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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 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전문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을 다 살아버린 것 같고, 더 이상 이 세상은 살만 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라는 칠판의 낙서, 아니, 그 농담 한 마디 때문에 모든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오직 낯선 땅으로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인간,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죽음보다도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있다”는 인간은 체코 출신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분신이며, 그 주인공들은 염세주의가 피워낸 새싹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염세주의란 이 세상을 혐오하고 헐뜯는 사상을 말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염세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커녕, 농담의 자유마저도 없었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그것이라라는 점에서, 그런대로 그 타당성을 얻게 된다. 아니, 밀란 쿤데라의 염세주의는 그 타당성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고 언제, 어느 때나 백절불굴의 용기만을 강요하는 낙관주의의 사상을 단 칼에 베어버린다. 그 낙관주의가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일당 독재이며, 그 사상의 목표에 항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이미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으로 변모하게 된다. 낙관주의는 염세주의의 새싹이 될 때도 있고, 염세주의는 낙관주의의 새싹이 될 때도 있다.
나는 우리 인간들의 운명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인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는 편이다. 운명이란 우리 인간들을 매우 수동적으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우연의 쳇바퀴를 돌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러나 그 우연의 쳇바퀴마저도 필연의 힘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만을 자행했던 원수들마저도 다 용서해주고 그 ‘자비로움’으로 오늘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 해마다 A급 태풍이 10여 차례나 지나가고 수없이 크고 작은 지진들과 싸우면서도 오늘날 경제적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바로 그 우연의 쳇바퀴를 필연의 쳇바퀴로 변모시킨 민족들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독일정신은 뿌리로, 이태리 정신은 잎으로 만든 왕관으로 되어 있다는 말도 있고, 프랑스 정신은 꽃으로, 영국 정신은 과일로 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일까? 미국과 중국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꿈꾸고 있는 만큼, 그들의 정신은 뿌리와 왕관(잎)과 꽃과 그리고 그 열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영원한 대제국을 꿈꾸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제국을 영원히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정신은 벌레 먹은 낙과(?)로 나타나고,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는 國號가 부끄럽고 그 어떤 목표도 없는 만큼, 한국정신의 새싹의 촉도 틔워볼 수 없는 쭉정이 씨앗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시집으로는 수런거리는 뒤란(2000년), 맨발(2004년), 가재미(2006년)가 있으며, 맨발과 가재미를 통해서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으로 등극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가재미’는 ‘가자미’의 경상도 방언이며, 이 ‘가재미’는 가재미의 표제시이면서도 그의 대표작에 해당된다. 이 시는 ‘고모의 삶’을 ‘가재미의 삶’으로 의어화(擬漁化)시킨 시이며, 따라서 나와 고모의 뭍의 삶은 물속의 삶으로 변모하게 된다. 시는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의 장르이며, 그것은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타나게 된다. 서사시의 주인공이 통개인적이며 문화적 영웅으로서 그가 소속된 국가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인물이라면, 서정시의 주인공은 사적인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또,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주관적인 감정은 보편적인 감정으로 승화되고, 그 감정의 토대가 되는 그의 삶은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원형이 된다. 시는 맑고 깨끗한 영혼을 얻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하고, 또한 시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연출해내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문태준의 「가재미」는 그 가냘프고 애닲은 곡조가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옛 이야기 형식을 띠면서도,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기법으로 「가재미」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상징이란 어떤 대상에 인간의 의식이 뚜렷하게 각인되 어 있다는 것을 뜻하고, 함축이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어떤 의미를 드러냈다는 것을 뜻한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와 ‘가재미’의 관계도 상징적이고, ‘나’와 ‘그녀’와 ‘가재미’의 관계도 상징적이다. 그녀의 상징은 가재미이고, 가재미의 상징은 그녀이다. 나의 상징은 그녀이고, 그녀의 상징은 나이며, 따라서 나의 상징 역시도 가재미가 된다. 가자미는 가자미과의 어류이며, 넙치류, 가자미류, 서대류 중에서 넙치, 도다리, 서대에서처럼, 별도로 특별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자미로 불리운다. 그종수는 520여종이나 되며, 산란은 대개 겨울철에 하고, 그 서식장소는 바다 밑이라고 한다. 성어의 크기는 17--23cm이며, 그 특징은 두 눈이 한쪽으로 몰려 있으며, 주로 모래 속에서 작은 갑각류와 조개류를 먹고 산다고 한다. 문태준 시인이 ‘나’와 ‘그녀’의 상징을 가재미로 선택한 것은 나와 그녀와 가재미가 다같이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두 눈이 한군데로 몰려 있고, 그 결과, 더 이상의 미래의 희망이 없고 비참한 생애를 마쳐야 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또, 그리고, 문태준의 「가재미」가 함축적이라는 것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와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함축성이 이 시 전체를 지배적인 힘으로 이끌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닥에 가재미처럼 누워 있는 그녀 옆에 나도 한 마리의 가재미로 드러 눕는다는 것은 나와 그녀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가재미로 퇴화되었다는 뜻도 되고, 다른 한편, 그 반대방향에서, 나와 그녀는 가재미와도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라는 시구는 ‘암 투병 중인 그녀’의 失明과 비정상적인 모습을 뜻할 수도 있고,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헤아려 보고 있다”라는 시구는 이승에서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녀와 그녀의 어렵고 힘든 삶, 즉, 파랑 같은 날들을 헤아려 보는 나의 모습을 함축하고 있다. 상징이 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신비의 해독이라면, 문태준은 ‘가재미’라는 상징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의 삶을 해독해낸 것이고, 함축이 단일한 의미만이 아닌, 여러 의미들을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문태준은 「가재미」의 시구들을 통하여, 그 단일한 시구들에 수많은 의미들을 중첩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듯이, 시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일수록 다양한 울림을 띠게 된다. 단성적인 울림은 모범답안만이 있는 인생에서 솟아나오고, 다양한 울림은 모범답안만이 아닌, 신비하고,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생에서 솟아나온다. 시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일수록 제일급의 시가 되고, 문태준 시인의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기법은 오늘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 되어가고 있다. 문태준 시인은 한국시단의 새천년의 기수이며, 그의 수많은 문학상의 영예는 우리 한국인들의 경의의 표시이자 기립박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태준 시인은 그의 고모님이 입원 중인 김천의료원으로 찾아가, 그의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눈물을 감추며 그녀 곁에 가재미처럼 누워본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그녀’가 단지 ‘조카’와 ‘고모’의 관계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변주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녀 앞에 한 마리의 가재미로 눕게 된 것이고, 그 어미 가재미는 그 아들 가재미를 보자 울컥 눈물부터 쏟아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꼭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고, 이승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도 눈물을 흘린다. 이때의 눈물은 반가움의 눈물이면서도 서러움의 눈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물속을 살던 그녀의 삶은 겨우 국수가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흙담조차도 없었던 삶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고, 그러나 이제는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한” 몸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악성종양의 삶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나는 그녀의 파랑같은 삶을 회상해보면서 그녀의 생애가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지만----이 시에는 시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시인이 이 시의 바깥에서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가재미」는 문태준 시인이 눈물로 쓴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의 삶이 더욱 더 그리워서 눈물을 흘린다. 죽음만을 보고 있는 그녀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죽음을 삶의 완성이나 삶의 해방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희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데, 왜냐하면 오딧세우스가 저승에서 만난 아킬레스처럼, 그 어느 누구도 거지와도 같은 이 세상의 삶을 원하지, 저 세상의 삶을 원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는 세월은 붙잡을 수 없고, 오는 세월은 막을 수가 없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인 그녀가, 아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비록, 등뼈가 구부러진 노년의 몸으로 울고 있을지라도,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린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린 운명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운명이고, 나는 다만, 그녀의 새끼처럼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누워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가만히 적셔”주게 된다. 이때의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가만히 적셔” 준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면서도 논리의 비약만이 아닌 데, 왜냐하면 물속에서의 삶은 산소호흡기로 물을 들이마시는 것이 더욱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겨우 겨우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고 있으면서도, 그 모성의 힘으로, 또다른 그녀처럼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몸을 가만히 적셔주고 있는 그녀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같은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미 가재미도 등뼈가 구부정한 몸으로 암 투병 중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아들 가재미도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린 몸으로, 메마르고 건조한 삶, 즉, 그 밑바닥의 삶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가재미의 삶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응하고, 그 가재미의 밑바닥 삶은 ‘인생무상’이라는 염세주의의 최고급의 물적 토대가 되어준다.
문대준 시인의 「가재미」가 그토록 뛰어나고 아름다운 시인 것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기법으로 ‘암 투병 중인 그녀’의 삶을 의어화(擬漁化)시키고, 그녀의 암 투병 중인 삶, 즉, 가재미와도 같은 막다른 삶에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나’와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삶에 결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정과 연민의 시선은 방관자의 시선이며, 사악하고 교활한 제3자의 위선에 불과하다. 동정과 연민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질식시키지만, 기꺼이 동참하는 삶은 만인들의 공감의 토대 위에서,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연출해내게 된다. 어미 가재미의 삶은 아들 가재미의 삶이 되고, 아들 가재미의 삶은 어미 가재미의 삶이 된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라는 시구가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슬픈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 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라는 시구가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슬픈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염세주의자는 이 세상을 혐오하고 헐뜯어 대지만, 낙천주의자는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한다. 하지만 염세주의의 장점은 낙천주의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반성시킨다는 점에 있을 것이며, 낙천주의의 약점은 그 모든 것들을 지나치게 일면적인 시선으로만 단순화시킨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극단이 약이 되지만, 또 어떤 때는 극단이 독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낙천주의자로서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한다. 나는 나의 「사색인 십계명」 제4장이라는 글에서 문태준의 「맨발」이라는 시를 분석한 바가 있고, 그리고 염세주의는 그의 가면이고, 낙천주의는 그의 진짜 얼굴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은 ‘맨발의 개조개’나 ‘가재미’와도 같은 밑바닥 인생들의 막다른 삶일 뿐인 것이다.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은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염세주의자의 삶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에 반하는 허무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는 이 세상의 삶을 혐오하고 헐뜯어 버리는 염세주의자가 파생시킨 새싹들에 불과하며, 그 허무가 주조를 이루게 되면, 진정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세상의 삶의 찬가는 울려 퍼지지 않게 된다. 염세주의자는 낙천주의자의 삶을 혐오하고 헐뜯어 버리고,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을 부처나 예수처럼,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병든 자, 미친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의 인생 전체를 소모시켜버리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치,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병든 자, 미친 자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의 목소리는 사해동포주의자와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처럼, 너무나도 크게 되고, 그들의 성실함은 맹목으로, 그들의 신념은 광기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염세주의는 그들의 가면이고 낙천주의는 그들의 진짜 얼굴이다. 나는 문태준 시인이 고은이나 신경림처럼, 또는 그밖의 어중이 떠중이들처럼, 디룩디룩 살찐 염세주의자가 되어가지를 말고, 더욱 더 어렵고 힘든 일을 찾아나서며, 진정으로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한 순교자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 쭉정이와도 같은 한국정신이 고귀하고 위대한 한국정신으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어 날 수 있는 그날까지.....!
시는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