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가 강준혁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공옥진의 병신춤, 김숙자의 살풀이춤, 이매방의 승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마당을 열어준 문화기획가 강준혁(姜駿赫.51)은 관심있는 이들이나 안다. 오늘도 대학로에서 벗어난 골목길에 숨은듯 자리잡고 있는 메타 스튜디오에서 조용하면서도 바쁘게 움직인다. 공연예술의 판도를 휘저어 온 그는 막상 완전범죄자가 시치미를 떼듯 담담한 어조다.
"문화에서 과속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경제도 과속발전끝에 거품이 빠지자 남는 것은 IMF구제금융뿐이었어요. 다만 문화는 삶의 한 모습이기에 삶의 때가 묻기까지 더 오랜 기간 길러줘야 합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말하고 있는듯 하다. 그는 예술적인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 예술적인 환경에서 오랜 세월 자라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48년 대전 태생인 그의 집은 은행원인 아버지 강갑문(姜甲文.86)부터 음악애호가였다. 6남매가 전부 서울대를 나왔으나 더 큰 자랑은 이들이 모두 음악을 좋아한 점이다.
강준혁의 바로 윗형인 강준일(姜駿一)은 물리학과의 졸업을 얼마 앞두고 동생과 같은 해 음대에 입학했다. 작곡가로 대성해 95년에 유엔본부에서 정명훈과 함께 KBS교향악단의 공연을 가져 성가를 높였다.
강준혁은 서울중에 입학하자 바로 밴드부에 들어갔고 곧 클라리넷에 빠졌다고 한다. '빠졌다'는 말도 싱겁다. 고1때인 63년에는 경희대 음악콩쿠르의 관악부수석을 차지했고 65년에는 서울대와 연세대의 콩쿠르서 수석을 차지했다.
"당연히 음대로 가야했으나 문리대 미학과에 입학했어요. 준일 형과 친했던 김지하 형이 미학과에 재학중이었는데 진짜 음악을 하려면 미학과로 오라고 마구 끌어 당기는 거예요"
진짜 음악을 하려면 미학과를 가라는 이론은 미학과 교수들도 모르는 '생명사상'같은 것. 마치 다빈치가 건축가였으니 진짜 화가가 되려면 공대 건축과를 가라는 것처럼 '스케일 크고 허망한' 소리같다.
그러나 김지하가 오늘의 강준혁을 내다보고 그랬다면 예언자였다. 강준혁이 음악의 어느 장르에 매몰되기보다 모든 장르들을 '미학'의 오브젝트처럼 조화시키는 것은 전공과 무관하지 않다.
"미학과에 입학은 했으나 음악을 떠난 것은 아니었어요. 금난새를 비롯해 고교시절의 음악친구들이 많아 음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음대생들은 제가 문리대생인줄을 몰랐어요"
어느날 금난새가 찾아 와 "우리 대학에 나이도 많고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이 들어 왔으니 너도 만나보라"고 권했다. 금난새를 따라 음대에 가보니 약속한 벤취에 앉아 있는 것은 형 준일이었다. 세 사람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10명 규모의 연주단체 '메아리'를 조직했다.
"69년 음대 학생회장이던 난새는 선거공약에 따라 음악캠프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어요. 방학때 수원농대 기숙사에서 수백명이 참가하는 캠프를 차리려 한 구상이 너무 거창했습니다"
마침 원주의 카톨릭 문화센터가 준공돼 열흘간 여름음악캠프를 열었다.
꿩대신 닭으로 차린 캠프여서 이것이 한국 음악사의 큰 이정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 캠프는 꾸준히 이어져 75년부터는 여름과 겨울 두 차례씩 캠프를 여는 '서울음악학회'(SMA)로 자리잡았다.
그 무렵은 오케스트라가 태부족이라 지휘할 기회도 없었기에 이 캠프는 유명한 지휘자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다. 금난새가 그랬고 임헌정(서울대 교수) 정치용(국립음악원 교수)이 뒤를 이었다. 이돈응(한양대 교수)은 뒤에 독일서 전자음악을 전공해 권위자가 됐으며 오광호는 독일 브라운 슈바이크 교향악단 수석 클라리넷연주자로 있다가 지금은 국립음악원교수로 있다.
"연극반에도 참가했습니다.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기거하면서 DJ로써 음반을 고르는 한편 연주회도 열었죠. 졸업후에도 그런 생활이었어요"
어쩌면 강준혁의 일생은 그런 음악애호가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76년 세실극장의 개관작업에 참가하는 등 재능이 헛될 수는 없었으나 그에게는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 해가 저물 무렵 그것이 주어졌다. 당시 건축가 김수근은 소극장 공간사랑의 준공을 앞두고 극장장을 찾고 있었다.
강준혁은 77년 4월부터 10년간 극장장으로 공간사랑을 지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그의 공간사랑 시절을 두고 한 말일까.
당시 몇 안되는 소극장은 모두 극단들이 운영하고 있었으나 공간사랑은 자체 극단이 없어 '공간'이 있었고 여기에 그의 구상을 채울 수 있었다. 그에게 78년 2월 22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당시 국악공연장은 국악원밖에 없어 젊은 민속음악들의 사설단체인 '시나위'는 공연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간사랑이 전통예술의 밤을 마련했고 여기서 '웃다리 풍물 앉은 반'이라는 중부농악을 시험 삼아 연주해 봤죠. 그 이름이 그렇게 우스운가요? 그럼 사물놀이라고 해두죠"
원래 사물이라는 악기는 농악에도 절에도 있었으나 '사물놀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물론 그들도 이것이 '놀이'가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날도 김덕수의 꽹가리는 제대로 주인을 맞았으나 해금연주자인 최태현이 징을 치고 대금주자인 이종대가 북을 쳤으니 어찌 보면 '놀이 삼아' 해본 시험이었다.
연주자로 보면 '이물놀이'였으나 연주에 들어가자 연주자도 청중도 놀랐다. 놀라움이기보다 부끄러움이고 떨림이었다.
"그 때까지 농악은 음악이라기 보다 행사의 구색맞춤이나 춤같이 시각적으로만 존재했어요. 그것을 앉아서 연주하여 음악으로 대하자 그처럼 좋은 음악을 몰랐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죠"
그 후 제대로 팀을 갖춰 '사물놀이'라는 단체이름을 내걸었으나 다른 팀들이 생겨나면서 모두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내걸자 그것은 보통명사가 됐다.
무속이 박해받던 79년 '무속굿제'를 열어주었을 때 강준혁은 삼신아비같은 존재였다. 동해안 오귀굿 서울 진오귀굿 진도 씻김굿 등 천대받던 굿쟁이들은 얼마 후 인간문화재로 내림을 받았다. 그 신내림에 공옥진의 병신춤 이매방의 승무도 춤을 추었다.
그의 발자취가 가장 뚜렷히 남아있는 것은 춘천인형극제. 이 국제행사는 89년에 발족했으나 그가 어린이날의 구색맞춤으로나 존재하던 인형극을 육성한 것은 84년 부터였다.
공간사랑은 자투리시간을 인형극에 내주면서 유치원들의 관람을 권했다. 관객이 늘어나자 인형극단이 늘어났고 샘터파랑새극장과 바탕골극장 등 인형극 극장도 생겨났다.
인형극단의 성장속도는 춘천인형극제의 참가극단수에서 드러난다. 첫해(89) 14개, 90년 17개, 91년 28개, 92년 35개, 98년 60개.
이 밖에도 그는 재즈음악 시낭송회 현대무용 등 그 때까지 공간을 얻지 못한 예술에 공간사랑의 문을 열어 주고 뿌리내리기까지 보살폈다.
86년 김수근이 별세했고 2년 뒤 강준혁도 공간사랑을 떠났다. 당시 그의 마음은 처절했으나 그것은 필연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공간사랑시절에 기른 역량으로 밖에서 해야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연기예술학교 아리아카데미를 세웠고 89년에는 스튜디오 메타를 세워 독자적인 문화기획가의 길을 걸었다. 90년 L.A 예술제와 91년 유로아시아 예술제의 코디네이트로 참가한 것도 그런 것이다.
98년 아비뇽 국제예술제의 한국주간 예술감독이 된 것은 개인적인 기쁨이기에 앞서 세계적 문화기획가를 갖게 된 나라의 경사였다.
요즘 강준혁은 '후진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바쁘다. 한계에 이른 스타들이 흔히 하는 소리도 아니고 당장 물러나겠다는 말도 아니다. 자신과 같은 문화기획자들을 장기적으로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문화기획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그 핵심인 다움아카데미원장으로 있다. 이제 문화기획가들이 학림다방에서 자라나기에는 우리 문화계가 너무 커진 것이다.
그러나 '강준혁다움'을 보여주는 가장 멋진 '문화기획'은 매월 마지막 금요일 그의 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와인파티.
"95년 이 스튜디오를 차렸을 때는 친구들이 너무 바빠 만나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달에 한번만이라도 만나자며 포도주파티를 열자 다들 반겼습니다. 이젠 문화계 안팎에서 백명이 넘게 찾아 옵니다"
이 파티에서 '히서연극상'이 태어났듯 이 자리는 그 자체가 문화축제이면서 문화의 구상이 오가는 문화의 산실이 되고 있다. 술자리는 싸움판이 되기도 하나 '문화기획'이 있으면 문화축제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