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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대 33회 & 69학번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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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어,그림 스크랩 새벽녁 과거 시험장의 풍경 / 김홍도,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오평규 추천 0 조회 165 16.12.05 16: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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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녁 과거 시험장의 풍경

Dawn at the scene of a civil service examination


미국 프레즈노Presno를 향했다.

이 도시에 사는 Patrick Patterson씨로부터 김홍도의 풍속화를 고증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떠난 여행이다. 그가 소장한 그림은 김홍도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그린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貢院春曉>이다.


1952년 한국동란 당시 부산에서 미국 해군에 군무하던 Gene J. Kuhn이 이 그림을 사서 프레즈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었고, 2005년에 Patrick Patterson씨가 다시 이를 구입하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이 그림은 작년 봄 필자가 이화여대박물관에서 개최한 <여성?일?미술> 전시회 때 논문을 쓴 <어물을 팔러가는 포구의 여인들 婆行>이화여대박물관 소장과 같은 시기, 같은 작가에다 같은 병풍에서 분리되어 나온 작품인 것이다.


글。정병모。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김홍도, 미국 Patrick Patterson 소장. 단원 김홍도,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새벽녘 과거시험 보기 직전의 풍경을 그린 풍속화다.



이그림은 새벽별 흐르듯이 이어지는 일산日傘들 사이에 과거시험을 치르기 직전의 긴장된 모습들을 그린 풍속화이다. 김홍도의 그림 위에는 그의 스승이면서 후원자인 강세황姜世晃의 제발이 따로 붙여져 있다.

강세황의 묘사는 김홍도의 그림 만큼이나 극적이고 사실적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 어떤 이는 붓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이는 책을펴서 살펴보며, 어떤 이는 종이를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서로 만나 짝하여 얘기하며, 어떤 이는 행담行擔에 기대어 피곤하여 졸고 있는데, 등촉은 휘황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모사模寫의 오묘함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는 듯하니, 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 강세황.

 [貢院春曉萬蟻戰, 或有停毫凝思者, 或有開卷考閱者, 或有展紙下筆者, 或有相逢偶語者, 或有倚擔困睡者, 燈燭熒煌人聲搖搖, 摸寫之妙可奪天造, 半生飽經此困者, 對此不覺幽酸. 豹菴  光之]”



마당에는사월초파일의 등을 단 풍경처럼 일산들로 가득 들어차 있지만, 그 공간이 전혀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까닭은 깊이있게 전개되는 공간구조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일산들의 후미를 새벽안개속에 잠기게 처리한 기법 때문이다. 당시 중국을 통해 새롭게 전해진 서양의 선원급법linear perspective과 대기원급법aerial perspective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더욱이 일산의 홍수 사이에서 활짝 열린 공간에는 과거시험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이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앞서 적은 강세황의 제발 그대로다.

얼굴, 손, 머리, 수염, 옷 주름 등 어느 하나 치밀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간략한 선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사실적 표현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장면은 밤을 새운 탓인지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행담에 기대어 자는 사람의 모습이다.
긴장 속에서 발견되는 뜻밖의 여유다. 역시 김홍도다운 해학이 돋보이는 장면인 것이다.


강세황이 제발의 첫머리에서 봄날 새벽녘의 과거시험장이라 했으니, 과거시험 치르기 직전의 풍경일 것이다. 전날 밤에 과거시험장의 문을 열면, 일산과 깔고 앉을 공석空石, 말뚝과 말장, 그리고 등을 준비하여 힘센 무인인 선접군先接軍을 앞세워 화살처럼 빠르게 들어가 다투어 자리를 선점한다. 시험문제를 빨리 보고 답안지를 빨리내야 합격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워낙 수험생이 많이 몰린 탓에 시험지를 빨리 제출하여 먼저 채점을 받은 이들 중에서 합격자가 많이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했다.


그러니 시험장이 무질서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간혹 압사하는 사고까지 벌어졌다. 일산별로 당시 접接이라고 불리는 한 팀이 자리 잡고, 일산 위에 각 접을 표시하는 글을 쓴 등을 세운다. 한 사람의 과거 보는 선비를 위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용된 선접군, 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거벽巨擘, 글씨를 대신 써는 사수寫手, 그리고 심부름하는 노비까지 한 팀을 이루는데, 이들을 접이라 한다.


김홍도의 과거시험장 그림은 시험보기 직전의 풍경이지만,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 펼쳐 있다. 시험이 시작되어도 상황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19세기에 제작된 평생도 중 <소과응시>(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보면, 조그만 일산 아래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험을 보고 있다.
김홍도의 과거그림을 통해서 그동안 기록으로만 간간이 접했던 난장판 같은 과거시험의 실상을 실감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그림은 역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평생도> 중 <소과응시(小科應試)> 부분. 필자미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과 같은 병풍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어물을 팔러가는 포구의 여인들>. 김홍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런데 최근 이 풍속화처럼 강세황의 제발에 김홍도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형식의 그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물을 팔러가는 포구의 여인들>은 같은 병풍에서 분리된 것이고, 또한 이들 그림과 비슷한 형식과 화풍으로 그렸지만 다른 병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 풍속화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답상출시>와 개인소장 풍속화가 소개된 바 있다.

이들 그림은 모두 1778년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행려풍속도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유사한 형식에 유사한 화풍을 보이고 있어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도성대지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담졸헌이 있는 중부동은 지금 종묘 앞 세운상가 부근이다.



담졸헌은 서울 중부동에 있는 강희언姜熙彦의 집이다. 중부동은 <도성대지도>(서울역사박물관 소장)로 확인해보니, 종묘 앞 세운상가 부근 지역이다. 이 집에서 신한평, 김응환, 이인문, 한종일, 이종현 등 당대 화단을 주름잡는 쟁쟁한 화원들이 모여 관청이나 개인으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하였다.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방은 당시 화단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스템이다. 마성린馬聖麟은 1777년 이 공방을 드나들며, “내가 평소에 그림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 봄부터 겨울까지 오고가면 감상도 하고 화제를 쓰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행려풍속도>의 맨 끝 폭 그림에는 1778년 담졸헌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제발이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이러한 공동제작의 시스템은 적어도 1777년에서 1778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원들이 담졸헌에 모여 공사의 회화 주문을 맡아서 공동 제작을 하였던 장면으로 추정된다. 33< 사인휘호> 개인 소장. 이미지출처『: 한국의 미- 풍속화』, 중앙일보사



마침 담졸헌에서공동 작업으로 화원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 작품이 전한다. 바로 담졸헌의 주인공인 강희언이 그린 <사인휘호>개인 소장다. 이 그림에 제발을 쓴 강세황의 서체로 보아, 김홍도가 과거 그림을 그렸을 당시에 쓴 것이다. 담졸헌으로 짐작되는 누각에서 화가들이 저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만 보고 이들 가운데 누가 김홍도이고 누가 신한평이고 누가 김응환인지 아니면 다른 화가인지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가 대부분 세로로 긴 화폭이므로 김홍도도 그림 왼편의 인물처럼 엎드려서 긴 화폭에 붓을 두 개 쥐고 안료를 갈아서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홍도는30대에 그린 풍속화가 가장 극적이고 활기에 넘친다. 김홍도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알고 있는 작품들이 거의 30대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그 유명한『단원풍속도첩』은 30대말이나 40세에 그린 것이고, 최근 김홍도의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파리 기메박물관 소장 <사계풍속도병>도 30대 후반의 작품이다. 또한『단원풍속도첩』과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거론되는 <행려풍속도병>도 34세에 그린 것이다.


40세 이후에도 풍속화를 제작하나, 30대만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50세에 30세 초반과 비슷한 형식으로 그린 풍속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데 이 그림은 필치가 너무나 세련되고 무르익어 오히려 풍속화다운 생동감이 부족해 보인다.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貢院春曉>도 김홍도의 30대가 풍속화의 전성기임을 또다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국악누리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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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고향은 어디인가?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김홍도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그는 1745년 하급 무반 벼슬을 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사실은 확인되지만,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둘로 갈린다.


하나는 그의 고향이 안산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마포라는 주장이다.


안산이 고향이라는 설은 변영섭교수가 처음 제기하고 유천형선생이 그 주장을 보강하였다.

강세황이 쓴 「단원기(檀園記)」에 김홍도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집에 드나들어 그 재능을 칭찬하고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내용을 그 근거로 삼았다. 강세황이 관직에 나가기 전 약 30년동안 처가가 있는 안산에 살고 거기서 어린 김홍도가 그림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안산이 고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마포설은 오주석에 의해 제기되었다.

김홍도가 초년에 사용한 호인 서호(西湖)가 한강인 마포 강가라는 점을 들어 마포가 김홍도의 출생지임을 암시하였다.


그런데 이들 주장 모두 김홍도의 출생지에 대하여 추정일 뿐,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와 연구 내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김홍도가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밖에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그림을 배운 강세황의 집이 어디냐가 중요하다. 어린 시절이라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그곳이 고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홍도, <매해파행도>賣蟹婆行圖  비단에 옅은 채색, 71.5×37.4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진품이나 다름없는 <매해파행(賣蟹婆行,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에 적힌 강세황은 평문을 보면, 그가 안산에 살았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준다.


"내가 일찍이 바닷가에 살 때, 아이를 업고 광주리를 인 십여 명의 젓갈 파는 아낙들이 무리를 지어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바닷가 하늘에 태양이 처음 떠오를 때 갈매기와 물새들이 다투어 날아오르고, 거칠고 차가운 풍물이 한 무리를 이룬 것이 또한 필묵의 밖에 있고, 바야흐로 도도히 흐르는 속세의 티끌 속에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로 하여금 돌아가고픈 생각이 일게 한다."

(余嘗居海畔 慣見賣婆行徑 負孩戴筐 十數爲群 海天初旭 鷗鷺爭飛 一段荒寒風物 又在筆墨之外 方在滾滾城塵中 閱此 尤令人有歸歟之思 豹菴)


이 그림에는 강세황이 바닷가에서 보았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다. 그 바닷가는 그의 처가가 있는 안산임에 틀림없다.



김홍도의 작품 가운데 이 작품과 빼어 닮은 것으로 <행려풍속도병> 중 <매해파행(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 작품에 적혀있는 강세황의 제발에는 광주리와 항아리에 담겨진 어물이 무엇이고, 언제 어디서 출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성게, 새우, 소금으로 광주리와 항아리에 그득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 놀라서 날고 한 번 펼쳐보니 비린내가 바람에 코를 찌르는 듯하다."

(栗蟹鰕 滿筐盈缸 曉發浦口 鷗鷺驚飛 一展看 覺腥風鼻)    


포구의 여인들은 성게, 새우, 소금을 광주리와 항아리에 담아서 이고 가고 있다. 그들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포구를 출발해서 향하는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곳은 필시 한양(서울)일 것이다.


서화에 재능을 가진 문장가인 유한준(1732∼1811)이 바닷가 풍물을 그린 풍속화인 "게 파는 여인"에 대해 시로 쓴 평에서 인천과 부천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는 방게를 주어 무리를 지어 한양, 즉 서울로 가서 옷과 바꾸어 돌아온다고 했다.


이들 지역과 붙어있는 안산의 풍속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산은 조선시대에 서해의 어장 중 가장 우수한 지역으로, 궁중에 생선 등 어물을 진상하는 사옹원분원(司甕院分院)이 관할하는 안산어소(安山漁所)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이 고장의 여인들은 어물들을 직접 이고 한양까지 가서 내다팔기도 했다.


김홍도의 두 그림에 적혀 있는 강세황의 제발을 통해 볼 때, 강세황은 젊은 시절에 안산에 살고 김홍도가 어렸을 적에 그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김홍도가 안산 태생임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홍도가 어린 시절 강세황에게 배웠다면, 그의 고향이 안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余嘗居海畔 慣見賣?婆行徑 負孩戴筐 十數爲群 海天初旭 鷗鷺爭飛 一段荒寒風物 又在筆墨之外 方在滾滾城塵中 閱此尤令人有歸歟之思


오래전 작성된 글인지 상기 적색부분의  慣見賣?婆行徑 에서 ?과 穰이 같이 쓰이고 있다.(慣見賣穰婆行徑)

? 이 맞는다. 오래전에는 한자입력에 제한이 있어 그런가 한다.


*?蟹? 방해해 : 방게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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