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컨디션이 좋은 날은 어김 없이 아웃사이드로 나가는 것 같아요. 식사와 산행을 작정 하고 토네이도를 몰았는데 양평해장국 집입니다. 장사 잘 하는 집은 밥 한 그릇을 먹으러 가도 내가 대접 받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아요. 땡큐. 반겨주서 고마워요. 1년 전에 잔나비랑 밥 먹으러 왔다가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었어요. 2.5톤 영업 차를 남의 에리어에 파킹을 했나 봐요. 잔나비가 미안하다며 곧 빼겠다는데 전화를 3번이나 걸어온 겁니다. 이윽고 성징 급한 놈이 나타나서 연병 지랄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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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하나 있는 후배가 시원찮으니 늙은 내가 쌈탉이 되었어요. 홀 안에 10여명이 있었는데 이왕 시작한 싸움이고 개 쪽은 이미 팔렸으니 본전을 뽑아야 할 것 아닙니까? 10분 정도에 상황이 종료되었고 주방에서 사장님이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이다. 그 날 이후 내가 갈 때마다 직원들이 모두 나와 반겨줍니다. 이러니 밥맛이 안 좋을 래야 안 좋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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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남동에서 곱창 구이 먹을 때 에스더가 곱창 전골 좋아한다는 말이 떠올라 포장을 주문했고 동시에 오늘 산행은 틀어져 버렸어요. 한참을 못 본 것 같은데 2일 날 노래방 갔었고, 4일 날 전화 통화를 했더라고요. 그동안 어찌 살았나 몰라요. 에예공! 개 보고 싶어. 나비 찍고 1시간 걸립니다. 고고씽! 숙명여대!. 잘하면 점심 시간 대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차분하게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을 로그 인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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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에서 내가 만난 비슷한 제목의 책들은 '존재와 시간'(하이데거)-'존재와 무'(샤르트르)-그리고 오늘은 '존재와 사건'(바디유)입니다. 인간이 철학을 시작한 이래 철학은 '존재' 문제를 중심 화두로 다루어 왔다고 봅니다. 바디우는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이어받아,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 안에,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이 변화하는 과정, 활동을 '진리' 라고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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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존재'는 무질서, 우연적, 비정합적 다수 상태인 사건이며, 만약 사건이 구조화 되어 '일자'가 된다면 더이상 사건이 아니며 따라서 '존재'도 아니게 됩니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적용하여, 사건이 구조화 된것을 '지식(이념화, 법제화 된것)' 이라고 하더이다. 국가는 고착화된 이 지식의 틀 안에서 사건을 규정짓게 돼요. 이 규정에 따라 다수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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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회는 시시각각 변하므로 이 고착화된 지식은 이러한 사회의 흐름에 맞지 않아요. 따라서 사건의 발발로써 이 규정을 엎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존 질서를 엎기 위해서는 타당한 이론 및 이념이 정립되어야 하므로, 사건으로써 지식을 엎기 위해서는 '사건 또한 규정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건이 규정화되면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지식'일 텐데, 기존 지식은 고착화된 거고 새로 생겨난 지식은 '진리'란 말인가? 새로 생겨난 지식이 고착화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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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는 이것을 '공백'으로 풀어냅니다. 기존 정의된 규정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 공백의 영역, 그 공백을 포함하는 절차는 무한의 영역이 있게 되므로 기존 규정 요소와는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로 규정된 것, 그러니까 새로 지식화 된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알지 못하며, 올바른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지식화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고착화 될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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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진리란 무한한 혁명과 개혁을 통해, 비록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올바른 것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부합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혁명과 개혁이 이루어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현재 있음의 존재'와 '도래할 존재'가 그것인데요, 현재 있음의 '나'라는 존재의 나는 과거에 반복적으로 있어 왔고 현재 눈에 보이는 자체로서의 '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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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도래할 있음의 '존재는 오지 않은 도래할 존재이지요. 이 두 존재 간의 차이는 같은 한 사람이지만 차이가 있어요. 현재 있음의 존재가 현재의 상태로 미래를 맞으면 그 현재의 존재는 미래에도 현재의 존재와 독 같은 '있음의 존재'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있음의 존재가 도래할 있음의 존재로 도약하는 데는 뭔가 개입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건의 개입'이 필요해요. 그리고 사건은 어느 닐 불쑥 터져 등장합니다. 아주 사소하거나 예기치 못했어 사건에서 출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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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 터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피하거나 참여를 거부해요. 물론 드물게 누군가는 참여하기도 합니다. 현재 있음의 존재가 도래할 있음의 존재로 변화하는 계기가 '사건'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특정 존재가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사건을 변화시키는 '촉성'(forcing)으로 작용합니다. 촉성은 촉진하는 힘이자 에너지죠. 이 촉성이 있음의 존재를 도래할 존재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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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사건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체성을 가진 주체(나)입니다. 단 한 명의 주체적 존재가 사건의 부름을 받고 사회와 역사 앞에 등장했을 때, 역사는 거친 변화와 혁명의 물살을 만들어 냈어요. 칼 마르크스-프로이트-이순신-광주 항쟁에서 죽음으로 참여했던 '주체'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주체'로서 사건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2024.9.7.sat.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