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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M> 주최로 열린 목회자 컨퍼런스 뉴욕 모임이 성황리에 마쳤다.
뉴욕나무교회(정주성 목사)에서 ‘건강한 교회를 고민하는’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노진준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노진준 목사는 1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의를 통해 교회나 목회자가 실용주의적 합리화에 빠졌다며, 하나님의 자녀됨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진준 목사는 우선 ‘원죄’와 ‘은혜’라는 단어 속에 감춰져 있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지적했다. 노 목사는 현대의 목회자들이 실용주의에 너무 익숙해졌다고 지적하며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로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복음주의는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가?’ 하는 근거보다는 오히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근거로 삼고 있다.
은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이 일은 사람이 자랑할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오히려 은혜는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근거가 되 버렸다. 심각한 문제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성화가 가능할까?’, ‘성화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니까 더이상은 언급할 이유가 없겠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현대 목회자들은 실용주의에 너무 익숙해 있다. ‘그게 되겠는가?’라는 것이 실용주의의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실용주의적 질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 실존주의적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이게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게 옳은가?’가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질문이다.
노 목사는 ‘원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현대 목회자들의 합리화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도적적 중립성’ 또는 ‘그 자체로 옳지도 그리지도 않은 행위’를 뜻하는 아디아포라(adiaphora)를 언급하면서 현대인의 문제는 어떤 것에도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하는 데 있다고 언급했다. 과거엔 지나치게 도덕적 의미를 부여해 문제가 됐다면, 현대인에게는 어떤 것에도 도덕적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선악과 사건 당시 뱀이 처음에 했던 질문은 매우 간교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니?”라는 뱀의 질문의 의도는 “너 자유하지 않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뱀의 유혹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하나님을 떠나라’,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행복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면서 행복해지려 했지만, 결국은 불행을 가져왔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인정받고,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제 안의 욕망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영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없지만,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원화된 생각때문에 성공과 성장을 추구하고,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교회성장, 인정받는 설교자가 되는 것 등의 문제에 옛날에는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라는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면, 요즘은 가치를 부여하기보단 오히려 중립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중립성에 초점을 맞춤으로 합리화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잘못된 생각조차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나의 욕망을 합리화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에 아디아포라(adiaphora)를 잘못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이라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안정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 있다는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 노출된 상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 가운데 살고 있으며, 거기에 노출된 위험성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긴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긴장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중립적인 상태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데 더 많은 마음을 두었다.
노 목사는 윤리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3가지 관점을 제시하면서 현대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문제와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규범적 접근’, ‘상황적 접근’, ‘실존적 접근’ 등의 3가지 윤리적 관점을 제시한 존 프레임(John M. Frame) 교수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실제 목회현장에서 경험되는 윤리적 접근 방식을 분석했다.
존 프레임(John M. Frame) 교수는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를 3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규범적인 관점’, ‘상황적인 관점’, ‘실존적인 관점’을 들었다. 이 세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술 마시는 것은 죄인가?’라는 질문을 접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규범적 접근’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도덕적인 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상황적인 접근’이다.’이게 덕이 되는가?’, ‘이게 교회에 유익한가?’ 라고 묻는 접근이다. 바울은 우상의 음식에 대해서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상황적인 입장에서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상황적인 접근’으로 봤을 때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에 먹지 않았다.
그 다음은 ‘실존적 접근’이다.’이게 내 신앙 생활에 유익한가?’, ‘나의 경건에 도움이 되는가?’를 묻는 접근법이다.. 우리는 종종 ‘교회 성장이 뭐가 나쁜가?’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교회 성장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다른사람과 비교해서 우월감을 가지게 하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랑을 하려고 하거나, 그것 때문에 어려운 교회와 목사를 보면서 은근히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면, 그 자체로는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은 규범적으로, 상황적으로 볼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멈춰야 한다. 그건 내 경건에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교회성장에 대해서 많이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저에게 자꾸 힘이 주어지는 사실 때문이었다. 교회 개척후 15년 목회를 하고 나니 교회가 별 문제 없이 잘 성장했다. 그러니 교인들 중 담임목사에게 이의를 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솔직히 이것이 너무 좋고 즐기고 싶었다. 이게 제 안에 갈등이 생겼다. 그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저 개인의 문제였다. 그래서 2년간 고민하다 사임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불필요한 우월감이나 끊임없는 죄의 유혹에 빠지면서 교회 성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이것이 저의 고민이었다.
그는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합리화 작업을 거론했다. 특히 교인들이 애용하는 성경구절을 거론하면서 목회자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야망과 욕망을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이라고 지적했다.
돈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의 문제는 돈을 너무 사랑한다는데 있지 않다. 현대인들은 돈을 너무 귀히 여겨서가 아니라 돈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 문제이다. 성경은 돈을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데,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중립성을 강조하면서 가볍게 여기고 있다. 돈은 유혹의 힘이 크다. 돈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여겼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치열하게 싸웠어야 했다. 저는 한국 교회가 그런 것에 가치 부여를 하지 않음으로 합리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집에 가보면, 제일 많이 붙어 있는 성경구절은 욥기 8장 7절이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말을 교인들뿐 아니라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욥이나 하나남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욥의 친구였던 빌닷이 한 말이다. ‘응징신학적인 배경에 의해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때문이다. 욥이 고난을 당하고 열명의 자녀를 잃어버린 것은 감춰진 죄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회복시켜줄 것이다.’ 그게 빌닷과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이었다. 결국 이말의 배경은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세워주실 것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말은 틀렸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자신의 죄때문이 아니었다. 욥기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의인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욥을 떠나신적이 없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신 것이다. 빌닷의 이 말은 응징신학적 배경에서 한 잘못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가 몰랐을까? 알고 있지만, 이 말은 좋은 말이고, 해주면 위로가 된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의미와 상관없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말도 상황과 문맥을 알고 있다면 오늘날처럼 해석되진 않을 것이다. 바울의 고백은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백을 그렇게 이용하지 않는다. 그 구절로 많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야망과 욕망을 합리화시키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건 욕망의 합리화이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 것인가?’ 보다는, 원죄의 영향이 남아 있어 여전히 주인이 되려고 하는 그욕망과의 치열한 싸움보다는, 오히려 그 욕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중립의 상태, 그 자체에는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게 바람직하다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을 넓혀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화이다. 이것은 해석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목회자들의 안에 있는 인식으로, 얼마나 빨리 성장할까, 얼마나 더 커질까, 얼마나 더 많이 가질까로 모여진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노 목사는 결국 현대 목회자들은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는 복음을 ‘하나님의 자녀됨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목회자들의 내면에 남아 있는 죄성과 끊임없이 싸울 것을 주문했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하게 싸울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이란 예수를 믿는다고 지적으로 동의함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권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됨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성에 대해서 훨씬 민감해야 한다. 이건 목회 30년을 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매일 새벽기도를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여전히 내가 높아지고 싶고, 내가 인정받고 싶고,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고 싶은 이 죄성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싸워야할 문제이다.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면서 합리화시켜서는 안된다. 긴장을 늦춰 서는 안된다. 긴장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죄의 가운데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복음주의는 복음을 통해서 합리화를 부추기는 그런 모순에 빠졌다.
‘중립은 없다. 아디아포라는 없다’
첫댓글 복음으로 돌아가자..
뼈 아프고 정확한 지적입니다..
신앙에 중립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