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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22일 토요일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신앙생활을 중단한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러한 말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다. 평소에 상황이 좋을 때는 하느님을 찾지 않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린다.’ 또는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하느님을 찾더라도,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은아들은 순수하게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정의를 넘어섭니다.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의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차원에서 정의를 뛰어넘으십니다”(『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 성서사, 48면). 우리는 정의에 묶여서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는 참된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십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 떠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귀향한 타락한 동생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저 기다리시고 환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묘사된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사랑,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사랑,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그런데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배은망덕, 배신의 삶, 방황과 타락으로 얼룩진 지난 삶 앞에 눈을 꼭 감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더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우리를 당신 품에 꼭 끌어 안으시며, ‘잘왔다. 잘왔어!’ 라고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품에 안으신 아버지는 혼잣말로 계속 되내이십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거라. 네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도 말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구나!”
그런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있습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신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그분께로 거슬로 올라가는 작업, 바로 회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님)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비를 선포하고 자비를 살 때만이 그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악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당신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당신
떠나는
나 괜찮아도
나
떠나보내는
당신 아리시지요
당신
멀리에
나 있어도
나
바로 곁에
당신 계시지요
당신
곁으로 차마
나 가지 못해도
나
늘 그렇게
당신 품고 계시지요
오늘의 성인
성 벤베누토 스코티볼리 (Benvenuto Scotivoli)
활동년도 : +1282년
신분 : 주교
지역 : 오시모(Osimo)
같은 이름 : 벤베누또, 벤베누뚜스, 벤베누투스
성 벤베누투스 스코티볼리(Benvenutus Scotivoli, 또는 벤베누토)는 이탈리아의 안코나(Ancona) 태생으로 법률을 공부하려고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하던 중에, 하느님이 사람의 영혼을 구하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사제가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부터 안코나의 부제로 임명되었다가, 1264년에 오시모의 주교로 또 안코나의 마르체스의 행정관리로 선발되었다. 그의 축성식이 있기 전에 벤베누토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며 향후 18년 동안 가난한 수도자로서 수덕생활에 전념하면서 교구를 돌보아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칭송받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를 닮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가 임종할 때에는 사부 프란치스코처럼 맨바닥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시편이 낭송되었다.
성 니콜라오 오언(Nicholas Owen)
활동년도 : +1606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오웬
영국 옥스퍼드(Oxford)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 오언(Nicolaus Owen, 또는 니콜라오)는 처음에 목수 일을 하다가 그 지방의 예수회 건축 일을 담당하던 중에 예수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요한 제라르드(John Gerard)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가톨릭의 조직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부유한 신자가 대속금을 지불함으로써 석방되자, 제라르드 신부를 런던탑에서 극적으로 탈출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재차 런던탑에 투옥되어 3월 2일에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성녀 레아 (Lea)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384년
로마의 부인인 성녀 레아는 과부가 된 후 성녀 마르첼라(Marcella)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나중에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엄격한 생활과 극도의 고행으로 유명하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성녀 마르첼라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녀의 덕을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