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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년(광종 25) '소요산'이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
서화담, 양달래, 매월당 등이 자주 소요해.,'소요산'.
기록 상으론.,'백운거사' 이규보가 남긴 흔적이 많다
.
소요산(536m)은 일명 "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
1호선 소요산역에서 가깝고 동두천역에서 약 4㎞.
자재암을 가려면 소요산역, 공주봉 산행은 동두천역.
.
소요산은 진달래· 단풍· 두견과
폭포를 연상케 하는 꽃단풍산이며
소요(逍遙) 이름 그대로.,사색의 공간.
신라 중기 원효
(617년 ~ 686년)
자재무애(自在無碍)
수행처.,자재암(自在庵).
(654년 무열왕1년에 창건)
태상왕 이성계 원찰
소요사(현재 자재암).
그 아래.,행궁(行宮)지.
소요산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42km 거리.
주변에 한탄강유원지·왕방계곡·12계곡 등
서울 상봉 시외버스터미널에 버스가 있고
소요산의 서쪽으로는.,경원선이 지나간다.
소요산 입구에 청량폭포 및 원효폭포.
청량폭포 있는 곳.,하백운대(下白雲臺)
그 위쪽 원효폭포가 있는 곳을 중백운대.
원효폭포 주변에.,방음봉·이필봉·약수봉이 있다.
중백운대에 신라시대 원효가 세운 자재암(自在庵)
다시 그 위쪽으로 나한대·의상대 등을 거쳐 30m 돌층계
그곳을 오르면 원효대에 닿는데 이곳을 상백운대라 한다.
'상백운대 ~ 자재암'.,"선녀탕계곡" .
'원효와 裸女' 전설의 고향인듯 하다.
선녀폭포와 선녀탕 구간은.,위험지대.
.
원효가 자재암 수행 중
죽을 고비를 겪었다는 곳은
혹시, 선녀탕계곡이 아니었을까?
소요산 선녀탕계곡
선녀탕계곡~창말능선'
창말능선
.
산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한탄강,
남쪽으로 서울 방면의
산맥 전망이 매우 좋다.
원효폭포
수려한 자연경관과 많은 전설이 많은 명승지
첫 계곡을 올라 원효폭포가 있는 곳.,하백운대.
그 오른쪽에 원효가 앉아 고행을 했다는.,원효대.
원효대를 지나면 백운암(白雲庵)
백운암을 지나 더 오르면.,소요교.
소요교를 건너면., 자재암(自在庵).
자재암 앞 청량폭포를 품은.,중백운대.
옥로봉, 관음봉, 이필봉 등을 품고 있다.
옥로봉을 넘어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나한대, 의상대가 있는데 이곳이 상백운대.
또한 소요산에서 봄에는 철쭉축제가 열리고,
가을에는 단풍축제가 열려서 서울·경기 지역뿐
만아니라 전국적인 문화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소요산.,'공주봉 철쭉 & 자재암 단풍'
소요산이 위치한 동두천시
고구려시대 내을 매(內乙買)
또는 (內爾米)리고 불리었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백제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사천으로 변경하여
견성군(堅城郡, 포천군) 영현(領懸)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81) 양주에 예속되었고 조선시대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정(官制改正)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어 진이 두어졌다.
그당시 양주의 속현으로는
견주·풍양·사천이 있었으며
목의 34개 방리중의 하나인
이담이 동두천시의 근원이다.
.
원효가 소요산
자재암에 머물때
이곳 동두천시는
고구려 영역이었다.
당시 원효는 고구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억류되어 있었던걸까?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당시 원효는 신라에서 소외된 인물.
경주 요석궁에서 요석공주와 3일간 사랑.
그후, 고구려 영역인
이곳에서 수행한 원효.
'원효굴
원효샘
원효대
원효폭포' 등.
원효의 발자취들.
신라 기록에는 없다.
그후 백운거사 이규보
기록 속에서.,등장하는
고려시대의 지명들이다.
자칭 "백운(白雲)거사"
그는 어떠한 인물일까?
.................
.................
"광세(曠世)의 문인인가?
시대의 아부꾼인가? 이규보"
고려 시대 시인이자 철학자.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읊은 즉흥시가 유명.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떨어졌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충헌에게
등용되어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던 그.
이규보는 10여년 은거와 유랑 생활
32세 때에 비로소 권력을 쥐고 있던
최충헌 부자 눈에 띄어 벼슬에 올랐다.
그 때문에 한때는
권신의 압객(狎客)
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또 권신들의 무고와 배척을
받아 여러번 유배 생활을 했다.
한편 그는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국난을 피하는 것은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자진 종군 용맹을 떨쳤다.
1202년 남쪽 지방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자 나라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산관(散官)
즉, 직위만 있고 직무는 없던 관리와
과거의 급제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이때 이규보는 농민봉기를
진압하는 관군에 가담하여.,
병마녹사 겸 수제 관직을 제수.
그는 농민들을 진압과정에서
농촌 생활의 비참함과 사회의
갖가지 폐단들을 직접 목격했다.
3년 후 봉기를 진압하고
개선한 수많은 장정들이
너나 없이 논공행상 요구.
그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나기를 거듭하던 이규보는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자
백의의 산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 무렵 고려에서 작성하였던 수많은
외교문서들은 모두 그가 초안 잡은 것.
그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관직을 받고,
운명할 때까지 여러 고급 관직을 지냈다.
..............
..............
고려 문신 이규보
1168 ∼1241(고종 28).
그가 즐겨 찾았던 소요산.
소요산 자재암은
654년(무열왕 1)원효 창건
974년(광종 25)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한 암자.
그러나, 고려 문신
이규보가 찾기 전까지는
전혀 기록에 없었던..자재암.
그 이전까지
소요산 自在庵은
'원효대사와 裸女'
전설 만 전해왔던 곳.
소요산은 소요를 통해
오직,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상의 산실' 구도자 수행처.
관음신앙(觀音信仰) 산실이자
경기도 북부 '성리학 산실'이며
구도자들에게는.,깨달음의 산실.
.............주..............
고려시대 수도 개경에서
인접한.,동두천시 소요산.
현재, DMZ에 인접한 위치.
....................................
이규보는
어떤 이유로
소요산 자재암을
즐겨 찾았던 것일까?
저서에는 아들이 간행한
시문집 《동국이상국집》 등
미신과 관념론을 비판하고, 한국의
유물론적 사상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나기를 거듭
1231년, 원이 침입하자 백의 산관으로 전쟁에 참가
그 무렵 고려 외교문서들은 모두 그가 초안을 잡은 것.
그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관직을 돌려받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고급 관직을 지냈다.
..........
..........
"사람이 죽은 뒤 그 자손들이
막대한 재산을 낭비해가면서
장례와 제사에 공을 들이는 것은
생전 술 한잔 드리는 것보다 못하다."
.
"이 한몸이 죽어
백골이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자손들이
일년에 몇차례 무덤에 찾아와
절을 한다고 해서 죽은 자에게
과연, 무엇이 돌아가겠는가?"
아버지 이윤수는 개성에서
지방 관리를 지낸 사람이었고,
80여 노비를 거느린 부유한 가문,
어려서부터 '기동(奇童)'
이라 불렸다고 하는 그는
여러 가지 문헌을 두루 독파.
한 번 읽은 것은 잊지 않는 재사
고려 명종 때 이름난 유학자 오세재가
30년이나 손아래인 이규보와 교류했다는
사실은 그의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대변한다.
아버지 명에 따라 몇차례 소과(小科) 응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한시만을 좋아하고
의례적인 과거의 문체에 소홀해 계속 낙방했다.
23세가 되어서야 진사에 합격하지만
말과(末科)는 기피하여 중용되지 못했다.
그후 그는 오랫동안 천마산 등지에서 은거
오로지 독서와 책 쓰는 일에만 힘을 기울였다.
.
내 지금
산가를 찾은 것은
술을 마시고자 한뜻은
아니온데 올 때마다
술 자리를 베푸니
얼굴 두꺼운들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
스님의 인격이
높은 것은 오직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 때문이리.
.
장차 몽정의
좋은 차 잎을 따서
혜산의 물로 차를 달이니
차 한 잔에 이야기 한마디
점점 현묘한 경지에 들어가니
어찌 술에 혼취할 수 있을까.
.
詠井中月 / 우물 속의 달.
.
山僧貪月色 (산승탐월색) 산속 스님이 달빛을 탐하여
幷汲一甁中 (병급일병중)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담았네
到寺方應覺 (도사방응각) 절에 다다르면 비로소 깨달으리라.
甁傾月亦空 (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는 사실을.
‘영정중월(詠井中月)’ 곧
샘 속 달을 노래한다., 뜻.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
달빛을 사랑하는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충분히 실천한 분이련만, 그조차
욕심이요, 병 속의 가득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지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절묘한 표현이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도
혀를 내두를 만한 표현이다.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시(詩)를 지으며., 장자 사상에 심취
평생 그 자신 만의 길을 걸었던 이규보.
신라 중기 원효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는 '소요산 자재암'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는
이곳을 찾으면서
무엇을 얻었던걸까?
이규보가 살던 시대의 통치자들은
봉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한다'는 목적론적
신학과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참위설,
풍수지리설 등 미신 사상을 퍼뜨렸다.
또한 삼세윤회설이라든지 인과응보,
영혼 불멸과 같은 신비화된 불교 교리를
가지고 호국(護國), 호왕(護王)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미 내우외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한
13세기 고려는 미신, 불교 교리로
국운을 되돌리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규보는
원기일원론적(元氣一元論的)
자연관을 내놓았는데 말하자면
'삼라만상은 '음양 두 기가 혼돈하여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물질적 실체'인
원기에 의해 생겨나고 발전한다는 것.'
그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신학적 목적론이나 관념론적
신비론을 강력히 공박하고 나섰다.
그의 무신론 사상은
후대 사람들에 본보기
한국의 유물론 사상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다.
원효폭포
옥류천
소요산 설경
이규보
기록 속에
'속리(俗離)'
.
공주봉
소요산 자재암 찾아가는 길
1호선 소요산역에서 하차.
..........테마여행 DMZ 트레인..............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대치.
지구 상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 대한민국.
올해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해빙 무드.
2018년 10월 5일/한국일보
‘DMZ트레인’ 인기 대폭발이다.
주말 매진, 평일 이용객 또한 많다.
DMZ트레인은 6ㆍ25 전쟁의 역사와
비무장지대를 달리는 관광테마열차다.
경의선(용산~서울~문산~운천~임진강~도라산)
경원선(서울~청량리~의정부~동두천~소요산~연천)
이후 연천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연장 개통했지만, 현재는
거림천교 개량 공사로 신망리역~대광리역 구간은 운행중지.
................................................................................
2018.10.30
소요산 단풍축제
한탄강 지류.,'동두천'
장마철 피해 다발 지역.
.
동두천은 한양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생활권은 임진강을 통해.,개성과 연결.
조선시대 태상왕 이성계.
소요산에 반년간 머물다가
그뒤 천보산 회암사로 옮긴다.
.
'신라 ~조선'시대
옛 화려한 명성을
지닌 동두천 소요산.
2011년 여름 폭우에
산사태에도 불구하고.
재건한 복원력이 놀라운
1400년 고찰.,소요산 자재암.
2011.07.30
소요산 자재암.,
백년 만에 물폭탄.
.
2014.11.19 복원된.,자재암 전경
2014.11.19
2017.07.28
동두천시는 동두천 변을 중심으로
길게 시가지가 형성된 전략적 요충지.
예나 지금이나.,미군 주력부대 주둔지.
수도권 방어.,'최후의 보루'인
동두천시는 여근곡(女根谷) 지형.
동두천시 소요동은.,'여근곡' 산세.
...........소요동(逍遙洞)...........
경기도 동두천시 최북단.,소요동.
'연천군과 포천시' 경게선에 위치.
동두천시 북단 시청에서 1km
소요산((逍遙山)이 위치한 지역
남으로 보산동, 북으로 포천시 신북면
주로 주거지역과 농지지역으로 이뤄졌고
동두천지방산업단지, 상봉암지방산업단지
등이 입주하여 공업지역도 분포되어 있다.
국도 제3호선이 관통
동두천시의 관문으로서
자연녹지, 개발 제한지역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경원선 전철 개통 등으로 지속적인
인구유입이 예상되고 있는 지역이다.
................................................
경기도 북부 중앙에 있는., 동두천시.
6·25 때 미보병 7사단 주둔후 급속 성장.
기지촌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1960년부터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다가
1970년 이후에 미군부대 일부 철수 후 둔화.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충현탑, 현충탑, 벨기에·
룩셈부르크 참전기념탑, 노르웨이 참전기념비 등.
동두천시
면적 95.66㎢,
인구 98,194(2016).
..............
..............
974년 고려 제 4대 왕(광종 25)때
"소요산" 지명이 처음 기록에 등장.
특히, 매월당, 서화담, 양사언 등 소요.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사람들은 방랑 천재시인으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중 한사람으로
'선비였던 승려'이며 기행을 벌인 기인.
최초로 남녀간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작가.,매월당 김시습.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농민 고통을 대변한 저항 시인,
기일원론(氣一元論) 성리학자 김시습.
...........
............
조선 중기 성리학자 서경덕(徐敬德)
송도삼절 '황진이'와 일화(逸話) 유명.
서화담(1489~1546 )으로 더 알려졌다.
............
...........
양사언(1517 중종 12)∼1584 선조 17).
호는 봉래. 돈녕주부 희수의 아들이다.
양사언은 동생 사준(士俊)·사기와 더불어
3형제를 중국의 소순·소식·소철에 비유했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
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
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미인별곡'은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난 양사언.
'안평대군.·김구.·한호'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
.
동두천시 소요산 하백운대
상백운대,
중백운대,
하백운대.
'상 중 하'는
조선시대 명명된
지명들이 아닐까?
원래 '백운' 지명은
'백운거사'를 자처했던
고려 문인 '이규보'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고려~조선
당대 석학인
유학자 문인들이
즐겨 소요한 명승지.
그렇다고 하여
명명된 지명이
소요산(消遙山).
승유억불 조선시대에는
유림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소요산 사찰들은 핍박 받은듯.
조선 태상왕 이성계의 원찰이었던
소요사(자재암)가 폐사찰이 될 만큼.
6.25 때 포화로 소실된 소요산 자재암.
동두천시에서 4km거리.,소요산 자재암.
2018.09.07 소요산 자재암.
관리사무소 → 전망대 → 자재암 →
하백운대 → 칼바위능선 → 자재암 →
관리사무소 (총 6.5km 2시간 50분 소요)
소요산역에서 내려 출구로 나와
길을 건넌 후 오른편으로 걸으면,
왼편에 소요맛거리.,조금 더 걸으면
소요산 입구가 나오고 속리교를 지나
왼편으로 가면 자재암을 만날 수 있다.
....................................
자재암(주지 덕암스님)에서는
어르신 및 관광객에게 점심 제공.
...........................................
식사는 무료 공양
설겆이.,본인 해결.
자재암에는 폭포와 약수터가 있다.
커피자판기도 있어 한숨 돌릴 수 있다.
'자재암 ~ 상백운대'코스도 충분히 운동'
.
관리사무소에서 자재암까지는 평지
'자재암~하백운대'는 거친 오르막길.
칼바위능선은 생각보다 긴 데다 위험.
칼바위에서 선녀탕 입구까지는
내리막 돌길이여서 무난하지만
자재암 가까이는.,짧지만 힘든 길.
.
............소요산 입장료...............
소요산의 95%가 자재암 소유 사유지
동두천시와는 토지 사용 등 협약 체결.
동두천시에서 소요산 개발시
토지를 무상 사용하기로 동의
동두천 시민 문화재관람료 면제
.
등산객들에게는
입장료 1000원씩
......................
.
'소요산 자재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
.
경주 요석궁에서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3일 동안의.,러브 스토리.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에,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고
원효가 그리워 소요산에 정착.
구도자 원효가 득도하길
매일 염원했던 곳이.,공주봉.
그러한 애틋한 설화가 전한다.
오늘날, 소요산 공주봉은
경기도 북부지역.,일출 명소.
.
창말코스
소요산 공주봉 치마바위
공주봉 치마바위.,로프 구간.
공주봉 창말능선
공주봉 정상
공주봉에서 바라본.,소요산
........태상왕 이성계의 말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세운.,조선.
새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성계는 세자 책봉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58세였기 때문에
세자(世子)를 세우는 일이 급했다.
이성계에게는 첫부인
한씨 소생의 여섯 아들과
왕비인 강씨 소생의 2 아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해에
죽은 한씨의 아들들은 모두 장성
반면, 왕비 강씨의 아들들은 어렸다.
이성계는 강씨 소생 막내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왕비 강씨와
그당시 당대 최고 권력을 지닌 정도전
2사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이뤄진 일.
이것은 장자 원칙도 아니요,
건국에 기여한 공도 배제된
한씨 아들들의 불만이 컸다.
특히 건국에 공이 큰
5남인 이방원의 반발.
결국, 이 일은 이성계
말년에.,'불행의 씨앗'.
1398년(태조 6), 이방원과 형제들은
왕자들의 사병 혁파를 추진하던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고 이때 이성계는
왕비 강씨의 병사로 시름에 빠져 몸져누워 있었다.
이방원은
세자 이방석과
그 형 이방번을
유배 후 죽였다.
졸지에 아들 둘을 잃은 이성계는
큰 슬픔에 빠져 정사에 뜻을 잃고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은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이전
그곳에서 넷째 형 이방간의 난으로
다시 형제 간 골육상쟁.,'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못마땅했던 태조는 서울을 떠나 소요산,
함주 등에 머물며 사냥과 불공으로 소요.
함주에서 이성계는
안변부사 조사의와 함께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 운명.
조선은 무장 이성계가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태종 이후 문치주의로 돌아서
정계에서 무장들의 지위가 크게 약화.
농사를 근본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 나라' 조선은 국방력이 약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존명사대(尊明事大)
외교적인 노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
태조 7년(1398년) 8월., 64세인 태조가 위독.
왕자들은 모두 궐로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방원은 태조의 위독함을 빙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한씨부인 아들들을 제거하려 한다 판단
이를 계기로 방원은 정도전 일파를 역습하여 제거
강씨부인 소생의 이복 아우 방번, 방석(芳碩)도 제거.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인데 이는 정도전 세력과
이방원 세력의 양대세력 간에 권력다툼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주유천하(周遊天下) 세월.
어느 날 백운사 노승 신강(信剛)이 알현.
이태조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방번, 방석이가 모두 죽었소,
내 비록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료
(芳蕃、芳碩俱死矣. 予雖欲忘, 不可得也).”
그 많은 전쟁터에서 죽이고 죽는 삶을 살아 온
그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성거산 관음굴, 평주 온천, 낙산사, 보개산으로,
정릉사로, 안변 석왕사로, 금강산 유점사로….
그러다가 방원이 왕위를 이어 받은
태종 1년(1401년) 11월 아예 짐싸들고
이 곳 소요산(逍遙山)으로 들어온 태조,
그날 실록기록.
‘中夜, 太上王幸逍遙山.
上欲送于門外, 不及’
(한밤중에 태조가 소요산으로 갔다.
태종이 문밖에서 전송하려했으나 못 미쳤다).
이렇게 해서 태조 이성계 소요산 생활이
다음해 6월까지 약 8개월 간 계속되었다.
하루 이틀이야
소요사(逍遙寺)에
머무를 수 있겠으나
여러 날은 어려운 일.
태조는 궁중에서 문안차 나온 신하에게
절 아래에 집을 짓고 머무르겠다고 한다.
핑계는 훌륭한 스님이 있어서였다
(此寺有名師, 欲於寺下營室居之).
이때가 엄동설한 한겨울이니
노복과 가까운 지역 백성들을
징발했는데 고생이 많았다.
태종2년(1402년) 3월 9일
별전(別殿)이 지어졌다
(太上王營別殿于逍遙山下).
태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손님을 접대할 전(殿) 한 채를 더
짓고자 하였기에 한 채가 더 지어졌다.
소요사 아랫녘에
작은 규모의 두 전(殿)이
지어졌는데 현재 ‘이태조별궁지’
표석이 서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다.
현종 때 남인 영수로 노론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운 미수 허목(眉叟 許穆).
고향 연천 가는 길에 소요산에 들렸다.
이때 쓴 소요산기(逍遙山記)
미수기언(眉叟 記言)에 기록.
골짜기 입구 안팎 산 아랫사람들이 전하길,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있는데 우거진 숲 속에
두어 층의 층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영락
(永樂: 명 성조/明 成祖 연호) 때 태상왕의 행궁.
…중략…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
(谷口內外山下人相傳。‘王宮遺墟二處。
荒草中有石砌數重而已。此永樂間太上行宮云
…중략… 宮墟上有瀑布…’).” 실록과 소요산기를
종합해 보면 별궁은 두 곳으로 (소요사, 현재 자재암)
아래 더 구체적으로는 폭포(원효폭포) 아래쪽이 된다.
그렇다면 원효폭포 아래쪽에
유허(遺墟)가 있었다는 말이다.
.
..............이태조행궁지.............
조선 태조의 행궁이 세워졌던 자리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1 소요산.
태조는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동안 한양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咸州; 지금 함흥)에 머물렀다.
‘이태조행궁지’란 태조가 함주로 떠나기 전
소요산에 있을 때 거처했던 별궁지를 말한다.
조선 중기문신 미수 허목(1595~1682)은
‘소요산기(逍遙山記)’에서 ‘그 골짜기 입구
안팎의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길
왕궁 옛터 2곳이 우거진 숲 속에 두어 층계만
남았으니 태상왕(太上王)의 행궁이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자식들의 골육상잔을 피해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요산 은둔
태조는 다음해 7월 8일까지 머물다
6월 9일 천보산 회암사로 옮겨 머문다.
허목은 현종4년(1663)에
소요산기를 지었는데 여기에
요석공주 집터, 이태조 궁지가
있다고 기록했는데 조선태조가
이곳에 왕궁을 짓고 산 것은 사실.
태조(1335~1408)는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왕조를 새로 열었다.
1394년 4월 고려 마지막왕이였던
공양왕 부자를 비롯하여 고려왕조의
후예들을 모두 살해하는 일을 행한다.
그리고 그해 8월에 한양으로 천도.
이 참혹한 만행의 과보인지 태조는
감당하기 힘든 참경을 당하게 된다.
자식들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서로 살육하는 골육상잔의 참극.
.
태조 7년(1398년)8월 26일
제 5왕자 방원이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 제 7왕자 방석과
제 8왕자 왕세자 방법, 동복매부인
흥안군 이제를 살해하였다.
이에 태조는
왕위를 방번에게 정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게 되는데
정종원년 방원과 제 4왕자 방간이
난투를 벌여 방간이 유배당하자
정종은 한양의 지세가 불길해서
그렇다 하여 그해 3월 7일에 바로
구도 개성으로 환도해버린다.
이렇게 되니 태조는
자신이 버리고 떠난
개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 숨으려 한다.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자. 과부가 된
막내공주 이제의 처 경순공주를
비구니로 만들고 한양의 흥천사에서
신덕왕후를 비롯하여 방원에게 살해된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사위 등
자신이 죽인 전조 왕씨들을 위해
수륙제를 베풀어 천도하는
대참회 불사를 거행한다.
그리고 오대산, 보개산,
금강산으로 떠돌며 비명에 간
고혼들을 천도하며 소일하다가
드디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옛 친구인 성석린 등이
귀환을 권유하여 환도하다가 결국
한양 가까운 소요산으로 숨어버린다.
태조는 거처할 왕궁을 세웠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 11권
양주목 건치 연혁에 의하면 태종이
소요산을 5번이나 찾아 뵙고 18번이나
신하를 시켜 문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요산 별궁은
4년 8개월 유지.
.........................
태조별궁지 위치가 명확치 않으나
1988년 이필성 사진첩 행궁터를 보면
행궁터가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
앞에 있는 상봉암동 130~131번지 논밭이
인근 노인들이 이곳이 궁터, 궁터라 했다.
그러므로 행궁지가 바로
상봉암동 130~131번지가
정확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위치나 지형적으로 보아서도
틀림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곳 500m이내에는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 참전비,
독립투사 홍덕문 선생비,
독립유공자추모비, 반공위령탑,
월남참전기념비, 노르웨이 참전 기념비,
그리고 자유수호 전쟁박물관이 있어
연계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주....................
소요산 관광지원센터 반대편
산쪽에 있는 자유수호평화박물관.
6.25 무렵 사용했던 탱크, 장갑차,
함포, 각종 포, 비행기 등과 참전
16개국 참전비가 미니어처로 전시.
이곳에서 눈길을 끈 것은
박물관 건물 앞 오른쪽 끝에
서 있는 두 문인석(文人石)이다.
특이하게 어유소(魚有昭) 장군
사패지(賜牌地) 경계석.,안내판.
사패지 경계석이라면
금표비(禁標碑)가 일반적인데
어찌 문인석으로 경계를 삼았을까?
...............................................
어유소 장군은 남이장군과 동시대 무장
남이 장군과 함께 이시애의 난 평정에 큰공
어유소는 좌장군, 남이는 우장군으로 여진 정벌
장군답게 영평(永平: 포천 동두천 지역)
함정현 활터에서 성종을 모시다가 과로로
급서(急逝)했으니 장군의 나이 56세였다.
남이에 비해 쉽게 잊힌
장군의 이름이 아쉽다.
이곳을 내려와 다시
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그림도 붙인
요석공원을 만난다.
원효가 관음보살을 만나 깨우침을 얻어
자재암(소요사)을 창건했다는 설화(說話)를
구체화한 요석공원은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이곳에 와 별궁을 짓고 살았다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설화를 살려
요석공주가 살았다는
요석궁지(瑤石宮址) 표지석.
이 공터 좌측 산 쪽으로 작은 공터
이곳에 옛날 기와 파편이 수습된다.
다시 앞으로 100m 정도 나아가면
산언덕에 작은 공터와 벤치 두 개
이곳도 옛 기와 파편이 수습된 곳.
두 곳은 이태조별궁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요산에 4개 절이 소개
중대암(中臺菴),
백운암(白雲菴),
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안타깝게도 자재암(소요사)를
제외하고는 위치를 알 수 없다.
미수 선생의 소요산기에도
4개 절 이름이 거론되었다.
중대 쪽 큰 절터,
소요사,
현암(懸庵),
사자암(獅子庵).
108 나무계단을 오르면 해탈문.
머리맡에 종을 매달아 놓았는데
종을 울리면 해탈의 경지로 入門
해탈문 앞에
그 옛날 원효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
이곳을 지나면 1978년에
열반한 추담선사부토탑.
그 앞으로 층계를 오르면
자재암(自在庵)에 이른다.
조선시대 세종실록 기록에는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 시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
이로보아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에 전한다.
이에 의하면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
'같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ㆍ만월보전ㆍ독성각ㆍ
산신각ㆍ별원(別院) 등 모두 44칸을 중창 하였다.'
1907년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
1909년 성파(性坡)스님과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
절의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
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에 전한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소실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 삼성각, 1982년 일주문을 건축.
1984년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 개원
1983~1985년 중창하여 지금 사격을 갖추었다.
2018년 현재 '조계종 소요산 관음도량 자재암'
.
거주지 서울 60/70대 연령층에게
적절한 2 ~ 3시간 등산 코스는.,?
.
소요산입구 매표소-일주문-백운암-자재암
-옥류동-선녀탕-청량폭포-원효폭포-일주문
-매표소-전철역(천천히 걸으면 2~3시간 소요).
974년(광종 25)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서화담양달래 &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여 소요산.
..................소요산(逍遙山)....................
소요산 입구에 청량폭포(淸凉瀑布) 및 원효폭포
청량폭포가 있는 곳을 하백운대(下白雲臺)라 하고
그 위쪽의 원효폭포가 있는 곳을 중백운대라고 한다.
원효폭포 주변에 방음봉·이필봉·약수봉 등.
중백운대에는 원효가 세운 자재암(自在庵)
다시 그 위쪽으로 나한대·의상대 등을 거쳐
30m 쯤 돌층계를 오르면.,상백운대(원효대)
산의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한탄강이,
남쪽으로는 서울 방면 산맥 전망이 매우 좋다.
............................................................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은
원효의 화정사상(和諍思想).
모든 대립적인 이론들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
신라의 원광(圓光). 자장(慈藏)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중엽 승려인 원효(元曉)가 집대성했다
원효가 화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신라의 불교 이론들이 다양해 논쟁이 격심한 탓.
각각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이론만이 옳다고 주장
다른 이론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이론적인 상호모순 해결을 위한 화쟁의 방법
화쟁 대상은 그 시대에 나타났던 모든 불교 이론들.
논리적 근거는 평등하고 차별없는 일심(一心)에 두었다.
또한 화쟁은 언어적으로 표현된 이론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언어에 대한 이해를 필요
원효 - "진리를 전달하고자 말을 사용하지만
말과 진리가 고정적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다."
"언어를 다만 진리의 전달 도구로 사용할 뿐이라
말은 도구성일뿐 이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
말은 진리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왜곡시키기도 한다는.,이중적 속성
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 이론에 집착을 막아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원효는 극단을 버리고
긍정과 부정을 자유자재로 하며, 경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통해 구체적인 화쟁을 전개했다.
우선적 화쟁 방법은 말의 한계를 지적하고
부정을 통하여 집착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부정 만으로 집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정은 다시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가기 쉽다.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의 극단을 떠나게 되면,
긍정과 부정을 자유로이 오고 갈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기초는 불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
어느 한 가지의 경전에 집착하지 않고
두루 불경의 내용을 이해하여 폭넓은 시각을
가짐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 와 요석공주........
진평왕 39년 압랑군 남쪽 불지촌
율곡 사라수 밑에서 태어난.,원효.
어머니가 원효를 가졌을 때
별똥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
해산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렇게 태어난 원효는 총명하고 영리
청년이 된 원효대사는 29세에 출가하여
영축 산 남지, 훙류낫 연기, 반용산 보덕 등을
찾아 수행하다가 34세에 당 유학을 떠나려 한다.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잠들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깨닫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
이후 원효는 당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한다.
원효 이름이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
어느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원효의 노래를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리며
신하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 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한다.
저 편에서 관리들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원효를 건져
요석궁으로 데리고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며
옷을 벗고 요석궁에서 머문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고
공주가 아이를 낳았으니.,훗날 대학자 설총.
설총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를 만들어서
그 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당시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했다.
원효대사는 파계해 설총을 낳은 후로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라 했다. 또 광대들이
가지고 다니는 둥근 박에 여러 가지 도구를
장엄하여 무애라 이름 짓고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염불하였으므로 가난 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모두 부처를 알게 되었고
아이들도"나무아미타불"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는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라는 법명은
부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다.
뜻말인데, 원효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때
참으로 그가 이름대로 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 아니라 화엄경과 금강산매경
해설로 후세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원효의 저술 활동을
남은 여생 동안 도우며
후원하였다는.,요석공주.
..................................
원효(617~686)와
요석공주의 사랑은
사실일까? 허구일까?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올 것을.,"
원효는 압량(경산 자인)에서 출생
아버지 담내가 신라 16관등 중 11위.
나마(奈麻)여서 신분이 6두품이었다.
반면 요석공주는 진골이었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오랜 세월동안 세상에 회자되어 왔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부
돌기둥에 새겨진.,'天主'
지리산.,,'천왕봉 & 일월대'
소요산 공주봉
'신년 해맞이' 풍습
원효의 무애(無碍)사상.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참 자유인의 삶.'
경기 북부 '일출 명소'.,소요산 공주봉.
....................동두천................
동두천시는 조선시대 양주목 이담면.
양주목 이담면과 현내면은.,옛 사천현
사천현은 본래 백제의 '내을매현'인데,
통일신라 757년 사천현으로 이름을 개명.
견성군(포천) 영현.,1018년에는 양주목 속현.
1914년 군면 폐합 때.,'양주군 이담면'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6·25전쟁.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적한 농촌.
6·25때 미군 주둔 이후 기지촌으로 발달.
주둔 미군이 유지 또는 증가되었던 1960년대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였으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미군 일부 철수 후에., 인구증가 둔화
1980년에 6만 165명이던 인구
1989년 7만 1,239명(18.4% 증가)
2006년 인구이동은 전입이 2만 348명,
전출이 1만 7,523명으로 전입이 많으며,
전입인구 중에는 도내 전입이 많았다.
행정·상업·문화의 중심지로서
도시적 경관이 뚜렷한 생연동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취락은
주요 도로와 강화천 따라 입지.
그러나 동부의 일부
산지에는 산촌도 분포.
.............................
2016.01.18 소요산 공주봉 해맞이.
경기도 북부 중심.,동두천시 소요산.
언제부터 신년 일출 명소가 되었을까?
원효가 소요산 자재암 창건
구도자로서 수행에 정진할때
소요산까지 찾아온.,요석공주,
,,,,,,,,,,요석공주(瑤石公主)................
태종 무열왕과 보희부인(寶姬夫人)의 딸
김흠운(金歆運)과 원효(元曉)의 아내이다.
삼국사기 화랑세기에서는 원효와 만나기 전
김흠운에게 시집 갔으나 남편이 655년 백제
조천성(현재 옥천)을 공략하다가 전사했기에
일찌기 과부가 되었는데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둘째 딸이 자신의 누이이자
신라 30대 국왕인 김법민의 큰 아들
소명태자와 혼인하였으나 소명태자가
일찍 사망하여 시동생인 정명태자와 재혼
그후 정명태자는 훗날 31대 국왕인 신문왕이며
그녀는 신문왕의 비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원효는 40세 쯤 요석공주를 만났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태종이
원효가 길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에 의해 요석공주 남편 김흠운이 전사한 후
태종무열왕 집권기(655~660) 사이 일로 추측된다.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에게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마자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는데..이 일이 있던 그후에
공주가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고 전해온다.
...................................................................
.
원효가 경주 요석궁을 떠난 이후에
설총을 낳은 그녀는 원효가 너무 그리워
어린 아들 설총을 품에 안고 소요산을 찾는다.
'소요산 공주봉에서 기거하며
원효대에서 수행을 하는 원효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그녀 자신으로 인해 파계한 원효.
그래서, 원효는 더욱 뼈를 깍는 수행.
멀리서 남편의 고행을 지켜 본.,요석공주.
이미 속세를 떠난 원효.
아직 속세에 있는.,공주.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을 때보다
애틋하게 그리웠을듯.
'원효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아야 만 했던
요석공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요석공주가 남편
원효의 깨달음을
기도한 곳.,공주봉.
오늘날, 해맞이 명소.
1950년 6.25 전쟁 이후에
휴전선 남북 분단으로 인해
고향을 찾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았던..소요산.
'일출 명소' 공주봉은
소요산 최북단에 위치.
.
동두천시.,소요산
2018년 10월 말 현재
실향민들 분단의 아픔은
약 70여년 세월이 흘렀다.
실향민 2세대
실향민 3세대.
칼바위능선
선녀탕계곡
원효폭포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이 원효대사를 유혹했다는 곳.
그래서, 이곳 개울이.,옥녀천(玉女川)
옥녀천(玉女川)
.나녀(裸女)를 닮은.,원효폭포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
소요산 자재암 '원효폭포 & 원효굴'
공주봉 코스 -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아담한 폭포가 보인다.
원효대사가 원효대 고행 수도 중
자주 내려와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폭포 옆에 작은 동굴이 있어 신비롭다.
이런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 소요산은
‘경기의 금강산’ 감투까지 얻게 되었다.
동굴이 있는 바위 위는 '원효대'라 불린다.
원효대 코스 - 소요산에서 수도 하던 원효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살을 하려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문득 도를 깨우쳤다는 설화.
원효폭포에 가기전
우측에 속리교가 있다.
속리교 왼편은 자재암 코스
속리교 오른편은 공주봉 코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속리교.
.
지하철 1호선 소요산역 출구로 나와
길건너 소요맛거리를 걸어 통과한 후
조금만 걸으면 소요산 입구가 나오고
속리교를 지나 왼편으로 가면.,자재암.
마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될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
'自在(자재)'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곧,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 정신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위험에서 구제하는 보살.
‘모든 곳을 살피는 분’ ‘세상의 주인’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무렵
백제와 신라에서 신앙의 대상
통일신라 초기에 현실적인 이익
고려·조선시대 대중과 친근한 신앙
...............................................
화엄경(華嚴經)이란
세존이 이 경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어
광채를 발하며,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들이 비로자나불 세계를 드러내며 전개.
깨달음을 구하려고 발심(發心)한 중생이 곧 보살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 : ⓢvairocana)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비로자나불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화엄경》
《화엄경》을 바탕으로
당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
화엄(華嚴)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화엄종의 제1조는 두순(杜順, 557~640)
제2조는 지엄(智儼), 제3조가 현수 법장.
화엄학의 핵심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모든 현상은 함께 의존하여 일어나,
걸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장엄한 세계라는 관점이 곧.,화엄학(華嚴學)
속리교 & 해탈문
108계단을 밟아야 해탈문에 이를 수 있다.
백팔번뇌 불교 가르침을 형상화한.,해탈문.
해탈문을 통과하면.,'나옹선사' 선시.,글귀.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원효폭포 & 원효굴.
나한전 옆에 우뚝 솟은 선바위.
그 아래 바위틈 사이에.,원효샘
봉선사와 그 말사를 기록한 봉선본말사지
원효가 주장자를 꼽아 솟은 샘물이 원효샘
고려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
이곳 샘물 맛을 보고 시를 읊었다.
'茶泉貯寒玉 酌飮味如乳'
‘茶샘에 옥 같이 찬물 고여
마셔 본 그 맛이 젖과 같구나
.
공주봉 샘터바위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인연 맺은 후
심신유곡인 이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신라 무열왕 1년(654)에 창건한.,자재암.
동두천시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두천시 소요산 자재암.
......................
......................
38선 접경지역
'분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두천시 & 소요산'.
동두천시는
6.25 한국전쟁
전략적인 요충지.
동두천시 & 소요산
'백제. 고구려 . 신라'
삼국시대부터., 격전지.
.
소요산 단풍축제
2009.11.02 소요산 단풍축제
2017.11.05 소요산 단풍축제
2017.11.05 소요산 단풍축제
소요산 단풍축제
원효는 34세 때 스스로 경전을 연구
수도에 정진하다가 당시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요동까지 갔다가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귀환하였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행 도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 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655~660, 즉 원효 나이 39~44세 사이에 일.
이 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
실계 뒤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했다.
어느날 광대가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 중 깨달은 바 있어,
광대 복장 후애 불교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 이치를 담은 것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 노랫가락
그 노래를 <무애가 無㝵歌>라 불렀다.
.
무애사상은 사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
“일체에 걸림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 허공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
事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
.....................
..........................
..........................
동두천은 경기도 북부 중앙으로 2/3가 산지
시 중심부에 추가령지구대가 남북으로 지나고,
동남쪽과 서북쪽은 500m up 고지, 서남쪽은 평야.
.
추가령지구대의 동쪽에 소요산(逍遙山, 536m)·
국사봉(754m)·왕방산(旺方山, 737m)이 포천시와,
서쪽 마차산(588m)이 양주시와, 남쪽에 칠봉산(506m)·
해룡산(海龍山, 661m)이., 양주·포천과 각각 경계를 이룬다.
.
추가령통곡을 따라 강화천(江華川)이 북진하여
한탄강에 흘러 들어가고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동두천을 비롯 많은 지류천은 산간계곡을 흘러
강화천에 흐르고 이들 주변에 계곡평야가 발달.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바 없지만
인근 연천군 전곡리·운탄리·중리·
장파리·남계리 등의 구석기유적지.
손도끼·가르개·외날찍개·쌍날찍개·
망치·긁개·찌르개·새김돌·석핵(石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동두천도
구석기시대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 지역은
백제 영토에 속했다.
475년(장수왕 63)경에는 고구려 영토.
551년(성왕 29) 나제동맹군이 한강 점령때
일시 백제영토로 757년(경덕왕 16) 신라 영토.
1970년대 동두천
1970년대 동두천
1970년대 동두천
1979년 발간
................시집 동두천(東豆川).,......................
1973년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시단에 ‘반시’ 동인으로 참여한 김명인의 첫 시집이다.
저자가 교사 생활을 했던 동두천 일대의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씌어진 시들이 대부분.
냉전과 산업화 시대에 미군 부대 주변
하층민들의 삶을 시적으로 투영함으로써,
당대 민초들의 고통을 시를 통해 보여주는
한편 민중들 삶에 무한한 애정을 담고 있다.
김명인 시인은 위의 시「동두천」에서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던 전쟁으로 인해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생겨난
혼혈아의 아픔을 시적 화자가 살아온 내력과
연결하면서 또 다른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어 벌어진 전쟁 상황과
그 후유증에서 발생될 수 밖에 없었던
혼혈아의 희망은 부유한 아버지의 나라,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당시 유일한 꿈.
그러나 대다수의 희망은
“더러운 그리움”만 뒤로한 채
현실의 “배고픈 고향”에 남겨질 뿐.
김명인의 유년의 그리움과 혼혈아의 그리움은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혼혈아인 그들도 그 자신의
유년과 같이,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유년의 허기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떠난후 기약이 없는
기다림 위에 “더러운 그리움”으로 덧입혀진다.
물론 “더러운 그리움”이 갖는 표면적인 의미는,
‘백의민족’ 또는 ‘단일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낸 민족적 순혈주의에 비추어볼 때 미군의 피가
섞여 있다는 뜻에서 ‘더러움’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아처럼 남겨진 혼혈아로서 부유한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뜻
그 이면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이념의 순혈주의를 강조하던 시대적
강박이 깊게 스며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그리움”은
개인적 차원의 정서적 그리움만이 아니라,
한국 전쟁 및 좌우 이념 대립에서 파생된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로서 한 시대가 호명하는 “더러운 그리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속의 미군과
기지촌 문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조명한 시집이다.
김명인 시인
.
..............동두천 전투................
1950.6.25~6.26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서울특별시 북쪽 17km의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이
김웅이 이끄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방어한 전투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25일의 동두천 전투 및 포천 전투
26일은 의정부 전투로 구별하기도 한다.
38선 경계 동두천·포천
그 후방인 의정부 지역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
제1·9연대(각각 동두천·포천 담당)와
포병·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전쟁 직전의 부대 개편과
기초훈련 실시로 2대 대대가 경비 담당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에 제1군단
(군단장 김웅) 2개 사단이 의정부 집중 공격
이같이 북한군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 투입한데
반하여 국군 측에서는 아무런
대비 없이 이와 맞섬으로써 전투
초기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갔다.
이 지역은, 경원 본도 3번 도로를 비롯
동측 43번과 서측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듯 남북으로 뻗힌 지형.
발발 당일,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은
포천 정면에 배치되어 영내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를 공격.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대대장 전순기 소령)는
북한군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평화로포천과
동두천대전으로부터 증원된 제2사단이 제7사단과
함께 북한군과 격돌하게 되어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 주력이 되었다.
.............................................................
2016.12.27 의정부지구 전투 기념비
.
'의정부 ~미아리'
2017.10.30
2018.02.08
2018.2.25 동두천시
소요산
경주시 오봉산(633m)
신평리.,여근곡(女根谷)
신라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전설 가운데 한 곳이다.
................주...................
신라의 선덕여왕 5년(636년)
백제군이 이 계곡에 숨어있다가
몰살 당했다는 경주 신평리 여근곡
옛 문헌에 여근곡이 옥문곡이라 표기.
..................................................
.
경주 오봉산 여근곡
경주 오봉산 여근곡
여근곡 옥문샘
.
..........경주 여근곡.,설화.......
636년 여름철 영묘사(靈廟寺) 앞
큰 연못인 옥문지(玉門池)에 난데없이
두꺼비들이 모여들어 싸우는 일이 생겼다.
모두 궁금히 여기는 가운데
선덕여왕이 해석하길 두꺼비의 눈이
성난 것같이 생겼으므로 병란이 날 조짐,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두 장군을 불러
2,000명의 군사를 주어 경주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의 복병을 치게 하였다.
'자인(玆仁)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
이곳에는 마곡산(馬谷山) 밑의
회곡치(回谷峙)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적으로 '전략적 요충지' 여근곡.
.
두 장군이 여근곡에 이르니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거느린
500여명의 복병이 있어 쉽게 물리쳤다.
이것은 옥문(玉門)을 여근(女根)으로 해석
여근은 음(陰)이므로 남근(男根)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토사한다는 음양설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
.....................................................................
경기도 동두천시
미군부대 현황
2007.11.22
2018.07.17 New 미군 더블백
70L 심마니.,백팩.
동두천 미군부대 내 골프장.
2018.10.15 동두천시
2018.09.20 동두천시.,국제 MTB 대회.
대한자전거연맹이 주최하고 동두천시 후원
세계적 산악자전거 대회로 발돋움하고 있는
‘동두천 왕방산 국제 MTB대회’ 10월 21일 개최.
대회는 크로스컨트리 방식
종합운동장 출발, 장림~해룡산~
오지재고개~왕방산~예래원~동점~
쇠목~어등산~종합운동장(35㎞ 구간)
초급자와 중급자 부문으로 나눠 진행된다.
.
2014.02.06
의정부로 수송되는
'미군 탱크 & 전투차량'
2016.07.14
동두천을 철수하는
미 전차대대 2-8 기병대.
.
2018.05.28 미군 특수부대원 & 개인장비
에필로그.
2018.10.01 오늘부터 DMZ 지뢰제거 개시
남북 군 당국이 지난 19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
1일부터 비무장지대(DMZ) 일대의 지뢰
제거작업 등 '평양 공동선언'의 첫 이행조치
합의서에 따르면, 남북 양측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비무장화를 10월1일부터 시작해
1개월 내로 완료하고, DMZ 시범적
공동유해발굴을 위해 이날부터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 등
폭발물 제거작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남북유해공동발굴 시범지역인
철원 '화살머리 고지' 내 지뢰 및
폭발물 제거작업은 11월말까지 진행
2018.07.09 DMZ 지뢰 제거 차량
2017.08.20 미래의 군용장비
6.25 전쟁 국군 사상자 1만5000여 명,
중공군 2만여 명이 백마고지에서 사망
그당시 시체를 치울 수가 없어 비가 오면
핏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서 피의 능선이었다.
포탄만 30여 만발이 떨어졌던 격전지.
위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산세.
6.25 최대 격전지 중 하나.,백마고지(395m).
'395고지'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한때 포격으로 1m 낮아져., 394고지.
전투기간 동안
'유엔군 항공기'
754회 출격 폭격
발사된 포탄은
아군 219,954 발
중공군 55,000발,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
적에게 뺏기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 하에 놓이게 되고,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부대의
병참선 도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고지 인근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었다.
10월 16일을 전승기념일로 삼아
매년 '민, 관, 군' 합동위령제 거행.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 처럼
보였기에 이후부터 '395고지'를 '백마고지'라 부르고,
이후부터 현재까지 9사단을 백마부대라 부르게 됐다.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한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중공군의 백마고지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 봉래호 수문 폭파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백마고지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으로 1개 대대 투입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 전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재탈환했으나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 공격을 받아 10일 간 12차례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포로.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 사상자.
.................................................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 격멸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백마부대)는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월남 파월부대로 선정되었다.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 캄란지역에서
백마부대는 부여된 작전임무 수행.
화살머리고지 전투
휴전 직전인
1953년 여름에,
철원의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281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
중공군 제73사단의 화살머리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도
방어를 위한 두 차례 방어전투를 치르면서
화살머리고지를 성공적으로 사수한 전투이다.
프랑스 대대가
철원 서북방 281고지를
방어 중 중공군과 전투로.
많은 병력 손해를 입으며
이 고지를 끝까지 확보하여
중공군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우측 국군 백마고지
방어에도 크게 기여.
태국기와 유엔기가 휘날리는.,화살고지
문대통령 프랑스 방문 타이밍 맞춰
화살고지 방문 중인 임종석 비서실장.
2018.10.10
빈센트 브룩스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어제(9일)
비무장지대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를 방문
유엔사가 오늘(10일) 밝혔습니다.
브룩스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화살머리고지에서의 지뢰제거와
공동유해발굴에 대해 "역사적인
화살머리고지로 향하는 길목을
개척하려는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브룩스 사령관 "많은 남북 합의 사안
중에서도 이 조치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장병들의 유해발굴을 가능하게 함으로 중요하다"
"화살머리고지 주위에는
다른 국가 장병들의 유해도 있으며,
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사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엔사도 보도자료를 통해
"지뢰제거 작업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세 번째
정상회담 후에 남북 국방장관이 서명한
군사분야 합의서의 일환으로 유해발굴
프로젝트가 이어진다"며 "지뢰제거 작업은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안전한 접근성을 확보하고
군사긴장 완화와 우발적인 충돌 예방,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2018.10.25.
201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