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선포의 전인성과 보편성
이사 35,4-7; 야고 2,1-5; 마르 7,31-37 / 연중 제23주일; 2024.9.8.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이 심상치 않습니다. 민심이 천심인데, 도무지 민심을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막무가내로 나라의 공동선을 파괴하고 있는 정치 현실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정치평론가 유시민은 도자기 박물관에 난입한 코끼리 같다고 풍자하였습니다. 코끼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들어 와 있는지도 모른 채 귀한 도자기들을 박살내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또 국회의원 조국은 이 코끼리가 윤석열과 김건희의 공동 정권이라고 정면 비판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지난 4.10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귀가 멀었고 눈도 멀었으며 말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민생 경제가 폭망하고 있고, 의료 대란이 일어나고 있으며, 남북 간 안보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복음이 알려졌을 즈음에, 북쪽 해안 지방에 사는 이방인들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티로에서 만나신 가나안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을 고쳐 주신 일은(마르 7,24-30 참조) 그분이 선포하시는 복음이 드디어 이방 지역에 사는 이교인들에게도 열리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일로서, 유다인 순혈주의의 장벽을 넘어 복음 진리가 지닌 개방성과 장차 인류 전체에게로 펴져 나가야 할 보편성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친 김에 역시 이교도들이 사는 시돈과 데카폴리스 지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만나셨습니다. 마귀들이 판을 치는 이교도들의 생활 문화에서는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어서 마귀로 인한 귀 먹음과 말 더듬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 아나빔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들뿐만 아니라 눈먼 이들이나 다리 저는 이들까지도 온전히 치유되리라는 희망이 퍼져 있었고, 이 희망찬 미래는 아나빔들을 대변한 이사야가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이미 내다본 예언에 나타나 있었습니다.(이사 35,5 참조) 심지어 이사야는 눈이나 귀가 멀었거나 다리를 절거나 말못하는 등 신체적인 장애가 치유되는 희망찬 미래를 예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이사 35,6ㄴ-7)는 심판까지도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이사야 특유의 화법으로서, 지질과 지형 등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를 비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정신적이고 영적인 환경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는 그래서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인 예언이요 또한 신체적인 불구와 장애 상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불구 현상과 장애 현상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그래서 전인적인 예언이었습니다. 이 보편성과 전인성이 올바른 인간 이해입니다.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나 사회교리를 실천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대전제입니다.
보편적으로나 전인적으로 회복해야 할 인간의 능력, 그래서 결국 하느님을 닮아야 할 인간의 품격은 사랑과 진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이 말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마음과 진실 등을 존중할 줄 몰라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사랑할 줄을 모르고 사랑해 본 적도 없는 정신적 장애자 내지 영적 불구자와도 같은 이들을 향하여 권고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그리고 데카폴리스 같은 이방인 지역에서 만나신 이교도들뿐만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에서 만나신 유다인들 가운데에서도 눈먼 사람, 귀 먹은 사람, 말 더듬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들은 많이 만나셨고, 이들의 신체적 장애와 불구는 금방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증언되고 수많은 사례에서 입증되듯이, 신체적 불구와 장애를 지닌 이들은 기적처럼 치유되었으니,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의 신체적 고통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믿음까지 돌려주심으로써 온전한 인간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심각한 불구와 장애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귀먹고 눈멀고 말 더듬고 다리 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들은 신체 기능이 멀쩡하고 또 자신들이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축복이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영적으로 불구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정신적으로나 영적 인지능력이 떨어지다 못해 마비된 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눈이 멀었음을 깨우쳐주려고 왔다.”(요한 9,39) 이것이 그분의 심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며 착취하는 폭력에다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같은 엘리트들이 가하는 사회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착취, 그리고 율법상 작은 허물도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정신적인 죄책감 등이 심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약한 이들이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질병을 초래하거나 심지어 마귀 들려 미치게 하는 일이 많았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판 갑질이 만연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자들이 약한 이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지기 때문에 병이나 장애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던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도 양반 계층의 사대부들이 노비를 비롯한 하층 신분과 중인이나 상민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고, 양반 중에서는 적자가 아닌 서얼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차별을 받았으며 여성은 신분에 상관없이 사회 진출에 제약을 받음은 물론 사회적으로는 귀머거리요 벙어리 취급을 받는 등 대다수의 백성을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렇듯 양반에 의한 신분 차별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갑질이었고, 당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일생 동안 심지어 자자손손 행해지는 영속적인 악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이들 중에서 선각자 선비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믿게 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의 바람이 불어 닥치자 심산유곡을 찾아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어 살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신자들은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서로를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보는 눈으로 목숨 바쳐 믿음을 지키려 하는 서로의 진실을 보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눈으로 서로의 애환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입으로 흠숭과 찬미, 감사와 속죄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변변한 농토가 될 만한 땅뙈기가 없는 탓에 담배 농사를 짓거나 옹기나 숯을 구워 팔면서 헤어진 교우들의 소식을 탐문하기도 하고 교우촌 소식들을 주고 받으며 기도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고아나 과부 등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교우촌에 찾아오면 내치지 않고 그 가난한 살림에도 숟가락을 더 얹어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박해의 피바람이 불어 교우들 중에서 누군가 치명하면 그들 자녀들의 대부 대모가 되어 길러주는 등 그들의 팔 다리는 사랑의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을 가리지 않고 존중하는 보편성과,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온전히 듣고 말하며 보고 움직일 수 있는 전인성으로 말미암아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촌은 불구적이고 장애적이었던 그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조선왕조가 가한 박해의 상황에서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에서 이룩한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바로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바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냇물이 흐르는” 등 역사적 부조리가 역사적 해방 현실로 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고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귀를 열어 주시고 혀를 풀어 주신 일이 재현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열려라!”(마르 7,34) 하신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기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의 능력이 마비된 이들에게도 예수님은 여전히 치유자이시고, 기도와 성사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손가락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어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법마저 잊어버린 우리 시대의 불구자들,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듣지 못하며 사랑의 말을 더듬는 우리 사회의 장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