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박용숙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이 분단국가라는 불명예는 전인류의 수치라고 할 수가 있다. 남북분단의 원인은 남침에 있지도 않고, 북침에 있지도 않다. 남북분단의 원인은 ‘우리 땅- 우리 주권’을 스스로 지킬 수 없었던 국력의 상실에 있었던 것이고, 그 두 번째 원인은 대한민국을 식민지배한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있었던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원인은 일본의 패망 이후 남북을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남북전쟁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과 공산주의의 진영인 소련(중국)에 의한 식민지 대리전쟁이었던 것이고, 그 결과,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오늘날까지도 남북통일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동경비구역이란 무엇인가? 공동경비구역이란 한국전 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원만하게 운영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상에 설치한 남북공동경비구역을 말한다. 공식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고, 통칭 ‘판문점’이 비무장지대의 군사분계선상에 있으며, 이 판문점은 공식적으로 남북의 어느 쪽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다. 공동경비구역, 즉, 판문점에는 군사정전위원회의 본회의장이 있고, 북한측의 판문각과 유엔측의 ‘자유의 집’ 등, 10여 채의 집이 있으며, 1953년 이후 수많은 군사회담과 남북정상회담까지도 이어졌지만, 그러나 그 어떤 성과도 이루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오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고, 공동경비구역은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그러나 남북분단의 현실에서는 어느 쪽의 영토도 아닌 공동경비구역에 지나지 않는다. 남과 북은 적대 국가로 대치하고,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은 한민족이면서도 우리가 아닌 타인(적)으로만 존재한다. 너와 나는 우리가 아닌 타인이며,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라고 할 수가 있다.
박용숙 시인의 [공동경비구역]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 인간들의 삶을 그 얼마나 파편화시키고 붕괴시키는가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기주의의 최종적인 형태이며, 그 결과, 우리는 없고 ‘나’만인 존재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그러나 수많은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나 ‘나와 너’, ‘타인과 타인’들만이 모여 사는 공동체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타인이며, 언제, 어느 때 그 야수의 발톱을 드러낼지 모르는 잠재적인 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주택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할 뿐, 영원한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익다툼과 영역다툼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부모형제가 따로 없으며, 오직 나 아니면 모두가 다 적으로만 존재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너무 가까이 해서도 안 되며, 너무 멀리 해서도 안 되며, 적당한 거리와 그 자유가 존재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아파트는 최악의 주거환경이며, 판문점의 널판지와도 같은 조각문화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널판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떠돌이-나그네들(난민들)의 집에 지나지 않으며, 이 떠돌이-나그네들에게는 공동체 의식과 애국심이 존재할 리가 없다. 아파트는 최소의 공간에 수많은 난민들을 살게 하는 개사육장과도 같으며, 한 마리의 개가 짖으면 모든 개들이 짖어대 듯이, 상호간의 경쟁심과 이기주의와 적대감이 극도로 표출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은 우리 아파트 주민들의 땅이지만,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라는 시구는 한 아파트의 이웃 주민으로 살면서도 상호간에 어떠한 통성명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웃과 이웃은 시시때때로 마주쳐도 “열대야에도 찬바람”이 부는 것처럼 차갑지만,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을 겨냥한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너무나도 차갑고 싸늘에게 그 이웃의 동태를 살핀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생각했을까?/ 잠시 딴청을 피우지만” 그러나 그 거울을 통해 그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문화적 수준을 살피게 된다.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스친다.
박용숙 시인의 [공동경비구역]은 대한민국의 분단현실과 자본주의 사회의 아파트 주거공간을 대비시키고, 아파트의 주거공간이 남북분단의 구조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있게 역사 철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남북분단은 주권의 상실에 의한 찢김에 속하고, 아파트의 주거공간은 공동체 의식의 상실에 의한 찢김에 속한다. 주권을 상실하면 민족이 분열되고, 민족이 분열되면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상호간에 무차별적인 적대감과 이기적인 발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 땅-우리 주권’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아닌 공동경비구역이 되고, 아파트 주민들의 공동 소유인 엘리베이터 공간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아닌 공동경비구역이 된단 말인가? ‘우리 땅-우리 영토’를 지키지 못한 주권의 상실이 우리 한국인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갈갈이 찢어놓고, 그 결과, 남북통일이란 대과제를 망각한 채, 마치 분단의 축복처럼, 아파트의 주거공간마저도 상호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넣는다. 날이면 날마다 마주치면서도 모른 체 하고, 상호간에 곁눈질과 째려봄으로써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문화적 수준을 정탐하며, 호시탐탐 그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짐승의 시간을 살게 된다. 박용숙 시인의 [공동경비구역]은 대한민국의 국민과 시민들이 떠돌이-나그네처럼 판잣집을 짓고, 상호간에 무차별적인 적대감을 지니고 개처럼 으르렁 대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양의 문화선진국의 집은 천년, 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집은 떠돌이-나그네들의 판잣집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는 ‘떠돌이-나그네들의 판잣집’이고, 개집이고, 불과 몇 십년이 지나면 사라질 모래성과도 같다. 판문접은 대한민국의 판잣집을 대표하며, 바로 그곳에는 대한민국의 국가의 목표와 역사와 전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떠돌이-나그네들’이 살아간다.
박용숙 시인은 남북분단의 비극과 민족과 시민의 분열의 한을 품은 채, 이렇게 묻는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학문 중의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고, ‘고급문화인’, 즉,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고, 그 앎을 통하여 전인류를 감동시킨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치욕인 판문점과 공동경비구역도 사라지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집들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박용숙 시인의 [공동경비구역]은 그의 역사철학과 사회학과 심리학의 산물이자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의 염원을 노래한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