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游子吟(유자음) - (孟郊맹교) : -길 떠나는 아들의 노래-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인자하신 어머니가 손끝의 바느질로 (인자하신 어머님이 바늘로)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꿰매네. (길 떠난 아들의 옷을 지었네.)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떠날 때 촘촘히 꿰매어 주심은 (떠날 때 한 올 한 올 촘촘히 바느질함은)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어쩌다 더디 올까 염려해서 이겠지. (혹시나 자식이 돌아옴이 늦을까 걱정함일세).
誰言寸草心(수언촌초심) 누가 말했던가, 조그만 풀 같은 효심으로 ( 그 누가 말하던가, 보잘 것 없는 효심으로)
報得三春暉(보득삼춘휘) 봄볕 같은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다고. (봄날 햇볕 같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 線[선] 針線, 즉 바느질을 뜻한다.
○ 密密[밀밀] 촘촘한 모양을 형용한 말.
○ 縫[봉] 꿰매다. 깁다. 바느질하다.
○ 誰言寸草心,報得三春暉[수언촌초심,보득삼춘휘] ‘寸草心’은 子女의 孝心이 한 치 자란 어린 풀의 나약함과 같다고 비유한 말이다. ‘三春暉(삼춘휘)’는 慈母(자모)의 자녀에 대한 은혜가 봄날 햇볕의 은택과 같다고 비유한 말이다. 봄 석 달 동안의 햇빛.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으로 가리킨다. “‘春暉(춘휘)’는 봄의 和氣(화기)이다. 草木(초목)을 기른다. 따라서 자모에 비유된다.”고 했다. 이 두 句는 “누가, 작은 풀이 능히 봄볕의 위대한 온정을 갚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함이다. 한 줄기 풀과 같은 미미한 자식의 효심으로 천지를 비추는 봄볕과 같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어머님이 손에 잡고 있던 실은 지금은 이 나그네가 입고 있는 옷에 있다. 길을 떠날 때 밤새워 촘촘히 꿰매어 주신 것은 해여 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하셨기 때문이겠지. 한 치 정도 자란 어린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날 햇볕과 같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리오.
<유자음>은 ≪악부시집≫ 雜曲(잡곡) 中에 나열되어 있다. 한나라 소무의 시에 ‘幸有絃歌曲 可以喩中懷 請爲遊子吟 泠泠一何悲(행유현가곡 가이유중회 청위유자음 령령일하비 :다행히 絃歌曲(현가곡) 있으니 속마음 비유할 수 있으리라. 청컨대 遊子吟(유자음)을 불러다오. 영령히 얼마나 슬프더냐)라고 하였으니 遊子吟(유자음)은 漢나라 때에도 있었다. 대개 집을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詠唱(영창)했던 노래이다.
이는 孟郊(맹교)가 률양현위로 부임했을 때 지은 시이다. 작가가 自註(자주)에서 말하기를 “률현에서 어머니를 맞아 지었다.”고 하였다. 률양은 강소성 의흥현 서쪽에 있다. 이 시는 어머니 사랑의 위대함을 송양하였는데 천고에 전해져 애송된 명시이다. 앞 네 句는 작자가 뜻을 가지고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극히 미세한 동작에다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臨行密密縫(림행밀밀봉)’이란, 이는 본시 하나의 평범한 일이지만, 도리어 심후한 어머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끝 연은, 햇볕이 작은 풀을 기름을 가지고 비유하여 순수하고 간절한 효심을 써서 자연히 심각하게 하였다. 今人 彭國棟(팽국동)의 ≪담원시화≫에 “東野의 <유자음>을 나는 매양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대개 돌아가신 李太夫人의 마음이 곧 <유자음> 가운데의 자모의 마음이었다. 오늘날까지 모애의 깊고 간절함을 쓰기를 동야와 같이한 사람이 없었다.
[참고자료]
우리나라 문인들도 부모의 은혜를 표현할 때 ‘유자음’을 典故(전고)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金宗直(김종직)은 <교우흥인문내영훤화>(점필재집) 권 5)에서 “북당이 아득히 남쪽 끝에 있는지라, 강개하여 다시 유자음을 읊노라.[北堂渺渺天南極 慷慨還爲遊子吟 북당묘묘천남극 강개환위유자음]”라고 하였다. 李植(이식)은 <생일유감>(≪택당선생속집≫권2)에서 “겨울 찬바람 손수 지어 주신 옷에 부니, 꿈결 속 그저 소식만 묻고 돌아오네.[冬風吹手線 消息夢徒回 동풍취수선 소식몽도회]”라고 하였는데, ‘手線(수선)’은 <유자음>의 첫 구절 ‘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에서 취한 것이다. 또한 卞仲良(변중량), 姜栢年(강백년), 申景濬(신경준), 成俔(성현) 등은 <유자음>이란 제목으로 작품을 짓기도 하였다.
成俔〈1439(세종 21)-1504(연산군 10)〉의 《허백당집》풍아록 1권에도 어머니의 사랑을 읊은 〈遊子吟〉 시가 보인다.
“나그네 고향 떠나
천애 멀리 행역 간 지 오래노라.
바람이 높으니 서리와 눈 차가운데
옷은 떨어져 양 팔꿈치 드러났네.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에
서글퍼서 부질없이 머리만 긁적이니.
옷 가운데 바늘과 실로 꿰매신 것은
모두 자애로운 어머니 손에서 나왔다네.
[遊子去古里 天涯行役久 風高霜雪寒 衣破露雙肘 仰念倚閭人 怊悵空搔首 衣中針線縫 皆出慈母手]”
봄은 소생의 계절이요, 젊음의 계절이다. 그런 만큼 봄은 젊은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봄을 타는 것조차도 젊은이들의 몫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봄을 노래한 시들 대부분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것들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들을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애틋한 모정(母情)을 읊은 시들은 봄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唐)의 시인 맹교(孟郊)가 봄과 모정(母情)을 연계시킨 시를 쓴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 시에 부모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
이 '한 땀 한 땀'의 된소리가 부모의 끝없고 가없고 변함없는 자식사랑을 잘 알게 해준다.
『사람은 누구나 ㅃ ㅉ ㄸ ㄲ ㅆ, 다섯 가지 된소리 속에 산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 태어나서 아이 낳아 기르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된소리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ㅍ ㅊ ㅋ ㅌ, 이 네 가지 거센소리보다는 된소리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삶과 죽음을 완성해 나간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하고 딸 둘에 아들 하나라야 '금메달'이라고 말한다. 아들만 둘인 사람은 나중에 길거리에서 죽게 된다며 '목메달'이라고 부르니 한심한 일이다. 어쨌든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가 자라나는 상황과 부모의 마음을 된소리로 한번 살펴보자.
짠!하고 이 세상에 나오는 아기는 없다. 아기를 낳는 것은 엄마들이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렇게 어렵게 태어난 아기는 엄마의 찌찌를 먹고 만지며 자란다. 일본어 찌찌[乳]에서 온 말이긴 하지만, 모유를 먹은 아기는 튼튼하고 머리도, 성격도 좋다고 한다.
엄마 젖을 먹고 자라 뒤뚱뒤뚱 아장아장 걸음을 걷게 된 아기는 이제 찌찌 대신 까까를 먹고 엄마 아빠와 '까꿍, 도리도리 짝짜꿍'을 하며 자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던가? 이때부터 이미 노는 꼴이 평범하지 않고 똘똘한 아이들이 눈에 띈다. 뭔가 한 가지를 손에 잡으면 딴 생각 하지 않고 골똘히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기는 어느새 꼬마라고 부를 만큼 성장했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아이들이 빨리 자라준다면 부모의 걱정이 줄어들까? 나름대로 또 다른 문제가 있겠지. 나중에 군대 가면 다시 선보이게 될 까까머리도 졸업한 꼬마는 알록달록 꼬까옷 차림이 귀엽다.
따개비처럼 엄마에게만 찰싹 달라붙어 살던 아이에게는 친구도 생겼다. 다른 아이와 짝쿵이 되어 묵찌빠를 비롯한 온갖 놀이를 하면서 개구쟁이로 자라난다. 딱지치기, 땅 따먹기와 같은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이제 거의 없지만 아이들이 노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무궁무진하다.
부모는 늘 걱정이다. 아기 때는 아기 때대로, 학교에 입학시킨 뒤에는 또 그때대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긴다. 부모는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옷을 빚듯이 아이를 기른다. 그러나 그 마음을 일찍부터 빨리 알아주는 자식은 그리 많지 않다. 일찍 철이 들어 부모에게 말대꾸도 하지 않고 어려움을 꿋꿋이 견디며 알아서 자기 일을 다하고 씩씩하고 똑똑하고 예쁘게 성장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게 곧 효도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나다니지 말고 부득이 멀리 갈 것 같으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물도록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놀기 바쁜 자식들은 잘 모른다.[<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된소리와 부모 마음, 한국일보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입력2013.03.25. 10:19 ]
※ 엄부자모(嚴父慈母)라 하지 않았던가. 자식에 대한 자애로운 사랑은 뭐니뭐니해도 어머니 몫이다. 곧 집을 떠나 타지를 떠돌게 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어떤지는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손안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실타래였다. 이 실타래는 한 올 한 올 어머니의 손을 거쳐 끝내는 집 떠날 아들의 옷이 될 터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겨 있는 그 옷은 아들이 타지를 떠도는 동안 내내 어머니 대신 아들을 지켜 줄 것이다. 아들과의 이별을 아파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 마침내 아들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 순간 어머니의 조바심은 극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입고 갈 옷에 혹시 제대로 꿰매지지 않은 데가 있나 살피면서 촘촘한 최후의 바느질을 가한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은 끝이 없다. 마음속으로 불현듯 아들이 돌아오는 것이 생각보다도 더 늦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오래 입어야 하므로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 놓았던 옷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면서 바느질을 더욱 촘촘하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어머니 마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때는 마침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시인은 봄풀에서 자식을 떠올리고 봄풀을 자라게 하는 봄볕에서 어머니 모습을 떠올렸다.
시인에게 봄은 청춘남녀의 사랑과 그리움, 왁자지껄한 행락의 철이 아니고 어머니의 인자한 사랑과도 같은 햇볕으로 자식과도 같은 어린 풀싹을 보살펴 기르는 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절묘한 형상화의 수법을 발휘한다. 이제 갓 돋아나 짧을 수밖에 없는 풀싹으로 철없는 자식의 마음을 형상화하고 이에 비해 춘삼월 석 달 내내 풀싹에 쬐는 햇볕으로 어머니 사랑을 형상화했다.
봄은 풀이 소생하고 자라는 계절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햇볕이다. 그래서 봄풀은 자식이요, 봄볕은 어머니인 것이다. 그러나 봄풀은 자신을 길러 준 봄볕의 은공을 잘 모른다. 안다 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봄풀과 봄볕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김태봉 ,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誰(수)는 의문대명사로 ‘누구’에 해당한다. 寸(촌)은 손목에서 맥이 뛰는 곳까지의 거리이며 한 치 즉 약 3.3cm에 해당한다. 方寸(방촌)은 사방 한 치 넓이의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 짧거나 작다는 뜻도 있으니, 寸陰(촌음)이나 寸刻(촌각)은 짧은 시간이고 寸志(촌지)는 작은 성의이다. 寸鐵殺人(촌철살인)은 한 치 쇠붙이로 살인한다는 말로 짧은 경구로 감동시키거나 약점을 찌름을 비유한다. 寸草心(촌초심)은 한 치 작은 풀과 같은 마음으로 자식의 작디작은 효심을 뜻한다.
報(보)의 왼쪽 부분은 刑具(형구)의 모양이 변형된 것이고, 오른쪽 부분은 손으로 사람을 꿇어앉히는 모습으로 다스림을 뜻하는 服(복)의 원형이다. 報(보)는 죄인을 판결한다는 본뜻에서 報恩(보은)이나 報復(보복)처럼 ‘갚다’의 뜻, 通報(통보)나 報告(보고)처럼 ‘알리다’의 뜻으로 확대되었다. 得(득)은 동사 뒤에서 가능 또는 완성을 표시한다.
三春(삼춘)은 초봄부터 늦봄까지의 孟春(맹춘)과 仲春(중춘)과 季春(계춘)을 가리킨다. 暉(휘)는 빛을 가리키며 빛나거나 밝거나 선명하다는 뜻이 있다. 春暉(춘휘)는 봄볕으로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 또는 은덕을 비유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손 안에 들린 실은, 길 떠날 자식의 옷을 위한 것. 떠날 즈음에 촘촘히 꿰매시는 것은, 늦게 돌아올까 걱정하셔서이다. 누가 말하는가, 한 치 작은 풀의 마음이 석 달 봄볕에 보답할 수 있다고.”
길 떠나는 자식이 일찍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행여 늦어져 옷이 먼저 해지기라도 할까봐 꼼꼼히 꿰매는 모정이 가슴을 흔든다. 언제나 변함없고 더없이 큰 그 사랑에 다 보답할 수 있는 이 누구인가. 唐(당) 孟郊(맹교)의 ‘遊子吟(유자음)’에 보인다. ,<오수형 서울대 교수·중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