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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역설
고린도후서 6:1~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올해 교회력이 다시 시작하는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집집마다 기다림초는 준비하였는가? 12월에는 성탄장식도 하면서 ‘블링블링’하게 살기 바란다. 인생도 블링블링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색동교회 교회력 배너가 대림절부터 다시 출발한다. 우리 모두에게 선물 같은 작품 두 점이 걸려있다. 재작년과 다르고, 작년과 또 다르다. 앞으로 색동교회의 좋은 전통이 될 것같아 반갑다.
대림절 첫째 주일은 색동교회에게 선물 같은 날이다. 꼭 10년 전 오늘 색동교회가 기독교대한감리회 군포지방 회원교회로서 설립예배를 드린 날이다. 법적으로 생일 날인 셈이다. 그날이 기억난다. ‘예수교회, 개신교회, 감리교회’ 중 감리교회 되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색동교회는 대림절의 교회이다. ‘대림’은 기다릴 대(待), 임할 임(臨), 즉 곧 오실 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라틴어 ‘아드벤트’(Advent)를 번역한 것이다. 아드벤트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바라기는 색동교회가 기다림과 희망을 선물하는 교회이길 바란다.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은 기쁨을 나누고, 전염시키는 기회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촛불을 밝히고, 장식을 하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주는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기대감이 없는 기다림은 없다. 만약 기대감이 없다면 그 기다림은 희망 고문일 뿐이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그 희망은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위대한 역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출생하였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났다. 탄생하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하나님의 선물은 인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인간이 얼마나 말을 안들었으면, 하다가 하다가 안 되어 아들까지 보내셨다. 이것이 인카네이션, 곧 성육신이다.” 그 신비의 힘이 역설적으로 지난 2천 년 동안 성탄을 축하하고, 시대와 민족, 나라와 인종을 막론하고 같은 기다림을 품도록 하였다.
본문은 바울의 전도여행 중 일어난 일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가장 전성기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의 인생을 전환한 분이다.
바울의 경우 결과적으로 보면 선교여행은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숱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바울의 기록을 보면 성공담보다 실패 리스트가 목록이 훨씬 길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사역을 나열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4-5).
이 말씀만 읽으면 바울은 실패한 사람이다. 그의 헌신에 비해 열매가 적었다. 그러나 훼방을 받고, 모함을 듣고, 감옥에 갇히며,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낙심하거나 포기한 적이 없다. 바울은 도전을 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최선을 다하였다.
바울이 실패에도, 좌절에도,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의 관점을 회복하고,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던 힘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자부심이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1)로서 자랑이다.
그가 본문에서 사도직에 대해 자랑하고, 이를 따르는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하나님의 일꾼”란 자부심 때문에 사도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자신의 십자가를 달게 질 수 있었다. 그가 겪은 숱한 고난은 “하나님의 일꾼”(4)으로서 감내한 것이다. ‘인내,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4-5) 중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었다. 바울이 겪은 고통과 핍박은 견디기 힘든 구체적인 육체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픔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어 나감을 증언하고 있다.
2)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내 안에 씨앗을 뿌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가 나날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는 죽어가는 자와 같지만, 풍성한 생명을 얻을 것이란 믿음이다.
내 생각에 바울이 고백한 ‘7가지 선언’(고후 6:8-10)은 그가 기록한 문장 가운데 감동적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아름다운 역설’을 강조한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바울의 고백은 일곱 가지 상반된 단어로 자기 입장을 토로하고 있다. 절절한 호소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학문이 깊은 사람답게 표현이 수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 반어법, 비교법, 역설법을 사용해 자기 생각을 선명하게 한다.
바울의 역설은 마치 아기 예수의 탄생처럼 신비하다. 그 표현의 장엄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위대하다. 그 지독하고 뜨거운 ‘아름다운 역설’을 통해 바울의 고백과 감사, 소명과 의지를 극대화한다.
위대한 사도의 심정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을 품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모든 것을 가진 자”(10)답게 고백한다. 당시 자신의 존재감이 흔들리는 어려운 처지였기에, 더 깊은 감동이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을 통해 계속 역사하신다.
서초성결교회 원로인 김석년 목사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예수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그 분이 현직에 있을 때 북 콘서트를 한다면서 내게도 출연을 부탁하였다. 장소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신세계 센트로 안에 있는 반디앤루니스라는 서점이었다. 깜짝 놀랐다. 대형서점 안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웬만한 공간에는 사람마다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자 했을까? 작은 무대 위를 집중해 쳐다보는 이들은 서초성결교회에서 온 동원된 사람들뿐이었다. 복잡한 서점의 인파는 무심하게 지나갔다. 무엇을 말하려고 나섰던 나는 진땀만 뺐다. 너무 혼란스러워 생각이 다 달아났다.
김석년 목사가 쓴 책은 <질문하는 믿음>인데, 질문이 없는 시대에 무심한 대중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콘서트 장소 역시 역설적이었던 셈이다.
모임 후 저자, 같이 출연한 서울신대 최 교수, 이렇게 셋이 저녁을 먹으면서 북 콘서트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당황했다고 실토하였다. 허긴 교회 안에서 정성껏 귀담아 들어주는 교인들 앞에서만 말하다가, 이방인의 시장 한복판에서 홀로 외치는 격이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최 교수는 서점 사방에 우뚝 선 서가들이 마치 수만 명의 인문학 저자들이 지켜보는 것 같더라며 비유하였다.
어쩌면 저마다 자기 독서에 몰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야말로 생경한 예수 이야기는 낯선 종교인들의 독백같이, 소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돌아보니 그동안 교회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우리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는데 익숙했구나 싶었다.
<질문하는 믿음>에서 저자는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당시 교회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껏 기독교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 여기서 시도되지 않는 기독교란 바로 ‘예수 신앙, 본질적인 기독교’를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우리는 변질된 기독교, 사이비 기독교, 미신적 기독교를 보아왔고 믿어왔으며 흉내 냈습니다.” 폭탄 선언이었다.
우리의 경우 예수님에 대해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귀 벌레처럼 듣지만, 그러나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이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부족한가? 김석년 목사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타령으로 가득하다. “예수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그렇다고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희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세상 가운데 징표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역설적 희망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역설, 반어, 징조로 가득한 세상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의 삶에게서도 그 역설을 배울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나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나,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예수 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나 종으로 사는’, ‘아픔 속에서도 기쁨을 고백하는’,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그런 역설적 희망을 지닌 존재다.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서 커다란 지혜를 찾았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
양 극단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두 가지 면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 면만 보고 슬퍼 말라!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다. 역지사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3)
대림절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계절이다. 그는 20세기 예언자였다. 그가 살던 시대에 독일국민은 대부분 개신교회든, 가톨릭교회에든 속하였다. 그때 독일교회는 안정되었고, 유아 세례와 입교식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꾸준히 충원되었다. 모든 것이 든든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의 위기는 쉽게 그들의 안정을 무너뜨렸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그들의 안일한 태도는 히틀러를 지도자로 선택하였고, 대부분 교회가 가짜 메시야를 환영하였다. 위기의식이 없는 신앙은 악령의 실체를 분별하지 못하였고,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였다.
본회퍼 목사는 불행한 그 시대에 ‘이건 아니다’라고 말한 소수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을 독일 국민교회와 구별하여 독일 고백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은 당시 시대를 거슬러 살았다. 그들은 예수 복음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들고 나갔다. 결국 본회퍼 그룹은 히틀러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고, 본회퍼 목사는 나치 패망 직전에 사형당하였다.
본회퍼 목사는 가장 깊은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아픔의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어둠과 빛의 갈림길을 일깨워 주었다. 1943년 말경, 본회퍼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대림 절기였다.
“감옥에서 독방생활은 대림절에 관한 많은 것을 나에게 되새겨주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희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 목사는 비로소 실토하였다. 인간의 오만함으로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문은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역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첫 성탄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시간이었다. 두 번째 성탄도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다.
13세기 지혜자인 야고보 드보라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대림절은 4주 동안 거행됩니다. 주님의 오심이 사중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고, 자비로움으로 오셨고, 죽음을 통해 오셨고, 마지막 심판 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색동교회는 기다림초를 밝힐 때마다 성경구절을 읽도록 안내한다. 네 번 모두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아름다운 역설’로 가득하다. 그 역설 때문에 더욱 기다림을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현실이 막막할 때 사람들은 비유의 언어로 말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비밀스런 꿈의 언어를 사용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비전이란 언어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비전을 보라. 이사야는 자기 시대 한복판에서 미래의 등불을 밝힌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란 희망의 메시지이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2-23).
대림절은 등불의 시간이다. 깨어있는 삶은 내 안의 등불만 밝히지 않는다. 내 마음은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겨운 상황에도, 이 세상의 어둠을 향해서도 열려있다. 이웃의 아픔, 불행, 슬픔, 눈물, 외로움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아름다운 역설’이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기쁨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대림절기에 나로 꿈꾸게 하시길, 등불을 들게 하시길, 아기 예수와 함께 아름다운 역설을 품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말씀 참으로 감사 드립니다.저로 하여금 꿈꾸게 하시길, 등불을 들게 하시길,아기예수와 함깨 아름다운 역설을 품게 하시길
감절히 소원합니다. 성경 통독을 하면서 고,후서 6장 7에서 10이 마음에 젓어들어 밑 줄을 그었답니다. 좋은 말씀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또 색동교회 열 살 생일을 축하 합니다. 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