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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1월 신안유물 발굴 현장.
신안앞바다는 오랜 세월의 격랑 속에서도
해저의 난파선을 품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난파선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이 실렸는지
무려, 650년간 비밀을 간직한채 놓아주지 않았다.
1975년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린.,도자기 6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집에 보관하다가
신고했는데 이게 아주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상 최대 신안해저유물 탐사.
1976년 10월11일 발굴조사위가 출범했지만
수중 발굴 기술이나 경험이 없어 작업은 험난.
선박 위치를 못 찾고 헤매다가 이미 치고 빠졌던
도굴꾼들의 협조로 수중발굴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양은 해군 SSU대원의 몫.
그들의 헌신이 심연의 해저에서 기적을 일궜다.
1984년까지 8년간 10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바다 만 알고 있었던 비밀의 실타래가 풀렸다.
이 배는 1323년 원나라 경원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을 떠나
일본 하카타로 가는 무역선이었다.
도자기 2만2000점 ,동전 28톤 800만개
등 진귀한 유물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신안보물선 동전 800만개.
신안군 증도.,보물선 카페.
1323년 그당시
동아시아 교역과
문화교류를 밝혀줄
타임 캡슐이 열린 것.
많은 사람들의 기다림과 사연을 품었던 비운의 무역선.
바닷속 깊은 잠을 깨운 행운은 우리에겐 굴러온 복이었다.
굳이, 그 유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한다면, 약 1조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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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말기에 양자강 하구의 경원항을 떠났던 보물선.
650년이 지난 1975년 5월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례.
한 어부에 의해 알려진 그 사건은 고려 충숙왕 때의 일.
전남 서해안 다도해 임자도를 4km 남겨두고 침몰한 보물선.
1270 년 영광군으로 바뀐 후 154년 동안 임자도는 무인도였다.
경원항은 당시 원나라의 광주 천주 복주와 아울러 국제 무역항
신안은 고려, 원나라, 왜를 연결하는 성공 확률 50%의 뱃길.
하여. 당시 해상무역의 이윤은 목숨 걸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6월 MBC가 복원한 19 일간 3000km의 뗏목 대장정 항로.
역시, 경원항을 떠나 서해를 지나
임자도를 거쳐 일본 후쿠오카 항.
1975 년 5월 임자도 어민들이 발견한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선이 발견된 지점은 (북위 35.1.15 동경 126.5.6) 수심 평균 20m
인양된 200톤 급 중국 보물선 선체 길이는 28.4m 폭 6.6m의 대형 상선.
.
발견된 유물은 토기류 20,661.
금속기 729. 석제품 43. 동전 등.
약 28 t 무게에 상당하는 문화재 급.
사실, 보물선이 발견 전에도 어부 그물에 걸린 청자와 백자들.
어부들은 보물인줄 모르고 바다에 버렸거나 개밥그릇으로 사용.
개밥그릇이 보물인 사실을 알고 도굴단이 처음 보물선 인양 시도.
그로부터. 한참 지난 이후에야 비로서
문화제 관리당국이 보물선을 인양했다.
서울대 최향순 교수는 배수량 260톤 급, 시속 8 노트 배로 추정.
배수량은 <물에 잠긴 선박 부피에 해당하는 물의 무게>를 말한다.
8 노트 = 1해리(1852m) x 8 (현재 통통배 수준, 당시 대형 쾌속선.)
길이 34m, 폭 11m, 깊이 3.8m 돛배로
현재,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나라 보물선이 당시 조난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충숙왕때 태풍속 대형상선은 전남 다도해로 배를 몰았다.
태풍에 밀려 최고 속도로 가장 가까운 임자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임자도 4km 남기고 침몰, 겨우 상륙한 선원들도 죽었다.
그당시 무인도.,임자도는
몇명의 생존자인 그들마저
그 누구도 구해 줄 수 없었다.
당시, 몽고군에 저항한 진도의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해
추토사 김방경은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했기 때문이다.
1270년 영광군으로 소속된 이후부터 154년간 임자도는 무인도.
'현재 중국 절강성의 항구도시'
'영파항'은 650년 전., 경원항이다.
원나라 말, 신안 보물선이 떠났던
중국 경원항은 그당시 국제 무역항.
경원항과 신안 왜를 연결한 항로는 선조들도 목숨 건 항로.
당시 교역이윤은 원가의 200 배 '황금항로' 였지만 성공율 50%
'중국~한반도 ~일본' 서해 항로는 위험해 해상무역 이윤이 컸던 곳.
그리하여, 탁월한 항해술과
축적된 조선 기술이 아니라면
안전하게 항해 할 수 없는 항로.
망망대해 지나 임자도 앞바다에서
위령제를 지낸 후 '후쿠오카 항' 行.
그러나, 임자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
'650년간 바다 밑에
잠들어 있었던 보물선.
전설 속에서 만 존재했다.
위령제 속에서 숨쉬던 전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1975년 5월에
전설 속 보물선이 실체를 드러냈다.
신안군 임자도 흑암리.,증도 앞바다
4km 지점에서 고기잡이배 어부가 발견.
국제적인 관심 속에 인양되고 복원되었다.
그로부터 '신안 보물선'이라고.,명명.
1976.10.26-1984.9.18 인양 복원되어 목포시 국립해양 유물전시관.
그당시 사회, 경제상, 국제 교역사, 조선술 및 공예미술의 연구자료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첫장을 연 해양발굴로 큰 획을 긋게 되었다.
신안군
신안군 드넓은 바다 밑 갯벌 속에는
얼마나 많은 해저유물이 묻혀 있을까?
그곳 뱃길 위로 무심히 다니는 고깃배들.
신안군
1만 2천년 전까지 육지였다는.,신안군.
현재, '1004의 섬'이라고 부르는.,도서지역.
그외 많은 섬들이 바다물 속에 잠겨 있으리라.
무인도서 수많은 암초들이 되어
바다 물 속에 그 자리에 남아있거나
또는 갯벌 밑에 잠겨, 숨 쉬고 있으리라.
신안군 지도읍.,지도(智島)
.......................지도(智島).................................
신안군 지도읍의 섬이며 한때 지도군의 군청이 있었다.
현재 무안군 해제면과 여러 다리와 갯벌로 이어져 육지화.
조선시대까지 신안군내 도서들은 월경지 형태로
나주·영광·부안·만경·무안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1896년 지방제도 개정 때
돌산군·완도군·지도군 신설.
서남해안 섬들을 소속시켰는데,
지금 신안군 섬들 대부분 지도군 속.
1914년 군면 폐합때 지도군 폐지,
지도군 소속 섬들과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에 편입되고,
군내면이 지도면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확대되어갔던 도서지역에 대한
중앙관서와 궁방들의 토지침탈은 일본의
식민지 시기까지 연장되어 토지분쟁을 야기.
1914년 하의도를 시작으로 1923년 암태도에서
거센 소작쟁의가 발생, 전국적으로 소작쟁의 확산.
1969년에 무안군 섬 지역을 분리하여 신안군을 신설.
1980년 지도면이 읍으로, 1983년 지도읍 증도출장소가
증도면으로, 하의면 상하태출장소가 신의면으로,
안좌면 팔금출장소가 팔금면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 밑
'신안해저유물'로 불리우는 중국 송·원대
1만여 점 도자기 등이 인양되어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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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지도읍.,전경.
1960년대 흑산도 예리항.,조기 파시.
'신안군 40년사' 화보
중에서.,흑산도 예리항.
1960년대 흑산도 시장 풍경.
오늘날.,고군산군도
군산 고군산군도는
새만금공사 완공으로.,
육지화(신시도 & 아미도).
고군산군도 인근에서 인양된.,해저 유물들.
고려시대 청자로 보물 가치가 있는 도자기들.
900년전 고려청자.,십이동파도 해저에서 발굴
2017.05.19
중앙일보 뉴스
신안앞바다에서
건져올린 고려청자
2900점을 한자리에서
1000여 년간 전북 군산 앞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던
고려청자 2900여 점이 전주 지역에서 처음 공개된다.
고려시대 도읍이자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 개경으로
가다 고군산군도 해역에 침몰한 배에서 발견된 도자기들.
- 국립전주박물관은 16일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전북 서해안 일대에서 발굴한 수중 문화재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오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연다”고 밝혔다.
.
‘침몰선에 실렸던 고려 사람들의 꿈’을
테마로 한 특별전은 2002년 4월 군산 비안도
인근에서 소라를 잡던 잠수부들이 청자를 발견.
이후 2003~2004년 군산 십이동파도,
2006~2009년 군산 야미도 등 15년간
전북 고군산군도 일대에서 발굴·조사한
수중 유물을 총망라했다.2002년 비안도에서
발굴한 고려청자 일부가 소개된 적은 있지만
2006년 이후 고군산군도에서 나온 유물까지
함께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려시대 때 중국을 잇는 무역항이었던
고군산군도는 선유도를 비롯해 야미도·
신시도·무녀도 등 63개 섬으로 이뤄졌다.
전북 지역의 수중 문화재 조사는
군산~김제~부안을 잇는 새만금
방조제(33.9㎞) 건설을 위한 대규모
물막이 공사로 인해 바닷속 물길이
바뀌면서 펄 속에 묻혀 있던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격화됐다.
그 결과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인
십이동파도선을 비롯해 고려청자와
닻돌, 철제 솥, 시루, 밧줄 등 1만5000
여 점의 유물이 빛을 봤다. 이 가운데
청자상감국화문합과 청자상감국화문잔 등
고려청자 2900여 점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아울러 10여 년간 보존 처리를 거친
십이동파도선 선체 일부와 나무로 만든
닻을 물속에 잘 가라앉히기 위해 매다는
닻돌 등 선상 생활용품 100여 점도 전시된다.
전시는 모두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동여도(東輿圖) 등 조선시대 고지도와
영국 해군장교 바실 홀(Basil Hall)이
1818년에 쓴 『조선 서해안과
류큐(琉球)도(오키나와) 탐사기』
등을 소개한다.
전북 지역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더불어 수중고고학과 수중문화재
조사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비안도와 십이동파도·야미도에서
건져낸 고려시대 유물이 전시된다.
전남 해남과 전북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구운 최상품의 도자기를 볼 수 있다.
2006년 취항 이후 야미도 발굴 현장 등에
투입된 국내 최초의 수중 문화재 발굴
전용선인 ‘씨뮤즈(Sea muse)호’(19t급)
모형도 전시된다.
3부에서는
고군산군도의 무녀도와
신시도·까막섬 등에서 주민들이
찾아낸 청동기시대 동경(청동거울)과
홍도(빨간 토기), 도자기 조각 등이 공개된다.
전시 기간에는 매주 목요일에 특별강연이 열린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의 ‘수중발굴
이야기’(5월 25일)를 시작으로 정진국 미술평론가의
‘바닷속에서 피어난 미술’(6월 1일), 곽장근 군산대 교수의
‘서긍항로와 군산도 영접’(6월 8일) 등의 강연이 진행된다.
장제근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특별전을 통해 전북 지역 수중
문화재의 가치를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2004년 6월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도
근해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
일부를 인양하고 있다.(사진 국립전주박물관)
1980년 신안 해저 유물발굴 이후
해양유물 박물관 필요성에 따라 건립된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國立海洋文化財硏究所)
목포시 남농로 136 (용해동 8)
문화재청 소속 산하 기관이다.
1993년 현재의 자리에 준공되면서
1994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출범.
이후 황해안에서 발견되는 고선박 및 유물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감당하면서 규모를 확장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신안선 모형을 중심으로 전시물 진열.
유물은 12세기 초 고려청자 원산지 강진에서
중국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면서 남은 유적들.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에서 인양한 고려항해선,
진도군 벽파진에서 인양된 세계 최대 통나무배 등
해양유적 뿐 아니라 그림, 서예 등
다양한 분야의 유적들을 기획 전시.
2008년 태안반도를 지나다 침몰한 배의 유적들.
'고려청자 보물선-강진, 태안'이란 이름으로 개최.
2009년 4월 27일 그동안 전시교육 기능을 유지.
수중문화재 조사연구 기능에 중점을 두기 위하여
기관 명칭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변경하였다.
전남 신안군은 유네스코(UNESCO) 생물권 보전지역.
14 읍면 중 4 면이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10 읍면이 추가 지정되면 전체가.,생물권 보전지역.
10 읍면의 면적은 총 3167㎢.
압해, 지도, 하의, 신의, 임자,
안좌, 암태, 팔금, 자은, 장산.
기존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 구역은
흑산, 비금, 도초, 증도면.,총 573.1㎢.
신안군 섬에는 으름난초, 나도풍란, 한란 등
희귀식물 자생지, 해안지역은 천연 갯벌이 가득.
1983년 보물선이 인양된 해저유적지.,신안 앞바다.
2009년 지정된 증도면은 연간 방문객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
지정 전, 37만3000명 방문객 수가 2010년 80만4000명으로 집계.
증도 농수특산품 연간 매출액도 814억 원에서 1238억 원으로 증가.
...........................신안군.............................
전남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서남단 해상에.,1004 섬.
지도읍 제외한 대부분 도서가 목포와 해상교통 연계.
동서간 79.3㎞, 남북간 65.3㎞로 넓게 펼쳐진.,신안군.
신안군 전체 면적은 654.7㎢
총인구는 44,427명(2014년 4월).
'유인도 72, 무인도 932'.,1004 섬
신안군 각 섬들은 높은산은 적지만
구릉성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편.
해방 전후 간척사업 농경지가 늘어나,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많다.
행정구역은 1읍 13개면 9출장소,
대표적인 섬으로는., 증도, 임자도.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 하의도,
신의도, 장산도, 안좌도,팔금도, 암태도, 압해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보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홍도가 유명하다.
동쪽으로는 목포 유달산을 바라보며 해남군 인접.
북쪽으로는 무안· 영광군이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진도군, 제주도 및 태평양
서쪽은 서해 건너 중국과 근거리.
기후는 사계절 기온 변화보다는
겨울과 여름으로 나눠진 계절 변화.
겨울에는 대륙성 기후.
여름에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시대 이 지역 섬들은
물아혜군, 도강군, 아차산군,
거지산현 등에 분속되어 있었다.
신라 병합 후 757년(경덕왕 16) 물아혜군은 무안군으로,
아차산군은 압해군로, 거지산현은 안파현으로 개칭되어
여러섬을 분령하였고,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안파현은
장산현으로 개칭되었으나 대체로 나주목과 영광군에 분속.
조선시대 대부분의 섬은 나주목, 무안군,
영광군, 진도현 등에 분속되어 있었으며,
독립된 행정치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682년(숙종 8)에 지도진을,
1810년(순조 10) 임자진을 두고
흑산도 등에도 진을 설치하였다.
1895년 관제 개혁으로 지도군을 신설해서
나주목, 영광군, 만경현, 부안군,광주군, 해남군,
진도군,무안군등에 분속된 지역을 16개면으로 설정.
1914년군면 폐합시 지도군이 폐지.
지도군과 완도, 진도군등에 속해 있던
팔금, 도초의 섬이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나머지 지역은 영광군과 전북 옥구군., 속.
1962년 도서 지역의 행정 구역에 약간의 변경이 있었고,
1969년 무안군 여러 섬을 분리,독립하여 신안군을 신설.
1980년에 지도면을 읍으로 승격시켰으며
지도, 무안, 해제 사이에 연륙공사를 완료.
지금도 섬과 섬을 연결하는 연도교 건설 중.
전남 도서지역 일대에 전승되는 '뺑돌이치기' 팽이놀이.
팽이 종류에는 뺑돌이, 활뺑돌이, 뺑이, 뺑오리 등 네종류.
뺑돌이는 지름 5㎝ 정도 통나무를 잘라 원추형으로 깎은 팽이.
활뺑돌이는 뺑돌이 두개를 얹은 모양.
이들은 주로 뜰에서 채로 쳐서 돌린다.
육각원추형에 1~6까지 숫자가 쓰여진 팽이는
뜰에서 치는 것이 아니고 방안에서 하는 내기용.
이밖에도 임자면의 연띄우기, 광대놀이,
앙감질하고 놀기 등의 민속 놀이가 있다.
전국 민요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 “장산도들노래”
문공부장관상
“가거도 멸치잡이노래”,
장산도 길쌈노래,
하의도 연자방아노래,
증도 화렴제작노래,
흑산도수리풍어제와 둥당기타령,
비금도 밤달애노리,
신의도 쟁풀이농악,
장산도 날받이 씻김굿.
군내 331개 마을에 당 수는 120개,
전체 마을의 37%가 당제를 지낸다.
섬 지방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당신과 그 신체가 매우다양하며
당신은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상당제와 하당제,
또는 상당제와 갯제(둑제).
이중제의는 흔히 볼 수 있다.
당제 지낼 때에는 가면놀이, 뜀뛰기, 씨름,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대부분 같이 한다.
주요 문화재 15개소 /국가지정 4, 지방지정 11.
..............................................................
신안군은 신석기시대까지 황해평원이었고
옛 황해평원의 높고 낮은.,산이었던 '1004 섬'.
지구온난화 및 대홍수로 바다물에 잠긴.,신안군.
신안군이 속한 황해평원은
언제 바다물 속에 잠긴걸까?'
'2만년전부터 1만1천년전'까지.,약 1만년에 걸쳐
동아시아 인류가 살았을 곳으로 추정되는.,황해평원.
"아스타"(Asta)는 아리안(Arian)의 古語로 고향을 의미.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나 이란에 이주한 민족.,'아리안.'
......................아리안족............................
인더스문명 몰락 후, 인도 대륙을 침입한.,아리안족.
인류 역사에 아리안 흔적이 나타난 시기는 BC 20세기.
약 4천년전 이들의 고향은 코카서스 남부 초원지대였다.
이들은 여느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초원을 따라
코카서스 거주지를 떠나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
'몽고~중앙아시아~ 티베트~돈황~고비사막~중국 북쪽'
히말라야 산맥과 마주치자 두 갈래로 갈라져 이동.
그중 한갈래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출했고
나머지 한갈래는 히말라야 산맥을 우회하여 서쪽으로 이동.
지중해 건너 유럽으로 진출한 유럽인 조상이.,아리안족.
인류학자들은 인도인과 유럽인은 같은 조상이라는.,결론.
고대 '실크로드 육로'는., 서양인 아리안족 민족대이동 경로.
.................................................................................
아스타(Asta).,뜻말.
'불의 나라', '신성한 곳',
'밝은 곳', '왕권이 있는 곳',
'아리안(Arian)'의 고향.,아스타(Asta)
고대 동아시아 저지대 '실크로드 항로'는
'아리안' 동양인들의 민족대이동 경로일까?
신석기시대 말, 지구온난화.
아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빙하가
태평양으로 흘러내리며 패인.,서해.
거대한 빙하군에 패인 물길들이 빚은 서해.
제4빙하기 말에 남북극 빙하까지 녹아 대홍수.
황해평야의 대한강(大漢江)이 서해바다로 변모.
한라산(漢拏山)은
'한수 漢, 당길 拏, 뫼 山'
'대한강(大漢江)을 당기는 산.'
1만2천년전~ 8천년전까지 황해평원에
바다물이 차오르며, 대한강 삼각주에 있던
마고지나(麻姑之那)왕국의 민족 대이동.,전설.
약 '14000년전∼12000년전'에
황해평야에 있었다는.,'마고지나'.
'한민족 최초의 왕국' 이라 전해온다.
대한강 해역은 .,고조선 영역.
그 조상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서해 상.,고대 항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
고조선(古朝鮮) 발생 직전에
사회상을 대변하는., 고인돌.
전세계 고인돌 중
2/3가 있는.,한반도.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의 구석기시대 유물들.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도 함께 발굴되었다.
약 1만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구석기시대.
B.C 6000년 경 인류에게 닥친.,재앙.
대홍수로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한 인류.
'하루밤 사이에 수십리씩 물에 잠기는 육지.'
지구온난화, 대홍수로 해수면이 급상승.
저지대민족들은 바다물에 쫓겨 민족대이동.
중국, 한반도, 일본 등 고지대로 흩어지기 시작.
한편, 갈증을 해소할, 눈 얼음이 곳곳에 있던 빙하기.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자 사정이 급변했다.
'히말라야 일대' 고지대민족들의 거주지도 비슷한 현상.
식수 제공원, 눈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 하천 따라 내려왔다.
그곳엔 먼저 온 사람도 있었고 나중에 온 사람들도 있었다.
서로 경계하며 강가에 움집을 짓고 함께 살게 되었다.
소수집단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바뀐다.
수만년 동안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 사용해왔던.,사람들.
집단생활을 하며 언어가 발달되고,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 채취 만으로는 좁은 지역에서.,함께 살 수 없었다.
새로운 생산 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이 등장 .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종교도 등장했다.
태양신이 숭배되었으나 그 권위는 점차 약해져 갔다.
씨족 집단 별로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민간신앙이 성행.
마제석기에 이어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며 생활이 급변.
청동기로 만든 검과 방패의 파괴력은 가공할만한 파괴력.
목검이나 돌칼 구석기인들은 청동검 신석기인들에게 참패.
청동거울 모양의 번쩍이는 방패와 청동방울 소리.
태양신이나 조상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려나갔다.
청동기인들이 서남 해안 육지로부터 섬으로 들어왔다.
임자도 청동기인들은 영광 쪽으로부터 건너와
장포만 일대에 거주한 흔적이.,지석묘(고인돌).
지석묘군은 임자도 내, 4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기록이 그 사실을.,대변.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사용된 패총.
고인돌은 지배계층 또는 가족 묘지나 공동 묘지.
B.C 300-400년 전 구산리 염동 패총의 발견으로
임자도에 처음 거주한 청동기인은 구산일대 거주
청동기시대 이후 특징으로는.,국가 정치권력 등장.
기원 전후로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
개울가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민족 대이동.
.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또 군신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여도간,차도간,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
산과 들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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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생활상을 정감있고 단아하게 표현한 글이다.
위 글은 신석기시대 무리의 규모에 대해 대변해준다.
1백호가 7만5000명이었다는 말은 1戶 씨족이 약 750명.
'10간이 1백호'란
'1간이 10호 씨족을
지배했던.,부족연맹체.
간은 부족장에 해당하며 1개의 부족은 약 7500명.
이것이 단군신화 이전 한반도 남단 신석기시대 모습
한반도 남단에 더 큰 부족연맹체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중 주목할 만한 경기, 충청, 전라지역.,마한.
마한은 여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것이 충청도 지역에 있던.,목지국.
목지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월지국'으로 기록.
중국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전반 마한연맹체의 주도세력.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 세력이었던.,목지국.
목지국의 위치는 인천,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
충청남도 직산(稷山), 예산(禮山), 아산만 일대 등지.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전북 익산.
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榮山江) 유역 등.
마한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 제사장인 천군
그리고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란 별읍을 두었다.
마한 소국의 일반민들은 초가지붕 반움집이나 귀틀집
괭이 낫 도끼 가래 자귀 등 목제 농기구를 이용
벼 오이 참외 박 호두 살구 등 밭농사를 지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마찰을 이용해 불을 피웠다.
가죽 신발을 신었고 해마다 5월 수릿날과
수확기인 10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
이 날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웁게 놀았다.
이 때 급격한 상황변화가 발생한다.
소국 중 하나가 팽창해 소국들을 접수
그 주역은 한강 유역에 자리잡았던.,백제.
결국, 마한은 백제의 철기문명 앞에 패하고 만다.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의 팽창 앞에 역부족이었다.
청동검 백제에 쫓겨 내려간.,마한 마제석검 유민들.
뒤늦게 청동기를 수입하고 힘을 키워 나갔으나
백제는 이미 철기문명까지 이룩한.,놀라운 성장.
결국, 마한은 백제의 철기문명 앞에 패하고 만다.
마한(馬韓)은 삼한시대 54개 부족국가 연맹체.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 충청· 전라남북도.
목지(目支)· 백제(伯濟) 등 54개국.,지역적 연합체.
백제는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 중심.,연합체.
결국, 백제(百濟)국이 마한 세력을 통일한 것.
마한의 72년간 피난도성은.,지리산 달궁(月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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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영산강 유역에는., 신미제국(新彌諸國)
낙동강 유역은 가야연맹(伽倻聯盟)이 장악했다.
낙동강(洛東江)은 가락(가야)의 동쪽 강이란 뜻.
반남면 일대 신미제국은 마한과 동일한 생활양식.
삼두리와 대기리 패총 옹관묘 조각이.,이를 뒷받침.
그물을 사용한,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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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마한 영역에 자신들의 행정구역 설치.
마한 서편 섬 지방도 백제의 통치권 내로 편입.
백제는 임자도 주위 섬들을 한 행정단위로 개편.
현(縣)이라 칭하는 말단 행정단위
이름은 고록지현(古祿只縣)이었다.
백제는 오늘날 신안군 지역에 고록지현 뿐만 아니라
아로현, 아차산현, 거지산현이라는 현도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구역 기본 골격은 백제 말까지 지속되었다.
신안군은 백제시대
백제 영역으로 정착.
백제는 국제무역이 성행했던.,동아시아 해상왕국.
당시 국제교류가 활발한 만큼 개방적인 백제 성풍속.
삼국시대 백제의 성풍속을 대변해주는..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隱 他密
只嫁良置古薯 乙薯房乙
密隱他置古薯 主夜矣
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는., 他(남다를 타) 密(빽빽할 밀)
只(성기) 嫁良置(가랑이) 乙薯房乙(샛 서방을)
密(몰래) 隱他置古薯(숨겨두고서) 날마다 밤마다
卯乙(아흐~) 抱遣去如(포개지어 거한다)"는.,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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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은 '서동요' 소문을 듣고 딸을 추방.
634년 백제 무왕은 선화공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정원' 부여 궁남지(宮南池).,조성
.
'서동' 무왕이 신라에서 시집 온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배를 띄우고 함께 놀았다고 전해온다.
백제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던 663년
임자도 해협은 일본이 빠져나간.,곳이다.
삼국시대 말, 멸망의 기로에 섰던 백제와 관련깊은 곳.
일본 원정군이 오고, 망국 백제유민들이 일본으로.,피난.
패망 백제왕실과 유민들이 통한의 눈물을 뿌린.,임자도 해협.
당은 10만 군사를 동원해 서해안 기습 상륙작전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배후 교란 카드로 활용
백제 멸망 무렵에 임자도 해협은 피난과 구국의 통로.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의하면,
663년 경, 임자도 해협은 오늘날보다
수심이 깊었고, 국제교류가 활발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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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반만년 전후에
저지대민족들이 민족대이동을 하여
하, 은, 주, 고조선 고대국가들이 출현.
저지대민족들은
대홍수 이전까지
어디에서 살았을까?
일본 오키나와 군도 요나구니(Yonaguni)섬 남단에
잠수부들이 해저층에서 건축물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사각 구조물, 거대한 평대, 길, 층계와 아치형 건축 등.
이것은 하나의 고성(古城) 유적 제단 같았는데
동서 200m, 남북 140m, 높이는 최고 26m 규모.
1986년 이곳을 ‘해저유적 잠수관광구’ 라 불렀다.
그후 오키나와 대학에서 ‘해저고고조사대’를 조직.
석환도 남쪽과 동서방 연안 해저까지.,8년 동안 조사.
약 3천년 전, 지진해일로 인해 해저에 잠겼던.,피라미트.
이어, 돌로 쌓은 각종건축, 둥근 구멍, 사람 머리조각,
아치형 석기 & 기하도형 바다거북 조각 등을 발견했다.
그외 +, V 등 글자 조각과, 76cm되는 소머리 조각을 발견.
유적지 주위에는 시가지, 농지도 있고
높이 25m, '암석 축성' 건축물도 보인다.
'오키나와 대학' 해저고고조사대가
컴퓨터 합성으로 입체도 제작 결과
사람들이 모여 제배하는 신전이었다.
신전 북면에는 2개 반원형 기둥모양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이 의식 거행 전, 목욕하는 곳으로 추정한다.
신전의 동방에는 아치형 성문이 있고
그 부근에 두 개의 중첩된 거석이 있다.
거석 위에는 사각형 인공으로 뚫은 구멍이 있는데
성의 보루용 초석으로 가공을 하기 위해 잘라낸 것.
그외에도 요나구니 동남해안에는 ‘입신석’ 이 있는데
그 아래 해저에 사람머리 조각은 얼굴과 오관이 뚜렷.
약간 뒤 ‘석비암’ 거석에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 조각.
오끼나와 대학 지질학과 기무라 마사키 교수는
1999년 9월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발표.
미국 보스톤 대학 쇼치(Robert Schoch) 교수도 잠수.
이 유적은 1m 높이 돌계단으로 조성한 계단식 피라미드.
런던 대학의 고고학자 모어(Jim Mower) 교수.
이 유적이 확실히 인조건물이라면 건축한 사람은
메소포타미아나 인디아 문명과 같은 문명 수준이다.
동경대학 해저연구소 테라우끼 이시이 교수
이 해역이 있는 육지가 지면에 노출된 시간은
적어도 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일이라고 말한다.
현대, 과학적인 인식으로 볼 때 만년전 인류가
빙하기에 남긴 건축물 유적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인류가 모르는 고대문명이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서부에서 발견된.,2만년전 피라미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대략 5천년 전에 건축.
인도네시아 피라미드는 이집트보다 오래된 피라미드로 보인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원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
지질학자 대니 힐만 박사는 9천년에서 2만년 전 것으로 추정.
현지 조사 전문가들은 최소한 BC 7천년 전 건축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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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서부 칸베이만 해저도시 유적
'8천년전~ 9500년전' 고대도시의 유적.
해수면 아래 40m 해저도시로
그당시 강흔적을 따라 9km에 걸쳐
고대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해저 유적.
우리나라.,해저유적
현재, 국내에서 해저 유적지는 삼백여 곳.
실제 발굴이 이뤄진 곳은 20곳에 불과하다.
바다 속에서 잠수부 작업 환경이 어려운 때문.
특히, 서해는 조류가 빠르고
바다물 속 시야가 흐리기 때문.
수중로봇 '크랩스터'를 세월호 현장에 투입한 결과
현재, 수중로봇을 이용하여, 해저유물을 탐사할 경우
해저 1m 갯펄 속까지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는 수심 6000m까지
내려갈 수 있는 '바다로봇'을 제작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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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1984년' 인양되었던 신안앞바다 보물선.
약 700년간 해저에 있다가 빛을 본.,송·원대 유물.
'임자도~증도' 해저 발굴 해역 인근의.,보물선 카페.
1층은 쉼터와 카페, 생선회를 맛볼 수 있는.,횟집.
2층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카페 앞바다에서 건진
청자, 백자 등 유물의 모형 170여 점을 전시되어 있다.
'1976년~1984년' 국내외 주목을 받았던 신안해저발굴.
14세기 무역선, 수만점 무역품을 인양한 성과를 거뒀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에서 무역품을 싣고
일본의 하카다와 교토로 향하던 국제무역선.
발굴지역인 '신안군'의 명칭을 따라.,'신안선.'
....................신안앞바다 보물선.........................
원나라 말기에 양자강 하구의 경원항을 떠났던 보물선.
650년이 지난 1975년 5월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례.
한 어부에 의해 알려진 그 사건은 고려 충숙왕 때 일이다.
전남 서해안 다도해 임자도를 4km 남겨두고 침몰한 보물선.
1270 년 영광군으로 바뀐 후 154년 동안 임자도는 무인도였다.
경원항은 당시 원나라의 광주 천주 복주와 아울러 국제 무역항
신안은 고려, 원나라, 왜를 잇는., 성공 확률 50% 뱃길.
그당시 해상무역의 이윤은 목숨 걸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6월 MBC가 복원한 19 일간 3000km의 뗏목 대장정 항로.
역시, 경원항을 떠나 서해를 지나 임자도를 거쳐 일본 후쿠오카 항.
1975 년 5월에 임자도 어민들이
발견한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선이 발견된 지점은 (북위 35.1.15 동경 126.5.6) 수심 평균 20m
인양된 200톤 급 중국 보물선 선체 길이는 28.4m 폭 6.6m의 대형 상선
발견된 유물들은 토기류 20,661. 금속기 729. 석제품 43. 동전 약 28 t. 등.
사실, 보물선이 발견 전에도
어부 그물에 걸린 청자와 백자들.
어부들은 보물인줄 모르고 바다에 버렸거나 개밥그릇으로 사용.
개밥그릇이 보물인 사실을 알고 도굴단이 처음 보물선 인양 시도.
나중에야 비로서, 문화재 관리당국이 앞장서서 보물선을 인양했다.
'원나라 보물선이 이곳에서
조난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충숙왕때 태풍속 대형상선은 전남 다도해로 배를 몰았다.
태풍에 밀려 최고 속도로 가장 가까운 임자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임자도 4km 남기고 침몰, 겨우 상륙한 선원들도 죽었다.
무인도였던 임자도는
몇명의 생존자인 그들마저
구해줄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당시, 몽고군에 저항한 진도의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해
추토사 김방경은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했기 때문이다.
1270년 영광군으로 소속된 이후부터 154년간 임자도는 무인도.
'현재 중국 절강성의 항구도시' 영파항은 650년전 경원항이다.
원나라 말에 신안 보물선이 떠났던 곳으로 그당시 국제 무역항.
경원항과 신안 왜를 연결한 항로는 한반도 선조들도 목숨건 항로.
당시 교역이윤은 원가의 200 배라 할만큼 황금항로지만 성공율 50%
망망대해를 지나 임자도 앞바다에서 위령제를 지낸 후, 후쿠오카 항구.
'650년간 바다 밑에
잠들어 있었던 보물선.'
위령제 속에서 숨쉬던 전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1975년 5월
임자도 흑암리 앞바다 4km 지점에서 고기잡이배 어부가 발견.
국제적인 관심 속에 인양 복원되어 신안 보물선이라고 명명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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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1004섬' 해역.,신안군.
한반도 고대역사의 산실이자 보고.
강화도에 버금가는 역사를 간직한 곳.
우리나라 고대항로 해역 중에서도
수많은 보물선과 해저유적지가 곳곳에
갯벌에 깊이 묻힌채 가장 많이 있다는 곳.
송나라 서적,도자기,예술품,비단,약재,향료,차 등이
이 해협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와 꽃이 핀.,고려 문화.
대각국사 의천은 이 해협을 통해 송나라로 유학.
1055년 출생한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중국 천태종이 들어와 해동 천태종으로 심화되었고
중국의 인쇄술이 들어와 고려 대장경을 목각하였고
송 인쇄술과 도자기 기술이 고려 상감청자 기술로 비약
조선시대에는 남부지방 세곡미가
신안군 해협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양곡이 이곳을 거쳐
북쪽 지방의 관군에게 군량미로 운반.,공급.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에서 왜함을 섬멸한 이곳.
신안군 칠전량해전 승리로 조선의 국운은 살아났지만
임진왜란 후, 공도령에 의해 폐쇄된.,신안군(칠전량) 해역.
신안보물선이 인양된 정확한 위치는
1004 섬 신안군.,'임자도 ~ 증도' 사이.
신안군은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곳.
신안군(임자도)는.,고려 개국 당시에
중대한 역활을 한 기록이 전해오는 섬.
十四年八月 憲司上疏曰 諸島漁鹽之利
畜牧之蕃 海産之饒 國家之不可無者也
我神聖之未定新羅百濟也 先理水軍 親御樓船
下錦城而有之 諸島之利皆屬國家
資其財力 遂一三韓
헌사에서 상소하였다.
여러섬에서 고기를 잡고
소금 만드는 이익과 목축 번성.
해산물 풍족은 새나라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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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께서 신라,백제를 평정하지 못했을 때
수군을 양성하여 친히 배타고 나주에 내려가
(임자도)를 점령하니 그 주변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우리나라로 돌아왔고 그 재물의 힘을 이용하여
3한을 통일하였다. " - 고려사 '신안군의 힘' -
일개 무장으로 수군을 이끌고 신안군으로 왔던 왕건
'정치기반, 경제력, 측근들, 목숨, 나라, 통일, 후계자.'
신안군은 무장 왕건에게 7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던 고장.
신안군의 힘을 이용해
통일 대업을 이룬.,왕건.
29명이나 되는 왕비로부터 얻은 많은 아들 중
장화왕후(오씨)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으니
고려 2대왕 혜종이고 신안군은 고려 건국의 모태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바친 미녀 '김억렴의 딸.'
훗날, 그 아들이 후삼국을 통일한.,고려 제2 대 왕.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자, 경순왕도 왕건에게.,투항
고려 개국 초, 형벌제도 기초는
원래, 신안군의 형벌제도를 그대로
고려시대에도 시행한 것이라 전한다.
............고려시대 형벌 제도................
외사촌끼리 결혼, 처가 죽은 후 처제들과 결혼
6촌간이라도 성씨가 다르면 결혼 할 수 있었다.
부인이 마음대로 집을 나가 징역 2년
개가하면 2천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다.
부모와 의논않고 처를 버리면.,삭탈관직
남편이 아내를 때려 상처내면 곤장 80대
아내가 첩을 구타해도 곤장 80대의 형벌.
유부녀가 간음하면, 방탕 명단에 등록
바느질하는 공인으로 귀양 배속하였다.
종이 상전 여인과 간통하였을 경우
화간이면 교형, 강간은 참형에 처하고
상대 여자는 한 등급을 낮춰 처벌하였다.
일반인으로서 여승과 간통할 경우
화간이면 징역 1년반, 강간이면 2년.
형이나 누나에게 욕하면 곤장 100대, 구타는 2년 반 징역
가까운 친족의 죄를 고발하면 징역 2년에 처하였고
아랫사람의 죄를 고발하면 곤장 60대에 처했다.
부모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면 징역 1년
상기 내에 상복을 벗고, 보통 옷을 입는 자는 징역 3년.
소를 도살한 자는 얼굴에 낙인을 찍고 형이 끝난 뒤 귀양.
도박을 한 사람은 곤장 100대
도박장소 제공자도 곤장 100대.
이웃 강도를 외면하면 곤장 80대
남의 재물을 빼앗으면 곤장 70대
남의 밭 과일 농산물을 훔치면
피륙으로 환산해 한 자당 70대
저울 눈금을 속이거나 농간을 부리면
피륙 한 자분 당 곤장 60대에 처하였고
도로와 밭둑을 침해한 자는 곤장이 70대.
군대에 가지 않으면 1일에 곤장이 40대
허가받지 않고 현을 넘어가면 곤장 90대
종이 세번 도주하면 얼굴에 낙인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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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신안군은 통일신라 이전까지 백제 영역.
통일신라 시대 광주에 무주(武州)를 두고.,통치.
나주에 '미다부리정'이라는 군사중심지를.,설치.
전남 서해지방 섬들 만 모아 독립된 군을 설치.
이 도서 군이 '압해군'이며 현재 '신안군'의 전신.
섬의 이름과 나라의 지배자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섬의 소유도 주민들의 손에서 떠나갔다.
섬은 신라 재상들 소유지로 목장을 설치.
300-400호 주민들이 말들과 함께 살았다.
조선시대 공도령으로 무인도가 된.,신안군.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신안군은.,유배지.
임진왜란 후,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한.,신안군.
옛부터 한반도의 북문은 임자도 해협.
명량해협은 남문, 흑산도 일대는 서문.
백제시대 남해는 일본 진출의 해상 관문.
통일신라 시대에는 양자강유역을 잇는 무역로
후삼국시대 에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요충지.
고려시대에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해상 통로
대각국사 의천은 이 해협을 통해 송나라 유학.
송나라 서적,도자기,예술품,비단,약재,향료,차
이 해협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와 꽃핀 고려문화.
중국 천태종이 들어와 해동 천태종으로 심화되었고
중국의 인쇄술이 들어와 고려 대장경을 목각하였고
송 인쇄술과 도자기 기술이 고려 상감청자 기술로 비약
남부지방의 세미가 해협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양곡이 북의 관군에게 운반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던 조선의 수군들.
바로 이 해역에서 재건되어 조선을 구해냈다.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공도령에 의해 폐쇠된 해협.
일제강점기에는 완전 폐쇄된 이곳 신안군 국제 항로들.
현재, 신안군 해역은 수심 20~24m
조류가 세찬 곳이라.,뱃길로 부적격.
작은 어선 만 먼바다에서 오가고 있다.
신안군 해역은 수심이 얕아진 이후, 바다길까지 막혀
아득한 옛날부터의 화려한 역사와 명성 만을 간직한 채
바다로부터 고립되었고 육지로부터 고립되었던.,1004 섬.
시간이 멈춰버린듯한.,'슬로시티 1004의 섬' 신안군.
세계 최대 천일염 생산지로서 옛 명성을 되찾고있다.
특히, 신안군 증도까지는 현재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옛부터 신안군 역사의 주역이었던.,임자도.
임자도 연륙교는., 2020년 완공할 예정이다.
증도(曾島) 방축리 앞바다는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274호).
2010년에 증도대교가 개통된 이후부터
무안 해제반도까지 육로로 통하게 된 후,
누구나 손쉽게 찾아갈 수 있는 섬이 되었다.
'물이 적은 곳' "시리섬"이라 부르던 증도.
증도 면적은 28.2㎢이고, 해안선 길이.,43.9㎞.
북쪽에 사옥도, 동쪽에 병풍도, 남쪽에 암태도.
증도는 남쪽의 대조도와는 별개의 섬이었으나
두 섬을 잇는 제방을 축조한 후, 하나의 섬이 되었다.
제방 사이에 태평염전은 여의도 50배 규모.,천일염 생산지.
1975년 8월 20일,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어민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던.,도자기 6점.
'목포에서 65km거리에 위치한.,증도(曾島)
그후, 여러 차례 추가 조사와 수중발굴이 이뤄지면서
엄청난 양의 유물을 실은 배가 침몰한 사실이 확인된 것.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도자기 종류 만 2만 661점에 달했다.
청동거울, 주전자, 잔, 접시,
악기 등 수많은 물품을.,인양.
이 배는 고려 말, 한·중·일 3국을 오가던 중국 무역선,
1323년, 원나라 때 푸젠성 촨저우항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 하카다항으로 가던 중 침몰했다는.,학계의 조사 결과.
650년 전, 이곳을 항해하는 중국선박이
풍랑을 만나 침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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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서남단' 신안군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도서군.
목포와 밀접한 생활권 '1004 섬'
압해도, 암태도, 자은도, 증도, 팔금도, 안좌도,
도초도, 비금도, 임자도, 신의도, 하의도, 장산도,
지도, 흑산군도 등 '유인도 72, 무인도 932'.,1004섬.
신안군은 선사시대 유적지로서
대흑산도 진리 해변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포함된 패총이 발견된 곳이다.
'대흑산도 진리, 장산도 대리,
압해도 대천리· 동서리'.,고인돌.
압해도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포함된 패총이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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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신안군은 물에 잠긴 대륙의 일부분이었다.
약 2만년 전까지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황해는 현재와 달리 물이 비워진 거대한.,황해평야.
당시, 중국과 한반도,일본 열도는 모두 하나의 땅으로 연결
황해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짐승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동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때는 빙하기로서 세상의 물 대부분 결빙되어 있었고
해수면은 지금의 해수면 보다 140m나 낮은 곳에 있었다.
얼음이 풀리며 대홍수가 시작되었다.
1만년전 어느때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얼음 녹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지구를 덮고 있던 엄청난 양의 얼음이 녹으면서
들과 산은 물론이고 대륙까지 물속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안군 '1004섬'도 바다물에 잠기어 갔고
그 자리에는 '황해'라는 새로운 바다가 생겨났다.
바닷물은 대륙을 삼키는데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상승.
'BC7000~ BC2000년' 현재와 비슷한 해안선이 생겼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인들은 대홍수를 목격하였다.
그들 중에는 살던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았고
수백리 넓은 땅이 물속에 잠겨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천년간 대를 바꿔 고지대로 고지대로 이동.
그들은 대홍수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으니
우리나라 민족 설화에 나타나는 홍수 신화의 기원이다.
대범람은 모든 것을 삼켰으나 남겨 놓은 것도 있었다.
높은 산이었다.산들은 봉우리만 바다물 위에 내어놓은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고 1004섬 역시 이렇게 탄생되었다.
신안 앞바다 다도해 '1004 섬'들은 원래 신안군 산이었다.
특히, 신안군 임자도는 신석기인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신안군 신석기인들의 역사는 임자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자도 신석기인들은 7천년전 대홍수가 시작되자
거주지 주변에 솟아올라 있던 산머리와 산머리 사이에
갯펄을 두껍게 침전시키고 그위에 모래를 날라 쌓은 흔적들.
여기에 주변 섬에 갇힌 신석기인들까지
임자도로 대피해 제방공사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산머리들 사이에 돌다리를 놓았고
농지를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또 쌓은 것.
섬사나이 한 명이 한 바작의 흙을 지고 와 바다에 부리면
그 뒤를 이어 섬 아낙 한 명도 한 메꾸리의 흙을 쏟아부었다.
그들이 흘린 땀의 결실로 뚝이 만들어지고 섬과 섬을 이었던 것.
신안군 임자도는 수천년 바다와 싸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땅.
육섬이라 불렸던 자연물에 '천년의 땀'을 더하여 탄생된.,임자도.
임자도는 불갑산, 한박산, 검산이라는 3개의 산이 기본 골격이었다.
청조형(靑鳥形).,불갑산
행주형(行舟形),,한박산
패장군형(覇將軍形)..검산.
신석기인들에게
'희망, 추진, 승리'
3 정신을 심어준.,곳.
풍수지리학상 청조형(靑鳥形)이라는 해석은
커다란 푸른새 한 마리가 두 날개를 힘껏 펴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 같다는 해석에서 나온 것
행주형(行舟形)은 잔뜩 부푼 돛을 세 개나 감아 올리고
황해 바다를 휘달려 나가는 범선을 연상한데서 나온 것
패장군형은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왕비가 베풀어주는 주연에 참석하여
왕비에게 보고드리는 모습이란 뜻이다.
임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신석기 유물.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에서 흑운모 편마암으로 만들고
양날을 예민하게 연마한 양인석부(兩刃石斧)가 발견되고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 등 신석기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다.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인류로로부터 버려진 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인류는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섬이 대륙의 일부였던 때
황해 바다 밑에서 살았던 구석기인.
빙하기 구석기인에게 태양은 따뜻함을 주던 고마운 존재.
그들의 고마움을 이념화하여 태양을 신으로까지 모시며
동토의 땅에서 돌 나무 몽둥이로 짐승을 쫓고 식물을 채취
B.C 6000년 이전 그들은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하였다.
제 4 해빙기 말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빙하가 녹아 엄청난 수량이 강이 되어 저지대로 흘러 들어왔다.
얼음은 차츰 서서히 녹은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녹았다.
그들이 농사짓던 땅과 수렵하던 터전은 바닷물에 잠겼다.
광대한 지역이 하루아침에 물에 잠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태양신의 저주로 세상은 종말을 고하는듯 했다.
그들은 대대손손 대를 바꾸어 가며 홍수에 쫓기어
현재의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등 고지대로 흩어져갔다.
그들의 뇌리 속에 세상의 종말 같았던 대홍수의 전설들
빙하기 추위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정도만큼 비례하여
그들의 절대신이었던 태양도 신으로서의 권위를 잃어갔다.
빙하기에는 곳곳에 얼음 눈이 있어
갈증 해소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살아도
물을 구하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어
소수의 씨족단위생활이 가능 하였다.
먹을 짐승과 식물만 있다면
어디에 가서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빙기에 들어 얼음이 녹아버리자 사정이 바뀌었다.
식수로 사용하던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가버렸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고
하천 주변이나 해안가로 몰려 내려왔다.
그곳에는 그들보다 먼저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얼마후에 또는 그후에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처음 보고., 처음 만나는 생소한 이들이었다.
서로 경계하며 하천가 곳곳에 곳곳에 움집을 짓고
가족 단위를 훨씬 넘는 집단으로 어우러 살게되었다.
정착생활은 그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채택된 생활 양식.
집단 거주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게된 집단의 후손들은
주도권 노하우를 상속받게 되면서 남의 씨족에 비추어
우월성을 깨닳으며 자신의 조상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씨족간 차별화가 시도되며
조상신이 태양신을 대신하여
새로운 숭배대상으로 떠올랐다.
역사는 변화를 받아들인 신석기인들이
새 집단거주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기온의 상승은 사람의 생활양태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소수집단의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대체되었다.
많은 집단의 영속적 집단거주는 만가지 변화 시발점이 되었다.
수만년 동안 불과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을 사용해오던 사람들
집단 거주는 집단의 경험을 공간적으로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문명의 씨앗을 전수할 수 있게 되어 다양한 지식의 축적 되었다.
집단의 정착 새로운 생활양식은
많은 것을 부수적으로 요구하였다.
보다 복잡한 의사전달 수단이 필요하여
언어가 발달되고 마제석기가 개발되었다.
식량 저장 필요에 따라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과 채취라는 구석기 시대의 생산 양식은
좁은 지역에 집단 거주하는 다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식량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었다.
새 생산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 어업 등이 등장하였다.
정교한 사회생활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적인 규범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종교도 등장하였다.
태양신이 숭배되고는 있었으나
그 권위는 점진적으로 약해져 갔다.
집단 거주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게된 집단의 후손들은
주도권 노하우를 상속받게 되면서 남의 씨족에 비추어
우월성을 깨닳으며 자신의 조상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씨족간 차별화가 시도되며
조상신이 태양신을 대신하여
새로운 숭배대상으로 떠올랐다.
역사는 변화를 받아들인 신석기인들이
새 집단거주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타오르는 문명의 불길은 마제석기에 이어
금속 생활도구 사용이라는 변화로 이어졌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하게 된 금속은 청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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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적, 유물.,고인돌.
임자도.,마제 돌대패날, 등은., 신석기시대 유물.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에서 3500년 전
사이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잡았던 우리나라 민족의 유물.
우리나라 조선술과 항해술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쪽배로도 대양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우리 민족
예나 지금이나., 조선술 항해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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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해수면이 가장 낮았던 시기는
약 2만년 전부터 1만 5천년 전 사이로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약 140m 낮았다.
한반도와 산동 반도가 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대 빙하기 직후부터 4천년 전까지
해수면이 1년에 평균 2mm 이상 계속 상승하여 왔다.
산동반도를 감싸고 흐르는 황하강과 양자강의 범람.
특히, 황하강 타고 흘러내린 토사로 인해 명명된 황해.
제방 운하 공사 이전까지 늘 하류 위치가 뒤바뀐 황하강.
매년 홍수로 중국 지형을 뒤바꿔온 황하강과 양자강
지난 1천년 동안은 지구 평균의 2배인 2m 이상 상승
특히 지난 1백년 동안만 무려 40-50cm가 상승하였다.
임자도 주민들은 임자도가
여섯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옛날부터 육섬이라 불렀다.
임자도는 섬 전체가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주민들이 ‘물치’ ‘모래치’라 부르는.,물웅덩이.
물웅덩이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이 모여드는., 오아시스.
갯바람이 심하게 불고 나면 섬의 들과 산도
모래로 뒤덮여 버리는 섬 곳곳에는 물웅덩이.
'모래 3말은 먹어야 시집간다.'는 임자도 처녀.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명명된 지명.,임자도(荏子島).
목포대학에서는 '신안군 문화유적' 지면을 통해
임자도 선사 유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청동기 이후 집단화 정치적 표징은 국가 권력의 등장이다.
국가권력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이르러 강화된다.
기원 전후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이
하천가나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해온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또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차도간,피도간,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
임자도 해협은 삼국시대 말기에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를 돕기 위한
일본 원정군 선단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진후에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피난.
망국의 눈물을 뿌렸던.,임자도 해협.
당은 10만 군사로 서해안을 기습 상륙
신라와 함께 백제를 무너뜨리고(660년)
이어, 고구려 정벌 작전을 완수(668)했다.
백제 멸망의 시기에 임자도해협은 피난과 구국의 통로.
백제의 부흥을 위하여 일본 제명천황과 천지(天智)천황은
대규모 선단을 편성하여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를 지원했다.
이 수군 선단은 임자도 해협을 거쳐 북상하여 올라갔으나
얼마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장되고 말았다.
이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 주유성마저 신라에 함락되어
사비성 함락 후 3년만에 전쟁은 끝나고 백제부흥 꿈도 수포
백제 부흥을 위해 대당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임자도 해협을 통하여 백제의 분국 왜(倭)로 건너갔다.
이때 원인(圓仁) 일본인 승려는
백제멸망 190여년이 지났을 무렵
신안 지역을 지나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이곳이 백제의 세번째 왕자 피난처 였음을
임자도 주민들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
1500년경 김해김씨, 광산김씨, 밀양박씨, 탐진최씨,
강화봉씨, 현풍곽씨 등이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711년에는 임자진이 설치되었고 그후 목장도 운영되었다.
임자도는 사질토양이라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되어
들깨 荏, 아들 子.,임자도(荏子島).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임자도 튤립축제.
임자도.,어머리해변 용난굴.
................용난굴 전설.
중국땅에서 청자를 싣고 황해를 건너온
신안 보물선이 임자도 앞바다까지 와 침몰.
선원들은 임자도를 향해 사력을 다해 헤엄쳤다.
그러나, 당시 임자도는
사람이 살지않은 무인도.
그들은 무인도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들의 배가 침몰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국 고향의 가족과 연인들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용난굴 바위 속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았다.
이무기는 누구인가 자신이 갖혀있는 바위에 눈물을 흘려야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는 운명을 갖고 있어 천년을 기다린 것.
난파선의 선원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한명씩 죽어갔고 마침내 선장이 남게 되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선장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용난굴 바위에 올라가 간절히 외쳤다.
"고향에 데려다 주오.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아내 곁에 데려다 주오."
용난굴 바위가 눈물을 빨아들이자
큰 소리를 내며 부서지며 그 속에서
용이 뛰쳐 나와, 난파선 선장을 왼손에,
죽은 선원들의 영혼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임자도를 가로질러 서쪽 황해로 날아갔단다.
그때 살아서 중국으로 돌아간
선장은 높은 사람이 되었단다.
임자도 사람들은 용이 나온 굴을.,"용난굴."
신안 보물선 선원들이 가족과 고향을 그리던
용난굴 옆에 서있는 바위를 "망향석"이라 부른다.
용난굴과 망향석에 간절히 소원을 빌면
누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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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새만금방조제 완공 후
육지와 가까워진.,고군산군도.
최근, 해저(유물)유적지로.,주목.
군산 해역에는 유인도 16, 무인도 51.,총 67.
섬 인구는 1.7%, 면적은 군산시 면적의 5.9%.
주요 유인도는 개야도 ·죽도· 연도 ·어청도·
야미도·신시도·선유도·무녀도·장자도·대장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 비안도· 두리도 등.
주요 무인도는 오도· 부도· 역경도· 치도· 십이동파도·
닭섬·송도· 흑도· 가막도· 백포섬· 단등도· 투도· 신시도 2, 3
솔섬· 정경도 1, 2· 소야미도· 서도· 무능도· 장구도·주삼도 1, 2, 3·
앞삼섬· 쥐섬· 소횡경도· 단도 1, 2·
보농도· 광대도· 계도 1, 2· 직도 1, 2·
덕산도· 악도· 치두도· 사당도· 북력도·
남가력도 등이 있고 새만금 방조제 33km
새만금 개통 후 '비응도~야미도~신시도~
북가력도~변산반도' 구간이.,육지와 연결.
그 이전까지 고군산군도 해역은 광활한 바다.
조선시대 조운선 항로
중간 정박지였던.,선유도.
군산앞바다 고군산군도.,선유도.
선유도를 중심으로
고군산군도 해역에는
해저유적지가 많은 곳.
.
2006년 6월 야미도 근해에서 고려청자 780점 인양.
새만금방조제 안쪽 약 200m.,군산시 옥도면 야미도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유물전시관(목포 관장 김성범).
새만금방조제 공사 완공 이후에
서해안에서 급격한 물길 변화로 인해
갯벌에 묻혀있던 해저유물들이 발견된 것.
'새만금방조제'공사로 인해
발굴 인양하게 된.,해저 유물.
2005년 10월 해저 도굴을 통해 존재가 보고된 야미도.
해저 유물을 4월27일부터 5월28일까지 2차에 걸쳐 25일 동안
발굴결과 접시, 대접을 비롯, 고려청자 등 다수 유물을 찾아냈다.
이들 청자류는 해저 7m에 흩어져있거나 묻힌 상태였다.
일부 지점에서는 청자대접 40 여점 이상씩 포개진채 확인.
어디론가 이동과정에서 배가 침몰하며 함께 가라앉았을 것.
조사 결과 지난해 도굴지점에서는 유물이 없었으나,
그곳을 벗어난 해저에서 도굴범들이 인양한 유물과는
종류도 다르고 질 또한 떨어지는 다른 청자류가 인양된 것.
청자류 외 경질도기 대형호(항아리형)와
시루 일부였을 연질도기 파면 등 소량 인양.
선상 생활에 필요한 도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양 청자류는 대체로 높이가 낮고
두께 또한 얇아 가벼운 것들이 주류이다.
거친 태토에 암갈색을 띠는 유약을 발랐으며,
용융상태 불량해 유약이 벗겨지고 산화된 것 다수.
전남 강진이나 해남, 혹은 전북 부안 등지의
저명한 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로 보기는 힘들며,
서남해안 인접 지방가마에서 제작한 민수용(民需用).
제작 연대는 12세기 무렵으로 짐작.
비단 이번 야미도 해저 뿐만 아니라
새만금방조제 공사현장 인근에서는
수중 변화로 해저유물이 연이어 출현
.........고군산군도 해저유물.......
고군산 군도 일대 해저 유적으로는
십이동파도· 야미도· 비안도 해저 유적.
먼저 십이동파도는 두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도자기를 포함한 선체 등 8,743점 14편이 수습되었다.
야미도는 세 차례 발굴조사 실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유물은
청자류와 기타 유물을 포함해 4,867점.
마지막으로 비안도는 다섯 차례 조사를 실시.
청자와 목재류를 포함해 3,191점이 수습되었다.
십이동파도에서 수습된 청자류는
대접, 완, 접시, 뚜껑, 병 등이 있으며,
이 중 접시류와 대접의 출토양이 가장 많다.
청자류와 더불어 다량의 목제가 함께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목제류는 청자 운반선의 부속구로 확인되었다.
야미도에서 인양된 청자는 대부분
조질 청자로 대접과 접시가 주종이다.
3차 발굴에서는 자기와 도기도 인양되고
선체편과 같은 목제류는 확인되지 않았다.
청자는 대부분 대접과 접시류이며
소량으로 청자 완과 잔이 확인되었다.
비안도에서 수습된 청자류 대접, 접시, 잔, 뚜껑,
발, 합 등.,긴급 탐사와 다섯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인양된 청자의 수량은 대접이 1,119점, 완 22점, 발 1점,
접시류 1,236점, 잔류 308점, 뚜껑 217점, 합 11점.,총 2,934점
십이동파도 수습 유물 중에는
선박의 부속구가 있는데 저판(底板),
만곡부 종통재(彎曲部縱通材), 선수재(船首材),
나무 못 등, 확인된 부속구를 토대로 배를 복원한 결과
전장 14m, 폭 5.5m 규모 고려 선박인 전통 한선(傳統韓船)
고군산 군도 일대에서 확인된 해저 유적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고려 시대 군산 지역의
해양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십이동파도에서 수습된 선체편을 통해
고려 시대 한선(韓船)의 발전과정과 선제 구조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어지고 있다.
또한. 청자 주변에서 완충재 등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선적 방법과 포장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청자 그릇을 포개 번조하며 서로 붙지 않도록
그릇 사이에 놓았던 내화도 비짐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마에서 꺼내어 바로 포장· 선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
고군산군도는 고대 해상항로에서 주요한 위치
고군산군도 일원의 수중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한
'확인조사가 절실하다.'고 해양박물관 측은 말한다.
..................십이동파도 해저유물.........................
1970년대부터 해저유물 발견 신고가 20건을 넘어,
2003년부터 본격적인 해저 유물 조사가 이루어졌다.
.
당시 발견된 해저 유적은 선체 조각 14점, 도자기, 철제 솥,
청동 숟가락등 8,743점이며 이를 통하여 전통 한선과 항로,
선상 생활 및 청자 변천과 생산유통 과정 연구자료를 제공한다.
십이동파도에서 발견된 해저 유물은
2003년 매장 유물 발견 신고에 의해
2004년까지 2차례에 걸쳐 조사되었다.
이때 발견된 십이동파선은 전남 해남군에서
개경으로 이동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며,
인양된 청자의 생산시기는 11세기 말~12세기 초.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유물 대부분은 도자기,
동서 방향으로 포개진 채 나란히 묻혀 있었으며,
침몰선박 선체로 보이는 목재 조각이 확인되었다.
인양 유물의 수량은 청자 대접 등 1차 조사 인양 물품 4,266점,
청자 접시 등 2차 조사 인양 물품 2,188점과 선체 조각 14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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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동파도(十二東波島).
십이동파도는 행정 구역상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
1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1960년대 초기까지는
사람이 살았지만 현재 무인도로, 군산항 서쪽으로 약 30㎞,
고군산군도 서쪽 끝 말도에서.,약 26㎞.
섬의 동쪽으로 군산시, 북서쪽으로 어청도,
남동쪽으로 비안도, 서남쪽으로 서해가 있다.
................십이동파도..........................
고군산군도에 속한.,십이동파도(十二東波島).
전북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12개 섬' 특정도서.
독도 등 도서지역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십이동파도1 ,2, 4 9는 특정도서로 지정된.,특정도서.
옥도면 연도로부터 남서쪽으로 21 km,
옥도면 말도로부터 북서쪽으로 17 km.
다양한 생물 자원이 있어 특정도서로 지정.
12섬 중 십이동파도4에 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7(북섬).,옥도면 연도리171., 40,046m2
좌표.,36° 0′ 0.7″ N, 126° 13′ 17″ E .
육지에서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참억새군락이 우점하고 부분적으로 팽나무 혼생
칡군락이 부분 확산 상태. 정상주변에 꾸지나무군락
북사면과 8부 능선주변에 누리장나무와 쥐똥나무군락.
6(병풍도)., 옥도면 연도리 170.,64,701m2
좌표.,35° 59′ 44″ N, 126° 13′ 16″ E
육지에서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십이동파도6은 십이동파도7의 남쪽에 위치
식물 식생은 전체적으로 참억새군락이 우점하고
갯기름나물 마 산국 등 정상주변에는 꾸지뽕나무군락.
그 주변에는 보리밥나무 · 밀사초 · 유채
암벽주변 습지에는 애기부들 · 소리쟁이
5(등대북섬).,옥도면 연도리 169 .,6,615m2
좌표.,35° 59′ 35″ N, 126° 13′ 20″ E
육지에서 약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식물환경은 제한적. 해국군락이 우점
참억새 · 밀사초 · 갯장구채 등이 분포.
사철나무 갯기름나물 천문동 소리쟁이
북동사면 바위틈에 도깨비고비 군락지.
10(작은쌍섬).,옥도면 연도리 174 .,42,833m2
좌표.,35° 59′ 38″ N, 126° 14′ 23.7″ E
육지에서 약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서사면 방향에는 소사나무군락
참억새군락에는 고사리 · 산국 등,
소사나무군락 주변에는 누리장나무
두루미천남성 등 출현. 관찰된 식물로는
참빗살나무 장구밥나무 백선 해국 등 57종류
3(소금도).,옥도면 연도리 167 .,10,374m2
좌표.,35° 59′ 4″ N, 126° 13′ 58.4″ E
육지에서 약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관찰된 조류 및 곤충 없음. 식물 식생은
전체적으로 참억새군락이 우점하고 있고
정상주변 후박나무군락, 초본층 참억새군락.
서쪽사면에 사철쑥 소규모, 식물은 사철나무 등.
8(사자섬).,옥도면 연도리 172 .,3,699m2
좌표.,35° 59′ 53″ N, 126° 14′ 18″ E
육지에서 약 38.00km.,국유지(기획재정부)
주요 조류 · 곤충 : 관찰된 조류 및 곤충 없음.
주요식물 식생은 전체적으로 참억새군락이 우점.
섬 중앙 주변에는 후박나무 · 소사나무 등이 출현.
참억새군락에는 고사리 · 밀사추 · 해국 등이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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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섬.,2008.10.20. 경향신문
전북 군산 앞바다 십이동파도 4개 섬.
환경부는 1·2·4·9섬을 특정도서 추가 지정.
독도 등 이번 4개 섬을 합쳐.,총 162개 섬 지정
특정 도서 1호는 2000년 9월 지정된 독도.
이번에 지정된 4번 섬에는 멸종위기 매가 서식.
파도에 깎인 해식 절벽과 팽나무 군락이 발달한 곳
9번 섬은 가마우지 등 다양한 조류가 번식하고 있으며
후박나무·사철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1·2번 섬.,육상 곤충류, 상록활엽수, 해조류 등
특정도서에서는 야생 동식물 포획 채취가 금지.
환경부는 2679개 무인도의 지형·식생 등을 조사하여
자연환경 우수도서를 특정도서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1960년대 초기까지는., 유인도
2016년 현재, 무인도 '십이동파도'
바다낚시 애호가들이 주로 드나든다.
'금강~십이동파도' 바다낚시
십이동파도 5섬.,'북섬등대'
2011. 1.10 문화일보., 수중문화재 보고.
각종 무역선과 조운선 등이 오갔던 서해 남해안.
지금까지 해저에서 발견·신고된 유적의 숫자만 240곳
1976년 1월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해역에서
최평호씨가 청자화병 및 백자류 6점을 발견·신고 후.
1976년 10월부터1984. 9월까지 11차례 수중발굴조사
우리나라 최초 수중발굴이자
가장 규모가 컸던.,발굴 기록.
도자기류, 금속제품, 일상생활용품 등 총 2만2000점.
신안선을 인양했던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해저 일대는
1981년 사적 제274호 '송원대유물매장해역'으로 지정됐다.
2007년 충남 태안군 신진도리 대섬 앞바다에서
주꾸미와 함께 올라온 청자는 12세기 고려시대
태안선과 다양한 기종의 청자 및 목간·도기류 등
약 2만3000점 유물이 인양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처럼 어부와 선원, 일반인들에 의해 발견·신고된
수중문화재가 계기가 돼 신안선과 완도선, 태안선,
마도 1·2호선 등의 중요한 수중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국내 유일의 수중발굴 전문기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지금까지 10척의 고선박과 고려청자를 비롯한
도자기, 금속제품, 청동제품 등 10만점 발굴 인양.
동전 8건(1만2011점), 도자기 파편 5건은 일괄처리.
학술적 의미가 큰 233점을 선별
유물설명과 사진을 수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유물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
고려청자·분청사기·도기 등 도자기류를 비롯해
오수전 등의 고대 동전, 총포, 마제석검 등이 있다.
또 중국·일본·독일의 도자기 유물도 있어
우리나라의 국제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해저유물 인양을 지역별로 보면, 아래와 같다.
동해에 접해 있는 강원도 해안가.,11점,
경북이 1점, 남해에 접해 있는 경남이 29점,
남해 서부와 서해 남부에 접한 전남은 348점,
서해안.,전북은 1094점, 충남 351점, 경기 23점
제주도 해역에서 23점이 신고되었으며,
기타 동중국해에서 수습된 유물이 33점.
선박 중요 항로인 고군산군도 중심
군산 해역에서 신고건수가 가장 많고
전남 서남해안 해역과 충남 태안 해역,
경기만 일대에 해저유물 신고가 많았다.
무엇보다 수중발굴이 진행된 태안반도 해역은
중요기항지였음이 수중 유물을 통해 입증되었다.
특히, '고려~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된.,인근 해역.
바다는 넓지만,
선박은 항로 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갯벌은 바다가 육속화되는 과정의 침전물.
갯벌의 깊이는 곧, 나무의 나이테와 유사하다.
고군산군도 해저유물 인양 위치는.,7m 갯벌 속.
중요기항지 항로 상., 봉수대.
'고려 ~조선'시대., 군사 통신시설.
오늘날, 등대 역활도 겸해서 한 것 같다.
즉, 봉수대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상.,옛항로 &
해안선 위치를 알려준다.
고려시대 해안선
조선시대 해안선
일제시대 해안선.
오랜 세월동안 침식이 되어
육지였다가 섬으로 바뀐 곳이나
해저지형 변화로 물길이 바뀐 곳이나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된 섬의 위치 등이나
한반도 삼면의 봉수대 터는 그 사실을 알려준다.
제주도 해녀들의 삶이 배어있는.,"올레길".
동해안 "일출과 걷는 사색의 길".,"해파랑길".
'봉수대 & 해저유적지'를 이어주는.,'봉수대길'
장차 ,'봉수대길'이
'해저유적지'와 연계되어
전국적 명소로서 개발이 된다면
세계적인 관광 자원이 되지 않을까?
산과 해안가와 섬을 잇는
'봉수대길 & 해저유적지길.'
'봉수대길'로 인해
도서지역 주민들이
보다 윤택해 질 수 있는
관광자원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