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옥주 목사의 책 <성경과 다른 거짓말>(신옥주, 은혜로선교회출판사, 2013)을 접하게 되었다. 책 제목이 다소 도전적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부제로 ‘한국기독교 130년 사(史)의’가 붙어 있었다. 즉, 한국기독교 130년 역사 동안 한국교회에서 행해진 성경과 다른 거짓말에 대해 지적, 또는 폭로하겠다는 게 책 제목에서 읽혀지는 분위기다. 한국교회를 향한 ‘충언’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과연 내용도 제목처럼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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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옥주 목사의 저서 |
책을 읽어 본 후의 결론은 정반대다. 신 목사가 오히려 지적 받아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그에게서 성경과 다른 비성경적인 교리가 다수 발견되었다. 엉뚱한 신구약 단어 연결, 성경본문에 대한 풍유적 해석 등도 적지 않다. 따라서 본고는 위의 책에서 나타난 신 목사의 교리(사상)가 왜 비성경적인지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 엉뚱한 ‘방언’, ‘방언통역’ 교리
신 목사 교리의 핵심은 ‘방언통역’이다. 그는 ‘반드시 방언통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론하겠지만 그는 자신이 언급하는 ‘방언통역’이라는 것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성경구절의 숨겨진 참 뜻을 그 방언통역이라는 것을 통해 발견해 낸다는 식이다. 먼저 방언통역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제는 육체의 예법인 도의 초보를 벗어나서 온전하게 영, 육간에 성경을 보고 ‘성경적으로 방언하고 방언통역’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주님이 다시 강림하시는 때인 지금 이 시대에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p.272-273)
“이에 대해서 영, 육간에 온전하게 분별하고 말하는 방법은 방언을 하고 반드시 방언통역을 해야 하므로”(p.154)
신 목사의 책에서 ‘방언통역을 해야한다’는 식의 표현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어쩌다 한두 번 말한 게 아니라, 그의 생각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그는 자신의 방언통역을 ‘복음’과도 연결시켰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자신이 주장하는 ‘방언과 방언통역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교리가 성경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들어보자.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적인 방언하고 방언통역(성경적인 예언)을 하는 것이며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시 예언’하는 것이다.”(p.91)
그렇다면 신 목사가 말하는 ‘방언’과 ‘방언통역’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한국교회 성도 상당수가 기도할 때 개인적으로 행하는 방언, 그것과 동일한 것일까? 또한 ‘방언통역’은 무엇일까?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방언을 말 그대로 통역해 주는 것을 말할까? 본고는 방언 은사의 중지와 계속, 그 의미와 역할 등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 목사가 말하는 방언, 방언통역에 대해 논리적, 성경주해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결코 그런 게 아니다. 신 목사는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방언이나 방언통역의 의미에 찬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방언’을 한국교회가 행한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p.38). 심지어 그런 방언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p.62). ‘방언’의 어떠함을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 목사에게 있어 방언의 문제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신 목사는 언급했다. 그는 자신도 과거에는 위와 같은 방언을 받았다고 한다. 신 목사는 일반적인 방언을 ‘개인적인 방언’이라고 표현한다. 방언을 받은 뒤로부터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다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았고 오늘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적이 없다”라며 감동하는 표현을 했다. 오늘 자신의 신앙에 개인적인 방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방언을 지금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 오히려 방언은 영적으로 태어나지 않을 때, 믿음이 없던 때 받은 것이라며 매우 멀리한다(p.51).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개인적인 방언으로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방언을 ‘한국교회의 거짓말’이라고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신 목사가 주장하는 ‘방언’과 ‘방언통역’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방언 = 문자 그대로의 성경’ ‘방언통역 = 설명, 해석’
신 목사가 말하는 방언이란, 성도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거나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방언통역은 그 성경구절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내어 소위 ‘설명 또는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희한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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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하는 신옥주 목사(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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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강단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성경적인 방언(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육으로 보고)을 하고 반드시 방언통역(그 말을 상대가 알아듣기 쉽도록 신령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여 명백하고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변증함)을 해야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p.53)
** 성경의 근거는?
그렇다면 신 목사는 어떠한 근거로 방언과 방언통역의 의미를 위와 같이 정의하려는 것일까? 그도 자신의 교리를 성경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가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2:4과 이사야 28:11이다(p.29). 정말 이 두 성경이 신 목사의 교리를 증명해 주는 것일까?
그가 제시한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본고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느라”(행 2:4, 한글개역)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 28:11, 한글개역)
신 목사는 위 두 구절을 연결시켰다. 구약성경(사 28:11)의 예언이 신약성경(행 2:4)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연결 고리로 사용된 단어가 바로 ‘다른 방언’이다. 두 곳에 모두 동일하게 나타난다. 언뜻 보기에 연결될 것처럼 보인다. 신 목사의 성경 이해의 한 방식이 이것이며, 역시 그의 성경 오해의 근원도 이 방식이다.
신 목사는 위 행 2:4의 ‘다른 방언’이 일반적인 방언, 즉 개인적인 방언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구약 이사야 28:11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성경 본문을 통해 그의 성경 이해가 옳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 28:11의 ‘다른 방언’의 의미를 살펴보는 게 그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행 2:4과 연결되는지를 이후에 따져보자.
먼저 사28:11의 다른 번역성경을 참고해 보자.
“Indeed, He will speak to this people Through stammering lips and a foreign tongue”(사28:11, NASB)
“For with stammering lips and another tongue will he speak to this people”(사28:11, KJV)
“Very well then, with foreign lips and strange tongues God will speak to this people”(사28:11, NIV)
“그러므로 주께서 낯선 말과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이다”(사28:11, 쉬운성경)
먼저 사 28:11의 말씀을 하시는 분,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NASB, KJV에서는 ‘He’라고 표현했다. 그것을 NIV에서는 ‘God’라고 명시했다. 쉬운성경에서는 ‘주께서’라고 번역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게 번역성경의 공통점이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다.
사28:11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무엇인가를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Through stammering lips and a foreign tongue)이다. 즉,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겠다는 형태다. 그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을 강조하기 위해서 영어성경(KJV, NIV)에서는 그 문구를 앞으로 끄집어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쉬운성경에서는 ‘다른 방언’을 ‘다른 나라 말(언어)’로 번역했다. 눈 여겨 볼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성경 본문의 앞뒤 문맥을 읽어보자. 에브라임의 ‘교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타락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사 28:11은 그 중의 한 구절이다.
타락한 지도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그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는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을 통해서 그 타락한 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결국 이웃 이방 나라 앗시리아에게 정복 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말(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존 오스월트, <NIV 적용주석>, 성서유니온선교회, p.421).
사 28:11 본문의 뜻을 염두에 두고 이제 행 2:4을 다시 살펴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느라”(행 2:4)
이때 ‘다른 방언’을 하는 주체는 ‘저희’,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한 게 ‘다른 방언’이다. 다른 번역서들도 동일하다.
이제 신 목사가 행한 대로 사 28:11과 행 2:4을 연결시켜보자.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구약성경 이사야 28:11에서 이방 나라 앗시리아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해서 하고자 한 말, 즉 ‘다른 방언’이 신약성경 사도행전 2:4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한 ‘다른 방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방 나라 백성의 말함 = 예수님 제자의 말함’이라는 등식이 된다. 이게 맞나?
정말 엉뚱하다. 신 목사는 자신의 방언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구절로 행 2:4과 사 28:11을 연결시켰지만, 이 두 구절은 그의 의도대로 연결되는 구절이 결코 아니다. ‘다른 방언’이라는 같은 한글만 나올 뿐, 전혀 다른 의미다. 비성경적인 접근과 해석이다.
지금 행2:44과 사28:11을 연결시켜 성경의 의미를 찾으려는 행위를 신 목사는 바로 ‘방언통역’이라고 한다. 즉 ‘방언통역 = 설명,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방언통역이 그러한 의미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지는 않다. ‘방언통역=해석’이라는 것도 성경 본문에서 입증해야 하는데 그의 책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혹시 다른 책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면 보고 싶을 정도다. 결국 신 목사의 방언, 방언통역에 대한 그의 교리는 엉뚱한 자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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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샬롬~! 요즘 신천지보다도 비논리적인 이단성이 많은 단체입니다.^^;;
전철역들마다 찌라시를 뿌리면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간판을 걸고 있지만 작은 군소교단이며
신옥주라는 사람이 거기 부총회장을 맡고 있어서
자신들끼리 이단성 혐의 없음을 발표하였습니다.
여러분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계신 분들이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및 당부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네! 목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