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이튼 칼리지’ 서울고등학교
(입력: 2023.06.02/최금호 성남시 안보정책자문관, 예비역 육군 대령)
서울고등학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선배님들의 숭고한 뜻과 넋을 기리고 호국보훈 명문 고등학교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현충행사를 시행해 오고 있다.
2023년에도 6월을 맞이하여 재학생과 총동창회 관계자 및 서울고 출신 예비역 군인들이 함께 모여 6·25전쟁 참전기념비, 삼일탑, 포충탑, 강재구 소령 동상을 차례로 돌며 참배하는 현충행사를 거행하였다.
서울고 교정에 서 있는 현충시설물들은 오랜 기간을 걸쳐 하나씩 마련된 것이다. 이 시설물들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온 서울고등학교의 전통을 후배들에게 알리고 계승시키려는 선배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회색 화강암과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6·25전쟁 참전기념 조형물이다. 이 기념비는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2010년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동문을 기리기 위하여 서울고등학교 총동문회가 건립하였다. 기념비 전면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 ‘자유민주주의 수호’ 글귀가 새겨져 있고, 좌우에 한 쌍씩 서 있는 4개의 비에는 참전 동문들의 명단이 기수별로 새겨져 있고, 전사자의 이름 아래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고 동문은 모두 453명이다. 이는 전쟁 당시 대학 2학년이던 1회 졸업생부터 중학교 3학년이던 6회 재학생까지의 동문 1,198명의 38%에 달하는 수치로서, 서울고등학교를 대한민국의 ‘이튼 칼리지’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다. 6·25전쟁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글귀는 참전했던 선배 전우들의 마음에 품었던 자유를 향한 불타는 애국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다음은 삼일탑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서울고등학교는 조선 시대 궁궐로 사용하던 경희궁 터에 세워졌다. 일제시대에 경희궁은 일본인 학생이 주로 다녔던 경성중학교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 그곳에 서울고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삼일탑은 1960년 3·1절 41주년을 맞이하여 경성중학교 시절에 있었던 신사(神社)를 헐고 그 자리에 세웠으며, 1980년 6월 서초동으로 학교가 이전할 때 함께 옮겨왔다. 이 탑은 숭고한 3·1 정신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탑 중앙에 새겨진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라는 한자 휘호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이갑성 선생의 글이다.
포충탑은 개교 10주년이 되는 1956년에 서울고 졸업생 중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동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30여 명 동문의 이름을 새겨 넣었지만, 현재는 4·19혁명으로 순국한 동문과 강재구 소령을 포함하여 모두 39명 동문의 고귀한 이름이 새겨져 있다.
탑 중앙에 새겨진 ‘褒忠塔(포충탑)’ 휘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께서 내리신 것으로 그 뜻은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동문들의 거룩한 혼이 이 자리에서 영원히 우리를 지키시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휘호를 내리신 지 4년 후에 그 자신이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 앞에서 모두가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뜻깊은 기념물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강재구 소령 동상이 있다. 강재구 소령은 1960년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서울고 동문이다. 그는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 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해 10월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던 중 한 병사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중대장이 몸으로 덮쳐 자신은 산화(散華)하고 부하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하였다.
강재구 소령의 서울고 동기인 8회 졸업생들은 졸업 30주년이 되는 1986년에 그가 몸소 실천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처럼 서울고등학교에는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동문들을 추모하고 그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노력이 교정 곳곳에 배어 있다. 학업에 매진함에 앞서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갖도록 하는 학교의 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세계적인 명문 학교 영국의 이튼 칼리지와 미국의 하버드 대학도 전쟁터에서 희생된 학우들을 기리고 있다.
영국 최고의 명문 학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는 잉글랜드 버크셔 주 ‘이튼’에 위치한 사립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1440년에 헨리 6세가 세웠다. 이튼의 학생들은 자신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라는 독특한 생각을 갖고 입학한다고 하는데, 이튼 칼리지는 20여 명의 총리를 비롯하여 정치계와 문화계의 많은 명사를 배출했다. 이튼 칼리지가 영국의 명문 학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영국을 이끌어 간 지도자를 배출한 것 외에도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2,000명이 넘는 동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정에 세워져 있는 헨리 6세의 동상 앞에 전사자들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이튼 칼리지’ 출신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제를 누구보다 먼저 전쟁터에 보냈다고 한다.
미국의 명문 대학 하버드 대학은 대한민국과 인연이 깊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 18명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금년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여 전사자 18명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그리고 만난 적도 없는 국민을 위해서 그들은 왜 자신의 가장 값진 목숨을 바쳤을까? 그 답은 “공부는 평화가 온 뒤에 해도 늦지 않다.”라는 소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하버드 박사 과정을 밟던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의 참전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선배들과 그 선배를 기리는 후배들의 마음이 엮어질 때 비로소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공동체가 완성될 수 있다. 2023년 서울고등학교에서 거행된 현충행사는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영광된 전통을 이어주는 참교육의 현장이었다.
행사를 마치면서 서울고등학교 출신 군인을 대표하여 윤완선 예비역 장군은 “6·25전쟁에 참전하셨던 선배님들의 멸사봉공하는 애국정신과 살신성인의 표상이신 강재구 선배님의 숭고한 군인정신을 이어받아 졸업생과 재학생 모두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미쁜 일꾼’이 되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결의를 밝혔다.