 광범위한 전통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인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로서는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래는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현대사를 년도 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1964년 대선에서 승리한 린든 존슨은 미국의 이전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다. 그는 정부가 사회 및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물이었다. 그는 역대 미국대통령 중 가장 탁월한 입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정치적 우상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완성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덕분에 의회를 재촉해 각종 법안을 연달아 통과시킴으로써 루스벨트의 뉴딜 이래 가장 의욕적으로 사회개혁을 이끌어간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가 발의한 민권법이 가결되었으며 국민의료보장제도 65세 미만 저소득자 국민의료보장제도(Medicaid)와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노인의료보험제도(Medicare)등이 연이어 제정되었다.
또한 이 존슨대통령 시절에 앞에서 언급한 개정 이민법이 통과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불교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1965년 10월 4일 오후 뉴욕항 남쪽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리버티 아일랜드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개정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됐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발의 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기까지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는 많은 동양인들이 미국에 들어왔고, 동양의 스님들과 불교지도자들이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불교사에 새로운 지형이 펼쳐졌다. 구체적으로는 개정 이민법으로 동양인들이 대량으로 미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존슨과 월남전쟁 그리고 반전운동
그러나 존슨의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베트남 속으로 깊숙이 끌고 들어감으로써 베트남 민중과 병사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를 반전운동의 소용돌이에 빠트리는 엄청난 과오를 범한다. 이런 반전 운동의 씨앗은 이미 1964년 9 ~ 12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부터 나타났다. 이런 운동은 전국의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9권)
1968년 존슨 대통령은 재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되었다. 민주당원이었던 유진 매카시가 반전이라는 공약으로 존슨의 대항마로 나섰다. 매카시는 뉴햄프셔 주에서 열린 첫 예비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현직 후보에 대항하여 상당한 선전을 했다. 이 결과는 존슨 진영에게는 큰 타격이었으며, 또 다른 요소도 작용하여 존슨은 3월 텔레비전 방송된 연설에서 지명 경선에서 철수한다는 전격 발표를 했다. 이때 파리에서 베트남과의 휴전 협상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존슨은 격화일로로 치달은 반전시위로 인해 사실상 백악관에 유폐된 상태였다. 경비가 철통같은 군사기지 외에는 공개석상에 나타날 수 없었다.
존슨이 지명 경선에서 이탈한 기회를 포착하고, 로버트 케네디 역시 반전이라는 공약을 내세워 유색 인종과 흑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지명 경선에 출마했다. 존슨의 부통령이었던 휴버트 H. 험프리도 지명을 받기 위해 출마하면서, 남베트남 정부의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험프리는 열렬한 뉴딜의 시행자이며, 존슨의 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충돌이 된 1968년 4월의 폭동이 일어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뒤이어 암살되었다. 그해 여름,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고 매카시는 당내 특권 계급에 있었던 험프리에게 패배했다. 험프리가 민주당 지명을 받았으며, 총선에서 공화당 리처드 닉슨과 싸웠다. 닉슨은 ‘히피’반문화를 혐오하는 중도 미국인들 ‘침묵하는 다수’라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또한 그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약속도 했다. ‘베트남화’라고 불렀던 전쟁을 베트남인의 손에 맡겨 버린다는 전략을 세운 닉슨 독트린을 제안했다.
닉슨은 베트남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기를 얻었다고 해도 그 책임을 경솔하게 떠맡아 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남베트남이 단독으로 자국을 방위할 수 있느냐하는 우려와 의회의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고, 또 일방적으로 전비를 삭감해 최종적으로 끊어 버린다는 방향으로 의회가 기울어져 가자 균형을 잡기 위해 닉슨은 막대한 노력과 정치적 재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었고, 심지어 의회가 제공하던 남베트남에 대한 소규모의 재정 지원도 남베트남 정부와 군사 비리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1973년의 파리 휴전 합의에 따라 미국은 드디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약간의 지원 부대는 2년 후까지 남아 있었고, 사이공 정권의 붕괴와 북베트남이 전국을 장악하자 탈출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질적인 종전은 1975년 4월 30일이었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은 최종적으로 500만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사망했고, 약 58,000명의 미군 병사가 죽었다.
히피
Hippie 히피
1960년 중후반, 베트남 전쟁의 계속된 실패와 불안한 사회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기존 사회의 질서를 부정,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며 인간성을 중시하고 물질 문명을 부정하는 운동이 전 미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히피'이다.
히피(Hippie)는 1960년대 미국을 위시한 서양권에서 20~30대 위주로 발생한 하나의 문화풍조 및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히피의 뿌리는 비트닉beatnik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비트닉 자체가 보헤미안적 태도를 지닌 반항아 문학청년들이었다.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숭배했다.
이 흐름은 훗날 모드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점점 요란한 패션과 약물문화, 자유, 평화의 사상이 합쳐지면서 히피 문화가 도래하게 된다. 히피는 대략 1966년경을 기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자유분방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정신적 해방을 위한 마약 사용, 집단 난교와 공동생활 등이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들의 상징적은 모습들은 사실 미국 원주민(인디언)들의 생활양식을 많이 따라하였다. 자유분방한 복장은 미국 원주민들의 복장을 어레인지arrange한 스타일이고, 마약을 통한 정신해방은 미국 원주민들의 연기 흡입을 통한 명상이고, 떠돌아다니는 공동생활 역시 미국 원주민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긴 것과 같다. 백인계 미국인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선택한 것이 바로 이색적으로 보인 미국 원주민식의 생활양식이었던 것이다.
히피는 당시 베트남 전쟁 반대로 큰 호응을 얻던 반전 사상의 아이콘격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당시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이 힘을 얻던 시대였고, 이들은 종종 폭력투쟁으로 발전했는데, 히피는 철저히 무대응 무저항을 원칙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초기에는 히피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집단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하는 행동을 연좌시위(sit-in)을 넘어선 행동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를 Be-in이라고 불렀다. 히피 이전의 서브컬처 집단들도 약물을 사용했지만, 그 전까지 약물은 괴팍한 재즈 뮤지션이나 거친 사나이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LSD의 구세주라 불리우는 티머시 리어리 Timothy Leary가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약물사용을 통한 정신구조의 확장 및 해방을 주장하면서 약물은 히피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생긴 단어가 바로 마약을 통한 정신세계의 탐험을 뜻하는 "Trip"이다.
이 단어는 지금까지도 마약을 경험했다는 은어로 쓰이고 있다. 이 때문에 히피는 단순한 서브컬쳐를 넘어서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e movement)라는 칭호를 얻는다.
1967년에는 국제적인 초점이 되었는데 사랑의 여름으로 대표되는 주로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그 운동의 중심지였다. 언론은 그들의 특징을 긴 머리, 공동체 생활, 평화, 자유연애 등에 주목했다. 이들은 주류사회와 가치를 거부하는 문화정치 스타일을 내세웠다. 그들은 중산층 출신이었지만 중산층을 가장 경멸하였고 청결을 부르주아적이고, 지저분한 것을 혁명적으로 보았다. 몇몇 히피는 아예 인도나 일본으로 직접 여행가서 전통무술과 요가, 동양종교와 철학을 배우기까지 했다. 당시 앨런 긴스버그를 위시한 진보적인 지식인과 작가들도 히피 무브먼트에 대거 참여했다. 흑인들의 민권운동,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선 사람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이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서 여러가지 사건이 터지고, 히피의 신화와 이상은 점점 흔들리기에 이른다. 특히나 찰스 맨슨이 일부 극단적 히피들의 컬트 교주로서 군림하며 살인을 사주하고 그들을 세뇌하여 착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미지에 심한 타격을 입게 되고, 당시 불길처럼 번지던 크랙 코카인 등 마약의 범람 등으로 인해 히피들에 대한 내외부적인 인식이 변하게 된다. 히피 운동이 사회적인 변혁을 일으켜 줄 것이라 기대하고 동조했던 소위 운동권들도 그들의 무능함에 학을 떼고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사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히피는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을 개최하면서 이제 1969년이 지나고 1970년대가 되면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리라는, 마치 1999년 세계종말 후 구세주 재림과 신세계를 기원하는 일부 기독교 종말론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타몬트 공연의 헬스엔젤스 사건 같은 것이 터지고, 1970년대 베트남전이 종결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잃는다. 이들 사상의 주요한 모토였던 록음악(특히 약물의 힘을 빌린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록음악)도 1970년대를 넘어가며 히피 신비주의를 버리고 급격히 세속화된다. 1980년대쯤 되면 이제 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게 된다.
히피 세대를 대변한 록 아티스트를 들자면 도어즈, 제퍼슨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크림, 모비 그레이프 등등이 있고, 비틀즈 조차도 당시의 히피 세대의 사조를 따랐다.
위에서 상술한 히피운동의 글을 통해서 볼 때 이들은 기존의 정치, 문화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상을 찾아 나섰다. 그 새로운 사상의 하나가 불교였다. 그리고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e movement)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에 1959년 스즈키 슌륜이 도착하여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폭발적인 인기속에 성장을 이어갔다. 또 앨런 긴스버그는 일본에 가서 정식으로 불교 수행을 하였다. 이 히피세대의 일부가 나중에는 불교계로 들어왔다.
1970년대는 미국과 남한의 교류가 전에 비하여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1971년 3월 26일에는 새로운 항공협정을 통해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의 취항권을 획득하였다. 또 미국현대사에서 한국과 관련된 사건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기도 했고, 한국현대사에서 미국의 존재가 아주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년대라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미국 중요 사건
1969년 1월 닉슨 대통령 취임.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1969년 9월 3일에 1968년 3월에 일어난 베트남 미라이村 양민학살 사건이 알려짐. 560여명 학살 당함. 이 9월 3일에 호찌민이 79세의 나이로 사망함.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 주립대 켄트 대학교 반정부 시위 사건.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은 1970년 5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켄트에 위치한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주 지사의 요청을 받은 오하이오 주방위군이 학생들에게 총기난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4명이 사살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 학생들은 4월 25일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5일 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 중이었다. 발포 사건은 미국전체로 반향을 일으켰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 등의 수 백개 학교들이 8백만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휴교했고, 미국 내 여론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나뉘었다.
1970년 4월 22일 제 1회 지구의 날 행사.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대표팀 15명 북경공항에 도착.
10월 26일 중국이 유엔가입.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전후 세계경제 시스템으로 등장한 브레튼우즈 협정(Bretton Woods System)을 포기하고 달러와 금의 연동을 폐기하겠다고 발표.
1971년 12월에 페미니즘 언론 자유를 표방한 잡지 <미즈(Ms)> 가 창간되었다. 이 창간호는 8일만에 30만 부가 팔려나갔다.
1970년대 중반 ‘미주’의 독자는 50만명으로 증가하면서 페미니스트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즈의 창간 전후로 여성학이 대학교육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9년 2개 대학에 신설된 여성학은 1974년에는 112개, 1975년152개, 1985년에는 557개 대학으로 늘어난다. (강준만 미국사 산책 10) ‘세계 여성의 해(International Women's Day)’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업적을 범세계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1909년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치적 행사로 시작되었고, 1910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에 의해 세계적 기념일로 제안되었으며, 1975년부터 유엔에 의하여 매년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되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 중국 방문.
1972년 5월 닉슨 모스크바 방문.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정상회담을 갖고 전락무기제한협정(SALT)를 합의했다. 데탕트 외교였다. 데탕트를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지정학적 세력균형에 도달한다는 것.
1972년 11월 대선에서 닉슨 재선.
1973년 1월 27일 베트남 전쟁 휴전협정 체결.
1973년 오일쇼크.
1974년 8월 9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국회에서 탄핵의 위기에 몰리자 현직에서 사임했다.
1975년 4월 23일 포드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고, 29일 마지막 남은 미국인들 사이공 떠났다. 북베트남 사이공 입성하여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완전히 무너졌다.
1975년 빌 게이츠와 앨렌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회사 창업.
1976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 창업.
1976년, 원래 조지아 주지사 지미 카터는 워싱턴 DC의 정치권과 무관했지만 그 해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가진 정치인들을 따돌리고 지명을 받았다. 카터는 남북 전쟁 이후로는 처음으로 딥사우스 출신 후보자로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7년 5월 25일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별들의 전쟁 ‘Star Wars' 상영.
닉슨 미국 대통령
베트남 전쟁
스티브 잡스
미국 불교의 중요 연표 (1970년대 ) 1970년 1월 초캄 트룽파 린포체 카나다 입국 1970년 스즈키 슌륜 선심초심 발간(Zen Mind, Beginner's Mind) 1971년 12월 4일-- 스즈키 순륜 입적 1971년 베트남 스님 틱틱엔안(Thich Thien-An) 로스엔젤레스에 국제불교명상센터 개원 ( Interm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mter) 1971년 뉴욕 캐츠길에 중국인 대승사 건립. Temple Mahayana 1971년 이한상 거사 미국 입국 1971년 카규의 현대판 밀라레파라 칼루 린포체 미국 방문, 현재 그의 센터는 뉴욕주에 있다 1972년 숭산스님 미국 입국 1972년 티베트 닝마파 수장 뒤좀 린포체 미국 방문. 4대 종파 중 가장 먼저 미국방문. 76년 뉴욕에 Oyregn Cho Dzong 설립 1972년 스즈키 순륜이 세운 샌프란시스코 선원이 Green Gulch 농장 소유 1972년 북가주에 티베트 타르탕 툴쿠가 닝마명상센터 설립 (Tibet Nyingma Meditation Center) 1972년 6월 7일 선화대사 미국인 5명 비구계 수계식 1973년 선화스님 국제역경원 설립 1973년 6월 타르탕 툴쿠 닝마 인스티튜트 설립 1973년 3월 8일 --- 야스타니 스님 입적. 88세 1973년 봄 법안스님 미국 입국 1973년 루스 데니슨(Ruth Dension)은 미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위빠사나 가르치기 시작함. (그녀는 남편과 함께 1960년에 아시아를 방문하면서 선불교 사원에서 지내기도 하고, 미얀마 한 센터에서 명상을 공부하였다.) 1974년 Naropa Institute. 여름학기 시작. 교수: 쵸감 트룽파 린포체, 람 다스(Ram Dass), 허버트 궨터(Herbert Guenther, 카규의 역사 티베트 문헌 번역 전문가),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 작곡가 존 케이지 (John Cage), 위빠사나의 잭 콘필드와조 셉 골드스타인. 잭 케루악의 ‘영혼의 시학 학교 설립(School of Disembodied Poetics) 1974년 선화스님 북가주 유키아시에 만불성성(萬佛聖城) 건립 1974년. 잭 콘필드, 조셉 골드스타인 미국에서 위빠사나 가르치기 시작 1975년 샤론 실즈버그,잭 콘필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메사츠세츠 베어리에 Insight MeditationS ocietyIMS를 설립했다. 매우 중요한 사건 1975년 미국에서 위빠사나 보급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아시아의 남방불교 스승들에게 명상을 배운 샤론 살즈버그, 잭 콘필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베어리에서 인사이 트 명상협회를 설립한 것은 미국불교사에 큰 사건이었다. ---- 미국불교 289 패이지에서 인용해야 함 1976년 영국인 타니싸로 비구는 태국 아잔 푸앙 조티코( Ajann Fuang Jotiko) 아래서 명상수행을시 작하여 1976년에 계를 받았다 1976년 7월 4일. 일본 에이도 시마노 스님. 업스테이트 뉴욕 케츠킬 산에 International Dai aBiosatsu Monstery 건립 1976년 마에즈미는 쿠로다 연구소 설립.(Kuroda Institute for the Study of Buddhism and Human Values). 이곳은 학술회의와 연수회를 후원하며 하와이 대학교 출판 부와 함께 동아시아 불교에 헌신하는 두 개의 출판물을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다. 하나는 학술연구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문헌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1976년 중국인 선화스님 북가주 유키아에 법계불교대학 건립 1976년 중국인 성엄스님 뉴욕 브롱스 대각사에서 선 명상센터 (CH'an Meditation Center)출범시킴. 2년 후에 이 모임은 자체적으로 센터를 건립 1978년 불교평화사절단( The Buddhist Peace Fellowship) 창설 1979년 달라이 라마 미국 처음 방문 1979년 뉴욕 우드스탁에 Karma Triyana Dharmachakra:KTD) 16대 걀와 카르마파에 의해 설립 1979년 늦은 봄 태국 아잔 차 스님 매사추세츠 바레의 IMS 방문 10일간 지도 1979년 캄보디아 첫 번째 사찰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세워졌다 1979년 아잔 아마로(영국출신 임) Ajahn Amaro 아잔 차에게서 비구 계를 받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