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배워야할 이순신 정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 스스로 먼저 죽었다.
2015.8.15.
오늘은 광복 70주년이다.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70주년이다. 1945년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로부터의 벗어남이었다. 1545년 이순신의 탄신은 침략자 일본군을 무찌르는 조선민족의 행운이었다. 임진전쟁과 한일병합, 우리나라는 두 번씩이나 일본에게 국권침탈을 당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당했다. 임전전쟁 7년 동안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도륙 당했으니 산하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고, 일제강점 36년 동안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은 강제징용의 제물이 되었고 처녀들은 성노리개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런 민족의 비극 중에도 민족혼을 망각했던 반역자들은 창씨개명은 물론 신사참배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침략에 협조하며 국권상실에 앞장섰거나 원수를 등에 업고 동족을 가해하고 독립을 방해했다. 심지어 성직자들 중에도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황국신민임을 자처하며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자들도 있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까지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교한 성직자도 많았다. 예컨대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일심회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의용군을 조직했던 서울 진관사 백초월(白初月) 큰스님은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며 미치광이 행세까지 했지만 끝내 해방을 앞둔 1944년 6월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역시 수차례 체포와 구금 중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했던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朱基徹) 목사도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일사각오(一死覺悟)를 외치다가 역시 해방을 눈앞에 둔 1944년 4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켜준 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니 이 작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임진전쟁 중에도 수많은 순왜(順倭)들이 나라를 등지고 있었으니 조정에 반감을 품었던 자들이나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조선의 각종 정보를 제공했던 자들이다. 예컨대 함경도에 피난했던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었던 회령부 아전 국경인, 왜적들 속에서 조총을 난사하며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댔던 사천해전의 조선인, 왜적의 포로가 되었던 박계생도 조선침략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활동했다니 기막힐 노릇이다. 뿐만 아니라 선왕의 왕릉을 두 번씩이나 파헤치는 치욕적 만행의 배후에 국록을 받아먹는 관원과 관노가 있었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반대로 조선에 투항해온 항왜(降倭)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동향파악에 도움을 주었고 조총을 비롯한 일본무기 관련기술을 알려주는 유용한 존재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이런 항왜가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들이 바로 한류(韓流)의 원조가 아닐까 비약하게 된다. 상징적 인물로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준사(俊沙)가 있었고, 일본군의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전해줬던 사야가(沙也可), 사여모(沙汝某) 등이 있었다. 사야가와 사여모는 모두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이었지만 투항이후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도 큰 공을 세워 조선이름 김충선(金忠善)과 김성인(金誠仁)을 하사받고 정2품의 벼슬까지 받았다.
항일(抗日)과 친일(親日), 항왜(降倭)와 순왜(順倭)를 생각하니, “나라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나라는 없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백성 없는 나라란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순신의 백성사랑은 백성 없는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한 최고의 가치였고 신념이었다. 이순신이 둔전을 경작해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제세안민(濟世安民) 했던 이유였다. 백성이 하늘이니 작전의 수립도 작전의 변경도 모두 백성의 안전, 보민어적(保民禦敵)이 우선이었다. 백성이 주인이니 공직자는 백성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실천이었다.
나라 없는 백성이란 유태인처럼 정처 없는 유랑민족의 전철을 밟아야 한다. 그러니 이순신의 나라사랑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지 않기 위한 최고의 목표였고 가치였다. 오로지 나라를 위해 멸사봉공, 진충보국했던 이유였다. 억울한 모함과 누명으로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당했어도 오로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자신을 원망할지언정 조정을 원망하지도 임금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북선을 창제하고 조총을 개발하고 화약을 제조하니 창조경제의 실현이었다. 스스로 군량을 조달하고 군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충원하니 자주자립의 구현이었다.
이순신 탄신 47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으며 일본을 다시 생각한다, 한류(韓流)가 저물고 혐한(嫌韓)이 극성을 부리는 일본열도가 안타깝다. 진정성 없는 반성과 가식적 사과를 되뇌는 아베 신조가 측은하다. 역사를 외면하고 미래를 보지 않는 민족에게 차라리 연민을 갖는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역사를 돌아보라, 조선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한 채 제 스스로 먼저 죽었다. 세계를 침략했던 A급 전범들이 사형대에서 죽어갔고, 수많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사람, 동물 등 모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말 그대로 죽음 속에 숯검정으로 그슬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손인 아베 신조와 그 세력들에게도 되풀이될 수 있음을 저들은 알아야 한다.
역사의 승자는 결국 박해를 받은 자의 것이다. 70년 전 해방의 해, 이 땅엔 변변한 산업기반조차 없었다. 일본인들이 도망치며 남겨놓은 허접한 잔재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 하면 된다는 긍정정신으로 아모레퍼시픽, 한진 같은 많은 해방둥이 기업들이 맨주먹으로 창업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6.25 한국전쟁, IMF, 금융위기 등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한국경제 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넘어 OECD 선진강국으로, GDP 국가순위 11위의 경제강국으로 도약했다. 박해받은 우리민족의 승리였다. 의(義)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우리는 당당한 국제사회의 주역이다. 쟁쟁한 국제경제의 중심이다. 임진전쟁, 한일병합 그 질곡의 역사에서 승리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이웃을 괴롭히지 않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분식하는 저들의 언행에 일희일비 연연하지 말자. 군국주의 부활로 영광 재현을 꿈꾸는 왜구(倭寇)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순신처럼 일본과의 경쟁에서 당당한 승자가 되는 것이다. 중과부적의 전세를 뒤집고 싸우는 싸움마다 승리했던 충무공 이순신처럼 경제 전쟁이든 외교 전쟁이든 무력 전쟁이든 승자가 되는 것이다.
광복 70년,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던 충무공 이순신에게서 그 해답을 구하기로 하자. 이순신이 실천했던 창의혁신의 정신, 자주자립의 정신, 기록보존의 정신, 정보공유의 정신, 원리원칙의 정신, 입현무방의 정신, 소통화합의 정신, 사랑실천의 정신, 곧 필사즉생(必死則生), 죽기를 각오하면 살 수 있다는 긍정의 정신이다. 족구천부(足懼千夫), 천명의 군사도 두렵지 않다는 도전의 정신이다. 반일(反日)이 아닌 극일(克日)을 위해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충무공 이순신의 위기극복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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