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숙옹(金容肅翁)은 평생 漢學을 하신 분이다. 출판과정에서 잘못된 한자는 정정했다. 오류가 조금 보이는데 김용숙옹이 직접 필기(筆記)한 문장을 편찬자들이 잘못 읽고 출판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강서원지(荷江書院誌, 1977년)를 소개했었는데 오류(誤謬)는 거의 없었다.
『 향교석전(鄕校釋奠) ; 공주향교 ㆍ충주향교, 2013년』 충주향교를 소개하는 책이다. 지금은 제수(祭需)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궁금하다.
충주향교지(1992년) 에서 옮김.
<충주향교지(1992년)에 실린 金容肅翁의 모습>
동량면 조돈(早遯)분이시라고 한다. 평생 漢學을 하신 분이다.
<원문>
忠州鄕校誌 序
蓋自天降生民以來未有盛之萬世宗師孔夫子德合乾坤明並日月卽人世間一太極也 以其倫理敎化廣濟宇宙以其仁義道德薰陶人民而與天地同功業則其鴻恩厚澤可謂泰華崇高河海深廣故自國都之泮宮下至州縣之文廟莫不尊奉而俎豆之也 維玆忠州鄕校之設殆至幾百星霜而經壬亂之灰燼重建於 高宗丁酉而其後隨毀隨繕于檀紀四二六九年 丙子及某某之歲而維支奉安僅繼春秋釋奠朔望上香之儀然其校誌與諸般書類燒失殆盡校內沿革莫可考徵一大欠事也 蓋邦國之有史氏族之有譜鄕校之有誌大小雖殊皆記其事而傳諸後世者也 苟或國而無史何以知君王之歷民族而無譜何以知祖先之所自出校而無誌何以知
聖賢之遺蹟乎 然則校誌者實儒林不可無底緊要文字也 是以出入校中之多士深憂永歎于無誌者爲日已久矣 幸玆典校李庸信甫慨然奮發專念于此與僉章甫詢議協商同心合意且賴忠州市中原郡當局莫大補助之力經始原稿蒐集而忠州商高前張基德校長忠州工大李璇馥博士執筆編纂成此積年未遑之宿願事業而開卷一目瞭然則現今西歐風潮有如怒濤謔浪之流入而禮儀綱常消滅絶無餘美風良俗痕迹不見之日如是之舉無乃振作儒風激勵士氣之一大警鐘耶 四方之士亦必觀感而作興者矣 豈不盛哉 豈不休哉 本校之榮吾黨之光孰大於此歟愚如肅也 雖無協調之實力粗有秉彛之未泯雖可坐視傍觀故不顧學淺識薄冒陳微衷所感略表贊成之忱云爾
歲玄汃涒灘之菊秋
前 成均館典學 光山 金容肅 謹序
忠州鄕校誌 序 (표점본)
蓋自天降生民以來, 未有盛於萬世宗師孔夫子. 德合乾坤, 明並日月, 卽人世間一太極也. 以其倫理敎化廣濟宇宙, 以其仁義道德薰陶人民, 而與天地同功業, 則其鴻恩厚澤, 可謂泰華崇高, 河海深廣. 故自國都之泮宮, 下至州縣之文廟, 莫不尊奉而俎豆之也.
維玆忠州鄕校之設, 殆至幾百星霜, 而經壬亂之灰燼, 重建於高宗丁酉. 而其後隨毀隨繕于檀紀四二六九年丙子及某某之歲, 而維持奉安, 僅繼春秋釋奠、朔望上香之儀. 然其校誌與諸般書類燒失殆盡, 校內沿革莫可考徵, 一大欠事也.
蓋邦國之有史, 氏族之有譜, 鄕校之有誌, 大小雖殊, 皆記其事而傳諸後世者也. 苟或國而無史, 何以知君王之歷? 民族而無譜, 何以知祖先之所自出? 校而無誌, 何以知聖賢之遺蹟乎? 然則校誌者, 實儒林不可無底緊要文字也. 是以出入校中之多士, 深憂永歎于無誌者, 爲日已久矣.
幸玆典校李庸信甫, 慨然奮發, 專念于此, 與僉章甫詢議協商, 同心合意. 且賴忠州市、中原郡當局莫大補助之力, 經始原稿蒐集, 而忠州商高前張基德校長、忠州工大李璇馥博士執筆編纂, 成此積年未遑之宿願事業. 而開卷一目瞭然, 則現今西歐風潮有如怒濤謔浪之流入, 而禮儀綱常消滅絶無餘, 美風良俗痕迹不見之日, 如是之舉, 無乃振作儒風, 激勵士氣之一大警鐘耶? 四方之士, 亦必觀感而作興者矣. 豈不盛哉! 豈不休哉!
本校之榮, 吾黨之光, 孰大於此歟? 愚如肅也, 雖無協調之實力, 粗有秉彛之未泯, 不忍坐視傍觀(출판과정에서의 오류로 판단되어 고친다), 故不顧學淺識薄, 冒陳微衷, 所感略表贊成之忱云爾.
歲玄汃涒灘之菊秋
前 成均館典學 光山 金容肅 謹序
<번역문>
충주향교지 서문
하늘이 이 땅에 백성을 내리신 이래로, 만세의 종사이신 공부자(孔夫子)보다 더 성(盛)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 덕은 하늘과 땅에 합치하고 밝음은 해와 달과 어우러지니, 곧 인간 세상의 한 태극(太極)이십니다. 윤리와 교화로써 온 우주를 넓게 구제하시고, 인의와 도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어 성스러운 천지와 더불어 그 공업을 함께하셨으니, 그 넓은 은혜와 두터운 덕택은 칭송하건대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처럼 숭고하고 하해(河海)처럼 깊고 넓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수도의 반궁(泮宮, 성균관, 성균관의 역사에 대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부산대 강명관 교수의 『 노비와 쇠고기: 성균관과 반촌의 조선사』 가 있다)으로부터 아래로 주현(州縣)의 문묘에 이르기까지 흠모하여 봉안하고 제사 올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곳 충주향교가 설립된 지 어느덧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임진왜란의 잿더미를 거쳐 고종 정유년(고종 34, 1897년)에 재건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며 파손되면 보수하기를 거듭하다가 단기 4269년(1936년, 병자년) 및 이후 여러 해를 거치며 지탱하여 봉안해 왔고, 겨우 봄·가을의 석전대제와 음력 초하루·보름의 상향(上香) 의식만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향교의 역사와 제반 서류가 거의 전부 불타 없어져 교내의 내력을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큰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무릇 나라에 역사가 있고 족속에 족보가 있으며 향교에 교지(校誌)가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모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입니다. 만약 나라에 역사가 없다면 어떻게 임금의 대세를 알 것이며, 민족에 족보가 없다면 어떻게 조상이 어디서 나오셨는지를 알겠습니까? 향교에 교지가 없다면 또한 어떻게 성현의 옛 자취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지라는 것은 실로 유림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지극히 요긴한 글입니다. 이에 향교를 출입하는 많은 선비들이 교지가 없음을 깊이 근심하고 장탄식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전교(典校) 이용신(李庸信) 선생께서 개연히 분발하여 이에 전념하시어, 여러 어르신들과 상의하고 협상하여 뜻을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또한 충주시와 중원군 당국의 막대한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원고 수집을 시작하였고, 전 충주상고 장기덕(張基德) 교장과 충주공대 이선복(李璇馥) 박사께서 집필과 편찬(編纂)을 맡아, 수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숙원 사업을 완성해 내셨습니다.
책을 펼치니 한눈에 명확히 들어오니, 오늘날 서구의 풍조가 성난 파도와 사나운 물결처럼 밀려들어 예의와 강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풍양속의 자취조차 보기 힘든 이때에, 이러한 거사는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선비의 사기를 격려하는 하나의 큰 경종이 아니겠습니까? 각처의 선비들 역시 반드시 보고 느끼어 일으켜 세우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으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본 향교의 영광이요 우리 유림의 빛남이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 용숙(庸肅)은 비록 도울 만한 실력은 없고 겨우 타고난 양심이 아직 마멸되지 않은 정도이나, 차마 앉아서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학식이 얕고 식견이 좁음을 무릅쓰고 마음에 느낀 바를 감히 아뢰어, 찬성하는 작은 정성을 대략 표하는 바입니다.
임신년(壬申年, 1992년) 음력 9월
전 성균관 전학 광산 김용숙 삼가 씀
(歲玄汃涒灘之菊秋
前 成均館典學 光山 金容肅 謹序)
※세현익군탄지국추(歲玄汃涒灘之菊秋)
고갑자로 십간(十干) 현익(玄汃)은 임(壬)을, 십이지(十二支) 군탄(涒灘)은 신(申)을, 국추(菊秋)는 음력 9月을 가리킨다.
임신년(壬申年, 1992년) 음력 9월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